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떠나요, 몽환의 섬(5) >
이 세계는 100개가 넘는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인간들이 본래 사용하던 섬은 단 하나. 물 좋고 땅 좋은 그곳은 아름답고 기름진 땅이었다. 거기서 과학을 발전시키고 환경을 개발하여 살기 좋은 터전을 조성하였지만···.
그것이 너무 과하여, 인구가 너무나도 폭발적으로 증가한 것이 문제였다.
섬은 너무나도 비좁았고, 늘어나는 인류를 수용하기엔 터무니없이 부족했다.
새 터전이 필요했다.
그때 나선 것이 바로 해니얼.
최초로 비행을 할 수 있는 기계를 개발하였으며, 외부로 나가기 위해서 이 기술을 극한까지 발전시킨 그는 마침내 또다른 섬의 존재를 발견하였다. 인간족 최초로 다른 섬으로의 비행을 성공해내고야 만 것이다!
다른 세계는 여전히 비좁은 터전에서 잘 살아가고 있었고, 비행 기술을 발전시킬 이유가 없었기에 그 안에서 빠져나올 궁리조차 하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기술력 자체가 인간보다 월등히 뒤떨어졌다.
정복 전쟁은 손쉬웠다. 새 터전을 찾아 나선 이후로 현재 해니얼이 정복한 섬은 무려 9개. 정복한 섬은 모두 식민지화하여, 이종족들은 노예로 부리고 있었다. 장차 해니얼은 이 세계를 모두 인간의 식민지로 만들 계획이었다.
······라는 것이 이 세계관의 이야기이자 배경이었다.
#새벽요정은_꿈을_꾸지_않아
서담은 자신의 앞에 선 주인공, 해니얼을 바라보았다. 행글라이더가 아닌 기묘한 과학장비로 몸을 뒤덮은 그는 20인의 부하와 함께 자신을 둘러싸고 있었다. 단순 신체 능력만 보자면 제각각 E~D랭크의 몸놀림을 가지고 있었으며 해니얼은 확실하게 D+급의 랭크였다.
서담은 자신의 주변을 슬쩍 둘러보았다.
나무와 나무. 그리고 또 나무. 장애물로 사방에 콱콱 막힌 이곳은 공중전을 하는 적들에게는 최악의 무대였다. 그래서 서담은 저들을 게릴라로 격파하고서 후퇴를 할 땐 항상 이런 길목을 이용하고는 했는데, 설마 이곳까지 찾아올 줄이야.
‘저런 타입이 사실 제일 상대하기 힘들단 말이지.’
일전에 상대했던 적들은 어떻게든 상황이나 분위기 등을 이용하여 주인공이 자멸하게 만드는 게 가능했다. 그 방법을 굳이 고집한 이유는 ‘이야기의 흐름’에 맞는 죽음일 뿐만 아니라, 가정 안전하고 저렴한 공략법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아니다.
저 수백 수천의 부하들은 주인공에게 절대적으로 충성을 맹세하였으며, 결국 주인공과 싸운다는 건 그 병력과 모두 싸워야 한다는 말이 되니까.
‘그런데······.’
어떻게 싸울 생각이지? 그런 의문이 들었다. 저들의 날개는 숲에서 무용지물이다. 오히려 서담이 더욱 유리하다는 의미. 그런 의문을 해소해 주겠다는 듯, 해니얼은 세밀한 공중 컨트롤으로 서서히 그의 앞으로 다가왔다.
‘오, 뭐야 저게?’
다른 이들이 착용한 날개와는 다르게, 아주 자그마한 날개에 더불어 마치 로켓을 연상케하는 자그마한 바람 사출기가 양 허리에 달려있었다. 공중으로 높이 날아오르는 건 불가능하지만, 이런 숲지대에서 입체적인 공중전을 가능케하는 신기술.
바로 ‘토네이도 런처 글라이더’였다. 서담은 그 사실까진 알 수 없었지만, 저들이 숲지대에서의 전투에 대한 대비책을 들고 왔다는 사실 정도는 알 수 있었다.
