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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주인공은 살인이다-85화 (85/251)

< 이야기를 걷는 시간(Time lapse) >

용사 레스카피는 본디 시골에서 난 평범한 청년이었다.

전사도, 기사도, 용병도 아닌 그였지만 아주 우연한 계기로 제국의 수도로 올라올 기회가 생겼는데, 그때 정말로 우연히 어느 던전에 들어가게 되었으며, 정말 우연히도 그 던전은 수천 년 전에 봉인되었던 진정한 용사의 무덤이었고, 아주 우연히도 레스카피는 그 던전에 봉인되었던 ‘진정한 두 번째 성검’을 쥘 자격이 있었다.

진정한 용사! 레스카피!

[주인공 ‘레스카피’가 탄생하였습니다.]

성격도 소심하고, 언제나 무시 받는 신분에, 싸움이라고는 전혀 해본 적도 없었으며, 누군가에게 말을 거는 것조차 잘하지 못하는 레스카피였다.

그러나 두 번째 신성검 ‘노슬릿’을 쥔 이후로 모든 일이 잘 풀리기 시작했다.

어째서인지 소심하게 말 한마디를 던지면 모두가 자신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 평민을 천대하는 귀족에게 신성검을 보여주었더니 진품 여부조차 따지지 않고 무릎을 꿇었으며, 고작 한 달 수련했을 뿐인데 10년이나 수련한 기사 지망생보다도 더욱 강한 힘을 가지게 되었다.

그때, 레스카피는 무언가를 느꼈다.

‘나는 할 수 있다.’

세상이 만만하게 보이기 시작하였다. 결코 그의 앞길에 자신보다 강한 적은 나타나지 않았으며, 설령 나타난다 하여도 그때마다 신성검 노슬릿이 빛을 발하여 적을 물리치고 더욱 강한 힘을 얻게 되었다.

검을 수련한지 석 달 차가 되었을 땐 15년 수련한 검객보다 강해졌으며, 반년 차가 되었을 때는 20년 차의 이름난 기사조차도 쓰러뜨릴 수 있었다.

세상이 쉬웠다.

어느 위험이 닥치든 그저 신성검 노슬릿을 휘두르면 해결되었으며, 동료들은 바보처럼 레스카피의 말에 맞장구만 쳐주었고, 마왕은 레스카피의 수준에 딱 알맞은 부하를 보내주어 성장의 밑거름이 되어주는 데다가 그저 말 한마디 건네면 여자들은 이유도 없이 뺨을 붉혔다.

자신이 원하는 것이라면 뭐든 얻을 수 있었다.

힘, 권력, 명예, 이성까지도.

그래서 용사로 선택받은 이후, 일 년 차가 되었을 때.

‘용사가 한 명 더 있었지······.’

레스카피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성검을 쥐었다던 ‘유서담’의 존재를 음해하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본래 발생하지 않았을 이야기. 그러나, 또다른 용사를 두려워했던 레스카피에 의해 발생한 이야기.

‘그놈은 악마입니다! 신성검 유슬릿을 훔쳐간 사탄!’

이 세상의 모두가 자신의 말을 단 한 치도 의심하지 않았다. 애초에 신성검을 쥐었다는 자체부터가 하늘에게 증명을 받았다는 사실이거늘, 그저 악마가 술수를 부렸다는 말에 모두가 홀라당 넘어갔다.

세상은 유서담을 악마라고 이해하였으며, 이제 레스카피는 이 세상의 유일한 용사가 되었다.

그래서, 그는 더욱 자신감을 얻을 수 있었고 마침내는.

‘제가 마왕을 물리치고 돌아온다면, 제 청혼을 받아주실 수 있겠습니까?’

제국의 가장 아름다운 꽃이라 불리는 황녀 니샤 카멜에게 당당히 고백할 수 있게 되었다.

레스카피는 황녀 또한 여타의 여자들처럼 얼굴을 붉히며 수줍게 청혼을 받아줄 것이라 믿어의심치 않았다. 그 어떤 누구라도 자신의 말에는 껌뻑 죽었으니까.

그러나.

그는 몰랐다.

황녀가 자신의 개연성을 파괴할 수 있는 누군가와 유년기를 함께하여, 언제나 믿고있던 ‘주인공 보정’이 전혀 듣지 않는다는 사실이.

