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실 왜곡(4) >
이면 세계의 환경은, 솔직히 말해서 인간은 살아갈 수 없는 수준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피로 물든 공간. 하늘은 불그스름했으며, 불온한 안개가 사방을 가리고 있었고, 시체인지 혹은 살아있는 생명인지 정체를 알 수 없는 핏덩이가 사방에서 꿈틀대고 있었다. 흡사 헬 게이트를 연상케하는 장소였기에 솔직히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다.
나는 마스크를 착용해야만 했지만 다른 무림 고수들은 그럴 필요가 없는지 그저 표정을 조금 찡그린 게 전부였다. 과연, A랭크까지는 그래도 인간의 범주 안에 든다지만 SS랭크는 인간의 한계를 두 번이나 초월했기에 저런 게 가능한 걸까.
이곳은 상당히 불쾌한 공간이었고, 고수들은 지구에 이런 이면 세계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는지 표정을 싸늘하게 굳혔다.
사방에 걸어 다니는 모든 것들에게는 거의 이성이 없다시피 했다. 그러나, 이성이 없다뿐이지 그들에게 지성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먹을 것.’
‘새로운 게 왔다.’
‘나보다 약한가?’
‘모른다.’
‘일단은 처리한다.’
온몸이 기괴하게 뒤틀린 생명체들. 그들에게는 언제나 ‘식량’이 부족했고, 부드러운 살을 가진 우리는 아주 훌륭한 식사거리가 될 수 있을 터였다.
<불완전한 차원 통로를 관통한 대가로, 저들은 서로의 몸이 뒤섞였습니다.>
벌레의 머리에 인간의 발, 혹은 짐승의 몸통에 엘프의 머리통을 가진 끔찍한 생김새를 가진 그들 역시 한때는 평범한 동물 혹은 유사인종이었다는 말이 된다.
“······시작합시다.”
작전은 속전속결로 진행되었다.
차원을 관통하며, 약한 생명체는 모조리 죽어버렸고 강한 이들만 이곳에서 살아남았겠지만······. 이미 병들고 지치고 뒤틀릴대로 뒤틀린 그들이 현경의 고수를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안타깝구나.”
다른 고수들은 혐오스럽다는 눈으로 그것들을 바라보았지만, 현경의 고수는 이미 미(美)적 감각마저도 초월한 탓에 그런 외적인 문제는 전혀 신경이 쓰이지 않는 듯했다. 그저, 그들이 처한 환경이 불쌍하고 안타까워서 슬픈 눈을 지을 뿐.
“그래도 죽여야 합니다.”
“···알고 있다.”
설중연은 새하얀 검을 뽑아 들고서는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그녀의 춤이 시작되었다.
이 끔찍한 지옥같은 환경에서도, 설중연의 검무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세상의 추함을 아름다움으로 찍어 눌러버린 탓에 순간적으로 이곳이 천국이 아닐까 하는 착각마저 들 정도였다.
그녀가 옷자락과 머리카락을 사르륵 휘날리며 검을 천천히 휘두르면, 고통조차 없이 이물들의 목이 썰려 나갔으며 현실에까지 영향을 미치던 것들이 잘려나갔다. 아마 지금쯤 현실에서는 초자연현상이 조금씩 사라지고 있을 것이다.
쿠오오오······!!
하나씩, 하나씩, 이물들이 죽음을 맞이하자 이면 세계 자체가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그래, 이 세계는 이미 하나의 생명이었다. 거리에 늘어진 시체 더미도, 붉은색의 살점 덩어리도, 길을 가득 메운 핏물조차도.
사방이 꿈틀거리기 시작하며, ‘무언가’가 일어났다. 그 무언가는 맨눈으로 봐서는 이해를 할 수 없었다. 갑작스레 눈알이 666개로 불어나기도 했으며, 13개로 줄어들기도 했고, 거대한 지하철의 형태로 변하더니 늑대의 대가리가 불쑥 튀어나왔다가 문어의 형태로 변하여 사방으로 촉수를 길게 내뻗다가는 손가락 여섯 개에 팔 여섯 개가 달린 괴이한 이물로 변하기도 했다.
