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야기를 걷는 시간(Rewind) >
‘주인공이 될 수도 있다.’
그건 내게 있어서 꽤 충격적인 말이었다.
일종의, 시한부 선고를 들었을 때와도 비슷한 기분이었다.
주인공, 언뜻 좋아 보이는 단어였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음을 나는 알고 있다.
그들이 하는 모든 행동 하나하나가 사실은 세계가 정해준 개연성의 흐름대로 가는 것이며, 자신의 의지가 거의 개입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주인공이 된다는 건, 곧 언 발에 오줌을 눈다는 뜻이나 마찬가지라고 보면 되겠다.
당장은 얼어버린 발이 따뜻해지겠지만······. 곧이어 발은 동상에 걸려버릴 것이다.
세계가 강제로 쥐여준 억지 클리셰와 개연성을 통해 손쉽게 얻은 것들은 금방 내 손을 떠나갈 것이고, 또한 내가 사는 세계는 얼마 지나지 않아 무너져내릴 것이다.
“······주인공이 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데?”
<물론 지금 당장 문제가 있는 건 아닙니다, 그러니까 제 말은···.>
“정신 차려. 네가 왜 횡설수설하는데?”
내 머릿속에 각인된 의뢰인의 이미지는 마치 기계처럼 냉정하고 언제나 차분한 여자였다. 그런데 내가 주인공이 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 나타나자, 지나치게 눈에 띄게 당황하는 게 보였다.
“개연성이 넘치면 이걸 어떻게든 소모하면 되지 않아?”
<개연성은 소모하면 할수록 점점 더 쌓이기 마련입니다. 만약 당신에게 1레벨의 기연이 주어지면, 곧바로 2레벨의 기연이 준비됩니다. ‘개연성 인플레이션’이라 불리는 현상으로 주인공이 반드시 이전보다 더욱 강하고 자극적인 기연을 얻는 일을 뜻합니다.>
“골때리네.”
잠시 고민해보았지만, 역시 방법은 하나밖에 없었다.
“그냥 예전처럼, 차원이동을 반복하면서 개연성을 소모할 수는 없는 거야?”
<한 번의 차원이동으로 소모하기에는 지나치게 개연성이 많아졌습니다. 게다가 짧은 시간 내에 반복적인 차원이동을 할 경우 심신이 크게 지칠 수 있습니다.>
“그럼 차원이동보다 덜 피로하고, 개연성도 소모하는 건 없어?”
<······있습니다.>
“오? 뭔데?”
<시간 여행입니다.>
갑자기?
내가 살짝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짓자, 의뢰인은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라는 듯이 말을 이어나갔다.
<이 세상에는 수많은 타입의 ‘개연성’이 존재합니다.>
회귀, 빙의, 환생, 전이, 전생.
<이들 중, ‘회귀’는 시간 여행과 아주 밀접한 관계에 있지요.>
“오···. 그래서 나보고 회귀를 하라고? 지구에서?”
<아니요! 큰일날 소리를 하시는군요. 평범하게 지구에서 회귀를 했다가는, 그냥 주인공과 다를 게 뭐가 있습니까?>
“······어, 그래.”
<지구에서는 결코 시간을 건드려서는 안 됩니다. 또한, 평범하게 시간을 과거로 되돌리는 ‘회귀’ 또한 절대로 금지합니다. 주인공이 되는 과정을 가속할 뿐이니까요.>
“그럼 뭐 어쩌라고?”
의뢰인은 잠시 고민하더니, 이내 방법을 찾은 듯 한결 밝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이걸 생각못했군요. 서담 헌터께서 주인공 살인청부를 위해 전이라는 개연성을 비틀어, 다른 주인공의 이야기 속으로 빠져드는 ‘차원 개입’을 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헐.”
처음 알았는데.
<그렇다면 회귀 또한 비틀어서, 주인공의 이야기 속으로 ‘시간 개입’을 하면 될 것 같습니다.>
“시간 개입?”
<그렇습니다. 이야기의 흐름 속으로의 개입을 반복적으로 하여, 체내에 쌓인 개연성을 모조리 소모하는 것이지요. 이번에 주인공 사냥꾼 스킬의 레벨이 4가 되면서, 개입이 가능해져서 정말 다행입니다.>
“오. 괜찮은데.”
