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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주인공은 살인이다-111화 (111/251)

< 검은 머리 성녀님의 로맨스(2) >

사하르 세레니티 공녀는 정확히 말해서 공녀가 아니라, 사실상 공작이었다. 하지만 현재 계승권 문제로 ‘보류’가 되었단다. 보류? 좋게 말해서 보류지, 사실상 공작위에서 쫓겨날 위기일 수도 있겠다.

이쪽 세상에 도착한 이후로 이틀. 서담은 그동안 세레니티 공작가의 저택을 자유로이 활보하였다. 아주 최소한의 경비와 아주 최소한의 수행인과 하녀들로 이루어진 저택은 굉장히 황폐하다 못해 폐가에 가까웠다.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들은 모두 제국에서 보내온 시중들이었고, 황제의 명령에 따라 의무감으로 ‘모든 힘을 잃은 공녀’를 감시하고 있을 뿐이었으니까.

그렇다.

사하르 세레니티 공녀는 황제에게, 즉 제국에게 미움을 받고 있었다.

“나는 여전히 황제 폐하를 사랑하고 있는데도 말이지.”

쓸쓸하게 웃으며, 사하르는 두 눈동자에 달빛을 머금었다. 그녀는 버건디 와인잔에서 찰랑이는 피처럼 붉은 와인의 향에 코를 가져다 대었다.

“부르뉴지아의 와인잔은 볼이 좁아서 향기가 모이기 쉽지. 나는 때로, 와인의 향을 맡으며 취할 때도 있어.”

구석에 뒷짐을 지고 서있는 유서담은 깔끔한 제복을 입은 채였는데, 그녀는 그를 향해 천천히 보랏빛 눈동자를 돌렸다. 그러고선 진심으로 가엾다는 표정을 짓는다.

“너도 참 안타깝군.”

“무엇이 말입니까?”

“너 또한 폐하께서 나를 감시하라고 보냈을 텐데···. 앞날이 창창한 젊은 기사가 세레니티 공작가에 배치를 받았다는 건, 사실상 미래가 막혔다는 의미니까. 뭐, 어때. 패가망신한 공녀를 감시하다가 생을 마감하는 것도 썩 즐거운 일이 될 수도 있어.”

과연, 그럴 수도 있겠다. ···만약 유서담이 다른 평범한 백성들처럼, 입을 모아 세레니티 공작가를 욕하는 사람이었다면 말이다.

“오해가 있으시군요.”

“···뭐?”

“저는 황제 폐하께서 보내서 온 게 아닙니다. 제 스스로의 의지로, 공녀님을 지켜드리고 싶어서 왔습니다.”

그러자 그녀는 내 눈을 빤히 바라보더니, 풋 웃음을 터뜨렸다.

“썩 재미있는 헛소리로군. 예전 같았다면 네 목이 달아났을 거다.”

“그 예전의 공녀님에 대해 궁금하군요.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시겠습니까?”

사하르 공녀는 주인공이 아니다. 그녀의 라이벌, 성녀 비앙카가 주인공이다. 그리고 내가 없는 사이 이곳에서는 이미 많은 사건이 벌어졌을 터. 대체 무슨 일이 있던 건지, 어쩌다 그녀가 이렇게 되었는지를 알아야만 했다.

“좋다. 벽에 대고 혼잣말을 하는 것도 지겨웠던 차. 내 이야기를 해주지.”

보라색 눈동자를 반짝이며, 사하르 공녀가 운을 떼었다.

“나는 1년 전, 시간을 되돌렸다.”

*

“성녀님. 오늘따라 정말 아름다우세요.”

그래? 나도 그렇게 생각해.

거울을 가만히 들여다 본다. 거울 속의 나란 놈, 참 봐도봐도 질리지 않는단 말이지.

하지만 저건 나이지만, 내가 아니다. 나는 전생을 기억하고 있다. ‘시간을 되돌리는 악녀’라는 웹 소설에 푹 빠져, 횡단보도를 건너면서까지 그것을 읽다가 트럭에 치여서 죽는 그 순간까지도 말이다.

으, 끔찍해.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경험이다.

아무튼. 나는 그렇게 죽었고, 환생을 했고, 그리고 지금 거울 속에는 나와 쏙 빼닮았지만 훨씬 더 예쁜 얼굴을 가진 ‘비앙카’가 앉아있었다는 말씀!

검은색 머리칼에 검은색 눈동자는 뭐, 국룰이란 말이지. 이게 없으면 보정을 못받는단 말이야. ···안타깝게도 나는 이 세계의 주인공이 아니지만.

