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즘엔 초능력도 기출변형이야(2) >
최초에 초능력자가 탄생했을 때, 미국에서 가장 먼저 계급제도를 제안했다. 초능력자들의 출력과 활용도에 계급을 매기고 그들을 구분할 수 있도록.
그때의 계급제는 단순했다. C랭크에서 A랭크가 전부였으니까. 하지만 이후 더욱 많은 초능력자들이 나타났고, 지나치게 약하거나 지나치게 강한 자가 등장하여 만든 등급이 바로 현재의 초능력 계급제도.
가장 낮은 E랭크부터 시작해서, SSS랭크까지 존재하는 이 계급제는 사실 그때그때 계급을 하나씩 추가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어떤 초능력자가 최고의 능력을 지니고 있어, 사람들은 그에게 A랭크라는 랭크를 부여하였다. 그런데 바로 다음날 그보다 더욱 강한 초능력자가 등장해, 그에게도 A랭크를 부여하였다. 혼란의 시기. 너무나도 많은 초능력자가 등장하였고, 그러던 어느 날.
마침내 인간의 한계에 다다른 초능력자가 나타났고, 그때 최초로 S랭크가 등장하여 초능력 제도가 제대로 정형화되었다.
통상적인 수치와는 차원을 달리하는 그들에게는 감히 A랭크라는 등급이 어울리지 않았다. 그래서, 초능력계는 최초로 등급을 추가하였으니.
그것이 바로 Super Rank.
오로지 인간의 한계치에 도달한 자에게만 주어지는 이 타이틀은 초능력자에게 주어지는 가장 명예로운 칭호이며, 받은 자는 아주 극소수뿐이다.
인간의 한계에 다다른 S랭크의 초능력자.
그러나, 과연 S랭크의 초능력자라고 해서 수련을 게을리할까?
그럴 리가.
최근에는 인간의 한계를 초월했다고 일컫는 SS랭크에다가 심지어 SSS랭크까지 발견된 데다가 비록 에테르를 더 이상 흡수할 수 없어 발전이 멈췄다고 해도 초능력을 갈고닦으면 얼마든지 더 성장할 수 있다. 설령 S랭크의 초능력자라고 해도 말이다.
그러나, 테일러 나인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녀가 강해지는 방법은 단 하나. 에테르를 체내에 꾸역꾸역 주입하여, 가지고 있는 초능력의 출력을 높이는 것 뿐이었다.
이유는 단순명료하게도, 초능력의 형태가 고정되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초능력은 ‘구체’의 형으로 고정되어 다른 형을 띌 수 없었고, 오로지 파워를 높이는 것만이 가능했다.
이런 경우는 상당히 흔했다. 초능력의 형이 고정되어 더 이상 발전을 할 수 없는 자들. 태어났을 때 외모가 정해져있는 것처럼, 그들의 초능력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아무리 높은 ‘출력’을 가지고 있어도 ‘유틸리티’ 항목에서 탈락이었기에 높은 등급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부지기수였고, 테일러 또한 처음부터 강한 빛의 구체를 타고났으나 결과적으로 E랭크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테일러 나인의 초능력, 빛의 구체. 손바닥 위에 둥실 띄우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 초능력은 헌터라는 직업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저, 정말이야! 에테르 디스펜서에 닿으니까 빛의 구체가 움직였어! 서담, 네 말대로야!’
그러나 아주 우연한 계기로 그녀는 에테르 디스펜서를 이용해 빛의 구체를 움직일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리고, 빛의 구체의 활용도는 무궁무진해졌다.
‘네임드’급의 에테르 디스펜서로 광구를 쳐내거나, 혹은 끝으로 툭 쳐서 빛의 보호막을 만들어내는 것도 가능해졌으며 나중에 이르러서는 빛의 구체가 물체에 닿는 즉시 굴곡을 일으켜 다른 대상에게 쏘아지도록 발전하였다.
하지만 결국 그건 도구에 의존했을 뿐, 결국 본인의 컨트롤은 거의 발전하지 않았다. 지금은 방망이가 없어도 어느 정도 빛의 구체를 조금이나마 움직일 수 있게 되었지만······. 그래봐야 결국 E랭크에 불과한 능력인 것이다.
단순하게 출력만 높을 뿐인, 활용도 제로의 초능력.
