소설리스트

내게 주인공은 살인이다-112화 (112/251)

< 검은 머리 성녀님의 로맨스(3) >

성녀 비앙카의 스무 번째 생일이 다가왔다.

제국은 성녀가 태어난 날을 축복하기 위해, 가장 큰 연회를 열었다. 형형색색의 보석이 박힌 샹들리에와 그 주위를 맴도는 정령들, 알록달록한 마법의 전등이 허공을 둥실 날아다니며 밤하늘을 환하게 밝혀주었으며 무지갯빛으로 펼쳐진 무대는 사람들의 눈을 시시때때로 현혹하였다.

제국의 모든 귀족이 성녀의 얼굴을 보기 위해 모였다.

“정말 화려하군요. 태어나서 이런 연회는 처음 봐요. 이게 단 한 사람만을 위한 연회라니.”

“과연 황제 폐하께서 성녀님을 사모한다는 소문이 사실인 걸까요?”

“예끼, 이 사람아.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그래?”

“뭐 어때요? 공공연히 모두가 아는 사실인걸요.”

“그건 그렇지?”

황제의 생일을 축복할 때보다도 더욱 화려하고 호화로운 연회에 타국에서 찾아온 왕족들조차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대체 이 연회 한 번에 들어간 예산이 얼마란 말인가. 그리고, 이 모든 게 단 한 명의 여인을 위함이라니 황제는 그녀를 얼마나 사랑한다는 말인가.

또각!

이윽고, 누군가의 존재감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자 소란스러웠던 장내에 순식간에 침묵이 감돌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또각, 또각!

오로지 세월과 계절의 여신관만이 입을 수 있는 흰색과 금색의 조화가 아름답게 어우러진 드레스를 입은 성녀 비앙카가 연회장으로 들어섰기 때문이다.

그녀는 별다른 보석을 착용하지 않았음에도 누구보다 반짝였다. 그녀는 화려하게 치장하지 않았음에도 누구보다 화려하였다. 그저, 이 세상의 모든 화려한 조명이 오로지 성녀 비앙카만을 감싸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가 고고한 걸음으로 연회장의 정중앙으로 걸어가자, 그 뒤쪽으로 세 명의 여신도가 성녀를 따라왔다.

“폐하.”

“왔군, 비앙카.”

비앙카는 황제를 보고서 은근한 미소를 띠었다.

“너를 위한 연회다.”

제국의 황제, 스라엘. 그는 굉장히 집착이 심한 남자였다. 어떻게 해서든 비앙카를 자신에게 붙잡아놓기 위해 그녀가 원하는 모든 것을 황궁에 비치해두었다.

가장 아름다운 보석? 가장 멋진 조각상? 가장 화려한 조명? 가장 비싼 장신구? 가장 낭만적인 그림? 가장, 가장, 가장! 제국에서 ‘가장’이 붙는 모든 것들을 오로지 성녀 비앙카 한 명만을 위해 황궁에 모조리 때려 박았다.

그녀가 좋아할 때마다, 행복해할 때마다 스라엘 역시도 행복했으니까. 그러나, 그 외에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아서 점점 더 가슴이 답답해져만 갔다. 애가 탔다. 어떻게 하면 비앙카가 자신을 돌아보게 만들 수 있을까.

“한 곡 추도록 하지.”

“어머, 보통 이럴 땐 ‘레이디, 저와 한 곡 춰주시겠습니까?’하고 말하는 거 아녜요?”

“···나는 그런 말 못한다.”

“에이. 그럼 나 안 춰.”

황제를 상대로 당장 목이 날아가도 할 말이 없는 배짱이었으나, ‘여주인공’은 가능하다. 그 장면을 구석에서 지켜보던 유서담의 생각이었다.

‘이 세상의 지랄이란 지랄은 네가 다 떠는구나.’

옥수수 튀김을 으적으적 입에 쑤셔넣으며 유서담은 슬쩍 옆을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쓸쓸하게 밤공기를 맞으며 테라스에 서 있는 사하르 세레니티가 있었다.

정말로 공교로운 일이었다.

하필이면 사하르 세레니티 공녀와 성녀 비앙카의 생일이 겹친 것은.

원래였다면 연회의 한가운데에서, 모두의 축복을 받으며, 사랑하는 황제의 손을 잡고 꽃처럼 아름다운 미소를 띤 채로 춤을 추는 주인공은 그녀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녀는 모두에게 외면받았다. 제국에서 가장 인기인이었던 그녀의 등장에도, 놀랍게도 그 누구도 관심을 주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주인공 비앙카가 패시브 스킬 ‘매력 독점(SSS)’을 사용중입니다.]

