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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주인공은 살인이다-107화 (107/251)

< 현실 왜곡(2) >

미국은 땅이 넓어서 어느 도시에서든 한두어시간 차를 타고 나가면 죄다 시골이 된다는 말이 있다. 헌터로서 내가 활동할 땐 주로 아프리카나 유럽, 아시아 쪽에서 움직였던 탓일까 미국에는 거의 와본 적이 없었는데 그래도 어쩌다 온 적이 있긴 있었다.

8년 전, 미주리 주의 도시 인디펜던스에서 발생했던 초거대균열을 저지하기 위해서였다.

그 균열을, 감히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신이 내린 천벌을 인간이 이해하는 게 과연 가능키나 할까? 그건 정말로 신이 ‘악의’를 가지고 인간을 벌하기 위해서였다고밖엔 설명이 되지 않았다.

흡사 헬 게이트를 연상케하는 그 초거대균열의 안에서는 인간의 상식과 과학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기현상이 자꾸만 발생하였는데, 지옥을 현실에 강림시킨다면 과연 그런 모습이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하긴, 그래.

신이 내린 천벌이라기엔, 결국 인간들은 그것에 맞서 싸워 이겨내는 데에 성공했다.

헌터만 따졌을 때 사상자만 족히 수십만 명이었으며, 민간인까지 합치면 집계를 못할 정도의 참혹한 결과를 낳았지만 말이다.

당시에 수많은 영웅들이 죽어 나갔으며, 촉망받던 인재들이 꽃을 피워보지도 못한 채 바스라졌다. 그런 끔찍한 전장에서 내가 살아남을 수 있던 이유는······.

순전히 내가 F랭크의 헌터였기 때문이다.

수 시간 공들여 괴수 한 마리를 간신히 사냥하는 ‘전략적 사냥꾼’은 당시에 필요가 없었다. 오로지 파워, 출력, 지구력만으로 승부해야만 하는 그 전장에서 소총을 든 일반인이 낄 자리는 없었다는 의미.

당연히 나는 최후방에 배치되었고 운이 너무 좋아서. 정말 너무너무 좋아서, 살아남았다.

······그리고, 나는 그날 ‘레이나 주’를 잃었다.

아직도 잊히질 않는다.

초거대균열의 속으로 빨려 들어가며, 나에게 손을 뻗고있는 그녀가.

이제 괜찮다고, 너는 살았으니 되었다고.

죽음의 직전까지도 의연하게 미소를 짓는, 그녀의 얼굴이.

“미국에 와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레토나 차량의 운전석에 탑승한 금색 머리의 사내가 내게 묻자, 퍼뜩 사념에서 깨어났다.

사내의 이름은 마이클.

국제 이상현상 협회의 사무국장이었다.

의례적인 질문일까. 아니면 내가 또 표정에 뭔가를 드러냈을지도 모르겠다.

“예. 8년 전에요.”

덜컹덜컹! 레토나는 영 탑승감이 좋지 않았는데, 그래도 이런 울퉁불퉁한 지형을 넘을 때에는 이만한 게 또 없다. 여기서 승용차를 운전했다가는 구역질이 날지도 모를 테니까.

“···‘인디펜던스 데이’입니까?”

“예.”

인디펜던스에서 발생한 초거대균열. 사람들은 훗날 그 사건을 ‘인디펜던스 데이’라고 불렀다. 인간이 괴수로부터 완전히 독립하여, 다시금 지구의 지배자로서 거듭난 시기이기도 했으니까.

“안 좋은 시기에 방문하셔서, 별로 좋은 기억은 없으시겠군요.”

“괜찮습니다. ···가끔, 미국에 찾아올 이유가 생겼거든요.”

설중연의 얼굴을 떠올리며 그리 말한 뒤 창밖을 내다보았다. 마이클은 내게 물었다.

“켄자스에 와보신 적이 있습니까?”

“아뇨.”

