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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주인공은 살인이다-67화 (67/251)

< 무武와 협俠은 중대문제다(1) >

예사혜가 헌팅 서포터 지망생을 그만두고, 학과 조정과 집안 사정까지 고려하여 길드 가입의 도장을 찍는 데까지 걸린 시간은 정확히 사흘이었다. 그녀는 생각보다도 훨씬 더 헌터라는 직업에 대해 목이 말라 있었고, 열망이 아주 철철 흘러넘치다 못해 과했다.

추측이지만 예사혜가 만약 원래대로 달마의 곁으로 갔다면, 그 재능과 열정을 바탕으로 무공을 빠른 속도로 습득하여 이동준의 강력한 전력이 되었을 수도 있다.

미리 가로채서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 벌써 길드원을 셋이나 구했다고?

“어.”

류진수는 내게서 비즈니스적인 무언가를 본 것인지, 그도 아니면 정말로 16년이나 친구로 지내왔던 우리 사이 때문인 건지 내 길드 설립에 적극적으로 협력해주었다.

-위혼과는 어떻게 됐어?

“글쎄? 난 사이 좋다고 생각하는데 걘 아닌가봐.”

-친구끼리 사이좋게 지내야지.

“네가 할 소리냐?”

-나는 전부 다 사이좋게 지내고 있는걸.

류진수는 누구에게나 예의를 차린다. 소문으로 듣자하니 집에서 기르는 고양이한테도 존댓말을 한다는데, 16년 지기인 나조차도 그건 못믿겠다. 여하튼 누구에게나 사근사근 다가가는 류진수였지만, 유독 동기들과는 전혀 가까워지질 못했다.

테일러는 애초부터 류진수의 그 능글맞은 웃음이 재수가 없다며 꺼려했으며, 지금은 헬로니란 이름을 쓰고있는 그 여자는 류진수와 무슨 사연이 있는 듯싶었고 위혼은······. 음. 얘는 그냥 질투심에 눈이 멀어서 그렇다.

요는 류진수의 사교성이 굉장히 뒤떨어지는 것과도 마찬가지라는 말이 되겠다. 그저 사근사근 다가간다고,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잘생긴 얼굴로 예쁜 멘트 좀 던진다고 해서 인간관계라는 게 좋아지는 게 아니란 것을 류진수는 아직도 모른다. 아마 쟤는 ‘전통’을 중요시 여기는 길드가 아니라 사업쪽으로 나갔으면 상당히 큰일났을 거다.

-어쨌든, 이번에 엽수 산업체에서 너와 자주 이야기해보고 싶다니까 잘 해봐.

“꿀팁같은 건 없냐? 장비 조금 더 뜯어오는 방법같은거 말이야.”

-우리 길드는 산업체의 지원을 안 받아서 모르겠는데.

“······.”

그러고 보면, 류진수는 초능력을 각성하고서 그 점을 아주 잘 이용해 떼돈을 벌어들였다. 지금도 굳이 장비의 협찬을 받을 이유도 없을 정도로 자금력이 넘쳐날 것이다. 나처럼 어딘가의 후원을 기대하기 보다는, 아예 전용 공방이 있을 수도 있는 노릇. 여러모로 류진수의 길드를 따라잡으려면 멀었다.

-아무튼 수고하고. 다음에 연합 건으로 시간 나면 연락할게.

“그래.”

류진수. 여러모로 껄끄럽고 부담스러운 친구였지만, 길드를 설립하는 데에 가장 큰 도움이 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실 위혼의 도움이 더 컸던 것 같지만.

이제 길드를 설립하는 데에 필수적인 요소는 거의 다 갖췄다. 얼마 전 헌터 협회의 본부에서 길드 설립의 승인까지 떨어진 상태였으니까.

그러나, 가장 중요한 부분이 없었으니.

“으응? 길드를 바로 만드는 게 아니었어?”

“예. 최소 2년은 잡고 있거든요.”

“왜?”

“건물이 없거든요.”

“아······.”

하선영은 내 말에 벙찐 표정을 지었다. 길드를 설립하겠답시고 사람 모집하고 다니는 놈이 제대로 뭘 갖추지도 못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지난번 SS랭크 대균열 때 꽤 많은 돈이 수중으로 떨어졌고, 이제 더 이상 값비싼 장비에 의존하지 않아도 되는 덕분에 어디로 돈이 샐 일은 없다지만 아직은 돈이 나갈 구석이 많았다.