<네. 하지만 아무 세계에서나 시간 개입을 남용할 수는 없습니다. 과다하게 시간 개입을 했다가는 개연성의 충돌이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죠.>
“어디서 쓰면 좋은데?”
<주인공에 의해 개연성이 이미 모조리 소모되어, 이미 되돌릴 수 없을 정도로 멸망을 향해 달려가는 세계.>
“···음.”
<그런 세계라면, 문제가 없을 겁니다.>
나는 세상이 멸망하는 광경을 직접 본 적은 없다. 다만, 이전번에 현실에 나타난 던전 속으로 들어가서 세상이 멸망할 경우 어떻게 되는지를 간접적으로 체험한 적이 있었다.
세상의 모든 개연성을 소모한 주인공은 여태 손쉽게 얻었던 모든 것을 잃는다. 서서히 세계는 붕괴해 모든 생명과 문명이 소실되며, 그 과정에서 아주 희미하게나마 개연성을 보유하고 있는 주인공만이 마지막까지 살아남아 세상의 멸망을 지켜본다.
<마침···. 적당한 세계가 하나 있습니다. 이미 세상이 종말하였으며, 그리고 주인공의 개연성으로 인해 진정한 ‘멸망’으로 달려가는 세계.>
“···보여줘봐.”
눈앞에 해시 태그 하나가 떠올랐다.
『용사는 세상을 구원하지 못했다』
#판타지 #용사 #악마
#약탈 #생존 #절망
━
<줄거리>
악마에 의해 종말해버린 세상.
용사는 세상을 구하지 못했다.
━
“······해시 태그부터 줄거리까지 아주 살벌한데?”
듣기만 해도 정말 가고 싶지 않은 곳이다.
“여기도 주인공이 있나?”
<있습니다. 다만, 통상적으로는 유서담 헌터께서 그곳의 주인공을 사냥할 확률이 운명적으로 0%입니다. 죽음과 관련된 개연성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지요.>
개연성에 의한 죽음은 주인공을 사냥하는 데에 있어서 필연적인 것이다. 나는 여태 꽤 많은 주인공을 사냥했고, 거의 대부분 ‘개연성에 걸맞는 죽음’을 선사해주었다.
하지만, 레벨 500의 달마지존조차 개연성이 있었거늘 아주 간혹 그런 개연성이 없는 주인공이 존재한다고 했다. 아마도 지금 향하려는 세계의 주인공이 그런 모양.
<하지만······. ‘시간’을 키워드로 집어넣을 경우, 사냥에 성공할 확률이 아주 미세하게나마 높아졌습니다. 그래서 이 세계를 선택한 것이기도 합니다. 물론, 사냥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개연성을 소모하는 게 중요하기 때문이지요.>
“그래···. 알았다.”
<출발하시겠습니까?>
“에휴. 그래, 가자고.”
여차하면 개연성만 잔뜩 쓰고 도망쳐 나오면 되니, 문제는 없을 터다.
[경고!]
[스킬 ‘백색 마녀의 도서관(D)’을 공유하고 있는 영혼이 한 개체 있습니다.]
“예카테리나를 말하는 거야?”
[스킬 ‘백색 마녀의 도서관(D)’의 일부를 해당 개체의 정신에 남겨놓으시겠습니까?]
그러고 보니 그걸 생각 못했다.
예카테리나의 영혼은 내 머릿속에 있다. 그런데 내가 그녀의 영혼을 데리고서 다짜고짜 세계를 이동하면, 그녀의 육신은 그대로 이곳에 남아 텅빈 껍데기가 되어버릴 터. 그건 그거대로 문제가 된다.
“남겨놔.”
[스킬 ‘백색 마녀의 도서관(D)’의 일부를 복사하여, 해당 개체의 정신에 남겨놓았습니다.]
이제 예카테리나의 영혼은 온전히 지구에 남아있을 수 있을 것이다.
“출발하자.”
[219레벨의 주인공 ‘레스카피’의 세계, ‘안와르 카멜 제국’으로 이동합니다.]
[10···9···8···.]
세상이 점점 흐릿해지더니, 이윽고 빛이 터져나온다.
[2···1···0]
[이동이 완료되었습니다.]
[현재 시각: 3070년 5월 30일]
[현재 장소: 거신 오메가의 마왕성]
그리고, 눈을 뜨자.
