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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주인공은 살인이다-86화 (86/251)

< 요즘엔 초능력도 기출변형이야(1) >

시내의 한적한 카페의 어느 구석진 자리.

만약 인파가 많은 곳이었다면 시선이 한곳에 쏠렸을 것이라 예상될 정도로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여인 두 명이 창가에 앉아있었다.

한 명은 테일러 나인, 다른 한 명은 ‘조야 블레스타쉬’라 불리는 여인이었다. 테일러와 마찬가지로 아름다운 은색 머리칼에 금안을 가진 그녀는, 무려 테일러 나인의 친언니이자 블레스타쉬 가문의 장녀였다.

다소곳하게 앉은 조야와는 달리, 테일러는 쩍벌다리를 한 채로 야구방망이의 위에 얹은 양손등에 턱을 괸 채 입술을 삐쭉 내밀어 커피의 빨대를 쪽쪽 빨았다.

“테일러. 이제 그만 돌아올 때가 되지 않았니?”

“않았는데요?”

러시아의 블레스타쉬 가문은 아주 특이하게도 초능력을 유전으로 대대로 이어받을 수 있었는데, 덕분에 자식 아홉 명은 전부 ‘빛’을 다루는 초능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아주 특이한 일이었다. 과학적으로도, 비과학적으로도 증명된 바가 없었다. 과연 초능력이 유전이 되는가? 그렇지 않다면, 블레스타쉬 가문은 대체 어떻게 초능력을 이어받았는가? 이러한 초능력 유전 현상은 블레스타쉬 뿐만이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꽤 자주 발생하는 일인지라 요즘 들어서는 그렇게 특이한 일도 아니었다.

다만 블레스타쉬 가문의 자식은 아홉이었으며, 테일러 블레스타쉬는 그중에서도 막내였고, 가장 약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의 능력은 아주 단순명료했다.

‘에너지를 발산하는 빛의 덩어리를 손바닥 위에 띄워 올릴 수 있다.’

각성 초기부터 그녀의 능력은 꽤 강렬한 에너지를 보유하고 있었고, 그렇기에 가문의 관심을 지대하게 받았으나······. 안타깝게도, 딱 거기까지가 테일러의 한계였다.

그녀는 그 빛의 구체를 움직일 수도, 에너지를 발산할 수도 없었다. 그저 강력한 에너지를 머금은 빛덩어리를 띄워올리는 게 전부였을 뿐. 닿으면 위험할 수도 있는, 그저 그런 후레쉬와 다를 것도 없는 초능력이 바로 테일러 블레스타쉬의 전부였다.

“언제까지 그 웃기는 가명을 쓰고서 활동할 셈이니? 가문에 먹칠을 제대로 하는구나.”

“허얼. 저기요 아줌마. 고작 대사 한 줄 쳤으면서 벌써 모순이 발생했는데요. 가명 달고 활동하는데 가문에 먹칠을 어떻게 합니까?”

“···테일러. 네가 블레스타쉬라는 사실은 공공연히 밝혀졌다. 그러니 이제 그만 하자꾸나.”

“에헤이, 이 아줌마가 또 헛소리 시작하셨네. 사람이 줏대가 있어야지, 벌써 16년 동안 진득하게 해왔는데 20년은 채워야 하지 않겠어?”

“하아······. 천박한 네 말투도 여전하구나. 천박한 것들과 어울리더니, 아주 딱 그짝이 되었어.”

“허이구. ‘기사’님 납셨어. 아주 고귀하셔서 눈이 다 부시네.”

31년 전 괴수와의 전쟁이 발발한 이후, 초능력은 대부분 괴수를 사냥하는 목적으로 쓰였으나 당연히도 모두가 꼭 그런 것은 아니었다. 대표적으로 블레스타쉬 가문이 그러했다. 그들은 헌터 업계에 종사하지 않으며, 군사적인 목적으로 초능력을 단련하였는데 괴물이 아닌 사람과의 전쟁을 위함이었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전쟁이 발발한 지도 벌써 수십년 째. 블레스타쉬 가문은 이제 빛을 다루는 특별한 초능력자 가문으로서, 러시아에 종속되어 ‘기사’라는 직책을 받고서 활동하였다.