“투항하라. 너는 죽이기 아까운 인재다.”
“오···.”
자신의 부하를 200명이나 죽인 적을 회유하려 하다니. 과연, 주인공이라고 해야 할까.
“거절하면?”
“죽음뿐이다.”
그리 말하며, 해니얼은 두꺼운 강철검을 꺼내 들었다. 서담은 저것과 비슷한 것을 지구에서 본 적이 있다. 바로 ‘톱’이었다. 그러나, 결코 평범한 톱은 아닌 듯싶다. 이곳에서만 나는 아주 특별한 금속을 이용해 만든 톱으로, 저것에 갈린다면 강철조차 분쇄되어버릴 것이니까.
발명가이기도 한 해니얼이 직접 만든 이 무기는 재료의 부족으로 인해 현재 단 스물한 자루밖에 없다. 그래서 해니얼과 질풍기동타격대 20인만이 사용하고 있기도 했다.
하지만, 어쩌랴. 애초에 대답은 정해져있다.
“거절한다.”
“그럴 줄 알았다.”
이제, 그들은 서로 죽고 죽이는 수밖에는 없었다. 그러나 해니얼은 대화를 멈추지 않았다.
“네 임무는 새벽요정들의 마을을 수호하는 것이냐?”
“비슷하지.”
“허나, 이미 늦었다. 오늘 일찍, 새벽요정들의 마을에 있는 내 연락책에게서 위치에 대한 정보가 송신되었지. 내가 너를 붙잡고 있는 사이, 500명의 병력이 지금 그곳을 향하고 있다.”
그러면서 씨익 웃는다.
“모조리 죽을 것이다.”
그제야 서담은 해니얼이 왜 그런 말을 했는지 깨달았다.
‘나를 초조하게 만들어서 빈틈을 만들 생각이겠군.’
저 말을 듣고서 만약 서담이 초조한 마음을 이기지 못해 무리를 하게 된다면, 저들의 입장에서는 제압하기 훨씬 쉬워질 것이다. 그러니 서담이 저 수법을 알고 있더라도 결국에는 당할 수밖에 없는, 간악한 수라는 의미.
그러나.
사실 서담에게 있어서 새벽요정들의 본거지가 무너지든 말든 별문제는 되지 않았다.
‘같잖은 수를 쓰는구만.’
하지만 서담 역시 E~D랭크의 비행 능력자를 만전의 상태로 상대하는 건 상당히 부담스러웠던 차. 해니얼과 똑같은 수를, 자신 역시 쓰지 말라는 법은 없었다.
그는 생각했다.
이제 고작 9개의 섬밖에 점령하지 못한 해니얼. 앞으로 그의 목표까지는 90여개의 섬이 남아있음에도 이 세상의 테마는 ‘새벽요정’이었다.
정복자 인간 주인공, 그리고 수많은 점령지 중 하나일 뿐인 몽환의 섬.
어째서 이곳이 이야기의 중심이 되는 것일까?
거기에, 서담은 ‘#금지된 사랑’을 떠올렸다. 아마 해니얼은 몽환의 섬의 누군가와 내통을 하고 있을 것이다. 저들의 기술력으로는 새벽요정들의 정령 은폐술을 찾아낼 수 없었으니까.
즉.
해니얼은 자신이 침략하고 있는 대상과 사랑에 빠져있다. 그 정도의 추측이라면 얼마든지 가능했다. 그게 누군지는 알 수 없었으나······. 그건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해니얼.”
“···내 이름을 아는군?”
“당연하지. 네 이야기를 많이 들었거든. ‘그녀’에게.”
여기서 ‘그녀’라는 단어는 그냥 내질러본 것이었다. 과연 해니얼이 사랑하는 게 남성일지 여성일지 알 수 없었으므로. 하지만, 예상은 대충 들어 맞았는지 해니얼이 몸을 움찔 떨었다.
