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지만 지금은 제 아지트죠(2) >
죽은 정령의 공중정원의 전체적인 에너지 파장을 측정해본 결과, S랭크의 던전이라는 결과가 나왔다. S랭크의 던전은 결코 만만치 않다. 최소한 S랭크의 초능력자가 몇 명은 더 필요했으니, 나 혼자 들어간다고 쳐도 100% 무사히 클리어하고 나오리란 보장은 없었다.
다만, 지금은 S+랭크 이상의 실력과 컨트롤을 가진 테일러 나인도 있으며 SS+랭크의 하선영까지 있으니 전혀 문제가 될 게 없었다.
<본래라면 이 세계 또한 지구인들의 기준으로 SS랭크 이상의 출력을 보유하고 있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멸망한 이후 시간이 흘러 에너지를 서서히 상실하여, 지금의 상태가 되었다고 한다. 덕분에 나야 좋다. 어쨌든 더 손쉽게 공중정원을 먹을 수 있었으니까.
“정령을 죽이지는 맙시다.”
“왜? 저거 다 에테르 크리스털 덩어리들이야.”
“환산해봐야 얼마 안 나와. 내 눈에는 마력 덩어리로 보이거든.”
“그래······?”
테일러와 하선영은 여전히 이해하지 못한다는 표정이었지만, 그래도 내 말을 따라주었고 우리는 정령을 죽이지는 않은 채 제압만 하면서 들어갔다. 덕분에 시간이 조금 지체되었지만, 그래도 상처 하나 없이 보스 몬스터로 추정되는 정령여왕인지 정령남왕인지의 앞에 도달하였고.
방망이와 검의 옆면으로 깔끔하게 다져주어, 죽지 않을 정도로만 팼다.
-죽여라! 이 악마같은 놈들아!
공중정원의 정령왕은 다른 정령들과는 다르게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덕분에, 이야기가 잘 통했다.
“이거 받아.”
-이건···?
“계약서다. 이 차원에 에너지를 부여해줄 테니, 네 땅문서를 넘겨.”
-큭, 그건···!
“네 부하들도 살려줄게. 그러니까 앞으로 내 밑에서 일해라.”
-······!
참고로, 내게는 그럴만한 힘이 전혀 없었다.
하지만 의뢰를 완수하며 받은 ‘수명’이 있지 않던가?
[수명 3000일을 차감합니다.]
[공중정원의 정령들에게 생명의 의식 에너지를 부여합니다.]
한때는 하루라도 더 살기 위해 아둥바둥 발버둥을 치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수명을 원할 때 언제든 벌어들일 수 있었고 그것은 곧 내게 있어서 제2의 화폐나 마찬가지였다. 애초에 수중에 있는 돈으로는 몇 평 되지도 않는 아지트밖에 못구할 텐데, 나한테는 상당히 수지타산에 맞는 장사였다.
-어···?
-여기는···.
-저, 정령왕이시여!
공중정원에 잔존하는 정령의 숫자는 총 100명. 사실 이들을 되살릴 필요는 없었지만, 앞으로 ‘인테리어’를 위해 인력이 상당히 필요한 상태여서 어쩔 수 없었다.
정령들이 하나 둘, 정신을 차리기 시작하자 정령왕이 감격한 표정으로 무릎을 꿇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고맙긴 뭘. 이제부터 일해야지.”
생명을 부여해준 덕분일까, 정령들은 내 말을 썩 잘 듣는 편이었다. 그리고 ‘백색 마녀의 도서관’의 도움을 받아 한번 생명을 얻은 정령들의 수명을 연장하는 법 또한 공부할 수 있었다.
[···해당 정령들은 ‘엘리멘탈 스피릿’의 종류로서, 자연 그 자체의 에너지를 받아먹으며 자랍니다. 비가 내리면 빗방울의 정령들이, 천둥벼락이 치면 천둥의 정령들이, 불이 나면 불길의 정령들이 생명 에너지를 얻는···(후략)]
그들의 영양분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자연 활동. 그러나, 세상이 멸망한 이후 공중정원으로 도망친 정령들은 그러한 자연 에너지를 생상할 수 없게 되어서 결국 생명을 완전히 빼앗겨버린 것이다.