그것은 덩치가 작기도 했으며 크기도 했고 가볍기도 했으며 무겁기도 했다. 생명의 본질 자체를 이미 잃어버려, 차원의 쓰레기통에서 그저 잊혀질 날만을 기다리던 무언가.
화경의 고수들조차 저것을 맨눈으로 볼 수가 없던 탓인지, 심한 정신적 충격을 앓고서 헛구역질을 해댔다. 나 또한 숱하게 차원 여행을 해오며 버틸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거늘, 전혀 아니었다.
차원 여행자면 뭐 하는가. 나는 여전히 A랭크밖에 되지 않는 수준이었고, 상상 이상으로 나는 보잘것없고 약한 존재였다.
과연, 코즈믹 호러를 연상케 하는 그 이물을 바라보면서도 설중연은 거리낌 없는 것처럼 보였다.
“불쌍한 아이.”
설중연은 그저, 그 괴물을 보고서 그런 한 마디만을 내뱉었다. 이곳에서 얼마나 오랜 세월 고통을 받아왔는가. 고향을 잃은 슬픔에 빠져 하루하루가 얼마나 괴로웠는가. 그리하여, 어찌 그런 절망을 받아들이고서도 사는가.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설중연, 그녀는 항상 그런 말을 하고는 했다.
‘나는 검을 휘두르는 것 외에는 재주가 없는 사람이다.’
다른 사람을 따스하게 품어줄 수도 없고, 그렇다고 저주 속에서 해방시켜줄 수도 없으며, 상대방을 행복하게 만드는 말재주를 가진 것도 아니었다. 그저, 검을 휘두를 줄 아는 재주를 가졌기에 그것으로 상대방에게 최대한의 선심을 베풀 뿐이다.
“이제 그만 잠들거라.”
*
‘초자연현상’은 빠르게 기사화되었다.
유서담의 요청에 의해서였는데, 그 이유로는 “우리가 관측하지 못한 초자연현상을 민간인들이 제보해줘야, 빠르게 대처할 수 있어서.”였다.
그리고 그 효과로 무림인들이 소속된 ‘특수 초자연현상 특별대응팀’이 화제에 올랐다.
어느 날 갑작스레 물건이 떠오르거나, 혼령 현상이 발생하고,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목소리가 들려오는 비과학적인 현상이 발생한다? 그럼 즉시 ‘특초팀’으로 문의하라! 바로 무림인들이 달려가서 해결할 테니까!
기사의 한가운데에는 역시 서담보다는 설중연의 얼굴이 대문짝하게 실렸다. 어쩔 수 없다. 슬픈 일이지만 그녀가 한마디 하는 게, 서담이 수십 수백 마디 하는 것보다 더욱 영향력이 크다는 이유에서였다.
앞으로는 초자연현상의 발생빈도가 더욱 잦아질 터. ···아마도, 헬 게이트가 사라지기 전까지는 초자연현상의 발생빈도 역시 늘어날 것이고 10년에서 20년이 흐르면 던전이나 게이트 사태처럼 흔한 일이 되어버릴지도 모르겠다.
그때까지는 최소한 초자연현상에 대해서는 오로지 어나더 리그와 신 무림맹이 독점할 수 있을 것이다.
거기에, 이면 세계에서 구해온 각종 이물질들은 과학적으로도 꽤 가치가 높았는지 굉장한 가격에 거래되었고 순식간에 떼돈을 벌어들일 수 있었다.
-무림맹의 이미지가 나날이 상승하고 있어요. 희소식이네요.
태블릿 속에서 신혜지가 말한다. 영상 통화라는 단순한 기능이었으나, 설중연에게는 퍽 신기한 기술이었다.
여전히 신 무림맹은 요주의 대상이었다. 3000명에 달하는 초인 독립 단체는 사실상 현대에서는 시한 폭탄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심지어 그 리더가 SSS랭크에 스무 명의 SS랭크 초인이 존재하는 데다가, 심지어 그 무력을 제자에게 전수할 수도 있다?
미국 대통령을 포함하여 세계가 견제하는 것도 이해는 간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허구한날 ‘무림맹은 당장 국제 협회에 소속되어 그 무력을 모두 국가에 귀속시키시오.’ 따위의 헛소리를 듣고 살아서는 안 되지 않겠는가?