“그래······. 그 여자가 나에 대해 뭐라고 하든?”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지. 나와 그녀는 어렸을 적부터 함께 해왔던 오랜 친구였거든. 그 여자는 항상 네 꿈에 대해 이야기해. 이 세상 전부를 손에 넣고 싶어 하는, 그런 허황된 것 같은 꿈에 대해서 말이야.”
“······.”
사실 배경 스토리는 전부 의뢰인에게 들은 내용이며, 실제로 해니얼이 사랑하고 있는 ‘그녀’에게 어느 정도 수준의 이야기를 해줬는지 알 수 없었기에 서담은 줄타기를 해야만 했다. ‘난 그 이야기까진 한 적이 없는데?’라고 하는 순간 물거품이 되기 때문.
“그 여자는 널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더군. 난 극구 말렸지. 그 남자는 널 이용하는 거다. 네 꿈을 철저히 짓밟아서, 자신의 꿈을 위한 발판으로 삼는 거다. 하지만 그 앤 믿지 않았어. 너를 끝까지, 또 끝까지 믿고 있었지. 그래서 나는 새벽요정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채, 홀로 나와서 싸우고 있는 거다. 그 아이의 꿈을 지켜주기 위해서.”
서담은 말했다.
“결국, 그 여자는 마지막까지 널 믿었지만 넌 그걸 배신했구나.”
그 말이 끝나자.
크게 동요할 것이라는 예상과는 다르게.
“······그게 어땠단 거지?”
해니얼은 굳은 표정으로 그리 말했다. 여기서는 서담도 살짝 당황하였다. 저토록이나 무덤덤할 줄은 몰랐으니까.
“나를, 마지막까지···. 믿었다고. 그건 좋은데 그래.”
첫만남은 우연이었다.
문득, 해니얼은 사릴렌의 미소를 처음 보았을 때를 떠올렸다. 달빛을 받아, 아름다웠던 미소.
그녀는 꿈이 많았다. 자신처럼, 더 넓은 세계로 나아가는 꿈을 꾸는 여자. 그러나 그녀는 정복이 아닌 여행의 형태로서 세상을 바라보고 싶어 했다. 그래서 해니얼은 그녀에게 세상을 알려주었다. 이곳은 그렇게 낭만적인 곳이 아니라고. 피로 물들여야만, 평화로운 세상이 올 것이라고.
곧, 몽환의 섬 역시 그렇게 될 것이라고 말하며.
해니얼은 사릴렌을 속였다.
‘새벽요정들이 스스로를 지킬 수 있도록, 우리가 보호해주도록 하지.’
‘하지만, 요정들은 보수적이에요. 당신들을 악마라 부르고 있다구요. 절대 인간을 받아들이지 않을 거예요.’
‘그렇다면, 조금의 힘을 사용하겠다. 과격하게 나서더라도 결국 너희 새벽요정들을 제압하고 강제로라도 보호하면 되겠지.’
그러니.
‘너희들의 본거지를 내게 알려다오.’
그녀를 이용했다. 그리고, 이제는 그 쓸모가 없어졌기에 부사령관에게 모두 죽이라 명령하였다.
“···한때. 그 여자에게 어떤 감정이 들었던 건 사실이다.”
“······.”
“그런데, 그러면 안 되는 거였어. 나는 오늘 너를 죽이기 위해 출격하면서 그 사실을 되새겼을 뿐이다.”
‘이거······.’
서담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원래의 전개대로라면 여기서 해니얼은 그 새벽요정과 사랑에 빠져야만 했다. 아마 정복 전쟁을 포기하든 뭘 하든 그런 결말이 나는 게 정상이라는 의미.
하지만 자신이 끼어듦으로써, 이야기의 방향이 바뀌었다. 해니얼은 한시라도 빨리 새벽요정을 점령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사랑에 빠진 여인에게 애틋한 마음이 채 자라기도 전에 사건이 전개된 것이다.
