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차원 유랑자 그녀, 아라셀리(4) >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어째서 이렇게 되어버린 걸까.
페루티우스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자신에게 달려드는 수천 명의 카오스 플레이어를 바라보았다.
‘의적 유길동을 받아들인 일? 그가 사실 죽은 게 아니며, 배신하고 도망쳐서 흑룡왕과 손을 잡은 일?’
대체 뭐가 문제일까? 아니, 애초에 유서담이라는 존재가 없었더라면 이런 일이 발생하지는 않았을 텐데.
“죽어라 위선자!”
“영웅 놀이하니까 그렇게 좋더냐!”
검은색의 천둥벼락이 내리꽂히는가 하면 바위가 굴러와 페루티우스의 머리를 짓누르려고 했으며 바닥에서는 불꽃의 채찍이 휘감겼고 땅이 움푹 꺼지며 온통 강철로 이루어진 가시가 솟구치기도 했다.
페루티우스와 동료들은 버티고, 또 버텼다.
그들의 수준은 이미 숨어서 지낼 수밖에 없는 카오스 플레이어들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을 정도로 강해진 채였으니까.
모든 동료가 온갖 레전더리 장비로 무장한 것은 기본이었으며, 무기 또한 최소한 7강 이상의 히어로 등급이었다. 거기에 페루티우스는 무려 11강의 레전더리 성검에 레벨 또한 급격히 올라서 175를 찍었으니 가히 최상위권의 플레이어라고 불러도 좋았다.
심지어 거기에, ‘주인공 보정’이 따른다.
“죽어라, 네 목을-커헉!”
암살자 클래스가 정확한 타이밍에 페루티우스의 목을 치려는 순간, 재수도 없게 옆에서 날아든 궁수의 화살에 맞아 절명하였고.
“네놈! 힘싸움으로는 내게 이길 수- 으윽?! 갑자기 팔에 쥐가!”
근력에 투자를 한 플레이어가 힘으로 그를 짓누르려는 순간 쥐가 나서 쓰러지기도 했으며.
“죽어라! 루나틱 블레이드 머신-뜨헉!”
퍼퍼펑!!
무려 30분이나 기를 모아 절체절명의 순간에 필살기를 날리려던 카오스 플레이어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 아군과 함께 자멸하기도 했다.
그렇다.
페루티우스는 운수가 좋았고, 그건 곧 자신의 주변 모든 사람들이 재수가 없어진다는 말과도 같았다.
그러나 운이 아무리 좋다고 하더라도 상대가 너무 많았다. 제아무리 페루티우스와 그 동료들이라도 수천 명을 모조리 상대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커헉! 용사! 너만은 살아야 한다···!”
“으으윽! 용사님, 죄송해요···.”
“미안하다, 용사. 더 이상은 버틸 수가······.”
동료들 또한 한 명씩, 한 명씩 쓰러져갔다.
-용사님······.
베고, 부수고, 박살내고, 처단한다. 그러나 한 명을 죽이면 두 명의 카오스 플레이어가 그 자리를 메웠으며, 세 명을 죽이면 다섯 명의 카오스 플레이어가 그 자리를 메웠다.
-제 마지막 힘을, 쏟아내세요!
“으아아아아······!!”
[주인공 페루티우스가 아이템 스킬 ‘리아트의 가호’를 발동합니다.]
쿠웅······!!
빛의 장막이 페루티우스를 중심으로 시작하여 사방에 퍼져나간다. 순식간에 대지가 둥그렇게 움푹 파였으며, 빛의 장막에 닿은 이들은 모조리 소멸해버렸다. 그러나, 여전히 천 명이 넘는 카오스 플레이어가 살아있었고 그들은 여전히 분노하고 있었다.
그건 꽤, 처절한 싸움이었다.
세상이 고요해진 것만 같은 전장에서, 페루티우스는 홀로 맞서 싸워야만 했다.
‘나는 용사다.’
빛의 성검 리아트에게 선택받은 용사.
10년을 수련한 검객보다 1달을 수련한 자신이 더 강했다.
남들은 평생을 걸쳐서 찾아야만 했던 것도 자신은 단 하루만에 찾을 수 있었다.
누구는 뼈 빠지게 노력해서 얻은 것을 자신은 한 번에 얻을 수 있었으며.
그 누구도 할 수 없던 것을 자신이 하면 손쉽게 해결되었다.