‘···죄송, 합니다. 조금 생각할 시간을··· 주세요···.’

‘······!’

그때 레스카피는 황녀의 눈빛을 볼 수 있었다. 자신을 껄끄러워하는 그 눈빛! 어쩌면, 평범한 반응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도 그렇지 않겠는가? 그 누가 처음 본 사이에 다짜고짜 청혼을 하면 좋아하겠는가. 둘은 서로의 마음을 알아가는 과정조차 전혀 없었는데 말이다.

그저, 레스카피는 믿고 있었을 뿐이다. 자신이 쳐다보기만 하면, 말을 걸기만 하면 모든 사람들의 환심을 반드시 살 수 있다고.

혹시 모른다. 레스카피가 진심을 담아서 황녀에게 다가가, 그녀의 마음을 얻기 위해 노력하였다면 정말로 용맹한 용사에게 반한 니샤가 돌아섰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고, 황녀의 마음은 레스카피에게 멀어졌다.

이윽고 레스카피는 황녀에게 분노하였고, 깨달았다. 자신 또한 그녀를 사랑하고 있지 않았다. 그저 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이었기에, 아내로 삼고 싶었을 뿐.

그래서 그의 목표는 단순명료해졌다. 이미 결혼 자체는 황제에게 허락을 받은 상태. 이대로 마왕을 물리치고 돌아오면, 어차피 황녀는 자신의 아내가 된다.

······그렇게 되었어야만 한다.

‘떡국의 악마 유서담이 공주님을 납치하였다!’

‘일주일 뒤에 떡국의 악마와 니샤 카멜의 결혼식이 마왕의 주선 하에 열린다!’

제국이 발칵 뒤집혔다. 제국의 황녀가 악마에게 시집을 가게 생기다니! 황제는 발등에 불이 떨어져 급히 용사 레스카피를 호출하여 말했다.

‘일주일 안에 마왕을 물리치시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레스카피가 제아무리 강하다 하여도 용사가 된 지 고작 1년이었고, 마왕을 물리칠 힘은 아직 충분히 얻지 못했다. 최소 10년, 아니 20년은 더 마왕의 부하를 잡아먹으며 수련을 한다면 모를까 지금 가봐야 개죽음이다.

그러나.

레스카피는 용사였으며.

세계를, 제국을, 그리고 공주를 구해내야만 할 의무가 있었다.

‘하, 하하···. 제국의 군대를 이끌고··· 가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게 무슨 소린가, 용사! 마왕에게 대적할 자는 용사가 유일하네!’

처음으로 자신의 의견이 거부당했다.

당연한 일이다.

‘용사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상, 마왕에게 대적하는 것은 오로지 용사만이 가능하다!’

그것이 용사가 받은 ‘주인공 보정’이었기 때문이다.

그 누구도 용사의 공적을 가로챌 수 없도록.

모두가 용사에게 반드시 의지할 수밖에 없도록.

‘아.’

그제야 레스카피는 뭔가를 깨달았고.

그때는 이미 늦은 채였다.

그러나 그는 고개를 저었다.

‘나는 용사다.’

세상에게 선택받은 용사. 진정한 용사만이 뽑을 수 있는 노슬릿을 수천 년만에 처음으로 뽑은 용사!

‘나는 할 수 있다!’

그렇게, 용사 레스카피는 자신만만하게 듬직한 등을 제국의 모두에게 내보인 채 마왕성을 향해 백마를 타고서 돌격하였고.

···정확히 사흘 뒤.

[78레벨의 주인공을 사냥하였습니다.]

시체가 되어 돌아왔다.

*

“······이제, 용사는 없네요.”

마왕성의 가장 끝자락, 모든 악마가 몰살당하여 시체밭이 된 성벽의 위에서 니샤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이 모든 악마는 용사 레스카피가 죽인 게 아니었다. 거의 대부분은, 유서담이 해치워둔 채였다.

어쩔 수 없었다. 그렇다고 진짜로 마왕성 내부로 공주를 데리고 들어가면 둘 다 죽는다.

“원래부터 없던 것이기도 하지.”