국가를 위해 헌신하는 명예로운 빛의 기사 가문! 이 얼마나 아름답고 예쁜 단어인가. 실제로 초능력과 함께 ‘기사’라는 직책이 부활하자 수많은 초능력자들이 국가에 몸을 담았고, 그들은 하나같이 입을 모아 말한다.

‘헌터는 천박한 직업이다.’

웃기는 말이다. 테일러로서는 코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괴물 죄다 때려잡은 게 누군데, 뒤늦게 초능력 깔짝깔짝 배워놓고서는 어디서 기사 행세를 한단 말인가?

그러나 그들을 대놓고 비웃기에는, 이미 너무나도 강력한 힘을 가진 채였다. 전장에서 구르며 거칠게 자라온 헌터들과는 달리 기사들은 안전한 곳에서 고자본을 바탕으로 꾸준히 에테르를 주입받으며 체계적인 훈련을 받아 아주 강력한 힘을 보유할 수 있었으니까.

“먼저 쫓아낸 게 누군데 이제 와서 오라 마라야?”

“우린 널 쫓아내지 않았다. 네가 스스로 나간 거지.”

꽤 예전이다.

자신을 제외한 여덟의 형제가 모두 강력한 빛의 능력을 각성하여 기사 임명식을 받고 있을 때, 능력을 아예 발현하지 못하여 가문의 눈초리를 받아 도망쳐 나왔던 그날의 일은.

별로 좋은 기억은 아니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차라리 잘 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덕분에 그녀는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을 만날 수 있었으니까.

“···아버지께서, 네가 돌아오길 원하신단다. 너를 위한 자리가 준비되어있어. 러시아 로열 네셔널 나이츠에 자리가 하나 났거든. 헌터로 활동했던 경력은 네 흠이 되겠지만, S랭크의 능력만큼은 아버지도 인정해주셨다. 그러니 어서 돌아오거라. 이제 그런 천박한 생활은 청산하고, 네 본래의 신분으로 돌아올 때가 되었어.”

그리 말하며 조야는 품에서 사진 하나를 꺼내서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아버지는 네가 그 남자와 결혼하길 원하신다. 로마노프 가문의 장남이야. 네가 어울리는 그 친구들과는 달리, 태생부터 귀족이었고 태생부터 고귀했지.”

사진 속의 남자는 테일러도 아는 사람이었다. S랭크의 풍술사이자, 강체의 능력까지 갖추고 있어 SS랭크의 초능력자조차 한 수 접어준다는 천재 중의 천재였다.

“와. 저딴 거랑 만나라고? 삼시세끼 콩나물만 처먹은 누렁이가 싸질러놓은 똥을 어깨 위에 올려놓은 것처럼 생겼는데?”

“사람의 외모를 비하해서는 안 된단다, 테일러.”

테일러는 사진을 검지로 툭, 쳐서 조야에게 돌려보냈다.

“나 사실 임신했어. 4개월이야.”

“···정말이니?”

“푸핫, 당연히 뻥이지. 사실 내 취향 한국남자니까 데려오려면 한국남자로 데려와.”

“테일러. 아버지의 말을 네가 감히 거스를 수는 없어.”

“글쎄?”

“만약, 아버지가 원로회를 소집한다고 해도, 그리고 기사의 결투를 연다고 해도···. 네가 그렇게 당당한 태도로 나올 수 있을까?”

그러자, 내내 태연하던 테일러의 눈썹이 살짝이나마 꿈틀 떨렸다.

초능력이 성행하기 시작한 이후로, 특이한 초능력을 보유한 가문들은 더욱 더 폐쇄적으로 능력의 비밀을 보호하기 시작하였다. 자신들의 유전자에 초능력이 담겨있다고 굳게 믿는 것이다. 블레스타쉬 또한 마찬가지로, 가문을 등지고 외부로 나가고 싶다면 정정당당히 초능력을 통한 결투를 청해야만 한다는 것.

