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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주인공은 살인이다-61화 (61/251)

< 백색 마녀의 도서관(1) >

쏟아지는 폭포를 등으로 직접 맞으며, 미스클렌은 눈을 감고서 명상에 잠겼다.

언제나 모든 것을 홀가분히 벗어 던지고 이렇게 폭포를 맞을 때면 머릿속이 깨끗하게 정리가 되는 기분이었다. 유서담은 폭포를 맞기 시작하는 그녀를 보며 ‘역시 수행에 폭포는 국룰이죠.’라는 쓸데없는 헛소리를 했지만 미스클렌은 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녀는 본디 대검을 다루었다.

어지간히 단련한 검객도 두 손으로 쥐고서 어깨에 걸치고 있어야 할 정도로 무거운 대검은 선천적으로 타고난 신체에 타고난 근력을 가진 미스클렌에게 딱 알맞은 무기였다. 그러나 그녀는 내심 깨닫고 있었다.

‘내 적성은 대검이 아닌, 쾌검이다.’

하지만 그런 깨달음과는 별개로, 신체는 둔하기 그지없었다. 그녀가 대검을 든 것은 선택이 아닌 필수였던 것. 살아남기 위해서는 가장 잘 어울리는 검을 들 수밖에 없었고, 평생을 대검과 함께 살아가리라 생각하였다.

그런데.

아도넨을 만나 힘을 빼앗기고, 유서담을 만나 힘을 되찾으면서.

자신이 가진 대부분의 힘을 재분배할 수 있었다.

“······.”

눈을 뜨자, 맞은편에 위치한 폭포의 아래에 유서담이 가만히 앉아있는 게 보였다. 그녀는 서서히 일어나 검을 뽑았다. 그것은 평생을 사용해오던 대검이 아닌, 날렵하고 도신도 짧은 검이었다.

느릿하게, 아주 천천히. 그저 낙엽이 떨어지듯 검을 횡으로 휘두른다.

그러나 그 검은 평생을 휘둘렀던 그 어떤 검로보다도 가벼웠으며 또한 가장 빠른 검이었다.

[미스클렌의 스킬 ‘철혈의 검로(SS)’가 ‘철풍의 검로(SSS)’로 변경되었습니다.]

폭포가 갈라졌다.

*

“너는 검술에 재능이 꽤 있는 편이다. 그럭저럭 길거리에 치이는 돌멩이보단 나은 수준이지.”

“······.”

나는 가만히 앉아서 미스클렌의 이야기를 들었다. 백년에 한번 나올까말까 한다는 A+랭크의 재능을 미스클렌은 그저 길거리의 돌멩이보다 나은 수준이라고 비유하는데도 나는 달리 할말이 없었다.

왜냐, 그녀는 나보다 더한 검술의 재능을 가지고 있었을 테니까. 또 실제로 내 원래 재능은 길거리의 돌멩이 수준이었고, 빼앗은 재능을 가지고 딱히 따지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도. 내 검로를 배우기에는 그럭저럭 적당한 수준이지.”

그녀는 회색 머리카락을 뒤로 질끈 묶은 채 가벼운 활동복 하나만을 입은 채였는데, 드러난 구릿빛의 피부에는 흉터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저게 과연 전사의 피부가 맞나 싶을 정도로.

미스클렌은 나보고 허공에 초식을 펼쳐보라 말했다.

그러나, 초식이 마땅히 없던 나는 단순히 휘두르기를 반복하였다. 형태가 없는 검술. 그저, 나 자신에게 딱 맞춰진 검술. 내 신체를 최대한으로 이용한, 하지만 그렇기에 나에게 가장 잘 맞는.

그녀는 내가 허공에 검을 휘두르는 걸 묵묵히 지켜보더니, 이윽고 입을 열었다.

“특이하군. 자신에게 가장 잘 맞는 검을 알아보는 눈은 쉽게 가질 수 없지. 너는 축복받았구나.”

“그런 셈이죠.”

사실 잘 맞는 검을 찾을 수 있던 이유는 백색검법(S) 덕분이었지만.

“하지만······.”

그녀는 잠깐 생각에 잠기더니, 내 에테르 블레이드를 바라보았다. 마치 커터칼처럼 사출되는 이 에테르 블레이드는 길이의 조절이 가능하였고, 현재는 120cm까지만 뽑은 채 에너지는 발산하지 않고 있었다.

