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터리 충전!(1) >
아라셀리는 유서담이 사라진 자리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의 몸에 자신의 흔적을 선명하게 새겨두었고, 이제 그것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비록 지금은······. 유서담이 너무 멀리 가버리는 바람에 신호가 잡히지 않고 있지만, 그가 또다시 차원이동을 한다면 반드시 자신에게 알람이 올 터.
‘···그때까지, 마력을 충분히 보충해야 해.’
그렇게 결심하며 자리에서 일어서자, 어느덧 가까이 다가온 황녀 류혜이안이 말을 걸어왔다.
“그대는 다른 세계에서 온 마법사라고 했던가.”
“으음, 아마도요?”
“아까 봤을 때보다 나이가 상당히 들어보이는군.”
열넷에 불과했던 방금까지와는 달리, 지금은 나이를 특정짓기 어려운 오묘하고도 신비로운 외모를 하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성숙했다는 점을 알 수 있을 뿐.
‘교수님이 시간의 파편 충돌 현상을 일시적으로 완화해주신 건가······. 어떻게 하신 거지?’
아주 일시적인 효과일 뿐이지만 최소한 플레이딘 대륙에서만큼은 어린 외모 탓에 고생을 할일은 없어 보였다.
“그대는······ 곧바로 떠나는가?”
잠시 고민하던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요. 교수님의 위치가 불확정적이거든요. 마력을 회복해야 하기도 하고······.”
“마침 잘 됐군. 그럼, 당분간은 우리 제국에서 일해볼 생각 없나? 듣자하니 상당한 수준의 마법적 지식을 갖추고 있다고 들었네만. ···이제부터 플레이어 독점 체제를 대륙인들의 힘으로 이겨내기 위해서는, 상당한 ‘힘’이 필요해. 그리고 그대에게는 그럴만한 지식이 있지.”
아라셀리는 류혜이안의 눈빛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현자가 된 이후로, 그녀는 그저 사람과 눈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상대가 선인인지, 혹은 악인인지에 대해 구분지을 수 있게 되었다. 물론 대략적으로 아는 것뿐이고 정확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눈앞의 저 여인이 가진, 자국민을 위하는 그 정의로운 마음이 거짓이 아니란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좋아요. 대신, 조건이 두 가지 있어요.”
그중 첫 번째.
“플레이딘 대륙이 어느 정도 플레이어 독점 체제를 벗어나게 되면······. 최악의 악인으로 역사에 남을 뻔한 ‘유서담’의 이야기를 세상에 제대로 공개해주세요.”
“······그러한가.”
류혜이안도 알고는 있다. 유서담이라는 사내가 저지른 악행이, 사실은 선행에 가까웠다는 사실을.
그러나 ‘악인 유서담’ 덕분에 제국이 플레이어들을 탄압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그를 다시 영웅으로 치켜세우는 건 굉장히 모순적이고 또 고된 일이 될 것이다.
하지만, 힘들다고 해서 거절하기엔 눈앞의 저 신비로운 여인이 너무나도 아쉬웠다.
“우리도 마침 거짓 용사가 사라져서 추앙받을 만한 영웅이 필요했던 참이지. 그런 부탁쯤이야 어렵지도 않다.”
“좋아요.”
“그럼 두 번째 조건은 뭐지?”
그에 아라셀리는 빙그레 미소지으며 답했다.
“밥 좀 주세요. 메뉴는 토마토 베이컨 샌드위치에 치즈 호떡, 그리고 만두 없는 떡국이요.”
그것은 비비안타 아카데미에서 쫄쫄 굶을 뻔한 자신에게 유서담 교수가 주었던 것과 정확히 동일한 메뉴였다.
*
[원래의 세계로 귀환합니다.]
[세계의 시간배속이 정상화되었습니다.]
무중력에 들어선 듯, 붕 뜬 느낌과 함께.
풀썩! 등이 침대로 안착한다.
“어···.”
여전히 등을 축축하게 적시는 식은땀.
<서담. 방금 그게 얼마나 위험한 짓인 줄 아십니까?>
<그 순간적인 판단 때문에 수명을 1년 넘게 소모하였습니다.>
“아······ 그러냐.”
<그렇게 담백하게 답하실 문제가 아니란 말입니다. 후우···.>
“미안. 다음부터는 안 그럴게.”
손으로 이마를 짚고, 방금 보았던 소녀를 떠올린다.
틀림없이 그 아이는 ‘아라셀리 라인칼’로서, 비비안타 아카데미에서 만났던 소녀가 틀림없었다. 훗날 대마법사가 되어 세상을 구할 운명이었던 바로 그 마법사 말이다.