내가 신도 아니고 이곳에다가 천둥벼락을 치게 할 수는 없었으나, 적어도 꽃을 심어서 자그마한 꽃밭과 숲, 그리고 인공 강을 만들어줄 수는 있었다.
“······그러니까. 지금 던전 안에다가 인공 강에다가 꽃밭도 만들 거고, 나무도 심고.”
“인터넷 개설도 하고, 에테르 전파 전봇대도 세우고, 화장실도 만들겠다고?”
“예. 하선영 씨, 뭐 원하시는 거 있습니까? 이참에 아예 수영장도 만들까요?”
“아니, 미친. 그럴 필요는 없어.”
“괜찮아요. 집값 굳었거든요. 부담말고 말하세요.”
“필요없다고······.”
그리하여 나는 정말로 던전 내부를 완전히 뒤집어 까기 시작하였다. 건축물들은 남겨두고, 공간을 최대한 활용하여 정령들이 최소한 생명력을 얻을 수 있을 정도의 자연 환경을 조성하였으며 아예 비닐 하우스까지 만들었다. 또한 수명을 500일 추가로 더 소모하여 외부와 통할 수 있는 차원문을 만들고, 세 명에게 모두 ‘차원 출입증’을 새겨주었다.
“앞으로 이 문신을 가지고 있으면 강남 광장 근처의 ‘포인트’에서 언제든 이 장소로 올 수 있어요.”
“오···. 신기한데?”
너무 많은 수명을 소모하긴 했지만 어쩔 수 없다. 다른 길드원들이 아지트를 자유롭게 출입하기 위해서나 인터넷, 전기, 전파를 통하게 하려면 차원문 개설은 필수적인 일이었으니까.
처음에는 뜨뜻미지근한 반응을 보였던 그녀들이었으나, 그 이후로 석 달이 지나자.
“완전 좋아요! 낭만적인 것 같아요!”
당장에 필수적인 공사는 거의 완료되어, 공중정원 내부의 건물 한 채를 통째로 현대풍으로 인테리어를 끝마치자 예사혜가 가장 먼저 펄쩍 뛰었다. 이후로 다른 이들도 표정으로 굉장히 마음에 든다는 티를 팍팍 내었다.
“그러게···. 여기라면 수련하기에도 안성맞춤인데? 사람도 없고, 소음 신경 안 써도 되고.”
“으음, 원래 지내던 연합 건물보다 편하긴 하네.”
예사혜는 이런 곳에서 일해보고 싶었다는 이유로, 하선영은 수련하기에 좋겠다는 이유로, 테일러는 그냥 야경을 좋아한다는 이유로. 썩 괜찮은 아지트가 되었다.
앞으로 공사할 것도 많고, 추가로 설비해야 될 것도 많았지만 이제 나한테 공간이라는 문제는 거의 없어진 것이나 마찬가지인 셈이라 문제는 없다. 전부 이공간 내에서 해결하면 되었으니까.
“너 말이야. 나는 길드원도 아닌데, 여기 출입 자격증 줘도 되냐?”
“러브 콜이라고 생각해.”
“···미친놈. 내가 원래 있던 빌런 헌터 연합에서 얼마나 오래 있었는데.”
“그러니까, 러브 콜이라고. 천천히 생각해봐.”
테일러는 한숨을 내쉬더니 이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알았다, 이 새끼야. 일단 슬슬 돌아가서 집안일 처리하는 김에, 덤으로 해결하고 오면 되겠네.”
그녀가 러시아로 돌아간다는 말에, 나는 예카테리나를 떠올렸다. 길드 아지트까지 세웠으니, 이제는 진짜 길드로서 활동할 수 있게 된 상황. 예카테리나가 약속했던 반 년이 거의 다 지났으니, 슬슬 그녀를 데려올 때가 되었다.