“낭만적이고, 여유로운 도시죠.”

글쎄. 그 둘 다 켄자스와는 맞지 않는 듯싶다.

왜냐하면.

“······지금은 아니지만요.”

창밖으로 보이는 켄자스 주는, 완전히 멸망해버린 지 십수 년이 지난 것으로 보였으니까.

삭막한 도시였다. 생명의 흔적은 전혀 없고, 차가운 표정의 군인들만이 먼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간헐적으로 들리는 총성과 괴수들의 비명소리는 이곳이 아직 전장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것처럼 들렸다.

그와 별개로.

켄자스 주는 정말이지 독특했다.

“저게···. 국장님이 말씀하신 ‘초자연현상’입니까?”

“그렇습니다. 아직까지도, 원인을 규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모든 건물들이, 허공에 둥실 떠있었다.

“······가까이서 봐야 알겠는데요.”

차량에서 내리자 미군들이 다가와 경례를 한다. 마이클은 그런 그들을 가볍게 지나쳐 나를 이끌고 도시로 향했다.

“괴수들이 출몰한 이후, 중남부 지방의 대부분은 멸망해버렸습니다. 특히 켄자스는 아예 사람이 살 수 없는 도시가 되어버렸죠.”

“그런가요.”

그래도, 잃어버린 땅을 완전히 방치해버린 중국과는 달리 미국은 조금씩 땅을 되찾기 위해 헌터들을 꾸준히 파견하고는 있다. 단지 되찾는 속도가 굉장히 느릴 뿐. 괴수들이 이미 진척에 퍼져있고, 곤충형 괴수들이 대지와 강, 산과 숲 모두에 알을 까놓은 데다가 환경 자체가 이미 이계 던전과 ‘동기화’가 되어 이미 이곳은 지구의 환경이라고 보는 것조차 힘들었다.

“그런데······. 저건 정말로 독특하군요. ‘동기화’는 단순히 환경이 바뀔 뿐, 저런 현상이 발생하지는 않잖습니까.”

흰색의 보호복을 입은 연구원들이 바삐 돌아다니며 야외에 설치해둔 컴퓨터와 막사 안쪽에 세워둔 슈퍼 컴퓨터로 뭔가를 연구하고 있었다.

건물의 잔해, 잘려나간 건물의 뿌리, 철근, 무너진 다리, 자동차, 간판 등등 모든 것들이 허공에 떠있었는데 과연 그것을 과학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처음에는 중력이 역전된 걸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따지면, 저희도 공중으로 떠올라야 하는거 아닙니까?”

“예. 하지만 도무지 설명할 방법이 없습니다. 자력, 중력을 포함하여 그 어떤 ‘힘’도 이곳에서 관측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 분명히 어떤 무언가, 우리가 알지 못하는 미지의 ‘힘’이 저것들을 자꾸만 끌어당기고 있습니다.”

과연,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으니 마법사를 부른다.

현명한 선택이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일 터다.

나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안경을 썼다.

“그건······.”

“에센스 에너지를 관측할 수 있는 장비입니다. 그 외의 추가적인 장비가 있다면 미지의 파장도 감지할 수 있죠.”

“오호라, 추가적인 장비라 함은······?”

“지금 보여드리도록 하죠.”

그러자 마이클과 함께 내 뒤를 따라오던 연구원들이 화색을 띄었고, 나는 인벤토리에서 청진기를 꺼냈다.

“······어?”

“······음?”

뒤쪽에서 연구원들이 의문을 표하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무시하고서 공중에 몇 센치미터 정도 떠있는 건물에 다가가 청진기를 대었다.

이것은 단순한 에센스 에너지 파장을 더욱 섬세하게 감지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으로서, 미약하게 걸려있는 마법조차 ‘과학적’으로 모두 판별하여 보여준다. 그리고, 그것을 백색 마녀의 도서관이 해석하면 완벽! ···했으나.

‘···마법은 아니군.’

