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야기를 걷는 시간(Fast forward) >
니샤를 납치하기 위해 찾아온 악마는 잠입 능력은 뛰어났으나, 생각보다 약했던 덕분에 단칼에 베어버릴 수 있었다. 악마의 시체가 서서히 증발하는 것을 확인한 나는 니샤에게 무어라 말을 하려고 했으나.
[주인공 ‘레스카피’의 스토리에 편승합니다.]
[시간을 빠르게 앞당깁니다.]
세상이 이질적으로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니샤의 목소리가 점차 멀어지더니, 삽시간에 낮과 밤이 수십 번이고 지나가기 시작한 것.
마치 시간을 빨리감기 한 것처럼 말이다. 감각 자체는 차원이동을 했을 때와 비슷하지만, 그보다는 조금 나은 기분이었다.
[현재 시각: 3021년 5월 30일]
[현재 장소: 안와르 카멜 제국, 빅토리안 기록관]
시간을 확인하니 그때 이후로 일 년이 흘러있었다. 몸을 돌려 뒤를 쳐다보자, 10살의 니샤가 천천히 걸어오다가 나를 발견하고선 어깨를 흠칫 떠는 게 보였다. 그리고 그 뒤쪽으로 보이는 어둡고 질척한 무언가.
악마였다.
나는 망설임 없이 검을 휘둘러 악마를 쳐냈고.
[주인공 ‘레스카피’의 스토리에 편승합니다.]
[시간을 빠르게 앞당깁니다.]
[현재 시각: 3022년 5월 30일]
[현재 장소: 안와르 카멜 제국, 아덴의 정원]
다음 해, 니샤의 열한 살 생일로 이동하였다.
그날도 어김없이 나는 악마의 목을 베었고.
[현재 시각: 3023년 5월 30일]
12살.
[현재 시각: 3024년 5월 30일]
13살.
[현재 시각: 3025년 5월 30일]
14살.
[현재 시각: 3026년 5월 30일]
15살, 악마의 목을 베었다.
그리고.
[주인공 레스카피의 에피소드 ‘(프롤로그)공주, 납치되다’가 변화됩니다.]
에피소드가 변화됨과 동시에, 이번에는 3년의 시간이 한꺼번에 점프되었다.
[현재 시각: 3029년 7월 19일]
[현재 장소: 안와르 카멜 제국, 백설관의 단상]
[에피소드 ‘용사의 탄생(1)’에 개입합니다.]
*
니샤 카멜이 열여덟의 나이가 되던 해였다.
‘세상을 구원할 용사를 찾는다!’
재앙의 마왕, 오메가의 강림.
그를 해치울 수 있는 자는 오로지 신성검 유슬릿을 뽑아 신의 선택을 받은 용사만이 가능할지니, ‘백설관의 단상’에는 지금도 세계 각지의 용맹한 전사들이 모이고 있었다.
제국의 유일한 황녀였던 그녀는 굳은 표정으로 단상을 지켜보았다.
“와아아아!”
수많은 용사의 손을 거친 위대한 카멜 제국의 상징, 신성검 유슬릿이 꽂혀있는 단상을 중심으로 사방에는 수만의 관중이 모여있었다.
‘재앙의 마왕 오메가가 깨어났다!’
그 소식에 절망할 틈도 없이, 황제가 용사를 소집한 것은 참으로 현명한 판단이었을 것이다. 지금도 모든 백성들이 용사의 탄생을 고대하고 있었으니까.
그것은 수천 년 제국의 방식.
오로지 용사만이 마왕에게 대적할 수 있으며, 신성검 유슬릿은 반드시 용사에게만 반응한다는, 그런 황당한 이야기.
‘이해할 수 없어.’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었다.
신성검 유슬릿에 무언가 특별한 능력이 있는 걸까? 그런 것도 아니다. 그냥, 반짝이고, 날이 잘 들고, 그게 끝이다. 그런데도 그 검을 뽑을 수 있는 용사만이 마왕을 물리칠 수 있다니. 그런 황당한 전승을 지적할 수 없는 것은, 감히 수천 년의 역사에 대들기엔 자신이 살아온 세월은 고작 20년도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와아아아아!!”
“칼덱스! 칼덱스!”
단상 위로 어떤 사내가 올라서자 사람들이 환호한다. 척 봐도 산전수전 다 겪은 것 같은 전사로 추정되는 그 사내는 그런 관중들에게 손을 들어 보답하더니, 신비로운 은색의 검을 향해 걸어갔다.
이윽고는, 은색의 검을 쥐고서 힘을 빡 주었는데.