‘어쩌면 이전보다 지금이 차라리 나을 수도 있겠는데.’
자신이 학살했던 종족의 여인을 사랑하게 되어, 어줍잖은 기만과 사랑을 섞어서 하는 것보다야 훨씬 낫지 않겠는가.
만약 그랬다가는 뻔한 전개가 나올 예정이었을 것이다.
‘여태 너 몰래 네 동족을 살해해서 미안하다.’라고 해니얼이 울면서 빌면 그럼 또 그에 마음이 흔들린 여자는 지 동족이 죽은 건 생각도 안 하고. ‘아니에요. 제가 전부 용서할게요. 사랑해요.’라는 대사를 칠 테니까.
생각해보니 어이없다. 저가 뭔데 죽은 사람 대신 사죄를 하는 거지?
서담은 그런 생각을 하며 에테르 블레이드를 꺼냈다.
“그 무기가 네가 가장 자신 있어 하는 무기냐?”
톱날을 회전하여 파괴력을 극대화한 무기.
그러나, ‘에테르 블레이드’는 그런 톱의 장점만을 살린 최종 진화형태라고 봐도 좋았다.
“그래. 그건 네 검인가? 밋밋하고, 덜떨어졌군.”
해니얼은 오만했다.
소총과 대포는 자신이 개발에 집중하지 않았던 무기였으므로, 다른 종족이 더욱 진보된 기술로 사용하고 있어도 그러려니 했다. 하지만, 이 톱검 만큼은 다르다. 자신이 가진 모든 기술과 재료를 총동원하여 만든 비장의 무기인 만큼 그 성과를 보이리라.
“······그러냐.”
서담은 에테르 블레이드의 버튼을 눌러, 활성화하였다.
그러자 강렬한 에너지가 솟구치며 사방에 빛을 발산한다.
“···무, 슨······?”
참으로 안타까운 주인공이다. ‘주인공’만 아니었다면 이 세계에서 제일가는 발명가가 되었을지도 모르니까. 어설픈 정복 욕구만 없었더라도. 그랬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서담은 새삼 자신이 가진 과학 병기를 자랑할 생각은 없었다. 이건 자신이 스스로 만든 게 아니었고, 상대방은 스스로 개발해낸 것이었으니까.
그저 세상을, 시대를, 그리고 운명을 잘못 타고나서. 그는 천재임에도 불구하고 서담에게 죽어야만 했다.
탓! 가볍게 뛰어오른 서담은 에테르 블레이드를 크게 횡으로 휘둘렀다. 단순하기 그지없는 일격! 해니얼은 그것을 막아내기 위해 톱검을 들어올렸으나······.
···서걱!
자신이 개발해낸 최고의 발명품은, 그저 허무하게 반으로 썰려나갈 뿐이었다.
*
휘이이이잉!!
“으윽···!”
막내 공주 사릴렌은 있는 힘껏 자신의 몸 안에 감춰두고 있던 자연의 힘을 끌어올렸다.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그녀였기에, 계승권 없이도 정령의 힘을 사용할 수 있었지만 한계는 거기까지였다.
진짜 ‘정령’이 힘을 사용하기 시작하자, 밀리게 된 것이다.
‘대체 뭐야······!’
기묘한 꽃이었다. 인도자라 불리는 존재가 들고 나타난 꽃. 사릴렌은 저 꽃에 대해 안다. 아주 먼 과거, 세상이 전쟁으로 인하여 피로 물들었을 때 단 한 송이. 피어났던 꽃.
즉, 죽음 속에서 피어난 ‘태초의 정령’이라는 사실을.
은빛의 꽃은 그저 노래를 부르듯, 하늘하늘 춤을 추듯이 바람을 다스렸다. 그러나 그것은 폭풍이 되어 사릴렌의 몸을 옥죄여왔다.
물, 불, 바람, 전기, 흙. 그 어떤 정령의 기운으로도 저것을 거스를 수 없었다.