예상대로, 이 기현상은 마법으로도 설명할 수 없었다.

사람들이 착각하는 게 있는데 마법은 손에서 뿅 불이 나가고 레이저가 나가는 신비로운 환상같은 게 아니다. 모든 현상과 자연을 수학적으로 규명해내는 또다른 학문일 뿐이라는 의미.

“조금 어떻습니까?”

“글쎄요······. 일단은 차차 지켜봐야 알 것 같기는 한···어라?”

말을 하던 와중, 무언가가 내 앞을 지나쳤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본다.

내 눈이 잘못된 게 아니라면.

저건, 틀림없이 ‘엘프’였다.

뾰족한 귀에, 진한 흑색의 머리칼, 그리고 어둠보다도 더욱 짙은 피부를 가진 다크 엘프 말이다.

‘엘프가, 왜······?’

움찔, 뒷걸음질을 치며 시야를 돌려본다.

분명히 시간대는 대낮이었고 한여름의 따사로운 햇살이 온 세상을 녹일 듯이 비추고 있었다. 그런데, 태양빛은 온데간데 없이 어둠이 짙게 내려앉은 켄자스 주가 나를 반기고 있었다.

아니. 켄자스가 맞긴 한 걸까?

꿈틀, 점액질이 흘러내리는 피부를 가진 촉수가 건축물을 천천히 들어올린다. 문어의 촉수에 파리의 얼굴을 가진 생명체가 그 아래를 지나쳤으며, 쥐의 팔다리와 고양이의 몸통에 말머리를 가진 생명체가 허공에 소리를 친다.

이질감이 온몸을 감싸고 돌았다.

이건, 지구가 아니다. 지구에는 이런 환경이 없다. ‘이계’라면 모를까······.

천천히 허공을 둘러보니, 그제야 공중에 둥실 떠있는 건축물에 대한 비밀이 밝혀졌다. 끈적한 물질로 이루어진 무언가가 건축물을 들어올려 받치고 있었고, 허공에 떠있는 자동차는 사실 쓰레기더미 위에 놓여있었으며, 허공에 난데없이 떠있는 간판은 알고보니 어떤 수상쩍은 건물의 간판으로 재활용되고 있었다.

그런데, 그 모든 것들이 방금까지만 해도 보이지 않았다는 점이 문제였다.

‘대체······.’

<서담. ‘차원 왜곡’ 현상입니다. 서로 다른 차원과 차원이 부딪쳐, 굴곡된 세계를 만드는 것이죠.>

‘차원 왜곡이라고?’

<그렇습니다. ‘차원 충돌’ 현상이 지구에서 던전, 게이트, 균열 현상으로 나타나지 않습니까? 그것과 비슷하면서도 살짝 다른 종류입니다.>

‘···어떻게 다른데?’

<쉽게 설명해드리죠. 차원 충돌은 얼린 콜라와 얼린 사이다가 부딪쳤다고 보면 좋습니다.>

얼린 콜라와 얼린 사이다는 서로 부딪쳐도 서로에게 흠집을 낼 뿐, 섞이지는 않는다.

<그리고 차원 왜곡은 녹은 콜라와 녹은 사이다가 부딪친 것이죠.>

하지만, 녹은 콜라와 녹은 사이다가 충돌하면······. 둘은 완전히 뒤섞이고 만다.

<이곳은 지구와 완전히 섞여버린 공간. ···그러나, 보통의 인간은 감지하기 힘든 공간이지요.>

나는 순전히 의뢰인 덕분에 이곳을 볼 수가 있다는 의미.

“마법사 유서담? 괜찮으십니까?”

뒤쪽에서 마이클 국장이 말을 걸자, 나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서 고개를 돌렸다. 여전히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코앞에 거대한 지네인간이 지나갔으며, 피부가 완전히 썩은 엘프가 바닥을 기어가고 있었음에도, 그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저곳은 쉽게 말해서 거울의 반대편, 즉 ‘이면 세계’라고 봐도 좋습니다. 하지만 평상시에는 분리되어있어 서로를 볼 수도, 느낄 수도 없어야 합니다만···. 아무래도 두 개의 왜곡되었던 현실이 하나로 합쳐지려는 모양이군요.>

‘어째서 이런 현상이 발생하는 거야?’