자신의 매력을 발산하던 달마지존의 ‘매력 발산(SS)’조차 가볍게 웃도는 스킬. 주위의 모든 매력을 흡수하여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여주인공의 보정 스킬을 사용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사하르 공녀가 아무리 아름답든 어쨌든 결국 주인공의 앞에서는 초라한 잡초가 될 뿐이다.

“공녀님. 괜찮으십니까?”

“괜찮지 않다.”

“······.”

그녀는 애써 황제가 있는 방향을 바라보지 않고 있었다.

일평생 그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쳐왔고, 두 번째 생에서도 그를 위해 살기로 결심했었다. 그러나 그 모든 게 대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어쩌면, 인생에 대한 회의감이 들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기서 그녀를 위로해줄 시간은 없었다. 애초에 위로를 할 자신도 없었고.

유서담은 언제나 효율적으로, 사냥을 위해 움직일 뿐이었으니까.

‘그래도 여기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는 대충 들어서 다행이군.’

사하르 공녀는 회귀자이고, 이 연회에서 벌어지는 어떤 사건에 대해서도 안다.

그런데, ‘책 빙의자’는 회귀자가 무슨 행동을 하는지까지 한 발자국 더 앞질러 있다. 정보에서 무조건 불리한 상황. 하지만 그건 문제없다.

‘기본적으로, 저 여자의 행동 양상은 나와 비슷하니까. 그걸 어떻게든 이용해먹으면 될 거야.’

어느덧 황제와의 댄스가 끝난 비앙카는 제국 최고의 마도사이자 마탑주 ‘하라윤’과 춤을 추고 있었다.

“후후, 오늘따라 눈에 은하수를 똑 떼어다가 박아놓은 것 같아, 비앙카.”

“너 진짜 느끼해.”

“그 정도로 내가 부드러워? 난 너만의 기름이 되고 싶어.”

그들의 대화를 엿듣던 유서담은 허공에 헛구역질을 했다.

‘꼴값들을 해라 미친 새끼들아!’

구석에서 엿듣는 사람의 귀가 썩어가는 것을 전혀 배려하지 않은 채, 하라윤이 말을 이었다.

“그나저나, 다음 활동은 언제야?”

“응? 무슨 소리야?”

“하하. 시치미 떼기는. ‘검은 여마도사’말야. 제국에 위기가 닥칠 때마다 나서서 모든 걸 해결해놓고 사라지는. 너인 거 다 알고 있어.”

“나 아니라니까?”

“후후, 제국 사람들이 다 알걸?”

검은 여마도사. 아마도, 아라셀리의 또다른 이명일 것이다. 그녀는 검은색 머리칼을 갖추고 있었고, 언제나 사건이 발생하면 복면을 쓴 채로 등장해 화려한 마법으로 사건을 해결하고서 사라진다고 한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으니, 언제나 사건 현장에는 비앙카가 반드시 있었으며 그녀 또한 하필 검은 머리카락이었고, 심지어 ‘매력 독점’으로 인해 모두의 주목을 반드시 집중받는다는 것.

그래서 사람들은 아라셀리의 기행을 비앙카의 짓이라고 오해하고 있었는데.

“진짜 아닌데~”

심지어 비앙카마저도 그런 사람들의 은근한 관심을 즐기느라, 명확히 부정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원작에는 없던 일인데. 흐흥, 뭐 상관 없겠지!’

어느덧 파트너가 바뀌었다. 그 상대는 무려 세계 제일의 검객, 소디에르.

속세에 대한 모든 미련을 떨쳐버리고 세상을 방랑하던 그는 우연히 비앙카와 만나게 되었고, 그대로 첫눈에 사랑에 빠져버렸다···라는 게 설정일 것이다.

“오다 주웠다. 가져라.”

“어머, 이건 불사조의 두 번째 심장······!”

···저 친구도 상당한 꼴값을 하는 모양이지만.

유서담은 그런 네 명의 ‘남주’들을 유심히 살폈다.

공격과 방어 모두 밸런스가 맞는 신성기사이자 교황 카인다주(탱커)

황제검법과 황제마법을 두루 익혔으며 부와 명성을 가진 황제 스라엘(미드필더)

황궁 수석 마법사이자 마탑의 마탑주 하라윤(원딜)

세계 제일의 검객 소디에르(근딜)

저들이 바로 주인공 비앙카를 움직이도록 만드는 원동력이자, ‘개연성’이었다.