‘정령이라면, 나를 미워하지 않을 텐데······!’
선천적으로 모든 정령들은 자신을 사랑했다. 자신만을 바라보았고, 자신의 부탁을 절대로 거절하지 않았다.
“그만, 둬······!”
-그럴 수 없어···.
그러나 저 정령은 자신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럼, 마녀가 싫어해···.
이상한 말을 내뱉으면서 말이다.
[‘은빛 정령의 꽃’이 ‘유서담’에게 귀속됩니다.]
[···동기화 확인.]
[‘은빛 정령의 꽃’이 스킬 ‘백색 마녀의 도서관(F)’과 연결됩니다.]
그때.
새하얀 꽃 위에, 자그마한 소녀가 피어올랐다. 은빛의 아름다운 꽃 위에서 몸을 흔들던 그 정령은 손바닥을 사릴렌에게 향했고.
기형적인 그림이 허공에 떠올라, 그대로 사릴렌에게 적중하였다.
퉁!
“아흑!”
거대한 바람의 망치에 얻어맞은 사릴렌은 그대로 나무문을 부수고 바깥으로 쫓겨났다. 이곳은 가장 높은 나무였기 때문에 자칫하면 추락할 뻔했으나, 어지간해선 나무가 그러도록 두지 않는다.
나뭇가지에 몸을 걸친 사릴렌은 재빨리 바닥에 우아하게 착지하였다. 그 모습을 보며 마릴렌은 비틀대며 자리에서 일어나, 화분을 자신의 품에 껴안았다. 꽃 위에 자라있는 자그마한 소녀 하나.
이런 형태의 정령은 본 적도 없다.
‘쫓아서 내려가야 해.’
자신의 동생은 지금 이상한 사상에 물들어 있었다.
악마를 믿겠다니.
그들은 간악하고, 교활했으며 잔인한 존재였다.
결코, 믿을만한 존재가 아니란 말이다.
마취 덕분에 움직이기도 힘든 몸을 이끌고 서둘러 바닥에 내려온 마릴렌은 사릴렌을 설득하기 위해 입을 열었으나.
···이미 늦은 상태였다.
“언니. 역시 내 재능으로도 계승권의 힘은 이길 수 없었나 봐요. ···그런데, 정령의 힘으로 안 된다면. 악마들의 힘이라도 빌리면, 되지 않겠어요?”
“······!”
갑작스레, 수백 개의 그림자가 하늘을 뒤덮었다.
바람과 화약을 다루는 악마.
그들이 지금 이곳에 찾아온 것이다.
“아, 아···.”
마릴렌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악마들이 하나둘 자신들의 보금자리에 착지하였고, 새벽요정들은 아비규환이 되어 사방팔방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사릴렌은 최대한 온화한 표정을 유지하며 마릴렌에게 말했다.
“언니. 걱정하지 마요. 저들은 우리를 보호하려는-”
···타앙!
“······어?”
사릴렌은, 자신의 복부에서 느껴지는 무언가 이질적인 감각에 말을 멈추었다.
“피···?”
연한 보랏빛의 아름다운 액체. 그것은 새벽요정의 피였다.
어째서? 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는다.
직후, 마릴렌은 세상이 찢어져라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는 동생을 바라보았다.
“아, 안 돼······!!”
그리고, 그녀의 복부에 총상을 입힌 장본인이 다가와서 말한다.
“동작 그만. 지금부터 움직이는 벌레들이 포착될 경우, 모조리 쏴서 너희 공주처럼 만들겠다.”
인간군 부사령관, 메이옌이었다.
새벽요정들은 도망치기를 포기했다. 이미 사방에 날개 달린 저 악마들이 가득하다. 아이 요정들은 울음을 애써 참았으며 어른 요정들은 치욕을 참아 넘겼다.
바닥에 쓰러진 사릴렌을 향해 마릴렌이 엉금엉금 기어가는 꼴을 보며 메이옌이 헛웃음을 쳤다.
