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지만 지금은 제 아지트죠(1) >
석 달간 테일러 나인이 한국에 머물며 수련을 하는 동안, 나는 서울을 돌아다니며 길드 사무소로 쓸만한 장소를 알아보았다.
이제는 슬슬 길드를 궤도로 쏘아올릴 때라고 생각했기 때문. 예카테리나가 무슨 계획을 생각하고 있는진 몰라도 만약 그녀가 정말로 내 길드로 들어온다면 길드의 운영을 아예 전면으로 떠맡길 수 있으니, 모든 준비는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또한, 어나더 리그 소속으로서 하선영은 예사혜를 데리고 다니며 꾸준히 검술을 가르치고 있는 모양이었고 성과는 굉장히 성공적이었다. 슬슬 길드원을 받아도 좋을 정도로.
소속 문파도 없고, 제대로 된 스승조차 없이 온갖 세계의 무공을 짬뽕하여 자신만의 무공으로 재창조한 하선영은 어떤 검술을 배우더라도 스펀지마냥 흡수하였는데, 나는 그녀에게 무협 세계관이 아닌 판타지 세계관에서 배운 검술을 일부 가르쳤다.
쾌속의 검로, 완속의 검로, 만근의 검로, 경량의 검로.
이 네 개의 검술은 아주 단순명료하기 그지없어서 무협 세계관에서 살다 온 무림인의 입장에서 보자면 코웃음이 나올지도 모른다. 하지만 저 검술은 사람이 아닌, 괴물을 상대하기에 아주 최적화가 되어있었다.
사람간의 심리전이 완전히 배제되어, 인간보다 강하고 단단한 인외의 존재를 더욱 효율적으로 베어버릴 수 있는 검술!
놀랍게도, 하선영은 무림의 검술 뿐만이 아니라 판타지의 검술까지 완전히 흡수해버린 것이다! 추정컨대, 신 무림맹 내에서 설중연을 제외한다면 괴물 사냥에 있어서는 하선영이 제일가는 헌터일 것이다.
그리고, 괴물을 상대하기에 적합한 검술로 재탄생한 ‘선영검법’은 예사혜에 의해 꽃을 피우고 있었다.
그녀가 제대로 검술을 배우기 시작한 건 반년도 채 되지 않았으나, 벌써 D랭크의 힘을 보유하게 된 것. 거기에 그치지 않고 혹시나 싶은 마음에, 예사혜에게 기초 마법을 가르쳤더니 놀라운 속도로 습득을 하는게 아니던가?
지금은 ‘주인공’이 사라져서 그녀의 능력치나 무슨 기술을 사용하는지 전혀 알 수 없게 되어버렸지만, 학습과 관련된 재능이나 스킬이 존재하는 것으로 추정되었다. 혹은, 순전히 노력을 잘 하는 것일 수도 있고.
예사혜가 조금만 더 성장한다면 검과 마법을 동시에 다룰 수 있는데다가 현재 우리 길드에서 유일하게 행정과목을 공부한 학생인지라, 사실상 머리도 제일 좋다.
그런 이유로 이제 길드 사무소만 있으면 되는데······.
“신생 길드가 죄다 채가서 이쪽엔 없어. 딴데 가서 알아봐.”
“아지트요? 없어요 없어. 방배동쪽에 하나 남아있었을걸요?”
“에헤이. 여기 나간지가 언젠데. 모란시장이나 가보지 그래?”
“없어, 없어. 바로 옆 판교에나 가봐.”
“이 사람아. 판교에서 길드 아지트 죄다 허문지가 벌써 반년 전이야.”
그렇다.
이미 고일대로 고여버린 수도권에서 아지트를 구하기란 누워서 식은 떡국 먹기만큼이나 어려운 극악의 난이도를 자랑하고 있는 것이다!
길드 아지트는 법적으로 에테르 디스펜서를 보관할 수 있으며 혹여나 폭발하더라도 버틸 수 있는 특제 금고와 그것을 설치할 수 있는 특수 설비가 된 건물을 전제로 둔다. 즉, 아무 건물이나 대충 잡고 아지트라고 등록할 수가 없다는 이야기.
조금이라도 길드의 규모가 크다면 초능력자들의 훈련을 위해 특수 에너지 배리어가 설치된 훈련장도 필요했고, 어떤 길드는 아지트 내에 사무소는 물론이요 주방, 세탁, 의료, 게임, 스포츠, 수영 풀, 분수 등등 있을 필요가 있나 싶을 정도로 다양한 설비가 되어있기도 했다. 그만큼이나 길드 아지트로 사용하려면 다양한 설비가 필요하다는 의미.
물론, 거기까진 바라지도 않으니까 제발 최소한의 조건(에테르 특제 금고)이 충족되는 아지트나 있으면 정말 여한이 없겠다.
무려 석 달이다. 이 정도까지 건물을 못구할 줄은 몰랐다.
이쯤되면 하선영과 예사혜에게도 미안해진다. 헌터는 기본적으로 소속된 길드 아지트에서 머물며 출동하지 않았을 때에는 충분한 여가 시간을 보내며 스트레스를 풀고 컨디션을 회복해야하거늘. 아직도 각자 임시 원룸에서 지내거나 모텔을 전전하며 생활하고 있다니, 내 가슴이 다 미어진다.