“······그러니까, 빛을 조금 더 다양하게 다루고 싶다고?”
“그렇지.”
“갑자기 왜?”
나는 착잡한 심정으로 테일러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머리카락을 배배 꼬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가문에서 갑자기 날 데려가려고 지랄이거든. 그래서 뭐, ‘결투’를 쳐서 당당히 나올 생각이야.”
“아, 너네 집안···. 헌터를 경멸한다고 했던가. 근데 그 가문의 초능력자들 죄다 ‘기사’ 아냐?”
헌터와는 달리 인간을 전문적으로 상대하는 기사들은 헌터에게도 상당히 껄끄러운 존재였다. ‘초능력자들의 경찰’이라 불리기도 했으니까.
“상관없어. 나도 빌런 헌터니까. ···다만, 내 형제들의 초능력이 살짝 더 뛰어난 게 문제라고 해야 할까? 걔들 좋은 밥 처먹고 매일같이 에테르 주입 받으면서 자라는 동안 나는 똥밭에서 굴렀잖아.”
같은 S랭크라고 해도, 그 사이에서는 천차만별의 차이가 난다. 아마도 그들은 테일러보다 훨씬 더 강한 출력을 가지고 있을 터.
“게다가···. 결투 때는 디스펜서를 사용할 수 없어.”
“······뭐?”
테일러는 방망이가 없으면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바보가 되어버린다.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있는 나였기에 저 말이 얼마나 이질적으로 들리겠는가?
“미쳤어? 너 초능력 없으면 지나가던 E랭크 괴수한테도 된통 처맞을 게 뻔한데?”
“그럼 가문으로 돌아가리? 뭔 쌍팔년도 막장드라마도 아니고 다짜고짜 나한테 정략결혼 시키겠다잖아, 옘병할. 방법은 형제 중 한 명 골라서 결투로 대갈통 터뜨린 다음! 응! 당당하게 걸어 나오는 것뿐이야! 넌 내가 웬 엿같은 놈한테 시집가면 좋겠어? 엉?”
“······아니.”
내가 표정을 찡그리자, 왠지 갑자기 기분이 좋아졌는지 테일러가 내 등짝을 퍽! 후렸다.
“됐고, 아무튼 그래서 널 찾아왔다 이거지. 유일하게 나를 도울 수 있는 두 가지의 방법을 가진 사람이 너거든.”
“방법이 두 개나 있어?”
“응. 첫 번째는 예전처럼···. 뭔가 기발하고 독특한 발상으로 나를 도와줄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에 찾아왔어. 게다가 지금은 DDR-”
“···DR이라고.”
“그게 그거 아냐? 어쨌든 넌 특이한 기술을 다른 세계에서 배워왔잖아. 어쩌면 힌트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몰라.”
맞는 말이었다.
“그럼 두 번째 방법은?”
“나한테 직면한 가장 큰 문제는 정략결혼이거든? 이걸 해결하는 건 사실 간단해. 외간남자의 애를 덜컥 가져버리면 되거든.”
“퍽이나 간단하겠다. ···근데 그걸 나만 도울 수 있다고?”
“그럼 너 말고 또 누가 있는데?”
멀뚱멀뚱 내 눈을 바라보며 말을 하는 그녀의 눈빛에는 별다른 생각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지적하는 것조차 이상할 정도로. 나는 한숨을 내쉬며 마른 세수를 하였다.
“쉬운 방법은 두 번째이긴 한데······.”
“그럼 지금 만들러 갈까?”
“뭘 어째?”
“아하핫! 농담이야 새끼야. 쫄기는.”
“후우······.”
그렇다면 결국, 테일러가 스스로 S랭크의 초능력자를 이길 수 있는 수준으로 만들어줘야만 한다는 소리. 하지만 그게 어디 쉬운가. 이미 완전체에 가까운 초능력을 가진 데다가 꾸준히 에테르 주입을 받아 출력도 월등하며, 초능력자를 상대하는 데에는 스페셜리스트인 블레스타쉬 가문이다.
에테르 디스펜서가 없으면 제대로 능력도 발동할 수 없는 반쪽짜리 초능력을 가진 데다가 출력도 부족한 테일러가 빠른 시일 내에 성장하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는 이야기.