다만, 과거의 테일러는 그 과정을 생략했었다. 그때의 그녀는 아예 능력을 발현하지도 못한 채였기 때문.

“네가 쓸모없을 때라면 몰라도, 지금은 적당히 굴려먹을 구석이 있으니까 얼마든지 그것들을 핑계삼아 끌고올 수 있다. 굳이 그러지 않고 있을 뿐이지. ···여전히 나약해빠져서, 에테르 디스펜서에 의존하지 않으면 제대로 능력도 발현하지 못하는 모자른 너를 아버지께서 바라시는 것을 영광으로 알아야 한단다.”

그리 말하며, 조야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니, 네 발로 돌아오거라 테일러.”

그렇게 그녀가 사라지자, 한참이나 그 자리에 앉아있던 테일러는 머리를 벅벅 긁었다.

“아오, 재수도 없으려니···.”

그러다 문득 고개를 돌려보니, 웬 여고생들이 흥미진진한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야, 뭘 꼴아 봐? 치정싸움 처음 봐?”

“꺅! 언니가 이쪽 봐주셨어!”

“언니! 한 번만 더 욕해주세요!”

테일러는 진심으로 소름이 오소소 돋은 듯 양팔을 부여잡았다.

“···뭐야 저것들. 미친년들인가?”

*

금강 체육관은 예전부터 내가 자주 체력을 단련하던 곳이었다. 물론, 예전에는 단순히 쇠질이나 하는 정도였다면 지금은 초능력자 전용 시설에 하루종일 틀어박혀 ‘이능력’을 체크하는 용도로 사용하였다.

이번에 레스카피를 사냥하여 얻은 재능 하나.

[지나치게 낮은 레벨의 적을 사냥하여 레벨이 오르지 않습니다.]

[레스카피의 재능 ‘통찰(B)’을 흡수하였습니다.]

[수명이 780일 지급됩니다.]

그리고 일전에 지급받지 못했던 이동준의 스킬까지.

[이동준의 스킬 ‘달마풍천보達摩風天步(SS)’를 흡수하였습니다.]

[해당 스킬이 ‘바람처럼 달리는 법(S)’과 공명하여 합쳐집니다.]

[스킬 ‘달마풍천신법達摩風天身法(SS+)’을 획득하였습니다.]

무려 SS랭크의 스킬을 흡수했다. 언뜻 보면 좋아 보이지만······. 사실 크게 운이 좋은 것도 아니었다. 달마는 무려 500레벨의 고수였으며, 수백 개가 넘는 스킬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 대부분은 무공이었으며, 최소 S랭크에서 대부분이 SS랭크였고 일부 달마지존의 오리지널리티 스킬들은 죄다 SSS랭크였다.

내심 SSS랭크의 스킬을 바랐던 건 사실이나, SS랭크의 스킬을 얻어서 기존의 스킬과 합쳐졌으니 상당히 만족스럽기는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수명이 5000일 지급됩니다.]

[당신의 수명: 10386일 14시간 28분]

수명이 지급되는 순간 온몸에서 또다시 변화가 발생하였다. 갑작스러운 레벨 업으로 히말라야 산맥에서 겪었던 골격의 변화와는 달리, 이번에는 피부가 깨끗해지거나 시력이 좋아지는 등의 간단한 변화였다.

“무슨······.”

천천히 체육관의 구석에 있는 거울로 다가가 얼굴을 살펴보자, 뭔가가 변했음이 느껴졌다. 어쩐지 얼굴이 20대 초반처럼 젊어졌으며 피부가 훨씬 더 깨끗해졌다.

<수명이 1만을 넘긴 효과입니다.>

<수명이 늘어날수록 신체가 젊어지는 건 당연한 수순이지요.>

“그런 거냐? 여기서 10배 정도 더 늘어나면 애기로 변하고 그러나?”