솔직히 법적으로 싸우기 시작하면 무림맹이 불리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쪽은 최대한 피한 채 일단은 어떻게 해서든 무림맹의 위상을 드높이고, 이미지를 세계 사람들에게 각인하면서 스스로가 완벽히 독립되는 수밖에 없었다.
그와 비슷한 실제의 선례가 있긴 있었으니까.
‘···물론, 그놈들을 따라한다는 건 별로긴 합니다.’라며 유서담은 일축했다. 국제적으로 독립된 단체를 인정받은 초인 집단의 대부분은 테러리스트였으므로, 무림맹이 그들을 따라해서는 안 된다.
-맹주님은 좀 어떠세요?
“나야 당연히 좋지 않겠느냐.”
현재 설중연은 LA의 5성급 호텔에 위치한 수영장에 몸을 둥둥 띄우고 있었다. 독점으로 사용할 수 있던 덕분일까, 주위에는 아무도 없다. 조금 어둑어둑한 조명의 틈새로 창문을 바라보면 꺼지지 않는 도시의 불빛이 환하다.
-흐으으음. 정말 그런가요?
“···왜 그러느냐?”
신혜지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자 설중연은 고개를 갸웃했다.
-지금도 뭔가 불안한 표정이신데······. 또 유서담 헌터님 기다리고 계시죠?
“······.”
그에, 설중연은 쓰게 웃었다.
-어후. 어쩌다 맹주님같은 멋진 여자가 남자한테 코가 꿰여서는······.
“어쩔 수 없지 않느냐. 그렇게 매력적인 남자인 것을.”
-으아아! 그거 콩깍지예요!
“후후, 너도 사랑에 빠지면 알게 될 거다.”
신혜지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지금도 유서담은 무림맹을 위해 국제 뭐시기 뭐시기 협회에서 나온 높으신 분들이랑 대화 한 마디 나눠보려고 발에 땀이 나도록 뛰어다니고 있었다. 설중연 또한 같이 가겠노라 말했으나, 그가 ‘여기에 맹주님이 오면 부정적인 효과가 날 수도 있어요.’라고 말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남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맨날 기다리는 거 지겹지도 않으세요? 같이 있는 시간도 별로 없으시잖아요.
신혜지는 매일을 그녀와 함께하기에 잘 알고있다. 매일 익숙하지도 않은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며 혹여나 그의 연락이 오지 않을까 오매불망 기다린다는 사실을.
“···나를 위해 그렇게 뛰어다니는데, 어린애처럼 투정을 부려서는 부끄러운 일이지 않겠느냐.”
분명 1분 1초라도 함께하고 싶고, 조금이라도 더 그와 대화를 나누고 눈을 마주하고 살갗을 맞대고 싶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것 정도는 잘 안다.
“나는 괜찮다.”
기다림이란 설중연에게 이미 인생의 일부가 되어버렸다. 설산에 갇혀 하염없이 올지 안올지도 모를 희망을 기다리는 것보다는, 지금이 훨씬 행복하고 값진 인생이었으니까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었다.
-그러면 안 돼요!
“···왜 소리를 치고 그러느냐?”
-어후, 조금 더 적극적으로 하셔야 한다구요. 막, 그, 어? 아시죠? 아예 밤에 덮쳐버리세요!
“이미 덮쳐보았다. 퍽 달콤한 밤이었지.”
-네, 네에에?!
그러자, 당당히 소리를 질러대던 신혜지가 도리어 당황해서는 얼굴을 붉혔다.
-지, 진짜로요?
일단 덮친 건 진짜였다. ···그 뒤로는 무언가를 할 줄도 모르고 서툴러서 전세가 역전되고 말았지만. 썩 다정했던 그날밤의 유서담을 떠올린 설중연이 대답하지 않은 채 희미하게 웃자 신혜지가 어우, 아으, 거리며 이상한 소리를 내더니 다시금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그럼···. 입으로 유혹하는 건 어떨까요?
“응? 당연히 해봤-”
-아니아니아니! 그거 말구요! 대화로 풀자구요!
“···대화라.”