‘그 전에, 미국에 먼저 가봐야겠어.’
*
미국, 워싱턴 D.C.
설중연은 신 무림맹의 무림맹주로서 미국을 무대로 활동하고 있었다. 포부 좋게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SSS랭크의 무림인!
여태 SSS랭크의 초능력자가 등장한 적은 아주 가끔 있긴 했으나 대부분 능력이 불안정하거나 정신이 불안정하다는 이유 등으로 TV출연은커녕 제대로 된 헌팅을 하기도 전에 은퇴를 했기에 설중연의 존재는 세간의 이목을 집중받을 수밖에 없었다.
또한, 설중연은 그렇게 받는 관심을 마다하지 않았다. 자신을 세상에 드러내고 활동하여 존재감을 더더욱 드러내야만 ‘중원 무림’의 존재를 인정받을 수 있을 테니까.
그 어떤 국가의 간섭을 받지 않은 채 모든 무림인이 자유로이 활동할 수 있는 세상.
그러나, 공식 석상에서 그런 이야기를 해봐야 비웃음만 살 뿐이었다. 차라리 나라를 하나 세우는 게 어떻느냐는 모욕을 들을 정도였으니까.
게다가 얼굴을 드러내고 활동하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맹주님. 밖에 또 사람들이 찾아왔습니다.”
“크윽······.”
“망할 것들이 또 찾아왔군.”
지난 몇 개월간 강력한 괴수를 토벌하며 돌아다닌 덕택에 설중연은 무려 워싱턴 D.C에다가 커다란 사무실을 하나 구비해둘 수 있었다. 그러나, 이곳 역시 자유롭지 못했다. 바깥에선 자신을 보기 위해 찾아온 사람들이 진을 치고 있었으니까.
마치 노을이 지는 듯 우울한 느낌을 주는 백금발에 연꽃이 핀 것만 같은 분홍색 눈동자를 가진 그녀의 외모는 퍽 이질적이었으며, 또 신비롭고 아름다운 데다가 심지어 SSS랭크의 무림인이자 DR이라니. 그야말로 사람들의 마음을 휘어잡기에 안성맞춤이지 않는가?
무림맹주 보기를 신성히 여겨야만 하거늘, 지구의 사람들에게는 설중연을 그저 연예인 보듯이 한다는 사실에 무림 장로들은 분통한 속내를 감추지 못했다.
예전 같았으면 감히 이곳까지 찾아와서 실랑이를 벌이는 민간인의 목을 모조리 베었을 테지만, 이곳은 현대. 시대에 맞춰 살아야만 했기에, 장로들 역시 참았다. 그들은 무림 출신이 아닌, 현대 출신의 무림인이었으니까.
“놔두거라.”
설중연이 피곤한 눈으로 그리 말하자 신혜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이곳에서 누구보다 현대의 법칙에 대해 잘 아는 사람으로서, 지금은 무림맹의 비서관이 된 박성호의 바로 아래에서 설중연을 따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설중연의 말에 절대적으로 충성하였다. 만약 죽으라면, 그 자리에서 정말로 자결을 할 정도로 강한 의지를 보이며.
“어찌 되었든 나 좋다고 찾아오는 사람들 아니더냐.”
창밖을 보면 설중연의 플랜카드를 들고있는 사람들이 꽤 보였고, 한 번만 얼굴을 비춰달라며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는 사람도 있었다.
흔히 말하는 ‘극성 팬’들이었다.
“중원 무림이 독립을 한다면 저런 썩을 것들 얼굴을 안 볼 텐데······.”
안타깝게도 모든 무림인들은 모여있을 수도 없고, 모여있을 공간도 없어서 전 세계로 흩어진 상태였다. 어쩔 수 없는 현실. 그래서 그들은 그저 받아들이고 살아갔다. 무림맹주 또한 마찬가지였으므로.