유서담은 바닥에 성검 유슬릿을 꽂아넣었다. 뽑은 이후로 단 한 번도 휘두르지 못한 바로 그 신성검. 바로 옆에는 레스카피가 죽으면서 놓아두고 간 두 번째 신성검 노슬릿이 있었다.

“이제······. 세상은 어떻게 될까요?”

“글쎄. 최소한 멸망을 잠깐 비껴나갔겠지.”

“네?”

이 세상에 현재 진행되는 이야기의 테마는 용사와 마왕이다. 그러나, 그런 흔한 클리셰가 아니었다.

『용사는 세상을 구하지 못했다』

즉, 용사가 마왕을 물리치지 못한다는 ‘클리셰 비틀기’가 적용된 세계.

마왕을 물리치지 못한 용사는 과연 어떻게 되는가, 를 주제로 다룬 이 세계의 결말은 결국 정해져 있었다.

세상 모두가 멸망한 이후, 용사는 자신의 아내들과 함께 이 세상을 탈출하여 다른 세상으로 건너간다. 그것이 유서담이 보았던 원래의 결말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 이야기는 없다.

용사 레스카피는 죽었고.

파스스······!

“시, 신성검이··· 사라지고 있어요···!”

신성검 두 자루가 모두 빛이 되어 사라졌기 때문이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요? 당신이··· 용사가 되나요?”

“에헤이, 나한테 그만큼이나 안 어울리는 수식어도 없겠네.”

“하지만 세상은 여전히 용사가··· 필요해요.”

그 말에 피식 웃은 유서담은 성벽 너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주인공이 사라졌고, 주인공 보정이 사라졌기에.

이제 세상을 둘러싸고 있던 강력한 제약이 모조리 소멸되었다.

두두두두······!!

“온다.”

“저건······!”

나부끼는 붉은색의 깃발. 그것은 틀림없는 안와르 카멜 제국 기사단의 깃발이었다. 유서담은 그런 기사단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들고있던 에테르 블레이드를 니샤 카멜에게 건네주었다.

“비싼 건데, 그냥 돌아가기 찝찝해서 빌려줄게.”

“이건 서담님의 검이 아닙니까?”

“아니. 그냥 검이 아니야. 세 번째 신성검이야.”

“세 번째라구요? 그럴 리가···.”

“왜? 두 번째도 있는데 세 번째라고 없으리란 법은 없잖아?”

“저, 정말인가요?”

믿을 수 없다는 듯 니샤가 되묻자, 서담은 에테르 블레이드의 버튼을 딸깍거리며 답했다.

“아니. 사실 뻥이야.”

“···네에?”

“그걸 드는 데에는 그 어떤 자격도 필요없거든. 그냥 들고, 버튼을 누르면 빛이 나와.”

하지만.

“검을 들 자격은 검이 정하는 게 아니라, 사람이 스스로 증명해야지. 이제부터 그건 세 번째 신성검이야. 세상 모두가 세 번째 신성검의 존재를, 그리고 네가 신성검을 들 자격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있도록 직접 나서도록 해.”

“그런······.”

“그게 네가 진짜로 하고 싶었던 일 아냐?”

그 말에 벼락을 맞은 듯 니샤 카멜은 몸을 움찔 덜었다.

맞는 말이었다.

니샤 카멜. 그녀는 제국의 가장 아름다운 꽃이라는 이명보다는, 차라리 한 명의 전사로서 악마에게 맞서 싸우고 싶었다. 그러나 그저 온실 속의 화초로 살아와야만 했던 그녀에게 기회란 주어지지 않았다. 이 세상에는 마왕에게 대적하여 싸워줄 용사가 존재했고, 그녀는 그저 용사의 아내가 될 운명이었으니까.

하지만 용사가 죽어버린 세상이라면, 이제 그 누구라도 용사가 될 수도 있다는 의미.

한때 아름다운 꽃이었던 니샤 카멜은 에테르 블레이드를 받아들이고서 잠시 망설이더니, 자신의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그것은 새하얀 꽃 한 송이였다. 작고 여리지만, 그래도 생생하게 생명을 간직하고 있는 꽃. 그녀는 그 꽃 한 송이를 유서담의 가슴팍에 꽂아주었다. 별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는 그 꽃은 지금 이 순간, 유서담에게 줄 수 있는 유일한 선물이기도 했다.