노력하지 않아도 좋았다. 아니, 애초에 ‘성검’을 얻기 이전부터 자신은 그다지 노력을 해오지 않았던 것 같다. 애당초 자신은 용사가 될 운명이었으니 그럴 필요가 없던 것이다.
‘그래, 나는 용사다.’
이런 위기 상황조차도, 결국 용사로서 자신에게 내려진 시련.
그렇다면 ‘평소처럼’ 극복하면 되는 일이었다.
“···리아트! 그걸 하자!”
-요, 용사님?
“아이템 강화를 시도하겠어. 저열한 카오스 플레이어 놈들을 이 자리에서 모두 척살한다!”
-잠시만요! 저는 ‘흑룡왕’을 상대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성검! 같은 플레이어를 상대로는 크게 힘을 발휘할 수 없어요!
“괜찮아!”
성검 리아트를 치켜들며, 페루티우스는 이를 악물고서 내뱉듯이 말했다.
“나는, 용사니까! 할 수 있어!”
주인공 페루티우스에게 발생한 ‘위기’. 그것은 아주 크나큰 개연성이었으며, 모든 개연성은 곧 행운으로 치환되었다.
그러나.
부족했다.
이 위기 상황은 ‘흑룡왕’에 의해 발생하지 않아 개연성이 턱없이 부족했으며, 심지어 지금껏 격렬하게 사투를 벌이느라 너무나도 많은 개연성을 소모하고 만 것이다.
일대일의 결투에서는 많은 개연성(행운) 소모하지 않는다. 그래서, 여태 페루티우스는 흑룡왕의 간부를 만나며 위기에 처할 때마다 100%의 확률로 강화에 성공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강화 확률 19.71%]
처참하게 떨어진 강화 확률. 유서담의 눈에는 그것이 똑똑히 보였다.
‘아직도 더럽게 높은 확률이군.’
저 정도도 미친 수준인 건 틀림없었다. 100%는 아니라지만, 무려 20%에 가까운 수준이라니. 이 일대에 있는 모든 개연성을 모조리 흡수한 결과가 바로 저것이다!
‘20%의 확률로 내가 질 수도 있다는 말이니까.’
그렇게는 둘 수 없다.
유서담은 인벤토리에서 메가 슈터를 꺼내들었다.
천둥소리와 함께 적을 죽인다고 하여, ‘천둥의 암살자’라는 유치한 별명으로 불릴 수 있도록 해준 무기이자 플레이딘 대륙을 자유로이 활보하며 주요 인물을 암살할 수 있도록 도와준 1등 공신이기도 한 메가 슈터.
그는 천천히 메가 슈터에 저격용 탄환을 장전하였다.
그냥 평범한 탄환이 아니었다. 마법을 덕지덕지 인챈트하여, 저격만으로도 어지간한 D~C랭크 수준의 초능력자는 단 한 발으로도 침묵시킬 수 있었으며 B~A랭크 수준의 초능력자에게도 꽤 큰 치명상을 입힐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거기에 대용량의 마력을 투입하여 효과를 더욱 끌어올린다.
평소 같았다면 화분이 ‘마녀는 멍청이’라며 딴지를 걸었을지도 모르겠다. 왜냐, 저격을 하겠다는 놈이 마력을 힘껏 끌어올리면 어지간한 S랭크의 초능력자는 잠을 자다가도 피할 수 있을 정도로 너무나도 뻔한 공격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저격이라는 것의 이점이 사라진다.
하지만 상대방이 무방비하다면?
결코 공격을 피할 수 없는 상태라면?
“너를 믿는 나를 믿어! 리아트!”
-요, 용사님!
마침내, 페루티우스가 온 세상이 떠나가라 사자후를 내뱉었다.
“아이템 강화!”
[주인공 페루티우스가 스킬 ‘아이템 강화(-)’를 사용합니다.]
[사건에 의한 개연성이 응집됩니다.]
그 외침이, 세상에 울려 퍼지며 찬란한 빛무리가 성검 리아트를 향해 집중된 그때!
···타앙!!
어지간한 초능력자조차 단번에 절명 시켜버릴 강력한 탄환이 페루티우스의 머리를 향해 발사되었고.
[···주인공 페루티우스에게 위기가 발생합니다!]
[주인공 페루티우스가 개연성을 행운으로 대량 치환합니다!]
쐐액···!
쿠구구구구······!!
순간.