그때.
“맹주님.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누구지?”
“유서담 헌터라고 합니다.”
“···! 들여보내라.”
유서담, 그는 무림맹의 군사(軍師) 직책을 맡고있는 자로서 회의에 얼마든지 참여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장로들이 채 반응을 하기도 전에 이름만 듣고 다짜고짜 들이라고 해버리다니. 그건 장로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기에 그들은 난색을 표했고, 설중연 또한 마찬가지로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본인이 실수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미안하구나. 내가 실수를 했군.”
이윽고 문을 열고 들어온 유서담은, 꽤 커다란 회의장 내부의 사람들이 흉흉한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자 슬금슬금 눈치를 살폈다.
‘뭐여 시벌?’
설중연은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면서 짐짓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은 여기에서 끝내도록 하지. 장로들은 돌아가보게.”
“하지만 요전번에 지원 요청이 들어온 SS랭크의 균열과 SS랭크의 괴수 토벌전 참여 인원을 아직 정하지 못했습니다.”
“얘기 잘 꺼냈군. 네가 해라.”
“······네, 넵!”
어쩐지 기분이 좋지 않아 보이는 설중연이 은근슬쩍 기운으로 분위기를 짓누르자 장로들은 눈치를 슬슬 살피며 회의장을 빠져나갔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도 표정변화 하나 없이 설중연의 뒤쪽에 착 붙어있는 신혜지. 설중연은 그런 그녀에게도 말했다.
“너도 고생 많았구나. 가서 조금 쉬도록 하여라.”
“감사합니다.”
이윽고, 모든 인원이 회의장에서 빠져나가고 단 둘만 남게 되자 유서담은 식은땀을 훔치며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눈빛으로 사람 죽이려고 드네······.”
“후후, 원래 그런 곳이다. 그나저나 무슨 용건으로 찾아왔느냐?”
방금 전과는 분위기가 판이하게 달라진 설중연이 부드럽게 미소를 띠며 말하자 유서담은 한결 나아졌다는 표정으로 자리에 앉았다. 앉자마자 최소 50만원 이상을 호가하는 의자라는 견적이 척 뽑혔으나, 내색을 하진 않았다.
“중원 무림의 독립 때문에 고민이 많다고 들었습니다.”
“······그렇지.”
그 문제에 대해 골머리를 앓고 있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 설중연의 표정이 살짝이지만 굳었다. 그러나 유서담은 신경쓰지 않고 말을 이어나갔다.
“제가 그 부분을 해결해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마도, 중원 무림과 굉장히 흡사한 환경 또한 찾을 수 있을지도 몰라요.”
“···그런 곳이 이 세상에 있느냐?”
“예. 정확히 이 세상은 아니고, 저 세상이에요.”
“흐음?”
설중연이 더 해보라는 표정을 짓자 유서담은 열심히 설명을 했다.
“차원을 초월한 자그마한 거품 세계가 있는데, 지구의 중력에 이끌려 시공간의 단층에 용접되었거든요. 지구인들은 그걸 볼 수도, 인지할 수도, 생각할 수도 없죠.”
“······.”
“음···. 그러니까, 지구를 거꾸로 뒤집어 깐다고 생각하세요. 아주 큰 운동장이 있는 거죠. 누구도 발견하지 못한 곳인데, 저는 거기에 문을 뚫을 수 있거든요. 굉장하죠? 대단하죠?”
“그렇구나.”
그녀는 그의 말을 반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손을 허공에 휘적거려가며 열심히 설명하려는 유서담의 모습이 어쩐지 재미있기도 하고, 귀엽기도 해서 설중연은 손을 턱에 괴인 채 그저 가만히 설명을 들었다.
“어찌 됐든, 제가 직접 눈으로 보여드릴 테니까. 아마 출구를 여러 군데 내놓으면, 전 세계 각지에 퍼져있는 무림인들이 언제든 모일 수도 있을 겁니다.”
“···그래, 정말로 고맙다.”