하선영은 애초에 나를 은인으로 생각하며 상관없다고 말하고, 예사혜 또한 능력이 없어 꿈을 접어야만 했던 자신에게 검과 마법을 가르쳐줘서 고맙다며 맨바닥에 신문지 깔고 자라고 해도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고는 하지만 내가 미안해서 안 된다.
“차라리 지방으로 알아봐야 하나······.”
그런 생각을 하며 다음 부동산을 찾기 위해 길을 걷는데, 갑작스레 화분이 말을 걸었다.
-마녀야.
“왜 또.”
-좋은 냄새가 나.
“근처에 술집이 많긴 하지.”
-으응. 그거 말고.
화분은 잠시 침묵했고,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술 한 병 달라고 칭얼대는 거겠거니 싶어서 무시하고 갈길 가는데 다시 그녀가 말을 했다.
-정령 냄새야···.
“뭐? 정령? 여기서?”
-응···.
그럴 리가.
지구에서 정령은 아주 극히 희박한 확률로 발견되긴 해도, 그렇게 흔하진 않다. 하물며 서울 시내에서 정령이라고? 여기는 강남 한복판이란 말이다.
“어디?”
-···저기 앞에.
나는 화분의 안내를 받으며 조금 걷자, 빌딩숲 한가운데에 위치한 거대한 광장이 나타났다. 강남 광장이라고도 불리며, 31년 전 대전쟁 이후 폭격에 휩쓸렸다가 생겨난 이 장소는 20대들이 모이는 만남의 장소이자 수많은 명문 길드 아지트가 밀집되어있는 일종의 요충지나 다름없는 곳이었다.
“······그래서, 정령은 어디에 있는데? 아무것도 없잖아?”
-아래에 있어.
“아래? 하수구라도 찾아보라는 거야?”
-으응. 그거 말고···.
그때, 화분이 내 마력을 뽑아가더니 스캔 마법을 펼쳤다. 시야가 마력으로 물들며 근처를 탐지하기 시작하였는데, 놀랍게도 강남 한복판의 바로 아래쪽에 거대한, 정말로 아주 거대한 ‘던전’이 감지되었다.
“던···전?”
마법으로 던전을 탐지해본 적은 처음인지라 이게 언제 생긴 건지는 모르겠다. 다만, 던전이 생성되면 해결이 될 때까지 근방 10m가 폐쇄되며, 담당 헌터가 나타나기 전까지 군인들이 항시 대기를 하고있을 텐데 이 근처에는 아무도 없었다.
던전이 발생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것처럼.
“이게 대체······.”
<떠돌이 차원이로군요.>
“그건 또 뭐야?”
<원래의 차원에서 떨어져 나와 세상 곳곳을 떠도는 차원입니다. 기본적으로 ‘던전’과 같으나, 지구에 해악이 되는 위험한 에너지를 발산하지는 않아서 이 세계의 과학 장비로 감지를 하지 못한 모양입니다.>
이상현상 관측소에서 던전 및 게이트를 감지하는 방법으로는 그곳에서 발생하는 거대한 에너지 파장을 추적하여 랭크를 매기고는 하였다. 그런데, 하루에도 유동인구가 수만 명은 될 법한 강남 한복판에 나타난 던전을 감지하지 못했다니. 만약 저 던전이 제한 시간이 다 되어 현실과 동기화라도 됐다가는 정말로 대참사가 발생했을 것이다.
“···지금이라도 발견해서 다행이네. 16년이나 이 짓거리를 해봤지만, 이런 건 진짜 처음이야.”
<제가 알기로, 지구에 저런 떠돌이 차원은 생각보다 많습니다. 단지 인간의 기술력으로 절대 찾을 수 없어서 여태 그 사실이 드러나지 않았을 뿐.>
“누가 실수로 들어가서 사고라도 발생했을 텐데, 그런 사례도 없단 말이야?”
<글쎄요. 던전은 현실과 반쯤 동기화되어 출입구가 생기지만, 떠돌이 차원은 말 그대로 걸친 상태라서 출입구가 없습니다. 다만, ······제 힘으로는 얼마든지 열 수 있겠군요.>
그 말이 뜻하는 바는 간단했다.
“나만 들어갈 수 있는 히든 던전이라는 소리잖아?”
*
그리하여, 나는 테일러와 하선영 그리고 예사혜까지 데리고 강남으로 왔다. 본래 예사혜는 두고 오려고 했으나, 하선영이 “실전 경험은 중요하지!”라며 그녀를 끌고온 것.
그녀들을 뒤로한 채, 강남 광장 한복판에 위치한 석상에 다가가 손을 대자 그곳에서 어떠한 기운이 흘러들어왔다. 예전같았으면 몰랐겠지만, 이제는 안다.
“차원문을 만들고 있는 거야?”
<···어떻게 아셨습니까?>
“그냥. 몇 번 왔다갔다 하다보니까 느껴지네.”