이윽고 유서담과 눈을 마주한 그녀는 싱긋 웃고서는, 당당한 걸음걸이로 성벽의 끄트머리로 향하였다.

그 아래에는 제국의 기사단이 용맹한 두 눈동자로 이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구름과 어둠이 걷히고, 이른 여명의 빛이 쏟아져 내려온다.

그때, 최초의 빛기둥 하나가 니샤 카멜을 비춘 것은 정말··· 정말로 ‘우연’이었다.

“모두 듣거라!”

“······!”

마왕성의 성벽 끄트머리에서, 납치당한 줄로만 알았던 니샤 카멜이 모습을 드러내자 제국의 모든 기사들이 고개를 들어 경악하였다.

“고, 공주님···!”

“황녀님이다! 황녀님이 계신다!”

수만의 백성들이 자신을 바라보는 바로 그 자리에서, 니샤 카멜은 에테르 블레이드를 치켜들어 버튼을 꾹 눌렀다. 누구라도 할 수 있고, 누구라도 들 수 있는 검이었지만 지금 이 순간, 모두의 시선을 현혹하기에는 아주 충분한 과학장비였다.

니샤 카멜은 좌중을 둘러보았다.

“이전대의 용사는 죽었다.”

이윽고, 에테르 블레이드에서 아름다운 빛무리가 터져나오며 니샤 카멜은 낮지만 모두에게 울리는 목소리로.

“그러니, 이제부터 마왕은 내가 잡겠다.”

그렇게 말했다.

[간섭할 수 있는 이야기가 없습니다.]

<개연성을 모두 소모하였군요. 원래의 시간대로 돌아갑니다.>

[시간을 빠르게 되돌립니다.]

세상의 시간이 가속되었다.

하루가 단 몇 초만에 흘러 지나갔으며, 한 달이 몇 분만에 유서담의 뺨을 스쳐서 뒤로 사라졌다. 빠르게 흐르는 시간 속에서 니샤 카멜은 점점 더 성장해갔다.

본래라면 멸망했을 세계에서 니샤 카멜은 제국의 모든 병력을 이끌고서 마왕에게 맞서 싸웠다. 마왕이 본래의 힘을 제대로 되찾지 못한 지금, 그것은 꽤 해볼만한 전쟁이었다.

니샤 카멜은 더 이상 가장 아름다운 꽃이라고 불리지 않았다.

가장 강인하고 용맹한 전사. 그것이 안와르 제국의 황녀, 아니 여황을 칭하는 말이었다.

그렇게, 어느 날.

마왕은 쓰러졌으며, 마왕성의 위에 니샤 카멜은 세 번째 신성검을 꽂아넣었다.

용사 없이 이뤄낸 최초의 승리.

그곳에서, 니샤 카멜은 손을 번쩍 들어 제국의 깃발을 휘둘렀다.

[시간이 안정됩니다.]

[현재 시각: 3070년 5월 30일]

[현재 장소: 안와르 카멜 제국, 황제의 집무실]

“···유서담?”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갈색의 머리칼에 갈색의 눈동자를 가진 여황 니샤 카멜이 집무실에 앉은 채 얼떨떨한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어리지만, 당당했던 한 명의 여인에서 현명한 황제가 된 니샤 카멜.

“맙소사···.”

그녀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유서담을 향해 걸어오다 문득 그의 가슴팍으로 시선이 갔다. 수십 년 전 그날, 장난삼아 꽂아두었던 꽃 한 송이. 그날 이후로 단 하루도 시들지 않은 꽃은 여전히 아름답고 향기로웠다.

“많이 컸네.”

“······네. 당신은 여전히 그대로군요.”

니샤는 유서담과 눈을 마주한 채 입을 뻥끗 열었다가 다물기를 반복하였다. 그 수십 년의 세월 동안, 마음의 기둥이 되어주었던 바로 그 남자가 나타났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하고 싶은 말은 정말 많았다. 매일 밤, 그가 갑자기 나타났을 때를 대비하여 가장 멋있고 힘찬 대사를 준비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나타나지 않았고, 기다림마저 잊어버렸을 무렵.

마침내 모습을 드러내었다.

“······가끔, 꿈을 꾸곤 했습니다. 매일 똑같은 내용의 꿈이었죠.”

“무슨 꿈?”