“그 특이한 검은 길이의 조절이 되는가?”

“네.”

“그렇다면 어째서 그렇게 휘두르는 거지?”

“왜요?”

“길이를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는 검이라면······. 언제든 장검과 단검, 대검과 소검을 상황에 맞추어 사용할 수 있다는 소리지 않느냐.”

“그건 뭐···. 그렇긴 한데. 비효율적이니까요.”

“아니. 네게는 그게 가장 효율적이다.”

“예?”

그녀는 잠시 단어를 고르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네가 보여준 검은··· 마치, 도화지 같았다. 아무것도 칠해지지 않은 도화지. 먹물 몇 개가 점점이 떨어져있긴 하다만, 그 정도는 얼마든지 나라는 존재가 물감이 되어 너를 덧칠할 수 있다.”

그러더니 미스클렌은 목검을 들고 일어나, 자세를 취했다.

고작 자세를 취했을 뿐인데.

나는 마치 미스클렌이 무겁고 커다란 검을 쥐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녀는 목검으로 허공을 내려쳤고, 공기가 무겁게 갈라졌다. 이윽고 그녀는 또다른 검을 선보였다. 어떤 때는 빠르게, 어떤 때는 느리게, 어떤 때는 무겁게, 어떤 때는 가볍게.

[미스클렌이 ‘쾌속의 검로(S)’를 사용합니다.]

[미스클렌이 ‘완속의 검로(S)’를 사용합니다.]

[미스클렌이 ‘만근의 검로(S)’를 사용합니다.]

[미스클렌이 ‘경량의 검로(S)’를 사용합니다.]

미스클렌은 목검 한 자루로 수많은 검을 표현하였고, 나는 멍하니 그것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네게 가르칠 ‘물감’이다.”

A랭크의 재능. 백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 하는 재능. 분명히, 내가 가진 검의 재능은 천재 중에서도 천재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과연, 남의 검술을 훔쳐다 쓸 뿐인 데다가 제대로 된 가르침조차 받지 못한 백색검범으로 내가 얼마나 발전할 수 있겠는가?

수많은 세상, 수많은 역사 속에서 천재는 숱하게 많이 배출되었다. 그중에는 내가 가지고 있는 재능보다 월등히 뛰어난 자도 있었을 터. 태어나면서부터 천재로 타고났던 이들이 죽기 직전까지 연구했던 그 검로가 대대손손 이어져, 또다른 천재에 의해 또다시 효율적으로 개편되고 발전된 검로를 과연 나 따위가 독학한 것으로 따라잡을 수 있을까?

절대로 아니다.

미스클렌이 내 눈앞에 펼친 검로는 내가 가진 모든 검로를 쓰레기 종잇조각으로 만들어버렸다.

“충격을 많이 받은 모양이군. 하지만 네 기초는 아주 탄탄하다. 말했듯, 이 검로를 모두 네게 색칠할 수 있으니까 걱정은 하지 말도록 해라.”

“······.”

방금 미스클렌이 펼친 저 검로를 배울 수 있다. 그 생각이 들자 내 머릿속에 빛이 가득 들어차기 시작하였고.

“일어나라.”

“예.”

“이제부터 네가 이 모든 검로를 깨우칠 때까지 나와 대련을 한다.”

“예?”

그녀는 웃음기가 전혀 없는 얼굴로, 농담 같지만 농담아닌 말을 했다.

“내가 누구에게 가르친 일이 처음이거든. 그러니, 내가 직접 색칠을 하겠다.”

“······예?”

그날 이후.

지옥이 펼쳐졌다.

*

[스킬 ‘백색검법(S)’의 제2초식이 개방되기 직전입니다.]

백색검법의 제1초식은 ‘자아성찰’. 나 자신을 하나의 도화지라고 생각하고서, 내 한계를 알아내는 것이었다. 어떤 검을 사용하면 좋은지, 어떤 검술을 사용하면 좋을지, 어떤 보법, 어떤 호흡. 그 모든 것을 완벽하게 파악한 순간 제2초식이 개방된다.

