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게 주인공은 살인이다-108화 (108/251)

< 현실 왜곡(3) >

헬로니.

그녀는 가수로 데뷔한 이후, 세계적인 스타가 되면서 단 한 번도 자의로 타국에 나가본 적이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대부분 회사에서 정해주는 공연을 하기 위해 나가는 게 전부였고 심지어 휴가를 갈 때에도 회사에서 정해주는대로 움직였다.

아니, 생각해보면 무언가를 스스로 하려고 했던 적도 없는 것 같다. 그 이유는 정말로 별 것도 아닌 게, 단순히 ‘귀찮아서’였다. 움직이기 귀찮아서, 의욕이 없어서, 하기 싫어서.

세계적인 스타가 가장 힐링을 느낄 때가 사실은 그 누구의 관심조차 받지 않는 아주 깊숙한 숲속 별장에서 아무도 없이 홀로 지내는 것이라면 누가 믿겠는가.

하긴. 헬로니는 그저 남이 하자는 대로 따르는 수동적인 인형처럼 지내는 것으로 유명했기에, 어쩌면 누군가는 믿을지도 모르겠다.

그나마 수동적이지 않았던 것은 연애였을까. 남자에게 전혀 관심도 없고 흥미도 일지 않아, 여태 수많은 월드 스타들이 그녀에게 대쉬를 했지만 거절했다.

일견에는 그녀가 동성애자라는 소문이 돌고 있었는데, 차라리 잘 됐다 싶은 마음에 헬로니가 ‘예 맞는데요.’라고 했다가 세계가 한번 발칵 뒤집힌 적이 있었다. 요즘 시대가 어느 땐데 고작 그런 걸로 뒤집히는지 헬로니는 전혀 이해를 할 수 없었지만.

그래서 그럴까.

무언가를 자의로 해본 건 이번이 처음인 것 같다.

한국으로의 입국. 그것도, 스스로 휴가를 내서.

“야, 여기 오는 건 안 귀찮냐?”

“응. 모처럼인데.”

“아주 안색이 훤칠하다잉?”

“네 덕분이지.”

“꼴값 떨지마. 소름끼치니까.”

곧장 테일러 나인을 만나러 온 헬로니는 여전히 활기찬 그녀의 모습이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러면서 고개를 들어 이곳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듣던 대로, 아름다운 곳이네.”

“듣던 대로?”

“여기 소문이 자자해. 왔다 간 사람들이 블로그나 SNS에다가 사진 찍어서 게시했거든. 지금 반응 폭발적인데, 몰라?”

“몰라.”

헬로니는 은근한 미소를 지었다. 뭔가 기분이 좋아 보이는 테일러는 오랜만에 친구가 왔음에도 연신 핸드폰만 들여보고 있었다.

“혹시, 네가 응원한다던 그 팀, 19연패 해버린 건······.”

“아니거든? 18연패에서 멈췄거든? 이번에는 이겼거든? 존나 잘하거든?”

즉시 발끈하는 테일러를 보며 헬로니는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정말 알기 쉬운 여자였다.

‘그나저나, 정말 예쁜 곳이네.’

지구에서는 더 이상 보기도 힘든 찬란한 은하수가 하늘을 수놓고 있었으며, 별빛이 땅에 내려앉은 듯 수많은 빛무리가 허공을 선회하였다. 그 사이사이, 아름다운 꽃밭을 가꾸는 정령들과 새하얗게 빛나는 건축물들은 이 정원의 신비로움을 더해주었다.

···물론, 그녀는 저 아름다운 건축물과 꽃밭의 바로 뒤에 위치한 숨겨진 비닐하우스를 보지 못했다.

건물 안에 들어선 헬로니는 가장 먼저 하선영을 찾았다. 테일러와 유서담에 더불어, 자신이 ‘스토커’를 떼어낼 수 있도록 도와준 고마운 사람이었으니까.

“꺄아아악! 헬로니!!”

당연히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방금까지 훈련을 하다 돌아왔는지 땀범벅이 된 채로 휴게실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던 그녀는 헬로니가 보이는 즉시 달려들었다. 그러면서 말한다.

“이것 봐, 나 헬로니랑 똑같은 연보라색 셔츠에 레깅스 샀어!”

“와아···.”

“자, 이거! 헬로니 이름으로 출시된 브랜드야!”

“···와아.”