여기는 소설 속 세상이다.

그것도 내가 죽기 직전까지 붙들고 있던 바로 그 ‘시간을 되돌리는 악녀’ 속 세상.

그래, 이 세계의 주인공은 ‘사하르 세레니티’다. 그녀는 1회차 당시 성녀 비앙카의 악독한 계략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자신의 사랑과 모든 권력을 잃어버렸다. 그런데 이게 웬걸, 사하르 공녀를 어여삐 여긴 세월과 계절의 여신이 그녀의 시간을 되돌린 게 아니겠는가?

결국 사하르 공녀는 우여곡절 끝에 미래의 지식을 이용하여 성녀를 죽이고 자신의 사랑과 부와 명예를 되찾는 데에 성공!

크으, 속이 다 시원한 사이다···였을 건데.

왜 하필이면 내가 비앙카냐 이거지!

“성녀님? 괜찮으세요?”

“어? 으응. 괜찮아.”

아차, 나도 모르게 머리를 쥐어 뜯고 있었다. 고운 머릿결이 헤집어지자 여신도들이 다급히 빗어주었다.

내 머리를 빗겨주는 왼쪽 여신도의 이름은 야얀, 오른쪽 여신도의 이름은 코얀. 둘 다 성녀의 최측근이었으며, 꽤 불쌍하고 암울한 미래를 가지고 있었다. 둘 모두 성녀의 명령을 거스를 수 없어 숱하게 악행을 저지르다가 결국 사하르 공녀에게 적발당해, 사지가 절단당하고 길거리에 버려지는 형을 받게 될 테니까.

나 또한 마찬가지다. 아마도 난 이대로 가만히 있더라도 어떻게든 사하르 공녀에게 온갖 트집을 잡히고, 음해와 모독을 당해서 결국 1년 안에 죽게 되겠지.

“후우······.”

내가 한숨을 푹 내쉬는 그 순간, 쨍그랑!! 바로 뒤쪽에서 유리가 깨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황급히 고개를 돌려보니 여신도 한 명이 기울어진 쟁반을 들고서 벌벌 떨고 있었다.

아아, 저거 ‘상큼함이 톡 터져요! 요거트 과일 파르페’잖아?

위에 데코레이션으로 초록색 잎을 하나 얹고서 레몬과 바나나를 섞은 뒤, 아이스크림 아래에다가 깔아둔 딸기의 그 황홀한 맛은 이곳에 와서 느낄 수 있는 내 유일한 행복이었는데······.

어라? 저 아이 왜 저렇게 떠는 거야?

“죄, 죄, 죄죄송합니다 성녀님!! 주,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파르페를 떨어뜨린 여신도가 갑작스레 바닥에 무릎을 꿇고서 머리를 처박았다.

아, 그제야 이해가 갔다. 원래의 비앙카는 상당히 싸가지가 없고 폭언과 욕설을 일삼는 것으로 유명했지. 파르페가 아깝지만, 나는 원래의 비앙카가 아니다 이거야.

“괜찮아. 이름이··· 실비니스라고 했던가?”

“네, 넵! 그렇습니다!”

“파르페는 또 만들면 되니까. 너무 겁먹지 마렴. 여기는 내가 치울 테니까 돌아가도록 해. 다음에는 더 맛있는 파르페를 만들어주면 된단다.”

“앗, 아아···!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성녀님···!”

그녀는 울먹거리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다른 신도들의 부축을 받으며 돌아갔다. 그런데, 뭔가 시선이 느껴저서 고개를 돌려보니 다른 여신도들이 나를 뭔가 품질보증 Q등급을 받은 신제품 세탁기를 바라보듯 쳐다보고 있는 게 아니겠는가?

“왜들 그러니?”

“아, 아닙니다. 성녀님이 너무 착하셔서요.”

“후후, 그러니?”

뭐, 나도 아군을 만들어두면 좋을 테니까. 그리 생각하며 다시 거울을 바라보는데, 유독 눈에 띄는 여자신도 한 명이 시야에 들어왔다.

흐응, 저 아이 아라셀리라고 했던가? 이곳에서는 검은색 머리칼이 워낙 희귀한지라 기억난다. 원작에서 저런 이름은 들어본 적도 없으니, 아마 ‘귀염상의 신도’ 정도로 묘사된 엑스트라일 것이다.

그나저나 앞으로 어떡한다?

아마 지금도 사하르 공녀가 성녀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 미래 지식을 기반으로 차곡차곡 기반을 쌓는 중일 텐데 말야. 으으, 어떻게 다시 태어났는데 이렇게 죽을 수는 없단 말이야!