“흐읍, 으흐으읍!!”
···은색의 검은 미동도 하지 않았고, 서서히 환호성 역시 잦아들었다.
“칼덱스님도 용사가 아니라고?”
“말도 안 돼. 혼자서 수천의 대군을 상대하신 칼덱스님이 용사가 아니라면 대체 누가······.”
뻘쭘해진 칼덱스는 그대로 단상에서 내려왔으며, 이윽고 수많은 전사들이 단상으로 올라섰으나 그 누구도 검을 뽑지 못했다. 니샤는 감정도 없고, 감흥도 없이 전사들이 검을 뽑기 위해 애쓰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한 명씩, 한 명씩.
위대한 전사들이 올라와 검을 쥐었고, 포기하던 그 무렵.
흠칫, 그녀의 어깨를 떨게 만드는 누군가가 단상 위로 올라왔다.
익숙한 얼굴이었다.
검은색 머리칼에 흰색 눈동자를 가진 남자. 상당히 나이를 먹은 것 같은 눈빛의 분위기와는 달리, 상당히 젊은 외모를 한 그 남자는 자신의 꿈에서 항상 등장했던, 유서담이 틀림없었다.
"···왜 그러느냐, 니샤."
"아···."
황제의 물음에, 그제야 니샤는 자신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있음을 깨달았다. 상당히 예의가 없는 행동이었으나 그런 것을 신경쓸 기색도 없이 니샤는 다시 자리에 앉아, 유서담이 하는 행색을 지켜보았다.
‘신성검 유슬릿이라.’
꽤 흥미로운 에피소드였다. 검을 뽑은 자, 용사가 된다.
그것이 바로 용사 레스카피가 탄생된 신화의 시작일 터.
‘그럼, 검을 내가 먼저 뽑으면 용사가 아예 탄생 못하지 않을까?’
그렇다.
애초에 주인공을 탄생시키지도 못하게 만든다면.
그리고, 검을 뽑음으로서 개연성을 충분히 소모한다면?
그야말로 일석이조!
<현재 보유한 개연성으로 충분히 검을 뽑을 수는 있습니다.>
<주인공의 탄생 신화 자체를 저지한다니. 제 기준으로는 참으로 신선하군요.>
‘좋았어.'
어쨌든 이 이야기가 마무리될 수도 있다는 뜻이니까.
그런 생각으로 유서담은 차분히 신성검으로 다가가 손을 대었고, 그 순간.
번쩍!
하늘에서 빛의 기둥이 떨어져 내리더니, 그대로 신성검 유슬릿이 뽑혀나왔다.
"오오! 이럴수가!"
"용사의 탄생이다!"
[주인공 레스카피의 에피소드 ‘용사의 탄생(3)’의 변화를 감지합니다.]
사방에서 환호성이 터져나온다. 빛으로 이루어진 기둥이 이 세상의 주인공을 축복하는 스포트라이트마냥 서담을 비춰주었으며, 황제마저도 기립하여 박수를 쳤다.
새로운 용사의 탄생!
새로운 역사의 시작!
[축하드립니다! 안와르 카멜 제국의 용사로 선택받으셨습니다!]
[그러나 정당한 방법으로 용사가 되지 못한 당신!]
[주인공의 물건을 훔친 죄로 ‘악역’으로 지정됩니다!]
상관없다. 악당이든 뭐든, 어쨌든 용사가 되면 그만이니까. 서담은 그리 생각하며 기쁜 마음으로 검을 하늘 높이 치켜들었고.
[···신규 에피소드 ‘두 번째 성검(1)’이 발생합니다.]
━
<두 번째 성검(1)>
사실 아무도 몰랐지만 안와르 제국에는 성검이 두 자루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진정한 용사 중의 용사, 오로지 하늘의 선택을 받은 용사만이 뽑을 수 있어 수천 년이 넘도록 봉인되어 있었지만 용사 '레스카피'에 의해 세상에 드러나게 되는데...
두 번째 성검에 숨겨진 진실을 파헤쳐라!
━
그것을 읽은 서담은 황당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아니 미친. 돌았냐고.’
떡밥조차 없었던 개연성 제로의 두 번째 성검의 등장!
뜬금없는 막장 전개에 유서담은 어이가 없다는 얼굴을 지은 채, 그 자리에서 빛이 되어 사라졌다.
[주인공 ‘레스카피’의 스토리에 편승합니다.]
[시간을 빠르게 앞당깁니다.]
