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는 매일 악몽을 꾸고는 해요(2) >
[긴급 탈출 시퀀스를 사용합니다.]
달마지존의 수도가 내 목을 내려치려는 순간, 세상이 뒤바뀌었다.
울렁.
“윽!”
10초의 준비 시간조차 없이 차원을 이동하는 반동이 상당히 큰 것인지, 머리에 어마어마한 두통이 몰려왔다.
[긴급 탈출 시퀀스를 사용하였습니다.]
[수명이 30일 소모됩니다.]
[시간배속이 5배 이상인 차원으로 이동하였습니다.]
[해당 조건을 추가한 대가로 수명이 10일 소모됩니다.]
[주인공이 존재하지 않거나, 사냥에 성공할 확률이 90% 이상인 차원으로 이동하였습니다.]
[해당 조건을 추가한 대가로 수명이 30일 소모됩니다.]
도합, 70일의 수명을 썼다.
긴급 탈출에 ‘조건’까지 걸어서 그렇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현대에 판을 벌여놨으므로 빠르게 복귀하기 위해서는 언제든지 돌아갈 수 있는 주인공이 없는 차원이거나, 사냥 성공률이 90%로서 높은 차원으로 이동하는 것이 좋을 텐데.
‘그래도, 수명을 쓴 대가로 달마의 마지막 약점을 알아냈어.’
70일의 수명 정도는 어차피 달마지존을 사냥하면 복구하다 못해 차고 넘친다.
게다가 죽을 위기를 고작 두 달의 수명으로 벗어날 수 있다면, 이 얼마나 남는 장사란 말인가?
“긴급 탈출을 아무 때나 쓸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말이야.”
<안타깝지만 그건 불가능합니다.>
<또한, 최소 1년은 재사용이 불가능합니다.>
“왜?”
<헌터 유서담의 수명만을 소모하는 게 아닌, 저의 힘을 소모하기 때문입니다.>
요약하자면, 자기가 힘들어서 못 쓴단다.
‘그렇단 말이지······.’
처음에는 의뢰인이 신적인 존재로 보였다. 아니, 사실 신적인 존재가 맞긴 맞을 것이다. 그런데 이연준을 사냥한 직후 스킬을 자유자재로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줬을 때나, 더 아라슈를 사냥한 이후 ‘자신의 모습’을 형상화한 직후 의뢰인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인간으로 치면 잠이라도 자고 있었으리라.
즉, 의뢰인 또한 과도하게 힘을 사용하면 회복 기간이 필요하다는 의미.
보면 볼수록 의뢰인에 대한 궁금증이 피어올랐으나, 굳이 묻지는 않았다.
“그나저나, 여기는 어디지?”
주위를 둘러보자, 온통 새하얀 건물의 안쪽이었다. 여느 때처럼 ‘어느 차원에서 당신은 무엇입니다.’라는 친절한 설명 문구도 없어서 여기가 어딘지, 또 뭘 하는 곳인지도 알 수 없다. 의뢰인 또한 해당 차원이 어딘지 파악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며 말이 사라졌다.
‘그래도 주인공은 없겠지?’
내가 알기로 사냥 성공률이 90% 이상인 차원은 없다. 만약 있었다면 애초에 그런 곳만 골라서 다니지 않았겠는가? 아무리 높아도 성공률은 50% 정도에 그쳤으니까. 즉, 이곳은 주인공이 존재하지 않는 차원일 확률이 높다.
‘이틀. 이틀 뒤에는 무조건 지구, 아니 히말라야 산맥으로 돌아가야 해.’
히말라야 산맥으로 향하는 건 문제없다. 긴급 탈출 시퀀스의 또다른 효과로, 지구로 귀환할 때 거리에 따라 수명을 지불하면 원하는 장소로 이동할 수 있기 때문. 나는 그에 추가 수명을 또 지불하여 히말라야 산맥으로 곧장 이동할 생각이었다.
다만 이곳에서 나가는 게 문제였다.
