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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주인공은 살인이다-105화 (105/251)

< 배터리 충전!(3) >

이른 오전, 여느 때와는 전혀 다르게 예카테리나는 아주 활기찬 인상으로 출근을 하였다.

“안녕하세요, 정령 아저씨들.”

“안녕하십니까, 마님! 오늘은 안색이 좋으십니다!”

“네. 푹 쉬었거든요.”

“좋은 거라도 드셨나 봅니다?”

“···그, 그런 건 아니지만요.”

정령들은 이종족에게 딱히 적대심을 드러내지는 않는다. 오히려 ‘마력’을 선천적으로 다루는 종족에게는 호의를 보내는 편이었는데, 예카테리나는 그 친절한 성격과 마력의 종족이라는 성향이 겹쳐서 공중정원에서 정령들에게 가장 인기가 많은 인원 중 한 명이었다.

힘없이 인사를 건네던 평소와는 달리 정령들 모두에게 한 명, 한 명 힘차게 인사를 보낸 예카테리나는 콧노래까지 부르며 출근을 하였다.

어젯밤 서담의 품에 안겨서 잠든 이후로, 온몸에 활력이 넘쳤다.

장장 12시간이 넘는 숙면! 평소 불면증에 시달려 이틀에 세 시간 정도 자면 아주 숙면을 잘 취한 것이나 다름없는 그녀였기에 정말 기적과도 같은 하룻밤이라고 할 수 있겠다.

물론, 혹여나 자신이 깰까 봐 쇼파에 앉은 자세 그대로 꼼짝도 안 하고 12시간이나 가만히 기다려준 유서담에게는 상당히 미안한 일이었지만······.

‘···나중에 떡케이크라도 사드려야겠어.’

사무실로 들어선 예카테리나가 가장 먼저 하는 일은, 다름아닌 아메리카노를 내리는 것. 그것은 하루 일과의 시작을 알리는 행위이다. 따뜻한 커피를 들고서 창밖을 내다보면 벌써부터 52인의 헌터들이 공중정원 내부를 질주하고 있었다.

“몇 회?”

“200회!!”

“목소리가! 작다! 300회!”

“300회!!!”

예카테리나는 그런 그들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1분 1초, 평화를 만끽할 수 있는 모든 시간이 아름다웠으니까.

안타깝게도 공중정원에는 별빛 가득한 밤을 제외하고서는 시간대의 흐름이 전혀 없었기에 아침 햇살을 받을 수는 없었는데, 그 점이 살짝 아쉬웠다.

‘흐음, 그러고 보니 외부 건물을 나중에 따로 마련하신다고 했던가?’

이공간 전체를 이용할 수 있는 공중정원은 참으로 편리하고 좋았으나, 여러모로 불편한 점도 있기는 있었으니까.

커피를 깔끔하게 마신 예카테리나는 컴퓨터를 틀었다.

오늘은 유서담이 출근하지 않는다. 미국으로 가서 무림맹과 해야 할 일이 있단다. 그래서 대부분의 업무는 ‘평소처럼’ 그녀가 혼자서 보면 되었다.

가장 먼저 메일을 확인한다.

마법과 무공을 동시에 배울 수 있다는 이점 덕분일까, 여기저기서 메일이 상당수 와있었다. 아직까지는 무공이나 마법을 아무에게나 가르치지는 않았기에 그저 메일을 교환하거나 기업인들을 모셔와서 기술에 대해 토론하는 정도에 그쳤지만, 저들 모두 훗날 중요한 거래처가 될 수도 있으므로 허투루 읽지는 않았다.

‘으음, 그러고 보니 헌터 등록도 해야겠지?’

50인의 검사들을 ‘이능력자’로서 등록해야만 하는 데다가, 아직 E랭크밖에 되지는 않지만 하루빨리 하선영을 선임 헌터로 하여 데뷔전을 치르는 것이 좋을 터다.

메일을 쭉쭉 확인하던 그녀는 눈에 띄는 무언가를 확인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헌터 협회 초대장’. 최소 10년 차 이상의 베테랑 헌터를 등급별로 초대하여 헌터 업계에 대해 토론을 하는 장이었는데, 올해의 헌터회가 슬슬 다가오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그 헌터회에 F랭크 헌터의 참가자가 유서담으로 결정이 되어있던 것.

“······유서담 헌터님 아직도 F랭크로 등록이 되어있잖아?”