몰랐다. 그러고 보니 그런 광고를 찍었던 것 같기도 하다.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온몸을 헬로니로 도배한 하선영의 말은 대체적으로 옳은 편이었기에 아마도 맞을 것이다.

“그리고 이거, 헬로니가 광고해서 샀어. 이 머리핀 보여? 헬로니 음표 머리핀. 아, 맞다. 나 팬티도······컥!”

“작작 하세요···.”

심지어 바지까지 내리려는 하선영의 4번 척추를 쿡 찔러서 저지한 건 예사혜였다. 그녀는 안경을 고쳐 쓰며 한숨을 내쉬었다. 하선영은 전 세계에서 60명도 안 되는 SS랭크의 ‘초인’이자, 곧 무림에서 20명밖에 없는 화경의 고수였다.

대부분의 SS랭크 초인들은 품격이 있기 마련이거늘, 어째서 이 철부지 아줌마에게는 그런 게 전혀 없는 걸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이 그러거나 말거나 테일러는 스마트폰만 가만히 들여다보며 안쪽으로 들어가 정가운데에 쩍벌다리로 자리를 잡았으며, 뒤늦게 달려온 백발의 자그마한 여인이 당황하여 그녀에게 소리쳤다.

“테일러 씨. 거긴 손님이 앉는 자리예요.”

그러거나 말거나, 테일러는 듣지도 않았지만. 예카테리나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푹푹 내쉬며 헬로니를 바로 옆자리로 안내했다.

어쩐지 정신없는 4명의 여인들을 보며, 헬로니의 머릿속에 문득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성격 더러운 테일러, 정신없이 활기찬 하선영, 어쩐지 지적여 보이는 예사혜, 가장 어린애처럼 생겼는데 가장 어른스러운 예카테리나.

심지어 전부 연예계에 던져놓아도 뒤지지 않는 미인들이었다.

“저기···.”

“말씀하세요.”

“···혹시, 5인조 걸그룹 생각 없으세요?”

뚝, 순식간에 분위기가 싸늘해진다. 테일러는 진심으로 헬로니를 경멸하는 표정을 지었으며, 예사혜는 껄끄럽다는 미소를, 하선영은 침울하게 고개를 저었으며, 예카테리나는 단어의 뜻을 뒤늦게 이해하고선 어색하게 웃었다.

“대가리는 집에 소중히 보관해두고 있는거 맞지?”

“내가 이 나이 처먹고 무슨······. 창제 그 양반한테 놀림이나 안 들으면 다행이지.”

“노래도 불러본 적 없는데요···?”

“후후, 즐겁겠네요. 하지만 저는 해야만 하는 일이 있어서요.”

아닌데. 분명 괜찮은 조합인데.

하지만 그들의 반응이 워낙 부정적인 탓에 헬로니는 더 이야기를 꺼내기 껄끄러워졌다.

예카테리나는 그런 그녀에게 차를 한 잔 내주며 말했다.

“그나저나, 유서담 헌터님이 안 계실 때 찾아오셨네요.”

“아, 그게······. 으으음···.”

헬로니는 이전에 유서담에게 빚을 졌다. 하선영이 결정적인 힌트를 제공했고, 스토커를 잡도록 계획을 짠 것은 유서담이었으니까. 그래서, 감사 인사를 분명히 전해야 하는데. 그래야만 하는데.

“그···. 조금······.”

우물쭈물대는 헬로니를 보며 예카테리나는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세계적인 스타라길래 조금 더 활발하고 친근하고 끼가 넘치는 사람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훨씬 더 소심했기 때문이다.

“예전에 제가 말실수를 조금 많이 해서요···.”

“어떤 말실수를요?”

“그게······.”

헬로니는 문득, 과거를 떠올렸다.

‘나, 난 이제 더 이상 못하겠어. 제발 날 내버려둬, 부탁이야. 난··· 진짜로······.’

‘헬로니. 여기서 벗어나면 이제 안정권이야. 네 능력으로는 충분히 극복 가능한 일이야. 내 뒤에 따라오기만 해. 다 알아서 할 테니까.’

‘닥쳐! 네가 뭘 안다고 그래! 아무런 초능력도 어, 없으면서! 너같은게 내가 지금 무슨 기분인지 알기나 하냐고!’

‘······.’