길드 사무소의 가장 중요한 포인트 중 하나는 바로 초능력을 시험하거나 훈련을 따로 할 수 있는 시설이었는데, 초능력자의 출력을 버티기 위한 시설이 딸린 사무소를 구하려면 돈이 꽤 깨진다.

“···그럼 나는 2년 동안 뭘 하란 말이야?”

이러한 부분이 문제였다. 예사혜의 경우에는 대학을 병행하면서 관장님의 도장을 빌려 검을 가르쳐도 되고, 달마의 딸램 신혜지는 아무데나 방치해놔도 지 아빠 무공 잘 받아먹으면서 자랄 테지만 검희는 무공이 금제당해 아무것도 못하는 일반인이었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뭐, 하시던 일 없으세요?”

“PC방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긴 했지. 저번에 카페 아르바이트하다가 잘렸거든. 손님들이 자꾸 추근거려서 결국 참다못해서 지랄 좀 했더니 바로 사장님께서 나를 고이 출구로 모셔주시더라. 어휴, 벌어 먹고살기 힘들고 팍팍해 진짜.”

“······.”

그녀는 농담조로 그리 말했지만, 나는 웃을 수 없었다.

모든 무공을 봉인 당한 무림인들은 자신들의 그 능력을 제대로 살리지도 못한 채, 그저 공사판이나 아르바이트 등을 전전하며 살아간다고 한다. 너무 오랜 세월 사회에서 벗어나 있었기 때문에 현대에 적응하기도 어려울뿐더러 배워둔 것도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저 능력을 헌팅에 써먹을 수 있었다면. 하다못해 더 이로운 곳에 써먹을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또. 뭐. 왜 그따구로 쳐다봐?”

“그냥 평범하게 쳐다봤는데요.”

“······에휴.”

그녀는 내가 무슨 생각하는지 다 안다는 듯 혀를 찼다.

“어쩌겠어. 괜히 무공 썼다가 개죽음당하기는 싫잖아? 수행을 못 해서 답답한 것도 있긴 한데 요샌 뭐, 그럭저럭 살만해.”

현재 나와 하선영은 금강 체육관에 나와 있었다. 다름 아닌 그녀의 ‘금제’를 내 두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서. 금강 체육관도 헌터 지망생들을 위한 곳이니만큼 초능력자들이 훈련을 하기 위한 장소가 따로 마련되어 있었는데, 오늘은 내가 전세를 내서 쓰고 있었다.

“그 금제를 제가 직접 봐도 될까요?”

“안 될 건 없지. 뒷 목 바로 아래쪽에 문신이 하나 새겨져 있을 거야.”

그리 말하며 하선영은 주섬주섬 상의를 풀어서 살짝 걷어 내렸다. 그녀가 머리카락을 옆으로 치워서 흘러내리게 하자, 새하얀 목의 라인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그 위에 새겨진 굉장히 이질적인 붉은색의 동그란 문신.

무공과는 동떨어진 그 문신에는 틀림없이 ‘마력’이 흐르고 있었다. 무공 또한 마력을 사용하는 건 같다지만, 저건 방식 자체가 완전히 달랐다. 마치, 마법과도 비슷한 느낌이 들었다.

‘백색 마녀의 도서관. 검색해봐.’

[스킬 ‘백색 마녀의 도서관(E)’이 발동됩니다.]

[검색 중······.]

[검색 결과: 없음]

[다른 내용으로 검색할까요?]

‘아니, 됐어.’

일단 마법은 아닌 듯싶다. 그렇다면, 도술이나 주술, 뭐 그런 걸까?

“도술이야.”

“역시 그렇군요.”

하긴. 무협지 세계관에서 파생될만한 기술에 대해 유추해보자면 도술밖에는 없다. 기본적인 틀은 마법과 굉장히 유사하지만, 온갖 회로를 때려박아 체계적으로 자연현상을 조종하는 마법과는 달리 도술은 마력 자체에 의미를 부여한 듯한 느낌이었다.

즉, 요약하자면.

‘내가 알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군.’