<그렇군요. 참고하겠습니다.>
뭘 참고해? 그러나 그 질문을 던지기도 전에, 세상이 일그러지더니 뒤바뀌었다.
[떠돌이 차원, ‘죽은 정령의 공중정원’에 입장하였습니다.]
“······윽!”
“흣.”
“우엑, 머리야.”
아무래도 일반적인 던전 출입 방식이 아닌, 반쯤은 차원이동에 가까운 방식을 택했기 때문인지 뒤쪽에서 곡소리가 들려온다. 그러든 말든 나는 고개를 들어 정면을 바라보았다.
이내, 말을 잃고 말았다.
“···장난아닌데.”
공중정원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세계는 공중에 둥실 떠있었다. 그리고 우리들은 공중정원의 가장 끄트머리, 입구로 추정되는 장소에 서있었는데 정면 한가운데에 드높은 건물 수십 개와 거대한 고성 하나가 자리하고 있었다.
정말 어마무시하게 넓은 이 공중정원의 세상은 해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온통 어두웠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눈이 부시도록 밝았는데 그 이유는 간단하게도 허공을 수놓고 있는 반딧불이같은 것들이 사방을 밝혀주었기 때문.
마치 눈이 내리는 것처럼 허공을 부유하는 빛덩어리들과, 밟을 때마다 빛이 나는 기다란 다리, 은색으로 은은하게 빛을 내는 신비로운 건축물과 부유물들. 그리고, 밤하늘을 환하게 비추는 은하수가 보라색, 붉은색, 푸른색으로 무려 세 개나 있었다.
환상적이라고 해야 좋을까, 혹은 몽환적이라고 해도 좋을까.
마치 꿈을 꾸는 것만 같은 아름다운 공간.
“예쁘다······.”
예사혜는 이 아름다운 광경에 정신도 못차리고서 눈을 휙휙 돌렸으며 하선영은 스마트폰을 들고서 정신없이 셔터를 눌렀다.
노을을 굳이 클리셰적으로 따져보면 엔딩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한다. 그래서 끝나가는 세상의 대부분은 저녁을 맞이하지도 못한 채, 해질녘에서 멈춰버리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고 들었다.
하지만 완전한 종말을 맡이한 세계에는 영원한 저녁이 찾아온다. 다시는 태양이 뜨지 않는 세계. 이곳은, 바로 그런 종말을 맞이한 세계 중 하나였다.
“야. 저거 몬스터 아니냐?”
테일러가 다가와 내 어깨를 툭 치며 말하자 나는 정면으로 시야를 돌렸다. 붉은색, 푸른색, 초록색 등등 불꽃처럼 피어오르는 생명체들이 갑옷같은 것을 입은 채 허공을 날아다니고 있었다.
<세상이 종말을 맞이한지 얼마 되지 않아, 모든 생명체가 죽음을 맞이하지 못한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생명 에너지가 모두 소진되었기에, 새로운 정령이 탄생하지는 않겠지요.>
<정령들은 서담이 굳이 나서지 않았더라도 멸망한 세계에 갇혀서 서서히 소멸되었을 것입니다.>
“그래? 그래도 에너지가 터져서 던전 동기화 사태가 벌어지면 큰일난다고.”
<일전에 말씀드렸다시피, 떠돌이 차원은 에너지를 발산하지 않습니다. 이미 모든 에너지를 소모하였기 때문이지요. 단적으로 말하자면, ‘죽은 차원’입니다.>
“죽은 차원이라···. 뭐 그럼 가만히 내버려둬도 던전 동기화 사태가 벌어지진 않는단 거지?”
<그렇습니다.>
“흐음······.”
몬스터가 나타나자 하선영은 무복으로 갈아입은 뒤 검을 뽑았으며, 예사혜는 3등급의 슈트를 입은 뒤 에테르 블레이드를 뽑았고 테일러는 야구 방망이를 꺼내들었다. 이제는 필요없겠지만, 일종의 버릇인 모양.
나 또한 임시로 구한 3등급의 에테르 블레이드를 뽑았지만, 앞으로 나서지는 않았다.
“왜? 문제 있어?”
“아니. 그런 건 아닌데······.”
출입구도 없고, 찾을 수도 없는 이 세계로의 통로는 의뢰인의 도움으로 뚫어놓은 상태. 마법적인 기술을 빌린다면 얼마든지 나만 이용할 수 있는 ‘문’을 만드는 것도 가능할 터. 게다가 이미 죽어버린 차원인지라, 이대로 영영 방치될 공간이라면······.
문득.
어떤 생각이 떠오른 나는 뒤돌아서 세 명의 여인들을 향해 말했다.
“여기 말이죠. 위치도 좋고, 아무나 들어올 수도 없고, 경치도 아름답고, 크기는 또 더럽게 크고, 역세권이고, 심지어 바로 옆에 떡만둣국 맛집도 있거든요?”
“······?”
웬 쌩뚱맞은 소릴 하냐며 이상한 사람 보듯 쳐다보는 그녀들에게 나는 꽤 그럴듯한 제안을 했다.
“보스 적당히 줘패서 여기 우리가 뺏어 씁시다.”
< 하지만 지금은 제 아지트죠(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