“···대체 어떻게 차원을 건너온 거지?”
<차원이동이라는 게······. 사실은 그렇게 드문 일도 아닙니다. 과학적, 마법적인 기술력으로 따졌을 때는 불가능에 가깝다고 봐도 좋습니다만 이 세상은 구멍이 송송 뚫려있으니 말이죠. 영웅의 자질을 타고난 자라면 그 구멍을 얼마든지 뚫고 이동할 수도 있다는 말이 됩니다.>
실제로, 세상의 개연성을 받은 주인공들은 차원이동을 밥 먹듯이 했으며 유서담 또한 그들의 개연성을 역으로 이용하여 차원 여행을 했으니까.
“그럼, 진짜로 나를 찾겠다고 차원이동을 하고 있다고? 아니, 근데 거기 시간배속 2~3배 아니었어? 이제 고작 3년 지난 거 아냐?”
<서담 헌터께서 지구에만 계셨다면 모를까, 수많은 세계를 다녀오면서 시간 배율이 상당히 비틀린 상태입니다. 심지어 몇 번은 직접 시간에 간섭하기도 하셨으니까요.>
“그러냐······.”
정말 깜짝 놀랐다. 그 자신감 없이 축 늘어져 있던 천재 소녀를 다시 만나게 될 줄은 몰랐으니까. 나는 천천히 입술을 어루만졌다. 입안으로 들어왔던 분홍색의 부드러운 무언가와 타액까지, 아직도 그 선명한 감각이 잊혀지질 않았다.
그 매사에 기운 없이 조용히 다니던 아이가 맞나 싶을 정도로 지나치게 적극적이여서 당황스럽기까지 하다.
“설마, 지구까지 찾아오려나?”
<그녀가 가진 기술을 보았을 때, 현재로서는 불가능한 것으로 보입니다. 현재 그녀는 ‘시간배율 안정화’조차 하지 못하는 채였으니까요.>
“···그러냐? 새삼 너 대단하네.”
잠시 고민해본다.
아라셀리와의 조우. 처음에는 많이 당황스러웠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그렇게 나쁜 일은 아니었다. 솔직히 말해서 이번 임무를 수행하면서 의문스러웠던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는데, 알고보니 그녀가 도와준 것이라면?
‘카오스 플레이어 놈들이 집단으로 몰려오고, 하이라이트로 제국군의 합류까지······.’
아무래도 아라셀리는 진작 내 존재를 눈치채고, 나를 돕기 위해 그만한 병력을 자신만의 방법으로 움직였으리라.
결국, 그녀의 도움 덕분에 절반 정도의 확률밖에 되지 않았던 주인공 사냥이 가뿐히 성공해버린 것이다.
“다음에 또 만날 확률은··· 있나?”
<네. 그녀가 당신의 몸에 좌표를 새겨두었습니다. ···이런 말 하기는 좀 그렇지만, 아마 세상 끝까지 도망쳐도 당신은 그녀에게서 벗어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냐? 그건 좀 무섭네.”
어쩐지 싱숭생숭한 마음을 진정한 뒤, 사냥을 끝내고 나온 보상을 확인하였다.
[수명을 1750일 얻었습니다.]
[당신의 수명: 6800일 7시간 18분]
[레벨이 5단계 상승합니다.]
[재능 ‘원기 SS+’를 흡수하였습니다.]
<유서담>
[도합 레벨: 145]
*능력치
[근력 142] [체력 155] [민첩 143]
[기력 1] [마력 200]
*재능
[검술 S] [사냥 D+] [사격 C]
[요리 D-] [직감 A] [기민 A]
[통찰 B] [원기 SS+][기타···.]
*스킬
[주인공 사냥꾼 Lv. 4]
[백색검법(S)]
[육감(C)]
[아라-선영 식 마나 써클링(SS+)]
[백색 마녀의 도서관(E)]
[인벤토리(S)]
[달마풍천신법(SS+)]
[정신 집중(S+)]
레벨이 150을 달성하지 못한 것은 아쉬웠으나, 수명을 대폭 얻을 수 있었기에 꽤 괜찮은 소득이었다. 차원문을 고작 몇 초 정도 찢었을 뿐인데 잃어버린 360일의 수명을 충분히 커버하고도 남는 양이었다.
그런데, 능력치가 조금 이상하다.
“체력이··· 레벨을 초과했네? 마력도 급상승했고.”
<재능 ‘원기(元氣)’의 효과로 보이는군요.>
“원기?”