유서담의 인생은 파란만장하여, 들어도 들어도 새로운 이야기가 튀어나온다. 그래서 그와 함께하는 시간이 지겨웠던 적은 단 한 순간도 없었다.
그러나.
그건 여태 그가 살아온 인생이었을 뿐, 현재를 살아가는 유서담의 인생이 아니었다.
그는 비밀이 많았다.
어느 순간 연락이 뚝 끊겨서 ‘파견’을 나가지를 않나, 무림인도 아니면서 무공에 대해 잘 알고 있으며 마법이라는 미지의 학문에 대해서도 통달하였고 심지어는 차원을 다루는 과학까지 보유하고 있었다.
대체 정체가 뭘까. 그는 자신이 모르는 시간 동안, 어디서 무슨 일을 하는 걸까.
···그리고, 과연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알고 있을까?
생각해보면 여태 설중연은 일방적으로 유서담의 인생 이야기를 캐물었을 뿐, 자신의 인생에 대해 이야기했던 적이 없는 것 같다.
그와 자신 사이에는 여전히 그만큼이나 거리가 있는 것이다.
“으음······.”
수영장 턱에 팔을 괴인 채, 설중연은 잠시 고민을 하더니 입술을 떼었다.
“···괜찮겠구나.”
*
“······피곤한데.”
호텔로 돌아온 나는 비척거리는 걸음으로 내 방을 찾았다. 마이클 국장의 도움으로 무려 5성급 호텔을 공짜로 쓸 수 있었거늘, 호텔의 특권을 제대로 누리지도 못한 채 ‘초자연현상’에 대해 높으신 분들에게 제대로 설명하느라 바삐 뛰어다니기만 했다.
벌써 시간은 새벽 2시. 이 시간에 밥 시키면 오나? 5성급 호텔인데 되지 않을까? 안 되나? 배달 음식은 안 되겠지?
<서담. 슬슬 다음 의뢰를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어···. 그래야지, 참.’
<멸망 직전은 아니지만, 살짝 위기라고 봐도 무방한 세계가 하나 있습니다.>
‘어딘데?’
양복 상의와 양말을 대충 벗어서 구석에 올려둔 다음 침대로 향하자, 의뢰인이 자그마한 메시지를 허공에 띄웠다.
<『검은 머리 성녀님의 로맨스』 세계관입니다.>
그러나, 나는 의뢰인의 말에 대답할 수 없었다.
“어···?”
“상당히 늦는구나.”
도시의 야경이 아름답게 비춰지는 창가의 자리에, 은은한 조명을 받으며 누군가가 앉아있었기 때문이다. 노을진 설산을 닮은 백금발에 연분홍색의 눈동자를 가진 그녀는, 얇은 잠옷 한 장만을 걸친 채 레드 와인을 홀짝이며 내게 손짓을 했다.
“이리로 오거라.”
거부할 수 없었다.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가니, 이미 살짝 취기가 오른 듯 뺨이 붉어진 채였다. 내공으로 그것들을 모조리 날려버릴 수도 있을 텐데, 굳이 그러지 않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을 것이다.
“저, 그···. 옷이······.”
눈을 두기가 민망한 잠옷을 입고 있었기에 내가 슬쩍 시선을 돌리자, 그녀가 매혹적인 미소를 지었다.
“이제와서 새삼 내외라도 하느냐? 오늘은 그저 대화를 나누고 싶을 뿐이니, 앞에 앉거라.”
내가 자리에 앉자, 그녀는 미리 준비해두었던 잔 하나를 꺼내서는 레드 와인을 쪼르륵 따랐다. 누군가에게 배운 것일까. 손짓은 서툴렀지만, 와인을 다루는 기본적인 자세가 되어있었다. 그녀가 지금 이 순간을 위해 소믈리에를 불러 공부했을 것을 생각하니 어쩐지 웃음이 나온다.
이윽고 설중연은 자신의 잔을 들었다. 야경과 조명에 반사되어, 홍조가 아름답게 피어오른 그녀의 미소는 새삼 봐도봐도 질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찰랑, 두 개의 와인잔이 부딪쳤고, 그날밤 나와 그녀는 많은 비밀을 공유하였다.
< 현실 왜곡(4)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