안 되겠어, 차라리 시골로 도망칠까? 어차피 난 신성력도 있는데 적당히 마사지사나 치료사 하면서 살아도 돈은 쓸어담을텐데? 좋았어. 생각난김에 바로 실행해야겠다.

그때, 똑똑 노크 소리가 들리며 어쩐지 중저음의 따스한 목소리가 울려왔다.

-비앙카. 안에 있니?

아아. 목소리만으로도 가슴이 녹아내릴 것···아니, 이게 아니지!

이 목소리의 주인은 남자 주인공이자 교황 ‘카인다주’잖아? 맙소사, 남주들과 엮여서 좋을 건 없는데······!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돌려보낼 수는 없었으므로 나는 그를 어쩔 수 없이 들였다.

푸른색 머리칼에 회색빛깔 눈동자가 아름다운 그가 방에 들어서자, 마치 온 세상의 조명이 그에게 집중된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곱기도 해라. 넌 뭘 먹고 그렇게 예쁘게 자랐니?

“비앙카. 무슨 일 있어?”

“어, 으음. 아니! 없어.”

“그래? 다행이다. 요새 과일 파르페를 자주 찾는다고 들어서···.”

컥, 부끄러워서 숨져버릴 것 같다. 아니, 그냥 이대로 숨져버리자!

“아, 그게. 책에서 읽었는데, 여자가 단 걸 찾으면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거래. 그래서 혹시나 걱정이 돼서······.”

······이럴수가. 너란 남자는 그렇게까지 꼭 다정할 필요가 있는 거냐. 어흑흑, 널 보고 음흉한 생각이나 했던 내가 더 수치스러워졌어.

“아냐아냐. 그냥 요즘 맛있어서 먹는 거야!”

“다행이네.”

그는 진심으로 다행이라는 듯 싱긋 미소를 지었는데, 그 오똑한 눈매 라인이 휘어지면서 동시에 내 마음도 꺾여버렸다.

“비앙카. 나는 이제부터 마올리덴 공화국의 순례지에 갔다 올 생각인데, 너도 같이 갈래?”

“무, 물론이지!”

아차, 나도 모르게 대답해버렸다. 이러면 안 되는데!

···아니지. 가만 생각해 보니까, 슬슬 이맘때쯤 ‘그 사건’이 터지지 않았던가?

‘마올리덴 공화국. 마올리덴 공화국···. 아!’

생각났다. 마올리덴 공화국에서 발생한 주요 인물 암살 사건. 당시에 꽤 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쳤고, 심지어 남주 카인다주마저도 크게 상처를 입었었다. 하지만 이 사건을 모두 미리 알고있었던 사하르 공녀에 의해 저지되면서, 카인다주는 그녀에게 푹 빠지게 된다.

“······흐음.”

가만히 생각하던 나는 은근한 눈으로 카인다주를 바라보았다.

“저기, 카인다주. 나 할 말이 있는데······.”

*

“그게 처음이었을 거다. 1년 전, 그날이.”

사하르 공녀는 서담에게 조곤조곤, 자신에게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마치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우스꽝스럽게 풀어나가는 것처럼. 그래서일까, 그녀의 이야기는 가슴을 짓누르게 만들었다.

“나는 그날 벌어질 사건을 미리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카인다주를 구하기 위해 직접 검을 빼들고 나서서 현장의 모든 암살자를 처리하려고 했지.”

그런데, 사하르 공녀가 암살자들의 앞을 가로막는 순간.

갑작스레 등장한 성녀 비앙카가 소리를 쳤다.

‘사하르 공녀! 이게 대체 무슨 짓인가요! 어째서, 어째서 이런 일을 벌인 거예요!’

‘···아니, 나는 이들을 막기 위해-’

변명을 하려고 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때마침 등장한 교황 카인다주마저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하르 세레니티 공녀······.’

언제나 다정다감했던 카인다주였거늘, 다시 없을 싸늘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서는 진심으로 실망했다는 듯이 말했다.

‘당신은 세월과 계절의 신녀로서, 부끄럽지도 않으십니까?’

‘저는 이 사건을 막기 위해···!’

‘어떻게 막으려고 했죠? 어떻게 미리 알았단 말입니까? 저 또한 비앙카가 뭔가 이상하다는 낌새로 일러주지 않았다면 몰랐을 터. 당신이 교황인 저보다도 더 이 사건에 대해 빨리 알아낼 수 있던 이유가, 대체 뭐란 말입니까?’