F랭크의 헌터가 얼마 남지 않은 탓에, 1년 전 미리 유서담을 초청한 것으로 보인다. 그때까지만 해도 유서담이 세상에 큰 두각을 드러내지 않을 때였으니까.

그렇게 메일을 확인하고 있는데, 벌컥! 사무실 문을 박차고 가장 먼저 테일러 나인이 들어와 쇼파에 털썩 앉았다.

“뭐야, 꼬맹이. 일찍 출근했네?”

“저 꼬맹이 아니거든요.”

예카테리나는 키가 작다는 이유만으로 줄곧 테일러에게 그런 별명으로 불렸다. 따지고 보면, 테일러 나인도 그렇게 큰 편은 아니면서 말이다.

“헌터 대기실 따로 있는데요.”

“거기 심심해.”

테일러 나인이 들어오자, 내친김에 예카테리나는 그녀와 관련된 메일을 체크하였다.

사실, 어나더 리그 길드로 발송되는 메일 중에서 ‘헌터 유서담’과 관련된 내용은 적다. 오히려 유서담보다도 테일러 나인과 하선영에 대한 메일이 훨씬 더 많다.

[헌터 ‘테일러 나인’ 랭크 재심의 및 승격 심사 건의]

그중 눈에 띄는 건, 테일러 나인의 SS랭크 승격에 관한 내용이었다. 최근 테일러 나인은 형태변환이 어렵다는 빛 속성 초능력을 다양한 형태로 변환하는 훈련을 시작하였는데, 여태 딱딱하게 굳은 채 갇혀있던 재능이 터져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마법의 수식을 통해 초능력의 다양한 형태변화가 가능하다고는 쳐도, 테일러 나인처럼 말도 안 되는 수준의 능력을 보이기는 어렵다. 그런데 그녀는 단 한 달 만에 능력의 한계를 넘어서질 않나, 반년도 채 되지 않아 아홉 형제가 사용하는 모든 능력을 베껴오질 않나, 정말 미친듯한 성장력을 보여주고 있었다.

비록 유서담이 테일러 나인에게 힌트를 준 덕분이라고는 하지만, 그것은 고작해야 잔잔한 호숫가에 돌멩이 하나를 집어넣었을 뿐인 정도이다. 거기에 파도를 일으킨 건 결국 테일러 나인 스스로의 노력 덕분이라는 의미.

‘SS랭크의 심사를 보긴 봐야겠지만······.’

예카테리나는 한숨을 푹 내쉬면서 바로 옆에 뉴스 페이지를 틀었다. 거기에는 테일러 나인의 최근 행적에 대한 논란거리가 몇 개나 쌓여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테일러 나인의 야구장 폭언 논란!

영상 하나를 재생하자, 거기에는 KBO를 보러 간 테일러 나인이 제대로 찍혀있었다. 그녀는 꽤 유명인인지라 경기장에 떴다 하면 수십 대의 카메라가 집중되기 마련이거늘, 테일러 나인이 어디 그런 걸 신경쓰는 사람이던가?

-야 이 씨■롬아 공을 왜 바닥에 처박고 지랄이야!!

-아니 와 저 개새 와 저거 와.

-그래! 야구를 못 하면 웃는 거라도 잘해야지. 아니 ■발아 넌 지금 웃음이 나와?

-저걸 왜 돌아 아니 와 내 야마가 다 도네.

-너네 저녁에 약속 있니? 경기 빨리 지고 집에 가서 뭐 하려고? 어? 대답해봐 이 ■새들아!

-이 개새끼들아 그냥 그라운드에서 시원하게 ‘저는 행복합니다’ 열창하고 집에 가!!

아마도, 안 들리는 줄 알고 그랬을 것이다. 그녀는 일개 관중이었고, 관중이 욕을 하는 건 흔한 일이었으니까. 그러다 이내 카메라가 자신에게 집중된다는 사실을 누군가가 허겁지겁 달려와 말해주며 욕을 줄이라고 부탁하자, 그녀는 표정을 와락 구기고선 또다시 소리를 질렀다.

-아이고, 내가 태어난 게 잘못이지. 내 잘못이야. 내가 태어나서 화데를 응원한 게 잘못이야!

-푸하핫! 진짜 웃겨. 한국 예능이 이래서 망한다니까? KBO가 제일 웃긴데 예능을 왜 봐? 으하학!

-내가 경기장을 잘못 찾아왔나? 이거 중학교 야구 클럽 특집 맞죠? 아니라구요? 아니면 경기를 왜 저따구로 하냐고 이 시■! 이거 놔! 놓으라고!