<정기, 활력, 정력 다양한 말로 쓰이지만 결국 만물의 근본이 되는 에너지라고 보시면 됩니다. 아마 눈에 보이는 능력치 외에도, 신체 내적으로도 상당한 변화가 있으리라 추측됩니다.>
“오······.”
S랭크의 기준은 150. 현재 나는 145밖에 안 돼서 S랭크에 약간 못미치는 수준이다. 그런데, 원기의 효과로 인해 체력 하나만큼은 무려 S랭크에 육박했으며 마력량은 SS랭크 수준이었다.
무려 7써클 혹은 3갑자 이상의 마력이라는 의미!
비록 마법은 1클래스도 간신히 쓰는 수준이었지만 말이다.
어쩐지 몸에 활기가 솟구치더라니. 일전에 얻은 스킬처럼 막 엄청 사기성을 띠고 있지는 않았지만 신체 자체의 스펙을 향상시켜 준다니 썩 괜찮았다.
“그럼······.”
능력치를 확인했으니, 건져온 아이템을 확인할 차례였다.
그간 페루티우스와 함께 활동하면서 얻은 자잘한 유니크, 에픽 등급의 아이템과 히어로 등급의 부츠를 제외하고서도 나는 무려 3개의 히어로 등급 아이템을 더 건져올 수 있었다.
갑옷으로는 <찬란한 ‘광휘의 계절’의 맹세 +5>를, 무기로는 <황혼이 지는 ‘빛을 잃은 샛별’의 어스름 +5>를, 그리고 이너아머 <새벽의 죽음>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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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란한 ‘광휘의 계절’의 맹세 +5>
등급: 히어로
*제한
레벨 150↑
근력 165↑
*효과
방어력 +500BP
빛 속성 대항력 +125
암흑 속성 대항력 -25
빛 속성 효율 +85
*접두 부여 옵션
찬란한: 빛 속성 방벽 계열 스킬의 방어력 1500BP 증가.
*접미 부여 옵션
맹세: 빛 속성 방벽 계열 스킬의 지속시간 2배 증가.
*특수 스킬
광휘의 방벽: 10초 동안 지름 5m 범위의 방벽을 생성. 방어력 +3000BP
*빛의 물질로 만들어진 갑주. 상당히 가벼우나 굉장히 튼튼합니다! 빛 속성을 가진 생명체들이 착용자에게 아주 살짝 호감을 가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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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려 빛의 물질로 만든 갑주란다. 확실히 입어보니, 갑옷이라길래 엄청 두껍고 답답할 줄 알았지만 실상은 그냥 코트에 스웨터를 걸친 정도의 느낌이었다. 흰색을 바탕으로 하여 금색의 문양이 새겨져 있어, 꽤 멋스러운 면이 있었다.
게다가 ‘광휘의 방벽’이라는 스킬은 순간적으로 나와 내 주변 모두를 보호할 수 있는 스킬로 보였는데, 마력이 부족하거나 마법을 사용할 수 없는 순간에 사용하면 꽤 좋아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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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혼이 지는 ‘빛을 잃은 샛별’의 어스름 +5>
등급: 히어로
*제한
레벨 150↑
근력 150↑
민첩 125↑
*효과
공격력 +480AP
악 속성 효율 +300
방어 관통력 +27%
*접두 부여 옵션
황혼이 지는: 공격한 적의 회복을 저하시킨다.
*접미 부여 옵션
어스름: 공격한 적의 방어율을 5% 추가로 무시한다.
*특수 스킬
혈류흡공(血流吸功): 적을 벨 때마다 에너지를 일부 흡수한다.
*저주를 받았다고 알려진 검. 적을 베어낼 때마다, 그 힘을 흡수하며 적의 회복력을 저하시킨다. 악(惡) 성향을 띠고 있어, 사용자가 미쳐버린다는 소문이 돈다.
━
용사가 들고 있었다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악’의 성향이 강한 검. 공격력 포인트(AP)가 어지간한 에테르 디스펜서 장인이 만들어낸 수치(400)을 가뿐히 초과하였다. 이 정도면 지구상에 존재하는 명검 TOP10 안에 가볍게 들어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그러한 명검들을 내가 직접 본 적은 없어서 확신할 수 없지만.
거기에, 이 무기에는 치명적인 결함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사용자가 미쳐버릴 수도 있다는 점. 하지만······.
[정신 집중(S+)가 아이템의 효과에 저항합니다.]
나에게는 그에 대항할 수 있는 스킬이 있다는 것. 마음대로 휘둘러도 전혀 문제가 없었다.