[현재 시각: 3030년 6월 30일]
[현재 장소: 안와르 카멜 제국의 수도, 카멜리시안]
*
니샤는 9살 때의 일을 떠올렸다.
그날 악마가 나타나 그녀를 습격하였으며, 어떤 사내가 막아주었다.
‘오늘 일어난 일은 악몽이야.’
또한, 사람들은 말했다.
‘공주님, 그날밤에 일어났던 일은 악몽일 뿐입니다.’
하지만 니샤는 알고 있었다.
그날 일어난 일은 실제이며, 악몽이 아니라는 사실을.
유일한 증거인 악마의 시체는 번번이 증발하였으며, 증인이나 다름없는 ‘그 남자’ 역시도 악마를 퇴치한 직후 사라지고 없었기에 그 누구도 니샤의 말을 믿어주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매년 자신의 생일 때면 나타나는 그분을 믿었고, 점점 악마를 두려워하기보다 생일을 기다리게 되었다.
그러나 열다섯의 생일을 마지막으로 그 남자는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고, 니샤 또한 그를 한 여름 밤의 꿈이라고 애써 잊어가던 무렵.
그 남자가 나타났다.
용사의 탄생을 축복하는 바로 그 자리에!
그러나.
‘그 남자는 사탄이다!’
‘성검을 훔쳐간 사악한 마귀다!’
다음 해, 수천 년 전 봉인되었던 전설 속의 성검을 찾아낸 진정한 용사 레스카피가 나타나 그의 존재를 부정하였다. 사람들은 반신반의하였으나 가짜 용사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결국 제국에서는 신성검 유슬릿을 들고 사라진 유서담을 수배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니샤만큼은 그를 믿었다.
어린 시절의 꿈을 지켜주었던 그 남자가, 어떻게 사탄일 수 있냐는 말이다.
그러나 아무도 그녀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니샤가 가장 믿었던 하녀, 기사, 귀족들은 물론이요 심지어 황제마저도 레스카피의 편을 들어주었다.
‘네가 아직 꿈을 꾸고 있는 모양이구나.’
그런 모욕적인 말을 내뱉으며.
믿을 수 없었다.
마치 이 세상이 레스카피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만 같았다.
‘이게 아닌데.’
니샤는 레스카피의 눈을 마주보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는 듯한, 저 역겨운 시선을 견딜 수가 없었다. 마치 혀로 핥는 듯한 불쾌한 눈빛. 니샤는 레스카피와 단 한 번도 눈을 마주하지 않았으나, 불행하게도 용사 임명식 당시 그녀와 처음 마주한 그는 공주님이 참으로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제가 마왕을 토벌하고 돌아오면, 공주님께 청혼해도 되겠습니까?’
그에 황제는 기쁜 듯이 흔쾌히 허락하였고.
쿵, 니샤는 가슴에 천근 무게의 돌덩이가 떨어져내린 느낌이었다.
싫었다. 저 끔찍한 남자에게 시집을 가는 것은. 차라리 돼지에게 시집을 가고 싶다며, 아버지에게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이 세상의 단 한 명뿐인 용사. 그가 없으면, 마왕을 잡을 수 없다.
‘···나 한 명의 인생을 희생해서, 모두가 행복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겠지.’
세상에서 가장 멋진 남자, 용사 레스카피.
그의 청혼을 받았다는 사실에 세상 모두가 니샤 카멜을 축복하였다.
이 세상에서 가장 멋진 용사와 가장 아름다운 공주의 만남!
그러나.
니샤 카멜은 자신을 그저 ‘가장 아름다운 공주’ 취급을 받는 것이 싫었다. 용사의 앞에는 ‘가장 강한’, ‘가장 위대한’, ‘가장 용맹한’ 등의 수식어가 붙으면서 어째서 자신은 그저 ‘아름다운’ 혹은 ‘꽃’ 따위의 수식어가 붙는단 말인가.
‘···아니. 내 잘못이겠지. 내가 얌전히 온실 속의 화초로서 살아온 잘못이야.’
그녀는 천천히 목검을 내려놓았다. 온몸에는 잔근육이 꿈틀거리며 땀이 비오듯 흐르고 있었고, 손바닥은 온실 속의 화초라기엔 거친 굳은살로 가득했다. 그간 숱하게 노력해온 흔적이었으나 세상 그 누구도 니샤 카멜을 한 명의 전사가 아닌, 아리따운 공주로 기억하였다.
“열심히 하네.”
문득, 들려오는 목소리에 니샤 카멜은 뻣뻣하게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어린 시절 매 생일 때마다 꿈에 나타나던 바로 그 남자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랜만이네요.”