중력이 일그러졌으며, 바람의 흔들림이 뒤틀렸고, 땅이 파였으며, 자전축이 흔들리더니 탄환은 페루티우스를 맞추지 못하고 저 멀리 사라지고 말았다.
이 세상 그 자체가 오로지 페루티우스 한 명만을 위해 움직인 것이다!
“···허억!”
순간, 자신이 죽을 뻔했다는 사실에 페루티우스는 안도하였으나 지금은 그럴 새가 아니었다.
-요, 용사님? 저 몸이 이상해요, 용사님. 용사님···!
갑작스레 성검 리아트가 비명을 내지르기 시작한 것이다.
“리, 리아트! 갑자기 왜 그래!”
-용사님! 당장 강화를 취소··· 아, 아아! 용사님! 안 돼요! 용사님! 용사니이이임!!
[아이템 강화에 실패하였습니다!]
퍼석!
“······어?”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양손 가득 잡히던 신성검 리아트가 사라지고 없었다.
“무, 슨···?”
허망한 눈으로 두손을 내려보는 페루티우스.
“리아트, 리아트? 리아트 대답해. 이건, 이거···. 이건, 이럴 리가 없는···데···?”
자신은 용사다. 그리고, 단 한 번도 강화에서 실패해본 적이 없다. 위기에 처할 때면, 언제나 성검 리아트와 함께 숨겨진 힘을 해방하여, 역경을 물리칠 수 있었는데.
어째서, 실패를······?
믿을 수 없는 현실을 감당하지 못하고서, 페루티우스는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아라셀리의 말이 맞았군. 이 또한 유서담의 계획인가.”
그런 그를 향해, 바로 근처에서 누군가가 말을 걸어왔다.
“어때. 그게 네가 여태 행운 하나 믿고 설치면서, 노력해온 자들을 무시한 결과다.”
페루티우스는 그것이 파시오스의 목소리라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러나,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전부, 죽여버리겠어.”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난 페루티우스는 인벤토리에서 또다른 무기를 꺼냈다. 흰색의 검신에 붉은색의 글자가 새겨진 그 검은 고작 히어로 등급일 뿐이었지만, 적을 베어 넘길 수만 있다면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서담, 그 자식을 죽여버리겠······.”
“그럴 틈이나 있겠나?”
파시오스는 피식 웃으며 그리 말한 뒤, 그대로 모습을 감추었으며.
머지않아 페루티우스는 그 말의 의미를 깨달았다.
두두두두두두···!!
멀리서, 수만 명이 넘는 군대가 진격해오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에 당황한 것은 페루티우스 뿐만이 아니라 카오스 플레이어들도 마찬가지였다.
“무슨···?”
“저, 저게 뭐야!”
“마로돈 제국의 정예 기병대다!”
“젠장.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마로돈 제국의 새하얀 깃발을 휘날리며 정예 병력들이 진격해오기 시작한 것!
어떻게 그들이 이렇게 빨리 찾아왔는지는 모른다.
어떻게 그들이 이 타이밍에 정확히 찾아왔는지, 그 이유는 유서담조차 몰랐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건 하나였다.
“저 카오스 플레이어들을 보라! 용사라 칭송받던 페루티우스를 보라!”
황녀가 플레이어들을 사냥하기 위해 바로 이 자리에 찾아왔다는 사실!
“흑룡왕과 손을 잡고서도, 정녕 네놈들이 영웅이라 불릴 자격이 있는가!”
“그, 그건 오해다! 나는 흑룡왕과 손을 잡지 않았다···!”
그래, 상황적으로 보자면 페루티우스는 요르문 성채에게 대응을 하고 있었으니 제국의 아군이라고 칭해도 좋았다. 그러나 이미 황녀는 페루티우스까지 모조리 죽일 생각을 하였으니, 소용 없는 변명이었다.
카오스 플레이어들 또한 억울하다는 외침을 내뱉었다.
“헛소리 마라! 흑룡왕은 구경도 해본 적 없다고!”
“그래! 우린 그저 유서담의 부름을 받아서, 이곳에 모였을 뿐이야!”
“여기에 흑룡왕은 없···!”
그러나 그들이 변명을 하기에 무색하게도, 이미 유서담은 제국군이 찾아온 그 순간 활동을 개시하였다. 본디 ‘에피소드’가 진행되면서 깨어났을, 요르문 성채 지하에 잠들어 있던 흑룡왕의 부하를 깨워버린 것!