세상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뭐···야?”
비유가 아니었다.
가루가 되어, 먼지가 되어, 빛이 되어.
정말로 세상이 사라지고 있었다.
땅은 점차 소멸되고 있었고, 결국 사방은 깎여나간 절벽이 되었다. 저 밑으로 떨어지면 무엇이 기다릴까? 나락, 혼돈? 공포?
그런 멸망의 한가운데에는, 키가 하늘까지 닿는 거대한 거인 하나가 걷고 있었다.
온몸에서 태양처럼 눈부신 빛을 발광하는 거인. 만약 신이 이 세상에 현신하면 저런 모습이지 않을까.
세상은 비좁았다. 모조리 소멸되어, 이제는 남은 것이 거의 없었다. 태양은 마지막으로 이 세계를 비추겠다는 듯, 하늘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나는 멍하니, 하나의 세계가 멸망하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이제보니 거인따위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저건 신처럼 보였을 뿐, 신도 무엇도 아니다. 그저 멸망하는 세계를 부여잡으며, 살아남기 위해 울부짖고 있을 뿐이었다.
“···당신, 누구야?”
뒤쪽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린다.
그곳에는 중년의 여인 한 명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온몸이 진흙투성이에, 다 찢어지고 썩은 옷을 입고있는 그녀였지만 맑은 갈색의 눈동자만큼은 밝게 빛나고 있었다.
머리 위를 확인해본다. 주인공의 마크는 존재하지 않았다. 나는 본능적으로 질문을 던졌다.
“다른 생존자들은?”
그러자 그녀는 떨리는 눈동자로 나를 쳐다보더니, 이내 고개를 저었다.
“모두 죽었다. 이제, 남은 사람은 나뿐이야. ‘용사 레스카피’를 포함한 7인의 생존자는 ‘방주’를 타고 다른 세계로 떠났어. 이제 이곳은 끝이야. 당신도, 나도, 그리고 세계를 멸망으로 이끌고 간 저 ‘재앙의 마왕 오메가’도··· 모두 사라지겠지.”
뾰족귀의 여인은 마왕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 눈에는 증오와 연민이 동시에 담겨있는 것처럼 보였으나, 사람의 감정을 읽는 데에 익숙하지 않는 나는 잘 이해할 수 없었다.
“용사는 세상을 구하지 못했어.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
마치 일기를 써내려가듯 중얼거리는 그 말을 가만히 듣던 나는, 입술을 떼었다.
“이름은?”
“하, 세상이 무너져 내리는 와중에도 통성명이라도 하자는 건가?”
“나는 유서담. 사냥꾼을 하고 있어.”
“···내 이름은 니샤 카멜. 안와르 카멜 제국의 여왕이자, 마지막 생존자다. 아니, 마지막 생존자였었지. 살아남은 사람이 설마 한 명 더 있었을 줄이야······.”
니샤는 멍한 눈으로 거인을 바라보다가, 문득 나와 눈을 마주쳤다.
그러고선 천천히 무언가를 중얼거린다.
“그때······.”
그건 나에게 하는 말이 아니었다. 내가 아닌 저 너머의 어떤 과거를 회상하며, 그리고 또 후회하며 내뱉은 그런 한 마디.
“내가 용사에게 의지하여 가만히 안주하지만 않았더라면···. 아니. 애초에 내가 그를 받아들였다면, 달라졌을까······?”
정말로 의미없는 그런 한 마디.
하지만 그 말을 듣는 순간, 갑작스레 세상이 일그러지기 시작하였다.
[주인공 ‘레스카피’의 스토리에 편승합니다.]
[시간을 과거로 되돌립니다.]
[현재 시각: 3020년 5월 30일]
[현재 장소: 안와르 카멜 제국, 아카시아 제3 황궁 - 황녀의 침소]
눈을 뜨자.
갈색의 아름다운 눈동자가 여전히 나를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니샤?”
“절 아세요?”
“······?”
구토가 치밀어 오를 것 같은 멀미 증세를 애써 가라앉히고, 정신을 차린다. 다시 보니 눈앞의 갈색 눈동자는 니샤가 아닌, 그보다 훨씬 어린 10대 초반의 소녀였다. 아니, 어쩌면 그보다도 더 어릴지도 모른다.