“그 꿈속의 저는, 멸망해버린 세상에서 혼자 살아남았더군요.”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린 세상. 마왕이 퇴치되지 않은 세상. 그리고, 용사가 세상을 등지고 도망쳐버린 그 세상 속에서 니샤 카멜은 홀로 남아 쓸쓸히 멸망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고 있었다.

“끔찍한 꿈이었습니다. 마왕은 분명히 퇴치되었음에도, 왜 그런 꿈을 꾸는지 이유를 알지 못하였죠. 그리고 오늘, 마침내 꿈이 마무리되었습니다. ···꿈의 마지막에 당신이 제앞에 나타났거든요.”

<아무래도 시간선이 뒤바뀐 것을 희미하게나마 감지한 모양입니다. 위대한 운명을 가진 위인이로군요.>

니샤는 희미하지만 꽤 밝게 웃었다.

“당신은 그때부터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세상이 멸망했던 이야기를 모두 걷어내셨군요.”

“아니, 근데 크게 의도한 일은 아닌······.”

“감사합니다.”

사실 다른 말은 필요없을지도 모르겠다.

“그날 이후로, 정말 열심히 살았고 또 싸웠습니다. 싸우고, 또 싸우다가 너무 지쳐서 주저앉고 싶을 때마다 항상 당신을 떠올렸습니다.”

“······.”

“정말로 감사합니다.”

그에 서담은 잠시 침묵하다가, 날짜를 확인하고서 입을 열었다.

“생일 축하한다.”

이윽고 유서담의 모습이 사라지자 그가 서있던 자리를 한참이나 바라보던 니샤는 고개를 푹 숙였다. 결국, 마지막에 보여주고 싶던 것은 보여주지 못했다.

“······.”

집무실에서 빠져나온 니샤는 황궁의 정원으로 향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니샤는 마왕군에게 대적하며, 어떤 일에 온 신경을 집중하였다.

한때 악마라 불리웠던 유서담의 이미지를 다시 영웅으로 각인시키는 것.

그리고 그건 꽤 성공적이었고, 마침내는 황궁에 그의 동상을 세울 수 있었다.

거의 5m는 넘어갈 듯한 그의 동상에 도착한 니샤는 가만히 그것을 바라보았다.

“멋있는 동상이네요.”

옆에서 목소리가 들려오자, 니샤는 고개를 돌렸다. 검은색 생머리에 푸른색 눈동자를 가진 소녀 한 명이 어느 사이엔가 자신의 옆에 서있었다. 아무나 함부로 들어올 수 없는 곳임에도 불구하고, 니샤는 경계심을 가지지 않았다. 자신의 인생에 누군가가 불쑥 튀어나는 것에는 익숙해진 참이었기에.

“나의 세계를 구해준 분이지.”

“그런가요? 여전하시네요, 저분은.”

“유서담에 대해 잘 아는가?”

“잘은 몰라요. 잘 알고는 싶지만요. 그래서 이렇게 찾아왔는데, 너무 멀리까지 와버렸나봐요.”

소녀는 동상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이내 콧가를 장난스레 찡그렸다.

“근데 저 동상···. 원판보다 더 잘생긴 것 같은데요? 특히 콧날이 조금···.”

“후후. 기억이란 시간이 흐를 수록 미화되기 마련이니까.”

니샤는 그리 말한 뒤 소녀를 다시 쳐다보았고,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10대 중후반의 어린 소녀였던 그녀가 어느 사이엔가 빠르게 자라서 20대 중후반의 여인이 되어있었기 때문이다.

“···자네, 정체가 뭔가?”

“아, 또 이러네. 죄송해요. 제가 능력이 부족해서···. 차원문을 통과할 때 뒤틀린 시간의 파편에 노출됐거든요. 그분은 이런 걸 어떻게 뚫고 다니시는 건지···.”

그리 말하더니 여인은 품에서 목걸이를 꺼내서 어루만지며 씁쓸하게 웃었다. 그것은 이 세계에는 존재하지 않는 물건, 총알로 만들어진 목걸이였다.

“제가 찾고 있어요, 교수님.”

이윽고 그녀는 나타났을 때처럼 소리없이 모습을 감추었다.

< 이야기를 걷는 시간(Time lapse)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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