“정말 믿을 수 없군. 진짜로 사령관님의 말에 속은 것이냐?”
“아, 아윽.”
사릴렌은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갈색의 머리칼을 가진 여인이 자신을 혐오스럽다는 듯 내려보고 있었다.
“야만족 따위가, 주제를 알아야지. 그간 너 같은 지저분한 종족과 어울린 내 약혼자가 대견스러워질 정도야.”
“···약, 혼자?”
“그래. 해니얼 막시포모스. 그와 나는 사랑을 나누기로 약속한 사이다. 아주 오래전부터 가문에 의해 그리 결정되어 있었지. 알겠느냐? 너 따위가 감히 넘볼 상대가 아니란 말이다.”
사릴렌은 떨리는 눈으로 메이옌을 향해 말했다.
“미, 믿을 수 없어요. 그분은 분명 저를 사랑한다고······.”
“그러니까. 그게 모두 거짓말이었단 말이다. 아직도 모르겠나? 미련한 것.”
메이옌은 사릴렌에게 다가가, 이마에 총구를 가져다 대어 툭툭 밀쳤다.
“더러운 야만족 따위가. 분수를 알아야지.”
“으윽!”
아팠다.
정말이지, 더럽게 아팠다.
이런 고통은 살면서 처음 느껴보는 것이었다.
복부에서 뜨겁게 번지는 고통이?
아니다.
사랑했던 이에게 배신당한 실연의 고통이, 너무나도 아팠다.
사릴렌이 고통에 젖은 신음을 토해내고, 마릴렌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현실에 눈물을 흘리자.
꽃이 말했다.
-도와···줄까?
‘어?’
그건 둘째 공주에게 하는 말이 아니었다. 총상을 입어 제정신도 유지하지 못하는 사릴렌에게 거는 말이었다. 어째서 저 꽃이 자신을 돕겠다고 말하는 건지 알 수는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방법이 없었다.
‘도와줘. 제발.’
-···응.
직후. 사릴렌은 자신의 몸을 감싸고 도는 시원하고 맑은 공기의 감각을 느꼈다. 고통이 아주 살짝이지만 사라졌으며, 바람의 기운이 더욱 선명하게 느껴졌다. 이것이 은빛 정령의 힘. 사릴렌은 그 기운을 만끽하며, 천천히 입술을 떼었다.
“정말로. 사령관께서······. 저를 죽이라 명령하셨나요?”
“그래.”
“정말로 사령관님은··· 처음부터 저에게 아무런 생각도 없었나요?”
“당연하지. 누가 너 따위에-”
짜증나는 표정으로 대답을 하려던 메이옌은, 자신의 숨이 턱 막혀오자 말을 멈추었다.
“···오만하군요.”
“무, 슨···컥!”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사릴렌은 메이옌의 총을 뺏어 들어, 그녀의 머리에 겨누었다.
“이곳은··· 몽환의 섬, 정중앙. 자연은 모두 새벽요정들의 손아귀에 있어요. 당신이 자랑하는 ‘탄환’쯤이야 바람 한 숟갈, 숨결 두 방울 떠오면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구요.”
철컥!
총을 써본 적은 없지만, 한때 사랑했던 이가 쓰는 모습을 보았기에 장전하는 법 정도는 알고 있다. 사릴렌은 복부의 고통을 애써 이겨내며 메이옌의 머리를 콱! 짓밟아 땅에 처박은 뒤 그 위에 총을 겨누었다.
“무, 무슨······.”
“부사령관님···!!”
인간군 병사들이 당황하는 게 보였다. 그럴 만도 했다. 지상 격투술의 달인인 메이옌이 고작해야 저런 약골 소녀에게 저항조차 하지 못한 채, 여전히 숨을 쉬지 못하겠다는 듯 바닥을 손가락으로 헤집고 있었으니까.
‘생각대로 돼서, 다행이야······.’