비앙카는 유서담 자신과 닮았다. 상대방의 지식을 역이용하여 파멸로 이끄는 그 방식이 말이다. 하지만 유서담은 그 모든 계획을 스스로 직접 실행에 옮긴다면, 비앙카는 다르다. 수동적으로 가만히 서있기만 해도, 개연성에 의거하여 ‘남주인공’들이 반드시 움직이게 되어있었다.

즉, 네 명의 남주인공이 ‘주인공 보정’ 그 자체라는 의미.

하지만 그 개연성을 흩어놓을 수만 있다면?

그 과정을 위해, 슬슬 아라셀리를 만나야겠다는 생각이 든 유서담은 사하르에게 말했다.

“공녀님. 말씀드린대로, 저는 잠시 다녀오겠습니다.”

“···그래.”

슬슬 서담이 알아낼 수 있는 것들은 전부 알아냈다.

‘회귀자를 상대할 때는, 상대가 알고 있는 정보를 역으로 이용한다.’

하지만 상대방이 자신보다 정보를 더 많이 가지고 있는 빙의자라면, 과연 어떻게 해야만 하는가?

어쩌면, 이번 의뢰는 상당히 위험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냥 돌아갈 수는 없다. 차원을 잠깐 찢는 데에만 1년의 수명이 소모되었는데, 의뢰를 포기하고 돌아갔다가는 모든 수명을 다 써도 모자랄 것이다.

‘어쨌든, 의뢰를 처음 받는 순간부터··· 16년 전 헌터를 시작한 그날부터 목숨을 걸고 싸우는 건 각오했으니까.’

긴장되는 가슴을 쓸어내린다. 언제고 확실한 정보의 우위와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서 싸운 적은 없었다. 그래서, 이 긴장감은 언제나 항상 하던 그것과 비슷하다.

‘빙의자가 회귀자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있다면.’

그렇다면, 회귀자조차 모르는 사건을 만들어낸다.

유서담은 인벤토리에서 ‘E-4 콤포지트’를 꺼내들었다.

*

사하르 공녀는 샴페인을 홀짝이며 테라스 바깥쪽을 바라보았다. 정원에는 벌써 눈이 맞은 남녀가 짝을 지어서 데이트를 하고 있었다.

“······.”

요 며칠간 자신의 옆에서 항상 이야기를 들려주고, 또는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던 유서담이 자리를 비우자 어쩐지 가슴이 공허해졌다. 더 이상 다른 사람의 정 따위는 필요치 않다고 생각했거늘, 그 사이 또 외로움을 타버린다.

‘나도 아직 정신을 못차렸군······.’

혹자는 그녀를 미치광이라고 부른다.

혹자는 그녀를 마녀라고 부른다.

혹자는 그녀를 연쇄살인마라고 불렀으며.

혹자는 그녀를 악마의 빙의체라고 부르기도 했다.

고작 1년. 그 1년 사이에 그녀는 너무나도 많은 사건을 막기 위해 애를 썼고, 그 결과 모든 죄를 뒤집어 쓰고서 완전무결한 공공의 적이 되어버렸다. 그나마 그녀가 이 자리에 나올 수 있던 이유는, 오로지 황제의 배려 덕분일 것이다.

그 점이, 아직까지도 그녀가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이유였다.

황제가 자신을 기억하고 있을까봐. 혹여나, 그가 다시 자신에게 마음을 돌릴 수도 있으니까.

“뻔뻔한 낯짝을 들고 잘도 더러운 발을 들였구나.”

“······폐하. 연회에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1회차 당시에는, 이 연회 자체가 오롯이 사하르 공녀만의 것이었다. 당시의 황제는 따스한 미소로 사하르 공녀의 뺨을 어루만지며 영원한 사랑을 약조했다.

그러나 시간을 되감아, 다시 돌아왔을 때의 황제는 자신이 알던 그 사람이 아니었다.

‘아··· 하하.’

저 차가운 눈빛, 혐오스러운 벌레를 보는 듯한 시선.

그제야 깨달았다.

‘그래, 황제 폐하는 여전히 나를 기억하는구나.’

그 기억 속 자신은 단지, ‘성녀 비앙카’를 음해하고 살해하려고 한 미친년으로 남아있을 뿐이었지만. 어쩐지 허탈한 웃음이 나왔다.