“무슨······?”
주위를 둘러보자, 웬 중세풍의 침실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것도 돈을 치덕치덕 발랐다는 게 느껴질 정도로 으리으리한 황궁. 창밖을 내다보니 화창한 햇살이 창문에 드리운 채였다.
천천히 창문으로 다가가, 창밖을 내다본다.
하늘을 찌를듯 드높은 고성이 유난히도 눈에 띈다. 마법적인 무언가가 건축물을 지탱하고 있었는지 백색 마녀의 도서관이 시키지도 않는 검색을 마구잡이로 해댄다. 그것의 알람을 끄고 가만히 살펴보고 있자니, 확실하게 알 수 있는 점 하나.
이 세계의 마법기술력은 어마어마하게 발전해있었다. 어쩌면, 비비안타 제국만큼이나.
<50년의 과거로 시간을 되돌렸군요. 이야기의 개입에 성공하였습니다.>
‘허···. 대단한데······.’
비비안타 제국의 수준과 비슷한 마도학을 가진 이 아름다운 세계가 바로 멸망한 세계를 그리는 이야기의 시발점이었다.
다시 고개를 돌린다.
갈색 눈동자를 가진 소녀가 나를 멀뚱멀뚱 쳐다보고 있었다.
“네 이름이 니샤니?”
아마도 50년 뒤에 보았던 그 니샤의 어린 시절인 모양.
“맞아요. 아저씨는 누구세요?”
“나는, 음. 그냥 지나가던 사냥꾼인데······.”
생각해보니, 니샤는 공주라고 했다. 그리고 여기는 아마도 50년 전 니샤 공주가 쓰던 침소일 터. 나는 공주의 침소에 무턱대고 침범한 수상쩍은 사람으로 보일 게 뻔했···으나.
어째서인지 그녀는 나를 멀뚱멀뚱 바라보며 미소를 지을 뿐 소리를 지르거나 경비를 부르지는 않았다.
“저, 꿈속에서 아저씨를 본 것 같아요.”
“뭐? 나를?”
“네! 저랑 눈을 마주치고서 무어라 하셨던 거 같은데······.”
몰라. 내가 왜 네 꿈에 나와?
“글쎄. 그나저나 오늘이 무슨 날이니?”
이야기에 편승하였다고 했으니, 분명 아무 날이나 찾아오지는 않았을 터. 내 질문에 니샤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
“제가 9살이 되는 날이에요!”
······그런 건 별로 궁금하지도 않다.
그나저나 니샤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니, 새삼 이 세계의 줄거리가 이해가 되었다.
용사와 마왕. 흔하디 흔한 클리셰다. 요즘에는 쓰이진 않았지만 옛날 동화책에서는 마르고 닳도록 쓰이던 것이니까.
‘용사와 마왕이라. 보통, 이럴 때 쓰이는 클리셰는······.’
그 순간, 내 육감이 ‘시선’을 경고하였다.
섬뜩한 감각이 등줄기를 타고 내려가자, 나는 잽싸게 니샤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싱글벙글 웃으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니샤. 뒤 돌아보지 마. 알겠지?”
“네?”
어둡고, 질척한 감각이 황녀의 침실을 가득 메운다. 용사와 마왕의 클리셰는 너무나도 진부하고 오래 전에 들었던 게 마지막이라 까먹고 있었지만, 흔히 쓰이는 전개가 딱 하나 있지 않던가?
‘공주 납치.’
그것도, 생일날에 공주가 납치되는 전개는 필연적인 요소라고 봐도 무방.
쩌억, 쩍-!
문틈새 사이로 비집고 들어오는 질척한 무언가. 마치 어둠을 닮은 그것은, 필히 ‘악마’이리라.
“니샤. 잘 들어. 지금 너는 악몽을 꾸는 거야. 알겠지?”
“네, 네···.”
니샤를 향해 조심스레 손을 뻗자, 악마가 반응하여 내쪽으로 소리보다도 빠르게 달려왔으나.
···서걱!
그 악마의 움직임보다도 빠르게 에테르 블레이드를 사출해낸 내 손에 의해 악마의 목이 떨어져나갔다.
[이야기의 흐름이 변동되어, 시간을 앞당깁니다.]
< 이야기를 걷는 시간(Rewind)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