사릴렌은 정령술에 재능이 뛰어났으나 ‘계승권’을 가지지 못해 자신이 낼 수 있는 출력에 한계가 있었고, 그래서 파괴력 면으로는 은빛 정령의 꽃에게 절대로 이길 수 없었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그녀는 누구보다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서담이 봤다면 가히 S라는 글자를 두세 개는 얹어줄 정도로. 거기에 은빛 정령이 가진 힘까지 더해진다면······. 바람을 극한까지 컨트롤하여 누구 하나의 숨을 막히게 하는 정도는 가능하게 됐다는 말이 되겠다.
“제가···. 실연당했다고, 주저앉아서 펑펑 울기나 하는 애새끼처럼 보였나요?”
“우극, 꺼허흑······.”
“저는······. 꿈이 있어요. 여기서 절대로, 멈출 수 없는. 그런 꿈이···.”
안색이 창백해진 사릴렌이었지만 초인적인 정신력으로 버티고, 또 버텼다.
자신이 자초한 일이다. 그리고, 이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은 정령의 힘을 다룰 수 있는 자신밖에 없다. 그러므로 쓰러져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그녀는 있는 힘을 다해서 소리를 쳤다.
“모두, 무릎 꿇으세요! 총을 바닥에 내려놓고···. 그대로, 손을 머리 위로 올리는 겁니다.”
병사들이 주저하기 시작하자, 사릴렌은 총으로 메이옌의 어깨를 쏴 갈겼다.
타앙! 울려 퍼지는 총성은 그들의 고막에 선명하게 파고들었고, 그제야 상황이 잘못되었음을 깨달은 병사들이 하나둘 무기를 내려놓았다.
“네가, 이런···다고. 소용있을······것 같, 아?”
메이옌은 이 와중에도 폐를 쥐어짜, 사릴렌에게 말했다.
“곧···, 오실, 거야.”
총사령관이.
이곳에 온다.
아마도, 사릴렌은 그와 맞서 싸워야만 할 것이다. 그 남자는 메이옌이 인질로 잡혔다고 해서 신경을 쓸 정도로 감성적이지 않았으니까.
‘그래, 나도 알아.’
이제부터는 더욱 위험하고, 잔혹하며, 교활하고, 더욱 강력한 적과 맞서 싸워야만 한다.
이성적으로 생각했을 때,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 괴물 같은 남자와 싸우기 위해 앞으로 또 얼마나 많은 희생을 치러야만 한단 말인가.
‘······요정들은 패배할 거야.’
그것은 정해진 미래였다.
자신이 그에게 속아 넘어간 그 순간부터, 동족들을 포함하여 모두가 죽는 절망스러운 결말이 그려진 것이다. 그 사실이 못내 후회스럽고, 고통스러워. 당장이라도 피눈물을 왈칵 쏟아내고 싶었지만 참아야 했다.
휘이이잉!!
어디에선가, 바람이 몰아친다. 누군가가 이곳에 왔다.
오늘 죽더라도 자신을 배신한 이에게, 발악 정도는 해보고 죽자고 생각하며 사릴렌은 그곳을 향해 총을 겨누었고.
······퉁!
하늘에서 무언가가 떨어져 내렸다.
“···어?”
그건 틀림없는 해니얼이었다.
다만.
온몸이 상처투성이가 되어, 죽기 직전의 상태였을 뿐.
“이게···대체 무슨···?”
사릴렌이 그런 의문을 내뱉으려는데, 뒤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화분을 깜빡해서, 흥정으로 적당히 써먹을 인질 데려왔는데. 그럴 필요도 없었네.”
“······!”
다급히 고개를 돌려보니, 조심스러운 손동작으로 마릴렌의 손에 들려있던 화분을 품에 껴안는 사내가 눈에 한가득 들어왔다.
조심스레 화분에 묻은 모래를 털어내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긴장이 턱 풀리는 바람에 사릴렌은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하, 하하. 하···.”
어쩐지.
정말로 길고, 또 길었던 하루였다.
< 떠나요, 몽환의 섬(5)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