주인공을 사냥할 경우 그에게서 일부 흡수한 개연성을 모조리 사용하여, 의뢰인이나 나나 별 탈 없이 차원 이동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주인공이 없는 세계의 차원이라면 흡수할 개연성이 없다. 또한, 나는 ‘주인공’이 아니기에 개연성을 어디서 가져오는 게 불가능. 즉, 나는 나대로 차원 이동에 필요한 수명을 다량으로 사용하고 의뢰인은 또 지쳐서 나가떨어질 수도 있다는 말이다.
‘우선은 이곳에 대해 파악해봐야겠어.’
처음으로 낯선 차원에서 의뢰인의 도움 없이 활동해야만 했다. 맨 처음 토너먼트에 떨어져서 주인공을 사냥했던 때의 그 긴장감이 온몸을 감돌았다.
‘여긴 미술관···인가?’
에테르 블레이드를 움켜쥔 채 주위를 슬쩍 둘러보자, 벽에는 웬 액자같은 것들이 가득 걸려있었다. 크기도 다르고 모양도 다른 그 액자의 안에는 아무런 그림이나 사진조차 없이 온통 새하얀 색이었는데, 손바닥을 가져다 대자 갑작스레 경고 메시지가 떠올랐다.
[스킬 ‘백색 마녀의 도서관(E)’이 발동됩니다.]
[접근 권한이 없어, 그림을 확인할 수 없습니다.]
“······뭐?”
뜬금없이 네가 왜 나와?
그럼 이 액자도 마법과 관련된 물건이란 말인가? ‘접근 권한’이라는 말은 상위 랭크의 서고에 접근했을 때만 떠오르는 줄 알았는데, 대체 뭐지?
그때, 주인공 사냥꾼의 시스템 메시지까지 떠오른다.
[주인공 예카테리나의 스킬 ‘악몽의 미술관(URS)’를 확인하였습니다.]
“······미친. URS랭크라고? 아니, 이게 그렇게 흔한 랭크였어?”
시간을 되돌리는 스킬조차 SSS랭크다. 세계를 창조하는 정도는 되어야만 URS급 정도는 되는 줄 알았는데, 이 미술관이 뭐라고 이토록이나 랭크가 높단 말인가?
[스킬 ‘백색 마녀의 도서관(E)’이 발동되었습니다.]
[해당 장소가 ‘마녀의 예언’과 관련된 정신세계임을 확인하였습니다.]
“뭐? 예언?”
갈수록 기가 찬다.
URS랭크의 스킬로 이루어진 장소가 예언과 관련이 있다니.
“근데, 아무것도 안 보이잖아?”
[접근 권한이 없습니다]
떠오르는 메시지를 보며 액자를 어루만지는데, 퍼뜩 위화감이 들었다.
“······잠깐. 주인공이라고?”
내가 긴급 탈출을 시도한 차원은 90% 이상의 확률로 주인공을 사냥할 수 있는 세계였다. 내 기억상 그런 세계는 없었으므로 주인공이 없는 세계로 이동했을 터. 근데, 주인공이 존재한다면······.
퉁, 퉁···.
퉁퉁···퉁···!
그때, 복도 저편에서 무언가 바닥을 튕기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잽싸게 긴장감을 끌어올리고서 시선을 돌리자.
그곳에는.
죄다 새카맣게 타버린 피부를 가진, 거대한 얼굴에 하나뿐인 다리를 가진······ 기괴하게 생긴 ‘여자’가 이곳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의 머리 위에 떠오르는 해시 태그.
『저는 매일 악몽을 꾸고는 해요』
#공포 #스릴러 #미스터리
#악몽 #루프 #절망
[주인공 예카테리나]
[Lv. 519]
키릭, 킥.
고개를 갸우뚱, 돌리자 머리가 거의 90도 이상 회전하며.
정확히.
나와 눈을 마주쳤다.
“······519?”
뭔가 잘못 본 건가 싶은 생각에 눈을 깜빡이는 그 순간.
퉁퉁퉁퉁퉁!!!
퉁퉁퉁!!
퉁퉁퉁퉁!! 퉁퉁!!
그것이 소리를 가뿐히 뛰어넘는 속력으로 나를 향해 달려오기 시작하였다!
“90%라며!!”
뒤도 돌아볼 필요 없다.