여태 자신이 사랑했던 그 남자는 과연 누구인가. 시간을 돌리기 전의 그 황제 폐하와, 시간을 되돌린 이후 눈앞의 저 황제 폐하는 같은 사람인가?

나는 과연, 여전히 같은 사람에게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끼고 있던 게 맞는 것일까?

혹시 나는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있던 게 아닐까? 그 모든 감정이 착각이었다면, 그래서 이렇게 비참해진 것이라면.

어쩌면, 시간을 되돌린 그 순간부터 모든 게 잘못되었던 게 아닐까.

“흐흐···.”

“너는 웃음 소리마저도 역겹구나. 무엇이 그리도 웃기지?”

“폐하는 여전하시군요. 제 기억 속 황제 폐하와 똑 닮아있습니다.”

“헛소리를 하는군.”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은 끔찍히도 챙기시지요. 예, 맞아요. 당신은 언제나 그랬습니다.”

사하르는 샴페인을 흔들며 보랏빛 눈동자를 가늘게 떴다.

“기억 속에 남아있던, 제가 사랑했던 남자와 당신이 너무나도 닮고 닮아서······. 잠시 착각을 하고 말았습니다. 그 착각의 대가로 제 인생이 망가졌으니, 이제 그만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이 미친 여자가 대체 무슨 소리를-”

그때.

지축이 흔들리며, 어마어마한 굉음이 황궁을 덮쳤다.

쿠구구궁···!!

쾅!!

“······뭐, 야!”

사하르 세레니티 공녀가 등지고 서있던 건물 하나가 갑작스레 통째로 주저앉은 것이다! 삽시간에 황제 스라엘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젠장!”

스라엘은 황급히 고개를 돌렸고, 덕분에 사하르의 마지막 말을 듣지 못했다. ‘그래요, 당신이 사랑하는 그 여인의 품으로 달려가야지요. 그때 그랬던 것처럼.’ 어쩐지 자조적인 웃음이 흘러나온 것만 같았으나, 이 장소에 있는 그 누구도 듣지 못하였다.

‘테러라니······!’

전혀 느끼지 못했다. 마법적으로 무언가 테러가 발생했다면, 마탑주 하라윤이 분명히 눈치를 채야만 했을 터. 하지만 그 역시도 당황한 채 급히 중앙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남자 주인공들이 모이는 장소에는 당연하게도, 성녀 비앙카가 주저앉아 있었다.

‘대, 대체 무슨 일이야?!’

전혀 모르는 사건이다. 연회에서 어떠한 일이 있을 예정이기는 했지만, 테러 사건은 예정에 없었단 말이다.

‘대체, 무슨······.’

회귀자와 빙의자가 가진 공통점 하나.

그것은 바로 자신이 알고있는 미래가 뒤틀리기 시작하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지금 유서담은 일부러 미래를 바꾸고 있었다. 더 이상 빙의자가 미래의 정보에 대해 선점하지 못하도록. 빙의자가 당황하도록.

그리고, 자신이 가진 지식을 스스로 의심하도록.

‘원작이··· 바뀌었어······?’

“비앙카! 서둘러 일어나야 해!”

“자, 잠깐! 난 지금 여길 떠나면 안 되는-”

쿠구구궁!!

폭음이 한번, 두번, 세번. 계속해서 울려퍼졌다. 전부 다른 건물이었다.

모두가 혼란스러운 와중, 황제가 소리를 쳤다.

“모두 연회장에서 벗어나지 마라!”

그러자 좌중이 우뚝, 멈춰섰다.

“내가 나서서 해결하겠다. 이 연회장은 일곱 겹의 마법으로 보호되어있으니, 안전하다. 모두 이 안에 얌전히 머물러 있도록!”

“오오, 황제 폐하께서 직접 나서신다!”

“폐하 만세!”

황제가 그리 말한 뒤 몸을 휘릭 돌려 연회장 바깥으로 사라지자, 하라윤이 평소의 그 능글맞은 미소를 싹 지운 채 비앙카에게 말했다.

“비앙카, 나도 다녀와야해. 그러니까 비앙카가 이 자리에 남아서 사람들을 지켜줘.”

“어, 어? 내, 내가?”

“지금은 마법을 숨길 때가 아니야, 비앙카. 알겠지? 네 마법은 나보다도 대단해. 그러니까 할 수 있어!”

“난 마법을 쓸 줄 모르는···!”