게다가, 마법이나 무공은 몰라도 초능력에 대해서는 진짜 아는 게 단 하나도 없다.
-으음···. 마녀야.
“왜?”
-비슷해···.
“비슷하다고?”
-마법이랑.
현재 테일러는 빛의 구체를 손바닥 위에 띄워둔 채 유지하고 있었다. 내 손바닥을 통해 인벤토리에서 빠져나온 화분이 빛의 구체를 살펴보기 위해서. 백색 마녀의 도서관으로 검색을 해보았지만 애초에 마법이 아니라고 하니, 마법을 수준급으로 다루며 또한 지능까지 갖춘 화분을 부른 것이다.
그 결과, 꽤 쓸만한 정보를 얻었다.
“마법과 초능력의 구조가 비슷하다······.”
마법과 초능력은 각각 다른 에너지원을 사용한다. 마법은 마력, 초능력은 기력. 자연으로부터 비롯되는 마력과는 달리 초능력은 생명체 그 자체가 가진 본질적인 에너지였다.
그러나 에너지원이 다르다고 해서, 발생하는 구조 또한 다를까? 경유와 휘발유가 다른 에너지이지만 발동하는 구조가 비슷한 것과 마찬가지로, 마법과 초능력은 어느 정도 닮은 부분이 있던 것이다.
다만, 마법은 수식과 주문 및 마법진을 통해 마력에 형태를 자유자재로 부여한다면 초능력자들은 그저 정해진 형태를 본능적으로 따를 수밖에 없었다.
“가만···. 그럼, 이거 혹시······.”
만약, 초능력자들의 능력에 수식을 똑같이 부여할 수 있다면? 에너지의 흐름을 자유자재로 컨트롤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지구의 초능력은 고작해야 발견된 지 30년이 조금 안 됐다. 발전하기에는 터무니 없이 부족한 시간. 그러나, 백색 마녀의 도서관은 이미 수천 년의 역사를 지닌 마법의 산물이다. 지구에서는 감히 생각해본 적도 없는 수만 가지의 방법으로 에너지에 ‘형태’를 부여한다.
“······해볼만 하겠는데?”
“뭐?”
“형질을 바꿀 수 있을 것 같아. 내가 직접 살펴보면 뭔가 될 거같은데.”
“진짜로? 구라치지 말고. 나 정말 설렌다?”
나는 대답 대신 테일러의 손바닥 아래에 내 손을 갖다 대었다.
“출력 좀 줄여봐.”
그녀가 진심으로 출력을 내면 내 마력과 마법 수준으로는 따라갈 수 없다. 서서히 빛의 구체가 작아져, C랭크 정도가 되자 나는 눈을 감고서 백색 마녀의 도서관을 펼쳤다. ‘빛’과 관련된 마법서가 눈앞에 나타나더니, 화분이 그것을 쥐고서 읽어내렸다.
빛의 마법을 다루는 마법서에는 빛을 수십, 수백 가지의 형태로 다루도록 해주는 방법과 수식이 적혀있었고, 그중 일부는 단순한 에너지의 흐름으로 재현해낼 수 있는 정도였다.
“지금부터 너한테 길을 보여줄 거야. 너는 그걸 외우고, 따라하면 돼.”
“윽!”
천천히, 테일러의 손목을 타고 마력을 흘려보낸다. 나의 마력이 화분의 컨트롤에 따라 서서히 테일러가 만들어낸 빛의 구체에 스며들더니, 이윽고는 마력이 기묘한 방향으로 뒤틀리거나 회전하기 시작하였다.
21세기 지구인들은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방식의 길.
마법은 일정한 마력의 양, 마력이 흐르는 속도, 마력이 흐르는 방향 등의 모든 것을 완벽히 계산하여 형태를 결정지었고, 그것은 곧 같은 에너지인 기력에게도 적용이 된다.
“아···!”
벌써 16년 가까이 ‘구체’의 형태에서 단 한 번도 요동하지 않았던 그 에너지 덩어리가, 처음으로 탈피하기 시작하였다. 아주 간단한 형태의 변화였다. 둥그런 구체를 길쭉한 막대기로 만들었을 뿐이었으니까.
“잡아봐.”
“······.”
테일러는 빛의 막대를 천천히 쥐었는데, 마치 야구 방망이를 연상케하는 모양이었다.