━
<새벽의 죽음>
등급: 히어로
*제한
없음
*효과
방어력 +50AP
*접두 부여 옵션
없음
*접미 부여 옵션
없음
*특수 스킬
죽음의 거부: 착용자가 위기에 처했을 경우, 1000BP의 방어력을 가진 ‘어둠’이 5분 동안 피부를 덮는다. 해당 스킬은 지속시간 내내 BP와 사용자의 상처를 급속도로 회복하나, 사용이 해제될 경우 사용자에게 극심한 피로를 안겨주며 수명을 급격히 감소시킨다.
━
마지막으로, ‘이너아머’였다. 이너아머란 기본적으로 갑옷의 내부에 입는 것으로서, 보조적인 성향이 강했다. 그런데 이 이너아머는 방어력이 히어로 등급치고 방어력이 터무니없이 낮았는데······, 위기 상황에 진면목이 발동된다는 것이 중요했다.
어지간한 레전더리 등급조차 가볍게 뺨치는 1000BP의 방어력이 무려 5분이나 지속되는 것에도 모자라, 심지어 체력까지 회복된다는 점! 안타깝게도 이 스킬을 사용할 경우 수명이 급격히 줄어드는 탓인지 용사 페루티우스는 이것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다르다. 여차할 때 수명을 대가로 목숨을 건질 수 있다면······. 언제든 다시 수명을 벌 수 있었으니까.
게다가 제한도 없었으므로 즉시 착용하는 게 가능했다.
“으음···.”
새벽의 죽음은 흡사, ‘쫄쫄이’를 연상케하는 오묘한 물체였다. 아니면 액체라던가. 몸에 착 달라붙는 것은 좋았으나 상당히 민망하다는 게 문제. ‘비활성화’를 해놓을 경우 가슴팍으로 검은색 덩어리가 집중되어 평상시에는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 다행이다.
어쨌거나, 결과적으로 참 만족스러운 아이템 파밍이었다. 이것들을 다 돈으로 환산한다면 족히 수십억은 나올 테니까.
“몇몇 에픽 악세서리는 선물로 나눠주면 되겠고······.”
시간을 확인해본다. 그곳에서는 무려 반년을 보냈으나, 이곳에서는 열흘도 채 지나지 않았다. 물론 이제 슬슬 나도 길드 마스터이기에 일주일 이상의 공백은 상당히 치명적일 수 있었으니 서둘러 확인해봐야 한다.
메신저 프로필에서 ‘파견’을 지운 뒤 와있던 연락을 확인한다.
그런데.
“으음?”
어째서인지, 검도 협회의 ‘달인’들에게서 온 문자 메시지가 상당히 많았다. 그뿐이랴, 세계 각지의 수학자 및 과학자들에게서 온 연락도 상당했는데 대부분이 ‘무공’ 아니면 ‘마법’에 대한 내용이었다.
“이건······.”
나는 서둘러 옷을 정장으로 갈아입은 뒤 펜션을 나섰다. 아무래도 길드 아지트로 가봐야 될 것 같다.
*
서담이 길드 아지트에 도착하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정령들의 정원을 지나 드높은 백색의 건물로 들어서자, 산더미처럼 쌓인 서류 더미의 한가운데서 예카테리나가 그를 반겨주었다.
“어? 서담님 오셨어요?”
“···이게 다 뭐야?”
“네? 서담님이 파견 나가시기 전에 지시하셨잖아요. 혹시 달인 협회에서 연락이 오면 잘 대화해보시라고······. 그래서 이것저것 하다보니, 이래저래 됐네요.”
“허.”
그러고 보면 파견 나가기 전에 몇몇 인수인계 사항을 지시하긴 했었다. 검의 달인들과는 꾸준히 연락을 취하고 있었고, 언제고 현대식으로 개조한 ‘대괴수용 무공’을 전수할 의향이 있었으니까.
그런데, 이 정도의 수준까지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서담이었다.
“찾아오고 싶다는 몇몇 달인분들을 데려왔거든요. 서담님께서 말씀하신 간단한 검증은 끝났고, 하선영 언니가 가르치고 있어요. 아, 그리고 마법을 배우고 싶다는 몇몇 학자분들께서도 찾아오셨어요. 일단은 러시아에 마법을 귀속한 모리안 길드에 밀리지 않으려면 저희도 마법을 이용한 대외적인 활동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조만간 마법에 대해 공표할 생각이에요.”
“와···. 그, 그래?”
서담이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정원에는 거대한 체육관 같은 것이 세워져 있었다. 만드는 건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정령들을 굴리면 금방이니까. 거기에는 하선영이 예사혜를 포함한 검의 달인들에게 무공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예사혜라는 분의 도움이 참 커요. 저분, 엄청 똑똑하시더라구요.”
“어떤 점이?”