설중연은 유서담의 배려에 진심으로 고마움을 느꼈다. 그의 이야기를 제대로 이해한 건 아니지만, 어쨌든 그 말에 따르자면 무림인들이 자유로이 활동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주겠다는 소리였으니까.
아마도, 무림인들이 최소한의 자존감을 회복하고 예전처럼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노릇이다.
물론 아직 서담이 중원 무림으로 쓸만한 이공간을 찾은 건 아니었다. 그렇기에 그는 설중연을 데리고 돌아다니며 쓸만한 공간을 찾아볼 생각이었다. 의뢰인의 말에 따르면 지구에는 지구인들이 발견하지 못한 그런 이공간이 상당히 많다고 들었으니까.
무림 또한 서담의 세력이나 마찬가지였기에, 그들을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게 해놓는다면 더할나위 없이 좋을 것이다.
이후로 서담은 설중연과 함께 새로이 사용할 중원의 공간에 대해 이야기했고, 이번 안건과 관련해 회의를 소집해서 결론을 내리자는 말과 함께 둘 모두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잠시 침묵.
먼저 그 고요를 깬 것은 설중연이었다.
“그리고. 더 할 말은 없느냐?”
“네? 아니 뭐, 일단은 무림인들의 괴수 토벌 말인데요······.”
“그거 말고.”
“으음···. 현대 사회에서 무공의 재확립을 위해······.”
“그거 말고.”
“······오늘 날씨가 참 좋네요?”
“그거 말고.”
설중연은 자리에서 일어나, 테이블을 손으로 살살 쓸며 유서담에게 서서히 다가갔다. 그러더니 그의 가슴에 손을 얹고서, 얼굴을 살짝 들이밀었다. 순식간에 설중연의 연분홍색 눈동자가 숨이 닿을 정도의 거리에 위치하자 유서담은 침을 꿀꺽 삼켰다.
“너는 내가 무림맹주로만 보이느냐?”
“아, 아뇨···?”
“나는 너 때문에 천마를 포기했다. 그러나 무림맹주로 남고자 한 것은, 네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 위해서지 무림맹을 위한 것이 아니야. ···네가 무림맹을 위해 도움을 주는 것은 참으로 고마운 일이다만······.”
그녀는 유서담이 앉은 의자를 자신을 향하도록 돌려, 그의 무릎에 자신의 허벅지를 얹었다. 상당히 아담한 체구를 가진 그녀였기에 그의 품으로 파고드는 것 정도는 일도 아니었다.
“오랜만에 얼굴을 대면했으면서, 일 얘기만 주절주절 늘어놓고. 최소한 그런 이야기가 끝나면 사적인 이야기를 아주 조금이라도 나눠주면 얼마나 좋겠느냐? 정말 매력없는 남자의 표본이구나.”
“···죄송합니다.”
“정말로 죄송한 건 확실한가?”
“물···론이죠?”
그러자 설중연은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그의 목을 껴안았다.
설중연은 공식 석상이나 TV 프로그램에 나가서도 항상 차가운 표정만을 띤 채였기에, 표정과 감정을 잃은 사람이라는 이야기가 상당히 돌았다. 그것은 설중연의 본모습이 아니었다. 그저 차갑고 날카롭고 무거우며, 우울한, 그런 가면을 쓰고다닐 뿐이었다.
무림맹의 최강자는 언제나 차갑고, 무거운 분위기를 유지해야만 하는 의무가 있었다. 그래야 무림맹주의 자리가 욕보이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그런 모든 것을 내던진 자리라면.
그 누구의 눈도 신경쓰지 않아야만 하는 곳이라면.
“너와 함께 있을 때, 나는 무림맹주가 아니다.”
“······.”
“그저 외로움을 지독하게 타는 설중연일 뿐이지.”
그런 가식적인 가면따위는 언제든 내벗어 던질 수 있는, 그런 여인이었다.
< 하지만 지금은 제 아지트죠(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