이건 절대로 이길 수 없는 싸움.
다행스럽게도 바로 앞쪽에는 새하얀 문이 있었고, 이판사판으로 그곳으로 뛰어들어 문을 닫은 뒤 철컥 잠금쇠를 잠그자 신기하게도 더 이상 주인공이 쫓아오지 않았다.
“허억, 헉. 와, 씨. 존나 놀랐네···. 뭐야 저건?”
주인공이라며.
주인공은 항상 모든 개연성의 축복을 받는 존재가 아니었던가? 무얼 하든 잘 되고, 성공하고, 사이다를 먹는. 그런 ‘클리셰’를 받아먹는 존재.
<해당 주인공은 개연성을 흡수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즉, 사냥할 필요가 없는 주인공.>
<그래서 의뢰 대상에서 제외되었습니다.>
‘···그런 거야?’
하긴, 이 세상에는 수많은 ‘장르’가 존재하며 호러물의 주인공이라면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서담······?”
“어?”
흠칫!
뒤쪽에서 웬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잽싸게 돌려 에테르 블레이드를 겨누었다. 그곳에는 웬 새하얗고 얇은 수건 한 장만을 달랑 걸친 자그마한 여인이 주저앉아 있었다.
색이 바랜 백발, 시력이 없는 듯한 투명한 눈동자. 그 신비로운 아름다움에 깜짝 놀란 것도 잠시.
쿠구궁!!
문을 부수고서, 저 미친 껄쭉이가 튀어 들어오자 나는 다급히 그 여인을 옆구리에 끼고서 앞으로 몸을 날렸다.
“젠장! 야 화분! 뭐라도 좀 해봐!”
-나는 달팽이다···.
“이 쓸모없는 정령 놈아! 일 좀 해!”
잽싸게 인벤토리에서 폭탄을 있는대로 죄다 꺼내서 바닥에 집어던진 뒤 한 번 더 구르자, 화분이 마법을 발동하여 이리저리 사방으로 폭탄을 재배열하였다. 처음 몇 발은 직접적으로 타격을 입혔으나 이내 소용이 없다고 판단했는지 화분은 폭탄의 목표를 바꾸어, 아예 미술관의 바닥이나 벽을 터뜨렸다.
아예 이동경로를 방해하겠다는 판단. 꽤 현명한 판단이었으나, 역시나 데미지를 제대로 입힐 수는 없겠다고 생각한 그 순간.
키에에에에엑!!
갑작스레, 깜찍한 껄쭉이 괴물이 비명을 내지르며 추격을 멈추었다.
“오···?”
설마, 데미지가 있는 건가?
그런 마음에 껄쭉한 퉁퉁이 괴물을 잽싸게 스캔해보았지만 여전히 상처는 하나도 없었다.
“이거, 설마?”
혹시나 싶은 마음에 전력질주를 멈추지 않은 채 폭탄을 한곳으로 모조리 굴려서 터뜨리자, 바닥에 크게 크레이터가 생겼다. 직후, 퉁퉁이가 방금보다도 더욱 괴로운 듯 괴성을 고래고래 지르기 시작하였다.
“···미술관이 피해를 입으면 같이 아파하는 건가?”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한 줄기의 빛!
인벤토리에서 폭탄을 죄다 꺼내 사방에 투척한 뒤, 메가 슈터로 신나게 난사를 하였다.
“핫하! 이 못생긴 괴물아! 죽어라!”
바닥을 집중포화했던 덕분일까, 뻥 뚫린 바닥으로 괴물이 추락하였고 나는 그곳을 향해 재차 폭탄 몇 개를 집어던지기 위해 인벤토리에 손을 뻗었다.
그러나 그 순간.
“아악! 아파요! 그만두세요!”
내 옆구리에 매달려있던 여인 역시도 찢어질듯 비명을 질렀다. 황급히 그녀를 바라보니 닭똥같은 눈물이 눈가에 그렁그렁 맺혀있었다.
“아니, 너는 왜···어?”
그제야, 그녀의 머리 위에 떠있는 해시 태그가 시야에 들어온다.