검이 모든 것인 세상. 로스티슬라프 대륙의 일출은 지구보다 평균적으로 한 시간은 느리다. 그리고 일출이 시작되기 두세시간 전에는 항상 기상하여 매일같이 마당에 나가 목검을 휘두르는 게 일상이 되었다.

도시에서 꽤 떨어진 산중에 위치한 이 작은 오두막은 미스클렌이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면 돌아오는 자신만의 거처라고 했다. 당연하지만, 어디 무협지에서 스승님 모시듯 강가에서 물을 떠오거나 장작을 패는 등의 잡일도 내가 다 한다.

“······.”

멍하니 목검을 휘두르며 지난 두 달의 시간을 생각하였다.

정말 엄청나게 맞았다.

온몸이 다져지도록 처맞았다.

현재 내 레벨은 49.

<유서담>

[도합 레벨: 49]

*능력치

[근력 46] [체력 45] [민첩 49]

[기력 1] [마력 50]

*재능

[검술 A+] [사냥 D+] [사격 C]

[요리 D-] [직감 A] [기민 A]

[기타···.]

*스킬

[주인공 사냥꾼 Lv. 3]

[백색검법(S)]

[육감(F)]

[아라셀리 식 마나 써클링(SS)]

[백색 마녀의 도서관(F)]

[인벤토리(B)]

[바람처럼 달리는 법(A)]

[정신 집중(S)]

놀랍게도.

고작 두 달을 처맞았을 뿐인데, 단 한 번도 한계치에 도달한 적 없었던 능력치가 하나뿐이지만 처음으로 레벨과 똑같아졌다. 심지어 마력 스텟은 내 레벨을 초월해버리기까지 했다.

전부 미스클렌의 덕분이었다.

‘너는 마력을 왜 그따구로 다루느냐?’

‘예? 나름 효율적으로 쓰고 있는 것 같은데요.’

‘···헛소릴 하는구나. 마력을 불태워서 움직일 생각을 해야지, 왜 그걸 묵혀두기만 하느냔 말이다.’

생각해보면 간단한 문제였다.

초능력자는 ‘에테르’라는 미지의 에너지를 이용해 신체를 강화하여, 그것이 곧 강체가 된다. 하지만 나는 신체를 에테르나 마력으로 강화하지 않은 채, 순수 ‘능력치’만으로 강화를 한 채였다. 즉, 마력이라는 미지의 에너지가 거기에서 더해진다면? 더욱 폭발적으로 출력을 높일 수 있다는 의미.

물론 마력을 신체 곳곳에 퍼뜨려, 근력과 속력을 강화한다는 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랬을 것이다.

[스킬 ‘정신 집중(S)’을 사용합니다.]

이 스킬이 없었다면 말이다.

허수아비를 가만히 주시하고서 스킬을 사용하자, 세상이 천천히 느리게 느껴졌다.

내뱉은 숨, 떨어지는 땀방울, 피부에 와닿는 옅은 바람. 모든 게 선명하게만 느껴지는 그 세상 속에서. 나는 내 심장을 격렬히 회전하는 마력의 일부를 뽑아 팔에 둘렀다. 이윽고, 목검을 힘껏 휘두르자.

퍼석!

마치 날카로운 검으로 베어낸 것처럼, 허수아비가 깔끔하게 잘려나갔다.

[스킬 ‘정신 집중(S)’이 해제됩니다.]

“허억, 헉!”

하지만 이렇게 한번 휘두르고 나면, 정신력과 동시에 팔을 타고 흐르는 고통 때문에 금방 자세가 무너져버렸다. 지금도 솔직히 숨을 쉬는 것조차 곤란할 정도로 팔이 아프고 머리가 뜨거웠다.

솔직히 말해서 왜 집중력을 높이는 스킬 따위에 S랭크가 붙었는지는 모르겠다. 자체의 효과로만 따지면 F랭크 수준도 안 되는 능력을 보유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만약 체내에 마력을 보유하고 있다면 이 스킬은 어마어마한 시너지 효과를 일으킨다.

이렇듯, 마력을 억지로 쥐어짜내 불태워 사용하기 시작하자 신체 곳곳에 마력이 감돌기 시작하였고. 놀랍게도 의뢰인이 ‘절대로 능력치는 레벨보다 높을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던 법칙이 깨져버린 것이다.