대답할 수 없었다. 그야, 당연하다. 그녀는 회귀자였고 미래를 미리 알아서 그랬을 뿐이니까. 그러나 어떻게 그 사실을 얘기한단 말인가? 아니, 얘기한다고 해서 믿어나 줄까?

“······그날, 나는 ‘신녀’로서의 모든 능력과 지위를 박탈당했다. 웃기는 일이지. 신을 위해, 교황을 위해. 미래를 바로잡으려고 했거늘, 처음부터 모든 게 틀어져버렸어.”

그러면서 사하르 공녀는 정말 다행스럽게도 현장에 ‘이름 모를 여마법사’가 등장해 마법으로 괴한을 모조리 퇴치해준 덕분에 피해자가 없었다고 했다.

‘잠깐, 여마법사?’

그 이후로도 사하르 공녀의 비참한 일대기는 계속되었다.

미래를 바꾸기 위해 갖은 노력을 해왔다. 모두를 구하기 위해, 자신의 것을 최소한으로 되찾기 위해, 그녀는 정신없이 뛰어다녔고 발 빠르게 움직였다.

그러나, 전혀 소용이 없었다.

그저 성녀 비앙카가 황제에게 ‘뭔가 느낌이 이상해요’라고 한 마디를 툭 내던지면 순식간에 사하르 공녀가 사건의 원인이 되었으며, 성녀 비앙카가 세계 제일의 검객에게 ‘오빠, 나 거기에 가는 게 무서워.’라고 말하면 사하르 공녀가 미래를 위해 꾸며두었던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갔다.

온갖 수모를 겪고, 누명을 뒤집어 쓰고, 멸시를 당하며.

마침내는, 사랑하는 황제마저도 등을 돌렸다.

그게 고작 1년 사이에 발생한 일.

“···이게 내 운명이노라, 운명은 바꿀 수 없노라. 신은 내게 보여주고 싶었겠지. 인생을 다시 한 번 산다고 해서, 뭘 바꿀 수 있겠느냐고. 다시 살아도 의미가 없다는 것을.”

유서담은 그저 씁쓸하게 말하는 사하르 공녀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흐음······.’

회귀자와 빙의자의 싸움이라. 상당히 흥미로운 관점이었다. 다만, 이 경우에는 어쩔 수 없이 ‘주인공 보정’을 받은 진주인공 비앙카 성녀가 압도적으로 우세를 점하고 있는 듯싶었지만.

‘하는 짓 딱 보니까, 완전 나 같은 새끼네. 아주 악질이야.’

한참을 고민하던 유서담은 결국 결론을 내렸다.

‘음, 이번 의뢰는 글러먹었군.’

이미 상황은 암울하다. 물론, 굳이 사하르 공녀를 살릴 필요는 없이 아예 신전으로 처들어가면 방법이 생길지도 모르나 그나마 ‘운명’론적으로 내가 공녀를 돕는 게 가장 사냥할 확률이 높다.

성녀의 레벨은 99. 대부분이 방어와 치료쪽으로 환산된 레벨인지라 실질적인 전투력은 꽝이나 다름없다. 즉, 싸우면 내가 이긴다. 그런데···. 그냥 다짜고짜 죽인다고 될까?

개연성이 어떻게 역행해서 그녀를 되살릴지도 모르고, 심지어 현재 그녀는 ‘세월과 계절의 여신 카데르’의 유일한 성녀이다. 죽여봐야 회귀를 해버릴 수도 있다.

‘골때리네 거참.’

한참을 고민하던 나는, 아까부터 마음에 걸리던 ‘정체불명의 여마법사’에 대해 떠올렸다. 사건이 터질 때면 언제나 바람처럼 등장해 피해자를 최대한 줄여놓고서 사라진다는 그 존재는 현재 제국에서도 꽤 소문이 자자하다고 한다.

과연 그녀의 정체가 누구인가. 어디에서 왔고, 또 어떻게 그런 대단한 마법을 사용하는가. 심지어 ‘남주’ 중 한 명인 마탑주마저도 그녀를 찾고 있다고 할 정도이니 얼마나 이슈인지는 뻔하다.

그리고, 나는 그 정체불명의 여마법사가 대충 누구인지 짐작을 할 수 있었다.

비록 시간축이 1년이나 어긋나버렸지만,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 나를 찾는 데에 성공해버린 소녀.

‘아라셀리. 너구나.’

이제부터, 그녀를 만나야만 한다.

< 검은 머리 성녀님의 로맨스(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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