그때의 헬로니는 제정신이 아니었을 것이다. 평상시에 누군가에게 화를 내본 적도 없는 그녀가 이성을 잃고서 소리를 고래고래 지른 것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으니까. 당시의 헬로니는 유서담에게 온갖 폭언을 퍼부었다. 그것도, 그가 가장 아파하는 트라우마를 자극해가면서까지도.

그런데도, 그는 다 이해한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그게 네 고민이었구나.’

이후로도 유서담은 헬로니를 억지로 이끌고서 전장을 돌파하였다. 수백 마리의 괴수로 둘러싸인 공간. 초능력이 없는 유서담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눈과 귀에 의존하여 최대한 은밀하게 도망치는 것밖에 없었다.

아마도, 그 과정에서 헬로니가 제대로 능력을 발산할 수만 있었다면······. 조금 더 수월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피를 보고서 패닉 상태에 빠진 헬로니는 스스로의 초능력을 전혀 제어할 수 없었고, 초음파라는 세심한 컨트롤을 사용해야만 하는 감지 계열 능력은 사실상 무용지물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그런 끔찍한 상황에서, 다른 그 누구도 아니고 아무런 능력도 없이 멸시받던 F랭크의 헌터가 초능력자들을 이끌었다면 그 누가 믿겠는가.

“······그날 이후, 저는 헌터를 그만뒀어요.”

“아···.”

그리고, 단 한 번도 유서담을 만나지 않았다. 아니, 그러질 못했다.

너무 미안해서. 죄책감이 매일밤 머리를 파고들어서. 그날 이후 몇 년 동안은 자꾸만 꿈속에서 유서담이 나왔다. ···폭언과 폭설을 내뱉는, 자신과 함께.

끔찍한 기억이었다. 제발 그 입을 다물라고 아무리 소리쳐도, 멈추지를 않았다. 마치 한 번 내뱉은 말은 주워담을 수 없다는 것을 꿈속에서마저도 상기시켜주려는 것처럼.

“병신. 유서담은 그런 거 신경도 안 쓴다니까.”

“······.”

야구를 보는 자세 그대로, 테일러가 말을 툭 내뱉는다.

“응. 그래도, 제대로 사과할 거야.”

그때의 일을 채 마무리 짓지도 못한 채, 유서담에게 또다시 큰 빚을 져버렸다. 이제는 정말로 그냥 넘어가서는 안 될 것이다.

“아, 그리고 선물 사왔어요. 보실래요?”

“오오, 헬로니의 선물! 선영문파의 비보로서 직계 제자에게만 물려주도록 하겠어.”

“제발 그러지 말아주세요 스승님······.”

어나더 리그에 4명의 여인과 50인의 달인들이 머물고 있다는 사실은 진작에 알고 왔다. 그들의 선물을 모두 정성스레 준비한 헬로니는 유서담의 선물박스를 조심스레 예카테리나에게 건넸다.

“그, 이거는 우선···. 나중에 오면 주도록 해요. 간단한 화장품이나 먹을 거리예요.”

“네. 제대로 전해드릴게요.”

예카테리나는 방긋 미소를 지으며 선물을 받아 챙긴 뒤, 은근한 얼굴로 물었다.

“그나저나, 저 궁금한 게 있거든요.”

“뭔데요?”

“···그, 옛날의 서담님은 어떤 사람이었나요?”

“으음?”

왜 그런 질문을 하나, 싶다가도 그녀의 우물쭈물한 표정을 보니 대충 감이 잡혔다. 헬로니는 턱을 쓰다듬으며 조심스레 옛 기억을 떠올렸다. 그와 함께했던, 최대한 좋은 추억들을.

‘알겠지? 이렇게 하면 무조건 우리가 100%로 몫을 챙길 수 있다 이거지.’

‘거기서 살짝 왼쪽 때렸으면 지분이 절반을 넘겨서 크리스털의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었어.’

‘내 총알을 왜 써? 잘 봐, 내가 저기다가 이거 던져놓으면 B팀이 알아서 처리해준다 이거지. 근데 쟤들은 여기까지 못 와. 무슨 뜻인 줄 알아? 저게 다 우리꺼다 이 말이야!’

좋은 추억···이 맞을 것이다.

헬로니는 어색하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유서담은 예전부터 뭐 하나 기회가 잡히면, 그걸 끝까지 물고 들어져서 최대한의 이익을 챙기는 사람이었죠.”