쿠오오오···!!
검은색의 고릴라를 닮은 괴수가 내성을 부수며 나타나더니, 온 사방에 흑마력을 내뿜었다.
그리고 그것은 제국군을 분노하게 만들기에는 충분했다.
“그래! 저게 바로 카오스 플레이어들의 추악한 진실이다! 하지만, 겁먹을 것 없다! 바로 나, 류혜이안 마로돈이 함께하니까! 맞서 싸워라! 흑룡왕에게 영혼을 팔아치운 거짓 영웅들을 모조리 죽여라! 우리는 결코 단 한 번도 흑룡왕과의 싸움에서 패배하지 않았다!”
혼란으로 가득 찬 상황이었다.
서로 싸우는 카오스 플레이어, 성채를 부수고 나타난 거대 괴수, 그것을 둘러싼 제국군, 그리고 그 가운데에 위치한 페루티우스.
“하, 하하······.”
제국군과 카오스 플레이어.
그 모두가 자신을 죽이기 위해 몰려오는 그 모습을 보며, 페루티우스는 검을 놓으며 고개를 숙였고.
[175레벨의 주인공을 사냥하였습니다.]
이윽고, 한때 용사라 불리던 자는 수만 명의 인파에 떠밀려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지고 없었다.
전쟁은 길지 않았다.
카오스 플레이어 또한 얼마 지나지 않아 제국군에 의해 완벽히 소탕되었고 흑룡왕의 괴수 또한 제대로 활동을 개시하기도 전에 철저히 무장을 하고서 진격해온 군대에게 버틸 수는 없었다.
“와아아아아아!!”
“우리가 플레이어를 소탕했다!”
“흑룡왕의 괴수를 물리쳤다!”
“황녀 전하 만세!”
“만세!”
모두가 기뻐하는 그때.
‘교수님, 교수님은 어디에?’
아라셀리는 제국군의 보호를 모조리 뿌리친 채 다급히 튀어나왔다.
일전에 마력을 모조리 소진한 탓에, 전장에 직접 나서는 것은 불가능했기에 뒤쪽에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제 싸움은 끝났고, ‘세계의 원천을 비트는 자’ 또한 죽음을 맞이하였다.
결국, 유서담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세상을 지켜낸 것이다.
‘그런데······. 아무도 모르고 있잖아.’
모두가 황녀 류혜이안을, 그리고 마법사 레두룬을 찬양한다.
하지만 아니다. 지금 이 순간 찬양받을 사람은 저들이 아니라, 유서담이란 말이다.
“허억, 헉!”
어려진 신체 탓에 숨이 가파르게 차올랐지만, 결코 질주를 멈추지 않았다.
‘교수님, 대체 어디에······?’
그녀는 피를 토할 기세로 수만 명이 모여있는 전장을 헤집었고.
마침내.
“교수, 님···!”
모두에게 외면받는 전장의 가장 구석진 곳에서, 페루티우스의 시체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 유서담이 시야에 한가득 담겼다.
‘아.’
틀림없다.
새하얀 눈동자는 어색했지만, 그래도 그 얄궂은 눈빛이 어디 가는 건 아니니까. 자신에게는 몇십 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음에도 유서담의 헤어 스타일은 여전했다. 복장은 조금 독특해졌다. 자신이 알던 그 코트가 아닌 강철의 갑옷 같은 것을 입고 있었으니까.
많은 게 바뀌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유서담이었다.
“아아······!”
폐가 찢어질 것 같은 고통을 느끼면서도, 아라셀리는 한 줌밖에 남지 않은 마력까지 모조리 쥐어짜내며 유서담을 향해 달려갔다. 환호성을 내지르는 제국군을 간신히 밀쳐내가며, 그를 향해 손을 내뻗었다.
이제 알 것 같다.
그래, 고작해야 ‘고맙다’라는 인사를 하기 위해 이렇게까지 필사적으로 일평생 차원을 뛰어넘어가며 한 남자를 찾을 리가 없지 않은가.
그를 본 순간 뛰는 심장과 뜨겁게 차오르는 가슴이 그것을 증명하지 않는가.
‘내 마음은, 교수님을 찾는 동안 이렇게 꽃을 피워버린 거구나.’
온 세상이 유서담을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교수, 님···!”
그런데, 그 순간.
갑작스레 공간이 일그러지며, 유서담의 몸이 금색의 빛무리에 휩싸였다.