당연하지만 그 어떤 신체 능력치도 이 한계를 깨뜨릴 수는 없다. 오로지, 마력이었기에 가능한 일. 애초에 내 체내에 잠들어있는 마력의 양은 49레벨이라는 조잡한 유리 그릇으로는 담을 수 없을 정도로 방대하였으니까.

이후로도 나는 멈추지 않고 내 심장을 감싸고 있는 마력을 아라셀리 식 써클링을 이용하여 끊임없이 돌리고, 또 돌렸다. 그것이 전부 고갈되어 단 한 방울도 남지 않을 때까지.

[스킬 ‘백색검법(S)’을 사용합니다.]

[스킬 ‘정신 집중(S)’을 사용합니다.]

어떤 때는 느리게, 어떤 때는 빠르게. 또 어떤 때는 무겁게, 또 어떤 때는 가볍게.

미스클렌의 손에서 펼쳐졌던 그 검로가, 지금은 내 손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완벽하지는 않다. 다만, 나는 이제 이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검을 들더라도 마음껏 나만의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되었다.

일전에는 나와 꼭 맞는 검을 들어야만 제대로 된 검로를 펼칠 수 있었다면, 지금은 그 어떤 검이라도 내게 맞출 수 있게 된 것.

이 정도면 꽤, 아니 어마어마하게 발전했다고 봐도 무방했다. 아도넨을 만나기 전, 검술의 다양한 종류를 구하겠답시며 사뒀던 검법서가 전부 쓰레기가 되어버렸다고 느낄 정도였다.

문득 눈이 부셔서 고개를 들어보니,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회귀자가 완전히 모습을 감춰, 더 이상 시간이 반복 재생되지 않는 B1의 세계선의 일출은 그저 새로운 하루를 알리는 여명일 뿐이었다.

땀에 젖은 몸을 씻기 위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화분이 말을 걸었다.

-마녀야···.

“응?”

-심심해···.

“도서관에서 책이나 읽어.”

-···다 읽었어.

“그걸 전부?”

미친. 난 아직 10%도 못 읽은 것 같은데 말이다. 정령이라서 그런지 어떤 이유에선지는 몰라도 화분은 책을 읽는 속도가 정말 어마어마하게 빨랐다.

“조금만 기다려. 여기서 마지막 검로만 수련하고 돌아갈 테니까.”

-돌아가도 심심해···.

“······그건 맞는 말이긴 하지. 뭐, 술이라도 줄까?”

-으응, 아니.

화분은 잠깐 고민하더니, 이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문 열어줘.

“문? ···너 설마, 도서관의 E랭크 출입권한 말하는 거야?”

-응···.

“야, 돌았어? 그거 열면 나 큰일난다니까?”

그러면서 무어라 나무라려고 했으나, 화분이 먼저 말했다.

-왜에?

“저번에 설명했고, 납득 했잖아. 근데 또 설명을-”

-지금은 열 수 있잖아···.

“···뭐?”

-마녀야. 문 열어줘···.

이게 갑자기 무슨 쌩뚱맞은 소리지?

화분이 가끔 칭얼대긴 했어도, 이렇게까지 떼를 쓴 적은 없다. 내가 안 된다, 라고 하면 그저 알겠다며 입을 다물고는 했었으니까. 하지만 아주 가끔 화분이 계속 칭얼대는 경우가 있었는데.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억지로 안 해줄 때만 그랬었지.’

설마하는 생각에 나는 ‘백색 마녀의 도서관(F)’을 호출하였다.

그러자.

[스킬 ‘정신 집중(S)’을 사용합니다.]

그저 반투명한 은색의 테두리만으로 이루어져있던 도서관이 점점 더 또렷하게 내게 다가오기 시작하였다.

마치, 진짜 도서관에 온 것처럼.

손을 뻗자 책장의 까칠한 감촉이 느껴진다.

마법서 하나를 꺼내 펼치자 가죽으로 이루어진 표지의 감촉이, 부드럽게 미끌어지는 건조한 속지의 감촉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미친, 뭐야 이거······?”

고개를 들어본다.

내가 방금까지 발을 딛고 서있던 현실은 더 이상 온데간데 없이 사라진 채, 정신을 차리니 나는 ‘백색 마녀의 도서관’에 도착해 있었다.

< 백색 마녀의 도서관(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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