아쉽게 됐다. 만약 여기서 그녀의 금제를 성공적으로 해제하기만 한다면, 이동준이 몰래 활동하는 것처럼 하선영도 가면을 쓰고서 적당히 힘을 숨긴 채 C~B랭크의 헌터로서 활동할 수도 있었을 텐데 말이다.

그렇게 되면 아군이 아닌 신혜지나 아직은 지망생인 예사혜, 거래 관계인 첼레스테를 모두 제외하고서 유일하게 내가 부려먹을 수 있는 전력이 탄생하는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지금 당장 저 금제를 어떻게 해두는 게 좋을 것 같다.

도술과 관련된 무협 세계관이라도 다녀와야 하나?

-···마녀야.

‘지금 바쁘니까 나중에.’

-나 저거 알아.

‘뭐?’

그때, 머릿속에서 들려오는 화분의 목소리에 나는 정신이 퍼뜩 들었다. 그러고 보니 백색 마녀의 도서관에게 생각이나 추측 및 연구를 하라고 시킬 수는 없겠지만, 또 하나 마법을 아주 잘 아는 지적 생명체가 있지 않던가?

‘네가 도술을 안다고?’

-으응. 도사들이 쓰는 거야.

‘어떻게 아는 건데?’

-···몰라. 그냥 알아.

그러고 보면 첫만남 때도 저 은빛 정령의 꽃은 내 마법의 종류를 알아보고 마녀라고 불렀었다. 아무래도 정령은 태어나면서부터 어떠한 종류의 지식을 타고나는 듯싶었다.

‘해석할 수 있겠어?’

-으으응···.

‘······끝내면 술 한잔 살 테니까 좀 해봐.’

-해볼게!

인벤토리에서 빠져나와, 내 손바닥 위로 피어난 은빛 정령의 꽃. 그녀가 허공에 마법진을 수놓기 시작하자 나는 조심스레 손을 뻗어 금제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었다.

“읏.”

마력이 흘러 들어가자, 하선영이 고통스러운 듯한 신음을 내었다.

[백색 마녀의 도서관의 외부에서 ‘중앙처리장치’가 마법의 종류를 해석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새로운 종류의 마법을 확인하였습니다.]

[알람 및 감지 계열의 마법으로 추정.]

[해당 마법을 백색 마녀의 도서관에 기록합니다.]

백색 마녀의 도서관이 보내오는 메시지에 나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은빛 정령의 꽃이 도서관과 연결된 걸 알고 있었지만, 거기서 ‘CPU’의 기능을 하고 있었다니. 마녀와 정령의 조합. 정말 어울리지 않았다.

[마법을 해제할 경우 알람이 시전자에게 향하도록 되어있습니다.]

‘해제할 수 있나?’

[중앙처리장치가 마법의 해석을 완전히 끝낼 경우 알람을 해제할 수 있습니다.]

[처리까지 남은 시간 3시간 17분]

아마도 그 메시지는 지금 집중력을 발휘하고 있는 은빛 정령의 꽃 대신 의사를 전달하고 있는 것이리라. 은색의 꽃에 피어난 그 자그마한 소녀는 평소와는 달리 말 한 마디 없이 눈을 감고 표정을 찡그린 채였으니까.

“······어쩐지 편안한 기분이네.”

“뭐가요?”

“그냥. 외간남자에게 등이나 내보이고 말이야. 나때는 상상도 못할 일이였어. 알아?”

“······.”

현대인이 할말은 아니었으나, 무림인이라면 또 이야기가 달라진다.

“어때···? 할 수 있겠어?”

“네. 대략 네다섯 시간이면 해제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거짓말 아니지? 진짜 할 수 있는 거야?”

“제가 거짓말해서 뭐 합니까? 네다섯 시간 뒤에 들통나는 걸.”

“그건 그러네. ···그럼, 나 무공 쓸 수 있는 거야?”

그녀는 어쩐지 놀이터로 뛰어가는 어린아이처럼 들뜬 표정으로 물었다. 나는 그에 피식 웃으며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네. 그러니까 그만 꿈틀대고 가만히 좀 있으십쇼.”

“응!”

그 뒤로 침묵.

나는 그녀의 목에 손을 얹은 채 꾸준히 마력을 흘려보냈으며, 정령은 도술의 해석을 진행하고 있었다. 마녀나 나는 할 수 없는 일. 그러나 마녀와 도사를 모두 아는 정령만이 할 수 있는 일.