검은색 머리칼에 흰색 눈동자.
니샤 카멜은 그와 눈을 마주하며 환하게 웃었다.
“이 사기꾼. 세상 모두가 당신을 증오하고 있어요.”
“알아.분위기 살벌하더라고. 세상에, 두 번째 성검이 대체 뭐람.”
농담조로 말을 하는 그에게서 크게 위기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니샤 카멜은 목검을 내려놓고서 천천히 그에게 다가가, 뺨을 쓰다듬었다. 꿈인지 아닌지, 과연 실존하는 인물인지를 확인하고 싶은 것처럼.
“당신은··· 그날 이후로 하나도 변하지 않았군요. 시간을 거슬러서 달려온 사람처럼···.”
그에 서담은 능청스럽게 대꾸했다.
“가끔 신나는 일이 있을 땐 시간이 빨리 가고는 하잖아?”
“후후. 그런가요.”
니샤는 빠르게 나이를 먹었고, 빠르게 철이 들었다. 올해로 열아홉. 그러나 어지간한 성인보다도 더욱 성숙하고 무거운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사람들은 당신을 보고 어느날의 꿈일 뿐이라고 그랬어요. 꿈에 나타났던 악마도, 그리고 나를 구해준 어떤 용사도 전부 꿈이라고.”
“그럴 수도 있지.”
“하지만 아니네요. 이렇게 제 앞에 나타나셨잖아요.”
그녀는 그리 말하며 유서담의 손에 들려있는 신성검 유슬릿을 가리켰다.
“그리고···신성검은 여전히 빛을 발하고 있어요. 봐요, 당신 또한 세상이 선택한 용사가 틀림없어요.”
“아, 이건 그. 음··· 좀 사정이 있어서. 빛은 나는데 효과는 없다고 해야 할까. 그냥 후레쉬보다는 조금 더 나은···?”
니샤의 말과는 달리 서담은 상당히 착잡한 심정이었다. 성검을 뽑으면 어떻게든 주인공을 방해할 수 있을 줄 알았건만, 오히려 도움을 줘버린 꼴이 되었으니까.
게다가 서담은 신성검 유슬릿의 진정한 효과를 발휘할 수도 없었다. 그건 개연성의 소모 여부가 문제가 아니라, 발동하는 순간 이쪽 세상에서 '주인공 화'가 진행될 수도 있다고 의뢰인이 말했기 때문.
“지금 내가 상당히 골치가 아픈···아니지, 잠깐.”
자신은 쓸 수 없는 신성검, 목검을 휘두르느라 엉망이 된 니샤, 그리고 에테르 블레이드를 번갈아보던 서담은 문득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야, 넌 신성검 쥐어본 적은 있어?”
“네? 아뇨. 저는 자격이 없습니다.”
“음.”
마왕과 용사의 클리셰 하나.
마왕은 용사에게 꾸준히 시련을 내려주고, 용사는 그것들을 격파해가며 레벨 업을 한다.
1레벨의 잡몹, 2레벨의 졸개, 3레벨의 장군, 4레벨의 흑마법사, 5레벨의 사천왕, 마지막으로 마왕. 이런 식으로 말이다.
그 어떤 세력도 개입하지 않는, 그 오랜 시련의 과정에서 용사는 마왕을 물리칠 힘을 얻고 마왕 또한 봉인되어있던 힘을 되찾는다.
즉, 50년 뒤의 그 재앙이었던 거신 오메가는 아직 없다는 의미.
그제야 서담은 이 세상이 어째서 멸망했는지를 깨달았고, 뭔가를 말하러는 그때..
“이거 그냥···.”
갑작스레 연무장으로 기사들이 우르르 들이닥쳤다.
“저, 저쪽이에요! 공주님께 사탄이 접근하는걸 제가 봤어요!”
어떤 여인이 다급한 표정으로 이쪽을 가리킨다. 수백의 기사들은 사명감에 물든 표정으로 공주를 지키기 위해, 그리고 신성검을 훔쳐간 사탄을 처단하기 위해 전력으로 달려오고 있었는데.
그 광경을 보고서.
유서담은 씨익 웃으며, 니샤의 허리에 손을 감아 허공을 박차고 날아오르며 외쳤다.
“으하하! 공주는 떡국의 악마, 유서담이 데려가겠다! 그녀를 구하고 싶다면 일주일 안에 마왕성으로 찾아와라!”
[신규 에피소드 ‘공주, 사악한 악마에게 납치되다?!(1)'가 발생합니다!]
< 이야기를 걷는 시간(Fast forward)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