“테러범은 최소 다섯··· 아니 여섯 명인가?어떻게 이렇게 동시다발적으로 내가 감지할 수도 없는 마법을······. 크윽, 검객 양반은 북쪽으로 가봐!”

“알겠다.”

“서둘러 출발하도록 하죠.”

남자 주인공들이 테러를 막기 위해 서둘러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이 현상 자체가, 바로 개연성에 의거한 것이다.

이 세계에는 그토록이나 많은 마법사와 경비대와 기사와 병사가 있거늘 어째서 항상 모든 일은 ‘남주’들이 해결을 한단 말인가? 어째서 그들은 항상 무력하단 말인가?

당연하다.

남주들에게 비중을 주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이번에도 남자 주인공들은 비앙카를 위해 움직인다.

“아직, 잠깐······!”

남주들이 모두 흩어졌다. 자리에 남은 비앙카는 황망한 눈으로 그들이 떠난 자리를 바라보았다.

“안 돼, 가면 안 된단 말이야······!”

갑작스러운 테러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테러 외에 이곳에서 하나의 사건이 더 벌어진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있다.

‘악마 소환 의식.’

지금쯤 황궁 지하에서 악마 소환 의식이 펼쳐지고 있을 터. 그러나, 미래의 지식을 알고있다 한들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괜찮다.

원작에서 늘 그랬듯, 사하르 공녀는 움직일 것이다.

나는 오늘도 황제 폐하를 위해 검을 빼어든다.

달빛을 받아 창백해진 검은 악마의 피를 잔뜩 머금고 있었다.

아아, 황제 폐하. 제 생일을 축하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저는 할 일이 있습니다.

당신의 행복을 위해.

제국의 행복을 위해.

그것이 곧, 저의 행복이니까요.

이번에도, 이번에도 그럴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였는데.

“어, 라···?”

비앙카는 이 혼란 속에서도 태연히 샴페인을 홀짝이는 사하르 세레니티 공녀를 바라보았다.

‘설마······. 사하르 공녀가, 뭔가를 눈치챈 거야?’

믿을 수 없었다. 저 여자는 [원작]에 대해서 전혀 모를 텐데, 어째서, 어째서.

“아-”

그런데.

여기서, 사하르 공녀가 움직이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 거지?

자신을 지켜줄 네 명의 남주들이 없는데.

게다가, 나는 그들이 믿고있는 ‘검은 여마법사’도 아닌데.

“도, 도망쳐······.”

비앙카는 다급히 출구로 달려갔다. 어서 이곳에서 빠져나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렇지 않으면······.

“성녀님! 진정하십시오. 황제 폐하께서 성녀님을 연회장 바깥으로 절대 내보내지 말라고 명령하였습니다.”

그런데, 경비대와 기사들이 입구를 단단히 틀어막은 채 내보내주질 않았다. 비앙카는 창백해진 얼굴로 말했다.

“비켜, 비키라고. 나도 나가야 해!”

“안 됩니다! 이건 황명이기도 하며, 저희가 꼭 성녀님을 지켜드리고 싶은 마음이기도 합니다. 저희는 결코 성녀님을 위기에 처하는 꼴을-”

“비키라고!! 악마가, 악마가 깨어난단 말이야!”

“···예?”

성녀 비앙카의 그 외침과 동시에, 연회장의 바닥에 붉은색의 금이 가기 시작하며 쩌저적!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닥치고 비키라고!”

비앙카가 당황한 경비병을 헤집고 나가려는 그때.

사하르 세레니티 공녀가 희미한 미소를 머금은 채 마침내 검을 빼들었다.

‘······과연, 그런 것이었나.’

원래는 그 누구도 눈치채지 못하도록, 조용히 악마를 사냥할 예정이었거늘 유서담은 그런 사하르를 극구 만류하며 말했다.

‘최대한 늦게, 엄청 늦게! 사람들이 모두 악마의 존재를 알 때까지 가만히 기다리세요. 오케이? 언더스탠?’

‘미래를 미리 알고있는데도 어째서 일부러···. 후우, 잘은 모르겠지만 그러도록 하마.’

그리고 지금.

사하르 공녀는 유서담의 의중을 깨달을 수 있었다.

‘과연, 너는 성녀를 극한의 상황까지 몰아붙이고 싶던 모양이군.’

그런 거라면야, 얼마든지 따라줘야지 않겠는가?

< 검은 머리 성녀님의 로맨스(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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