『저는 매일 악몽을 꾸고는 해요』
#공포 #스릴러 #미스터리
#악몽 #루프 #절망
[주인공 예카테리나]
[Lv. 6]
저 괴물에게서 보았던 그 태그와 똑같은 것이, 눈앞의 여인에게도 존재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주인공이 두 명이라고?”
하지만 내가 알기로 주인공이 같은 세상에 두 명 이상 존재하면, 그 세상은 에필로그로 접어들게 된다.
<이 세계의 주인공은 한 명입니다.>
<다만, 한 명이 시간의 뒤틀림으로 인해 두 명이 되었군요.>
‘뭐?’
다시 이름과 레벨을 확인한다.
이제보니, 아까 그 주인공과 이름은 같았음에도 레벨은 이상하리만치 낮았다. 일반인의 수준조차 되지 못할 정도로 허약하디 허약했다.
아니. 그것보다도 더 의문스러운 점이 하나 있었다.
“···그러고보니, 너. 내 이름을 어떻게 아는 거야?”
레벨은 6이라지만, 절대 긴장을 놓아선 안 된다. 나 또한 저레벨의 신체로 고레벨의 주인공을 숱하게 사냥해왔기 때문이다. 그녀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서 눈물을 찔끔 흘리더니, 천천히 바닥으로 내려왔다.
아래층은 상당히 떨어진 공간이었는지, 더 이상 껄쭉이의 비명소리가 들려오지는 않았다. 예카테리나라는 이름의 그 여인은 천천히 심호흡을 하며 숨을 가다듬더니, 고개를 들어 나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알 수밖에요. 저는 당신을 본 적이 있어요.”
“뭐? 너 지금 나 처음 보는 거잖아.”
“아뇨. 당신이 저를 처음 보는 거죠.”
“···뭔 개소리야?”
그녀는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내게 천천히 손을 뻗었다. 혹시 공격하려는 건가 싶어 에테르 블레이드를 겨누려고 했지만 예카테리나는 이상하리만치 무방비한 자세로 비틀비틀거리며 손을 뻗었는데, 마치······ 내게 도움을 청하는 듯한 태도여서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다.
“유서담···. 유서담 헌터. 정말, 만나고 싶었어요.”
“···너는 대체 누구야?”
“저는 지구의 유일한 예언가, 예카테리나.”
“······뭐?”
그제야, 예카테리나라는 이름이 무엇인지에 대해 떠올랐다. 러시아에서 흔히 쓰이는 종류의 이름이 아니던가? 너무 예쁘고, 귀여워서 한때 유행했을 정도로 흔한 이름, 예카테리나.
“너··· 혹시, 지구인이야?”
“맞아요. 당신은 꼭 아닌 것처럼 말씀하시네요···.”
“나도 지구인은 맞긴 하다만···. 아니, 그럼 여긴 지구라는 거야?”
어느덧 숨결이 닿을 정도로 가까이 다가온 예카테리나는 손을 뻗어 내 뺨을 어루만졌다. 마치 내가 실체인지 아닌지 확인하고 싶은 듯, 세심하고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아뇨. 여기는 제 꿈속이에요. ······그래서, 묻고 싶어요. 여기는 어쩌다가, 어떻게 오셨어요?”
“아니. 뭐, 그냥. 지나가는 길이었는데.”
“지나가는···길? 그, 그럼 여길 들어오는 법과 나가는 법을 알고 계신 건가요?”
“···대충은?”
“아······!”
내 말이 떨어지자, 예카테리나가 새하얗고 마른 팔로 내 손을 부여잡고서 필사적으로 외쳤다.
“그, 그렇다면 저도 여기서 꺼내주세요! 제발요, 부탁이에요! 더 이상 이곳에서 머물고 싶지 않아요! 저 괴물이 저를 죽이려고 한단 말이에요!”
그러나, 그녀의 말은 내게 썩 이상하게만 들렸다.
그도 그럴게.
“방금의 괴물을 말하는 거라면······, 저건 미래의 너잖아?”
왜 미래의 자신이, 과거의 자신을 해친단 말인가?
< 저는 매일 악몽을 꾸고는 해요(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