결국 그녀의 발언은 모두 하나하나 움짤과 영상으로 캡쳐되어 단 하루 만에 인터넷 전체를 관통하였는데, ‘화데 18연패’라는 검색어 1순위와 함께 테일러 나인의 발언은 모두 속시원한 사이다로 자리를 매김하게 되었다.

물론, 그와 별개로 그녀는 이제 어나더 리그 소속의 헌터였기에 공식적으로 사과를 해야만 했지만.

“후우······ 테일러 씨. SNS에 사과문은 올리셨어요?”

“···일단은?”

테일러가 떨떠름하게 답하자 예카테리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보나마나 대충 올렸을 게 뻔하다.

그나마 최근 어나더 리그에 소속되면서 테일러 나인은 언행을 조심하는 편이었는데, 그것이 야구장에서 폭발해버린 모양. 그녀를 막 나무라기에는, 그저 관중으로 갔을 뿐인데 주목을 받아버렸다는 죄밖에 없었다.

다행인 점은, 그녀의 평소 행실이 원래 저래서 더 깎일 이미지가 없다는 것. 오히려 저런 행동 덕분에 팬층이 상당히 두텁기도 했다.

이윽고 테일러에 대한 서류를 확인하고 있을 무렵, 사무실의 문이 열리며 하선영과 예사혜가 들어왔다. 조깅을 끝내고 잠깐 휴식 시간을 가지려는 모양.

“오, 하얀 친구. 오늘은 유서담 안 온대?”

“늘 그렇죠.”

“쯧쯧. 사장이나 돼서 말이야.”

“서담님은 마스터고, 사실 사장은 제가 아닐까요?”

“그래. 네가 길드 먹어라. 그 친구 다 좋은데, 복지가 영 꽝이거든.”

“사부님! 그런 말은 하면 안 돼요···!”

하선영은 아저씨처럼 털털하게 말하는 편이었고, 예사혜는 그럴 때마다 옆에서 전전긍긍하고는 했다. 그녀들이 쇼파에 앉자, 예카테리나는 또다시 메일을 확인하였다.

하선영. 그녀 역시도 테일러 나인과는 다른 또다른 문제점을 앓고 있었다.

무림인 삼천 명가량이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으면서 SS랭크 이상의 힘을 보유한 무림인들의 존재가치가 급격히 상승하였는데, 그 숫자가 무려 20명이라는 점!

전 세계적으로 SS랭크의 초능력자가 단 37명뿐이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고작 하나의 단체에서 SS랭크의 초능력자를 20명 가까이 보유했다는 건 큰 논란거리가 될만한 문제였다. 허나, 이미 무림맹은 정식으로 인정을 받은 상황. 섣불리 건드릴 수가 없었으므로, 타겟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타겟의 대상은 다름아닌 무림맹의 외부에서 활동하는 하선영.

어나더 리그가 급격한 성장세를 보이고는 있다지만 아직까지는 규모가 세계적인 수준은 되지 않는 탓에, 여기저기서 그녀를 자꾸만 찔러보고 있었다.

헌터 협회에서는 무림인들에게 제약을 걸기 위해 하선영을 이용하려고 하기도 했으며, 기업이나 길드에서 거액의 돈을 차출하여 하선영을 빼가려는 시도도 있었으니까.

물론, 하선영은 죄다 무시로 일관해버렸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들에게 쉽사리 밉보일 수 없던 탓에 그 사이에 껴서 고생하는 건 죄다 예카테리나의 몫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 서담이 그 친구 자리 비운댔나?”

“그럴걸.”

“으흐흐흐, 우리 헬로니가 길드 아지트에 방문하고 싶다는데?”

“엥? 그 새끼 또 뺀질거리네.”

“후우···.”

그녀의 고생을 아는지 모르는지, 테일러와 하선영은 태평해 보였지만 말이다.

필수적인 메일은 거의 다 체크했다 싶어 슬슬 업무를 시작하려던 예카테리나는 문득, 1분 전에 착신된 메일을 확인하였다.

[국제 이상현상 협회: 마법사 유서담께 최근 세계 각지에서 발생하는 ‘초자연적 현상’에 대하여 문의를 드리고 싶습니다.]

그것은 어나더 리그의 길드 마스터 유서담도, 헌터 유서담도 아닌.

마법사 유서담에게 온 메일이었다.

*

[기울어진 도깨비들의 도원]

서담이 위치한 이곳은 이공간. 정령들의 공중정원과 마찬가지로,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출입조차 불가능한 아주 특별한 이공간이었다.