다른 차원을 여행다니면서, 이런 현상은 단 한 번도 본적이 없다. 그런데 유독 지구에서만 이런 독특한 현상이 발생한다. 던전, 게이트, 균열에 더불어 현실 왜곡이라니.

<···지구에는, 모든 차원의 잔해가 모이는 ‘차원 쓰레기통’이 있기 때문이죠.>

‘차원 쓰레기통?’

<네. 서담, 당신이 ‘헬 게이트’라고 부르는 바로 그곳입니다.>

‘······뭐? 그럼, 헬 게이트가 지구에서 발생하는 이현상의 모든 원인이라고?’

<일단은······. 그렇다고 보면 좋겠지요.>

모든 차원의 잔해가 모이는 세계, 지구.

그제야 나는 여태껏 들었던 의문 중 하나를 해소할 수 있었다.

바로, ‘은빛 정령의 꽃’의 존재에 대해서였다.

그녀는 막 태어났음에도마녀에 대해서도, 도술에 대해서도 인지하고 있었다.

그것은 그녀가 특별해서가 아니었다.

그저 마법과 도술이 존재했던 세계에서 태어났기에.

그리고, 그런 세계에서 버려졌기에.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거야?’

<아직은 ‘헬 게이트’가 나타난지 몇 년 되지 않아 현실 왜곡 현상이 거의 발생하지 않았을 것으로 보입니다. 아마도, 이곳이 거의 처음이겠지요. 만약 동기화가 끝난다면···. 던전 사태와 마찬가지로 ‘동기화’가 될 것 같군요.>

그리고, 던전 사태의 동기화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을 정도로 끔찍한 일이 벌어질 것이다. 던전 내부는 그나마 인간이 적응하여 살아갈 수 있는 공간이라지만······. 저 ‘이면 세계’는 도저히 인간이 살아남을 수 없을 것으로 보였으니까.

게다가 더욱 최악인 것은, 인간의 과학력으로는 대응할 수 없는, 말 그대로 ‘초자연적’ 현상이라는 점. 그나마 이러한 현상이 지구상에서 거의 발생하지 않아서 망정이지, 하마터면 큰일날 뻔했다.

‘아니지. ···잠깐, 야.’

<네?>

‘어쨌든 난 저기를 볼 수도 있으니, 간섭할 수도 있다는 뜻 아니야?’

<그렇습니다.>

‘그럼 던전과 마찬가지로 어떻게 해결할 방법도 있겠지?’

<아마도···. 그렇습니다. 저는 잘 모르겠지만······. 혹시, 어떤 방법이 있습니까?>

‘아니?’

없다.

하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 나중에 생각하면 될 문제니까.

지금 당장은, 이게 중요했다.

“국장님?”

“예. 말씀하시죠.”

나는 최대한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단골로 찾아가던 떡국집이 문을 닫았던 그때보다도 더욱 더.

“이 기현상의 심각성에 대해···. 말씀드려야할 것 같군요.”

“그렇게, 많이 심각한 일입니까···?”

“예. 하지만 괜찮습니다. 저는 이쪽으로 프로페셔널리스트니까요.”

“혹시 무슨 뾰족한 수라도 있습니까?”

“당연하죠. 저한테 다 계획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나는 손가락을 비비며 은근한 표정으로 말했다.

“저를 고용하십쇼. 다 알아서 해드리겠습니다.”

지구도 지키고. 돈도 벌고. 세계에서 가장 큰 기관에 영향력도 만들고.

이거 완전 일타삼피에 일석삼조에 일거삼득이 아니겠는가?

< 현실 왜곡(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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