<···그렇지는 않습니다. 최전성기에서 더 젊어지진 않을 겁니다.>

“흐음······.”

처음에는 당장 살아보겠다고 수명을 거래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더 강해져서 목표를 이루기 위해 주인공을 사냥한다. 저 수명에 과연 의미가 있을까. 과연 내가 저 수명을 전부 채우고 죽을 수는 있을 걸까.

<수명은 본디 주인공에게서 흡수한 개연성을 변환하여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1만 단위가 되었으니, 수명을 다른 용도로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어떤 식으로?”

<유사시에 대량의 수명을 사용하여 상처를 회복할 수 있으며, 수명을 힘으로 치환하여 순간적으로 강력한 파워를 낼 수도 있습니다. 물론 그 효율이 좋지는 않아 자주 사용하는 것은 추천드리지 않습니다.>

“오······.”

수명을 다른 용도로 사용할 수 있다니. 위기 상황에 꽤 좋을 지도 모르겠다.

“그럼, 얻은 걸 한번 써볼까.”

가볍게 발을 굴러서 몸을 통통 튕겨보자, 뭔가 확실히 가벼워진 느낌이 들었다. 일전에는 바람의 흐름을 타고 나아간다는 느낌이었다면, 이제는 아예 바람의 길을 직접 개척하여 그곳을 질주한다는 느낌이었다.

굳이 비유하자면 포장되지 않은 자갈밭을 마차로 달리다가 포장된 도로를 자동차로 달리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움직임의 부드러움에서도, 그리고 그 속도면에서도.

이전보다 모든 것이 더욱 나아졌다.

그러나, 제아무리 스킬을 익혔다 하더라도 경신법이 그리 손쉽게 발동되지는 않았다. 이건 백색 마녀의 도서관과 살짝 비슷했다. 호흡 한 줄기, 근육의 움직임, 발을 뻗는 각도, 발바닥이 찍히는 위치까지 모두 완벽하게 계산하고 발을 내딛어야만 진정한 신법이 완성되기 때문이었다.

숱하게 넘어졌다. 얼마나 넘어졌는지 셀 수조차 없을 정도였으며, 무릎에 피멍이 들기 시작할 정도로 달리고 또 넘어졌다. 그러나 나는 멈추지 않았다. 실전에서 사용하려면 아무리 지치고 힘들고 괴롭더라도 자연스레 내 걸음에 묻어나오도록 반복학습해야만 했기 때문.

그렇게, 더 이상 일어나기도 힘들 정도로 달렸을 무렵.

[스킬 ‘달마풍천신법達摩風天身法(SS+)’이 발동됩니다.]

내 걸음걸이는 이전보다 조금 더 나아져있었다.

“후우······.”

바닥에 쓰러진 채 거칠게 만족스러운 숨을 고르고 있자, 누군가가 다가와서 음료스를 내밀었다. 그것을 받아들고 고개를 들어올리니 테일러 나인이었다.

“어? 네가 웬 일이냐?”

“한 탕 뛰자며. 문자 받고 왔는데 벌써 걸레짝이네. 재미있는 일이라도 있나봐?”

“아··· 미안. 깜빡했다.”

그러고 보니 이계로 파견나가기 전, 테일러에게 그런 문자를 보냈다. 이제 시간배율을 기존에서 3~5배 정도 임의로 조정할 수 있는 덕에 현실과 이계의 차이가 그리 크지 않다. 즉, 나는 이계를 거의 반나절도 안 되는 시간 안에 다녀온 것이다.

“헌팅은 좀 천천히 가야겠다. 최근에 얻은 힘을 시험해보고 있었거든.”

“그래? 흐음.”

테일러는 내가 이계에서 힘을 얻는단 사실을 안다. 그렇기에 별 대수롭지 않게 그녀에게 그리 말했더니 웬걸, 테일러가 자신의 뺨을 긁적이며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그, 이계에서 얻은 힘 중에 말이야···. 혹시 빛을 더 잘 다룰 수 있는 방법도 있을까?”

< 요즘엔 초능력도 기출변형이야(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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