그렇게 한참, 시간이 흘렀을 무렵.

하선영이 입을 열었다.

“그거 알아?”

“······.”

“40년 전, 아니 현대 기준으로 20년 전이려나. 난 무림의 세계에 가서도 거지였어. 다른 지구인들이 그 재능을 선보여서 남궁세가니, 곤륜이니 청성이니 화산이니. 하여튼 구파일방인지 뭔지에 들어가서 무공을 배울 때에도 나는 길거리를 전전하면서 간신히 칼밥이나 얻어먹었지.”

“그랬군요.”

“그래서 남들한테는 다 있는 별호가 나한테는 좀···. 엉성해. 태극검제니 황룡권황이니 뭐 그런 거 있잖아. 나는 그냥 검희야. 여자인데, 칼질도 잘 한다 해서 검희. 후우······. 나도 좀 멋있는 별호 좀 생각해둘걸. 이제와서 후회된다 진짜.”

“멋있긴 한데 현대인 감성으로는 조금··· 그렇지 않습니까?”

“얘가 뭘 모르네. 별호는 천하가 모두 인정해야만 쓸 수 있는 거라고. 그게 얼마나 명예로운 일인 줄 알아? 아, 그래. 내가 너한테 별호 하나 지어줄까?”

“···방금 천하가 인정해야만 쓸 수 있는 거라고 했잖습니까?”

“내가 인정하면 그게 곧 천하가 인정하는 거지!”

그녀는 꺄르르 웃으며 이야기 보따리를 풀었다.

그 뒤로도 하선영의 이야기는 한참이나 계속되었다.

아무것도 없던 무일푼 소녀가 무림에 떨어져서 기연과 인맥의 끄트머리조차 잡지 못해 구르고 또 굴렀던, 그냥 그런 이야기.

금제가 해석되기까지 시간은 많았다.

그러나 한 명의 소녀가 무림에 떨어졌던 이야기를 풀어내기엔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었다.

*

아시아 대륙 남부를 달리는 산계, 히말라야 산맥.

총길이 2,400km의 이 어마어마한 크기의 산맥은 31년 전 ‘대전쟁’ 이후로 몬스터들이 점거하여 현재도 인간들이 되찾지 못하고 있는, 잃어버린 땅 중 하나였다. 물론 현대에 들어서서 제 땅을 찾기 위해 인도, 네팔, 중국 등에서 꾸준히 원정대를 보내 몬스터들을 소탕하고 있다지만 그래도 여전히 정복되지 못한 땅이 더욱 더 많았다.

한때, 세계의 지붕이라 불렸으나 지금은 지옥의 땅이 되어버린 이 히말라야 산맥의 어딘가에 자리한 자그마한 오두막.

그곳에는 ‘설중연’이 살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갇혀있었다.

휘오오오······!!

히말라야 산맥에는 이제 365일 그치지 않고 눈이 내린다. 눈은 끊임없이 내리고, 녹아서 다시 구름이 되어 눈이 되어 내린다. 원인은 모른다. 그저 대전쟁 직후 발생한 어떤 던전과 현실이 융합되어 이런 현상이 발생했다는 것만 알 수 있을 뿐.

설중연은 멍하니 내리는 눈발은 바라보았다. 오두막에 쳐진 결계 덕분에 추위를 느끼지는 않았으나, 결국 오두막 바깥으로 나갈 수는 없다는 말이 되겠다.

“······.”

한때.

그녀가 천하를 호령했었다 하여, 마도천하의 시대라 불리던 시절이 있었다.

천지를 개벽하는 마魔. 천마신교의 교주. 천마 설중연.

그녀에게는 원대한 꿈이 있었고, 그것을 함께할 제자와 수하들이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없다.

낯선 세계.

무와 협이 중시되는 그런 세계에 떨어져 그 누구도 자신을 받아주지 않았을 때에, 유일하게 그녀를 거두어주었던 자가 있었다. 천마(天魔) 갈혁준. 마도의 절대강자라 불리며 그 누구보다도 거칠고 패도적인 인물이었으나 그녀에게만은 따뜻했던 사내. 고아로 태어난 그녀에게 있어서 아버지와도 같았던 존재.