*

선글라스를 꺼내서 착, 장착하자 세상이 다르게 보였다.

아닌 말이 아니라, 정말로 다르게 보인다. 차원을 관측할 수 없는 일반인들도 이 선글라스를 착용하면 ‘이면 세계’를 어느 정도 볼 수 있었으니까.

내 신호에 맞춰, 옆에 나란히 서있던 7인의 무림인들 역시 선글라스를 착용했다.

설중연을 포함하여, 무림의 20대 고수라 불리는 이들이었다.

“신기하군! 정말로 다른 세상이 보이다느우웨에에엑!”

두 주먹을 불끈 쥐고서 호기롭게 소리치던 고수 한 명이 갑작스레 구토를 했다. 당연한 일이다. 아무리 이면 세계를 관측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다른 차원을 갑작스레 보는 건 큰 부작용을 유발하니까. 그나마 멀쩡한 사람은 설중연 뿐이었다.

“대단하시군요. 역시 무림인이라고 할지······.”

마이클 국장은 선글라스를 끼고서도 고작 멀미밖에 안 하는 무림인들을 보며 감탄사를 내뱉었다.

내가 마법과 수명을 쏟아부어서 특수 제작한 이 선글라스는 누구라도 착용할 경우 이면 세계를 볼 수 있었지만, 단점으로 아무나 착용할 경우 그대로 머리가 팽 돌아서 쓰러진다는 점이었다.

일반인이 낄 경우에는 사망에 이를 수도 있다고 경고하여, S랭크의 헌터들을 불러모아서 착용해보았으나 백이면 백 죄다 1초도 못 버티고 기절했다.

그나마 무림인들은 이미 차원 이동을 한 경험이 있었고, 또 그중에서도 가장 강한 축에 속하는 화경(SS랭크)의 고수들만 모아두었으니 멀미를 조금 하는 정도에 그치는 것이다.

설중연은 선글라스를 벗으며 말했다.

“이제 무얼 하면 되겠느냐?”

그녀가 말 한 마디를 하자, 모여있던 모든 미군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내공이 실려서 모두에게 들리도록 말을 한 것이기도 했지만, 묘하게 중독되는 음색에 감히 고개를 돌리지 않고서는 못배겼던 것. 심지어 몇몇은 사인을 해달라고 다가왔다가 간부들에게 끌려가기까지 했는데, 군인들의 사기가 흐트러질 정도로 그녀는 이곳에서 꽤 치명적인 존재였다.

“간단합니다. 이면 세계로 통하는 포탈 보이시죠?”

선글라스를 통해 바라본 허공에는 일그러진 공간이 한두개씩 있었다. 정말로 아주 작디 작아서 콩알만큼이나 조그만 공간. 그러나 아주 간혹, 그것들이 살짝 커지는 순간에 벌레나 새가 들어간다면? 그대로 뿅, 이면 세계로 빨려들어간다.

간혹 헌터들이 이런 기현상이 발생하는 지역에서 실종되었다는 말이 괜히 나오는 게 아니었다. 아마 그들 역시 이런 왜곡된 차원의 틈새로 빨려들어갔을 터.

“저 틈새로 직접 걸어 들어가서 ‘보스’ 혹은 ‘코어’를 때려부수고 나옵니다.”

어떤 던전은 보스 몬스터를 처치해야만 클리어가 되기도 했고, 어떤 던전은 몬스터를 모조리 소탕해야만 했으며, 어떤 던전은 에너지원이 되는 핵심 코어를 부숴야만 하기도 했다.

그와 마찬가지로, 저곳 역시 이면 세계와 현실을 연결하게끔 만들어주는 원천을 부수면 해결이 된다는 의미.

지구의 가장 구석진 곳, 차원의 잔해들이 모이고 모여서 만들어진 이면 세계.

마이클 국장이 결국, 내 말을 듣고서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이 기현상은 당신들밖에 해결할 수 없으니······. ‘특수 초자연현상 특별대응팀’의 결성을 허락하도록 하겠습니다.”

이 세상에서 오로지 나와 무림인들만이 할 수 있는 일이 하나 생겼다. 그리고 그것은 국제 이상현상 협회에서도 인정을 받았으니, 이제 거리낄 것이 없었다.

“갑시다. 옥탑방에 월세도 안 내고 불법체류중인 외계인놈들 죄다 때려 부수러.”

< 현실 왜곡(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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