[10···9···8···]
‘아···?’
직감적으로 아라셀리는 저것의 정체를 알아낼 수 있었다.
자신의 임무를 끝마친 유서담은, 모두에게 외면받으며 그렇게 조용히 떠나가려는 것이다.
자신을 구해주었던 그날처럼.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아, 안 돼!”
그래서 그녀는 소리를 질렀다.
피를 토할 듯이, 온 힘을 다해서.
“안 돼요, 교수님! 떠나지 마세요! 제발, 제가 왔어요! 교수님! 아라셀리가 왔어요!”
[6···5···4···]
그 목소리를 들었는지, 유서담이 고개를 돌렸고.
“뭐······?”
마침내, 푸른색과 흰색의 눈동자가 교차하였다.
“너······.”
“교수님, 제발! 가지 말아요!”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고.
[2···1···0]
유서담의 몸이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아라셀리는 그가 서있던 허공을 움켜쥐며 바닥에 쓰러졌다.
털썩!
“아윽!”
덜덜 떨리는 팔로 바닥을 짚으며, 아라셀리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아, 으으···.”
사라졌다. 흔적조차 남기지 않은 채.
더 이상, 유서담에 관한 것을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그저 그가 서있던 공기만을 손끝으로 훑을 수 있을 뿐, 결국 이번에도 교수님을 잡을 수 없었다.
그 절망감과 상실감에 아라셀리가 고개를 푹 늘어뜨린 그때.
쩌적, 쩌저적···!!
갑작스레, 허공에 금이 가기 시작하더니 누군가의 손이 튀어나왔다.
“어······?”
공간의 균열이 점차 넓어지더니, 이윽고 그것은 성인 남자의 상반신 정도의 크기가 되었다.
<차원에 강제로 균열을 내는 행위는 개연성을 소모합니다!>
<현재 개연성의 잔여량이 전혀 존재하지 않아, ‘수명’을 대신 소모합니다!>
공간을 찢고 나오며, 유서담은 아라셀리와 다시 한 번 눈을 마주하였다.
“······너, 대체 여기에 어떻게 온 거야?”
“교···수님?”
아라셀리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동자를 크게 뜨자, 유서담은 눈살을 찌푸리며 그녀를 향해 손을 뻗어 뺨을 어루만졌다.
“꼬라지는 또 왜 그런 거고?”
“윽!”
그의 손길이 닿는 순간, 시간의 파편에 직격당하여 어려졌던 몸뚱이가 서서히 자라나더니 20대의 신체가 되었다.
“교수님···.”
“그래, 나야. 너 아라셀리 맞지?”
“네, 네! 맞아요. 저, 아라셀리···.”
무얼 말해야 할까. 그녀는 뒤늦게 유서담이 식은땀을 줄줄 흘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
자신은 고작 다른 누군가의 흔적을 쫓아서 차원을 여행할 뿐이었는데, 그는 무려 차원벽 그 자체를 찢고 지금 이 상황을 버티고 있는 것이다. 척 봐도 알 수 있었다. 유서담은 오래 버티지 못한다.
시간이 없다.
빠르게, 하고 싶었던 말을 전해야 한다.
‘고마웠어요. 덕분에, 제 인생이······.’ 이러쿵 저러쿵. 원래는 그런 말을 하려고 왔었다. 그러나 그를 마주한 순간 그런 쓸데없는 헛소리는 쏙 들어가고 사라졌다.
그 대신.
‘내 흔적을 남겨야 해!’
유서담이 어느 세계에 가든, 어느 시간대를 여행하든, 자신이 알아차릴 수 있도록.
그래서 아라셀리는 유서담의 목을 확 끌어안아 그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가져다 대었다.
“윽?”
순식간에 자신의 입속으로 따뜻하고 부드러운 무언가와 함께 마력이 흘러들어오자, 유서담은 저도 모르게 그것을 삼키고 말았다. 이내 입술을 떼어낸 아라셀리는 유서담이 다시금 차원의 저편으로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하자 서둘러서 말을 꺼냈다.
“보고 싶었어요, 정말로 너무너무 보고 싶었어요.”
그녀는 그 어느 때보다도 아름다운 미소를 지으며, 마지막 한 마디를 덧붙였다.
“이제는······ 어디에 가시더라도 반드시 쫓아갈 거예요, 교수님.”
< 차원 유랑자 그녀, 아라셀리(4)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