아직 완전히 멸망하지 않은 탓일까, 하늘에는 노을이 지고 있었다. 퍽 아름다워 보일 수 있으나, 세상의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니 마음 놓고 볼 수는 없다.

-쿠오오오오오······!!

SS+랭크의 대괴수이자 도깨비왕 ‘망량(魍魎)’이 세상이 찢어져라 비명을 질렀다. 이미 멸망하기 직전의 세계, 이성조차 잃은 채 그저 파괴만을 일삼는 도깨비들에게 남은 것은 ‘승부욕’밖에 없었으니, 신 무림맹의 맹주이자 현경의 고수인 설중연은 그런 그의 상대가 되기에 아주 충분했다.

“···멋있네요.”

서담의 바로 옆에서 고급 캠을 들고서 전투 현황을 촬영하던 신혜지가 그리 중얼거렸다.

“그리고, 또 아름답구요.”

확실히 그녀가 넋을 놓고 보는 것도 이해는 갔다.

기울어진 도깨비들의 도원은 온통 새하얀 색을 띄고 있었는데, 노을지는 배경에 맞춰 마치 온 세상이 금으로 뒤덮인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것은 썩 설중연의 머리칼과 잘 어울렸는데 심지어 이 세계에는 ‘벚꽃’과도 비슷한 물체가 사방에 한가득이었다.

그것들 또한 도깨비의 일종이었으나, 안타깝게도 영혼을 가지지 못해 그저 사물이 되어버린 것들. 즉, 죽어버린 도깨비들은 여전히 이 땅에 자신의 흔적을 남겨 마치 벚꽃처럼, 혹은 연꽂처럼 세상을 아름답게 꽃피우고 있었다.

도깨비들의 도원은 무려 중국 땅의 1/4 정도나 되는 크기를 가졌으며, 또한 SS랭크의 도깨비왕이 세 개체나 있었으나 자신들만의 ‘중원 무림’을 애타게 갈구하던 무림인들은 고작 몇 개월만에 이 땅을 완전히 점령하는 데에 성공하였다.

퉁, 쿠웅···!

마치 산만큼이나 거대한 형체를 가진 망량이 쓰러지고, 그 시체의 위에 흰색 한국풍 무복을 입은 설중연이 올라서자, 모든 무림인들이 그녀의 별호를 외치며 환호했다.

그래, 다 좋았다. 아름다운 전투 끝에 일궈낸 승리! 확실히 충분히 임팩트는 있었으나······.

신혜지의 입장에서는 뭔가, 뭔가가 부족했던 모양이다.

‘좀 더! 좀 더요!’

그녀가 손짓 발짓을 해가며 신호를 보내자 저 멀찍이서도 그것을 알아들은 설중연이 표정을 살짝 굳혔다.

최근, 신혜지는 설중연의 이름으로 SNS와 YTUBE 활동을 시작했기 때문. 물론 내용은 별거 없고 그녀가 가끔 전투하는 영상을 찍어서 올릴 뿐이지만··· 그 반응이 굉장히 폭발적인 탓에 구독자는 단기간에 500만명을 넘어갔으며 지금도 실시간으로 쭉쭉 상승하였고 SNS의 팔로워는 벌써 3천만명이 넘어갔다.

설중연은 자신의 얼굴이 마치 연예인처럼 세상에 공개되는 것을 꺼려했으나, 신혜지는 “맹주님의 ‘위엄’을 ‘멀티 미디어’로 세상에 당당히 공표하여 무림맹의 힘을 ‘과시’하는 행위.”라며 설득하였다.

하는 수 없이 설중연은 신혜지의 등쌀을 이기지 못해 뭔가 ‘과시’할만한 것을 찾았고.

‘오, 마침 좋은게 있구나.’

희미하게 미소를 짓고서는, 대뜸 도깨비왕 망량의 잘려나간 목을 번쩍 하늘 높이 들어올렸다!

“와아아아아!!!”

“천마지존 만세!”

“신 무림맹을 위하여!”

죽은 도깨비왕의 모가지가 피를 뚝뚝 흘리며 흰색의 아름다운 배경을 수놓기 시작하자 모든 무림인들이 환호성을 내질렀고.

“으아아! 안 돼요!”

반대로, 신혜지는 절규를 내지르며 카메라를 가렸다.

아무래도 설중연이 SNS에 적응하려면 상당한 시간이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 배터리 충전!(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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