‘네 눈동자를 보니, 꼭 눈 속에서 피어난 연꽃같구나. 이제부터 네 이름은 설중연이다.’

그때부터 천마신교는 설중연의 모든 것이 되었다.

‘······오늘 이후로, 천마신교는 하늘아래에서 더 이상 그 이름을 떳떳하게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달마가 찾아와서, 모조리 부숴버리기 전까지는.

끼이익···!

문이 열리며 누군가가 들어온다.

달마, 이동준.

무림의 최강자이자 설중연의 철천지 원수. 죽어버린 설중연의 분홍색 눈동자가 서서히 그쪽을 향했다.

“식량이다.”

“······.”

설중연은 이동준을 빤히 바라보았다. 왜 천마신교를 모조리 멸문시키면서도 그가 자신만은 유일하게 살렸는가.

“네가 좋아하는 아월육(峨月肉)을 구해보았다. 지구에서는 구하기 힘든 고기니까 아껴먹도록 해라.”

이동준이 달마의 반대에도 불과하고 기어이 지구로 돌아온 이유.

바로 천마 설중연을 위해서였다.

천마신교는 무림의 절대악이었고, 그녀는 더 이상 무림의 세계에서 고개를 떳떳히 들고 살아갈 수 없는 몸이 되었다. 만약 무림맹에 노출된다면 차라리 죽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는 삶을 살아가게 될 터.

그래서 이동준은 설중연을 지구로 데려왔다. 그 누구도 그녀가 천마신교의 교주였다는 사실을 모르며, 어떠한 악행도 범죄도 저지르지 않은 세계이니까.

유일하게 설중연이 살아남아도 좋은 세계.

그러나, 설중연에게 남은 것이 아무것도 없는 세계.

설중연은 이제 더 이상 그에게 저항할 수 없었다. 그와의 결투에서 패배하였고 모든 내공이 봉쇄당하여 지금은 그저 평범한 여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으니까. 이 오두막에서 빠져나갈 수 없는 이유도, 천마가 한낱 폭설을 두려워해서였음을 과연 천하는 알고있을까.

이동준은 설중연과 눈을 마주하였다.

[주인공 이동준의 스킬 ‘매력발산(SS)’이 발동됩니다.]

[조연 설중연이 스킬 ‘천마부동심(SS)’을 발동하여 힘겹게 저항합니다.]

잠깐의 사이에 벌어진 기싸움. 이동준의 스킬은 패시브로 발산되기에 그는 몰랐겠으나, 설중연은 굉장히 힘들고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원수에게 감화되기 직전의, 차라리 혀를 깨물고 싶을 정도로 괴로운 어떠한 마음이 자꾸만 가슴을 뒤덮기 직전이었으므로.

“···너, 그 상처는 뭐지?”

문득, 이동준은 설중연의 손가락에서 피가 흐르는 것을 깨닫고서 가까이 가려고 했다. 그러나 그러기도 전에 설중연이 소리를 입술을 떼었다.

“그 이상 가까이 오거나, 네가 내 살결에 감히 손을 대면 자결하겠다.”

“······.”

그 말에 이동준조차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이 세상 모든 것이 항상 쉬웠던 그였지만, 설중연만큼은 너무나도 어려운 관문이었다. 한때 이 세상 그 무엇보다도 찬란하게 빛났던 백금발을 뒤로 스륵 넘기며 그녀는 자신의 무릎에 얼굴을 박았다.

“꺼져.”

더 이상 대화하기 싫다는 듯.

하는 수 없이 이동준은 식량을 내려놓은 채 뒤를 돌아서 나올 수밖에 없었다.

“······네가 살기 좋은 세상을 보여주고 싶었다.”

마지막으로, 자꾸만 그녀의 가슴을 뒤흔드는 한 마디를 한 뒤 달마가 사라지자 설중연은 입술을 콱 깨물었다. 이전같았으면 쓰레기 같은 소리를 하지 말라며 소리를 내질렀을 터인데, 어째서인지 자꾸만 시간이 흐를 수록 그럴 수 없게 되었다.

휘오오······!!

덜컹, 덜컹!

여느 때와 다름없이 눈보라가 거세게 몰아치는 밤.

설중연은 그저 멍하니, 새하얀 세상을 바라보며 밤을 지새웠다.

< 무武와 협俠은 중대문제다(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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