“다른 손으로도 구체를 만들어서, 휘둘러.”
그녀는 내 말을 따라서 구체를 하나 더 만들었고, 빛의 방망이를 휘둘러서 쳐냈다.
까앙!!
그것에 맞고 날아간 빛의 구체는 네임드 급의 야구 방망이를 사용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시원하게 날아가 벽에 부딪쳐 소멸되었다.
에테르 디스펜서의 도움 없이, 처음으로 빛의 구체를 쏘아낸 것이다!
“으······.”
파스스···.
그러나 한 번 휘두르는 게 고작이었는지, 빛의 방망이는 금세 사라져버렸다. 애초에 형태를 만들어준 것이 나였으므로 테일러 스스로 형태를 유지할 수 없던 탓.
이것은 마치, 불 위에 그저 기름을 부어서 더욱 활활 타오르게 하는 것밖에는 모르던 원시인에게 전자 회로를 설계하여 전압 및 전류의 신호 에너지를 변환하는 법을 알려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안 그래도 기본 출력이 강한 그녀였기에, 만약 스스로 형질 변화를 완성시킨다면 지금보다 더 무궁무진한 파괴적인 기술을 보여줄 수도 있을 터.
“···어떻게 하면 배울 수 있는데?”
“어떡하긴.”
나는 뒤쪽으로 손가락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조금은 싸구려로 보이는 초능력 컨트롤 측정기가 있었다.
“존나게 굴러야지.”
그날부터, 테일러 나인의 지옥특훈이 시작되었다.
*
수련의 과정은 쉽지 않았다. 애초에 출력은 S랭크 중에서도 상위권인 테일러였으나, 컨트롤적인 면에서는 상당히 젬병이었으니까. 게다가 유서담과 마찬가지로 공부와는 연이 멀었기에 수학적이고 마법적인 부분을 가르치는 것도 불가능. 오로지 기의 흐름을 제어하여 마력의 움직임을 따라하는 수밖에 없었다.
시간은 많았기에, 테일러는 초조해하지 않았다.
한 달이 지났을 때 그녀는 빛의 구체를 타원형으로 바꿀 수 있었다.
신기했다. 자신이 초능력을 단련할 수 있다는 사실이.
즐거웠다. 유서담과 함께 같은 학문을 공부하며 초능력에 대해 토론하고 또 함께 수련할 수 있는 지금이.
두 달이 지났을 때, 그녀는 빛의 구체를 조금 길쭉한 바게트 빵의 형태로 바꿀 수 있었다.
하루하루가 가슴 벅찬 시간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그녀는 초능력을 단련하던 이유를 잊어버렸다. 가문? 결투? 정략결혼? 그런 건 더 이상 고민거리가 되지 않았다. 그저, 이 순간을 즐길 수 있으면 되었다.
그리고 석 달이 지났을 때.
“······.”
달이 가득 차오른 밤.
테일러는 속옷바람으로 침대에서 일어나 창가로 걸어갔다. 익숙하게 지내던 원룸이 아닌, 조금은 사치를 부린 유서담의 오피스텔이 어색하게만 느껴졌지만 이제는 그럭저럭 적응이 되었다.
창문에 팔을 기대어, 멍하니 바깥을 바라보던 그녀는 손바닥을 천천히 들어올렸다.
스스···!
허공에 빛무리가 서서히 모여들더니, 이내 그것은 어떠한 형태를 이루었다. 석 달 전 유서담이 만들어준 것처럼 완벽한 야구 방망이의 형태는 아니었으나······. 그래도, 그것은 완벽한 막대의 형태는 이루었다.
즉, 테일러는 스스로의 힘으로 마침내 빛의 형태를 완벽하게 변형하는 데에 성공한 것이다!
어쩐지 가슴이 벅차올라, 소리라도 힘차게 지르고 싶었지만 뒤쪽에서 자고있을 유서담을 배려하여 그저 주먹을 불끈 쥐고 바닥에 쪼그려 앉아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아주 소심하고 섬세하고 절제된 세레머니를 하였다.
“크으으···.”
이것은 소리없는 아우성.
‘내가 해냈다고 시발!’
그러나, 저 푸른 해원 전체를 울리는 아주 힘찬 환호성이기도 했다.
< 요즘엔 초능력도 기출변형이야(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