“하선영 언니가 무공은 참 잘 쓰시는데······. 솔직히 가르치는 쪽이 영······. 그렇잖아요?”
“······.”
서담도 안다. 그녀에게 무공 한 구절 배워보겠다고 머리통 다 찢어지는 줄 알았던 그때의 그 경험이 아직도 선명하게 뇌리에 박혀있었으니까.
“그런데, 예사혜 씨가 그것들을 모두 현대 스타일로 깔끔하게 정형화했어요. 누가 보더라도 이해가 되기 쉽도록요. 저도 검을 잡아본 적은 없지만 대충 원리는 알 수 있을 정도였어요.”
“대단하네.”
그 하선영의 말을 누구라도 이해할 수 있도록 깔끔하게 해석했다고?
서담은 혀를 내둘렀다. 그건 이미 천재의 수준을 넘어선, ‘외계어 번역가’라고 불러도 좋다.
“······월급을 늘려줘야겠는데.”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나는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길드가 오히려 더 잘 굴러가잖아······?’
고작 일주일이 조금 넘는 사이에 예카테리나가 길드를 대체 어떻게 굴려먹은 건지 감히 파악하는 것도 힘들 정도였다. 게다가 그녀는 그 사이에 자신이 모르는 한국의 법률까지 공부했는지, 책상 위에는 법률이 빼곡히 적힌 노트북이 펼쳐져 있었다.
“넌···. 진짜 최고야. 여러모로.”
“후후, 그런가요? 저도 제 입맛대로 길드 굴릴 수 있어서 그런지 상당히 재미있네요. 아, 혹시 저 위에 마도공학 시설을 설비해도 될까요? 예산이 조금, 조오금···. 아니, 많이 드는데···. 마법 실험을 개인적으로 해보고 싶어서요.”
“말만 해. 내 장기까지 팔아서 지어줄게.”
“아, 아뇨. 그 정도까지는 괜찮아요.”
예카테리나는 부드럽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서담에게 다가갔다. 어쩐지 상당히 피로한 듯, 다크 서클이 짙게 내려앉아 있었는데 그녀는 살짝 머뭇거리며 조심스레 이야기를 꺼냈다.
“그, 저 슬슬 ‘배터리 충전’ 해야되거든요······.”
“배터리? 무슨 소리야?”
“그···. 으음. 제 영혼을 서담님이 가지고 계셔서, 저는 제 스스로 정기를 회복할 수 없거든요. 서담님을 통해서 받아야 하는데······. 이미 몇 개월 전부터 정기가 바닥을 드러낸 상태라서······.”
“뭐야, 그랬어?”
그의 말에 예카테리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다못해 스마트폰도 제때 배터리 충전하시면서, 저를 굴리실 땐 그것도 안 해주시나요? 저는 서담님한테 완전히 귀속된 몸이라는 걸 상기하실 필요가 있어요.”
그러면서 예카테리나는 내게 훌쩍 다가와,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양손을 내뻗었다.
‘괜찮아. 저번에 겪어봤으니까, 이번엔 참을 수 있어.’
일전에 겪었던 그 아찔한 쾌락을 기억한다. 그때는 처음 느껴보는 감각이었기에 당황하였지만, 이번만큼은 다르다. 입을 꾹 다물고,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서, 가슴에 천천히 손을 얹으면······.
“읏, 흐윽?!”
···풀썩,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뭐, 뭐야? 무슨, 일이···?’
마치 고압전류에 감전이 된 것 같은 아찔한 감각이 온몸을 휩쓸고 지나갔다. 예카테리나는 자신이 주저앉았다는 사실조차 한참이 지난 뒤에야 눈치챌 수 있었다.
“또 왜 그래?”
“···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니신 거예요?”
확실하다.
이건 자신이 적응을 하지 못한 탓이 아니다.
그저, 단순히, 유서담의 정기가 지나치게 강력해진 탓에 자신에게 흘러 들어오는 양 또한 그만큼 많아진 것이다!
이제는 손을 대는 것조차 두려울 지경이었다. 하지만, 손을 대지 않으면 자신의 정기는 그대로 바닥을 드러내어 쓰러질지도 모르는 상황.
‘아니야, 그래도, 이, 이건 아니야. 이건 진짜······.’
그러나 유서담이 바닥에 쓰러진 예카테리나를 가만히 내버려 둘 리는 만무.
‘아······.’
그가 자신을 안아 들기 위해 손을 뻗자, 그녀는 창백해진 표정으로 그 양팔을 바라보다가 눈을 꼭 감았다.
‘···난 이제 끝이야.’
< 배터리 충전!(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