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게 주인공은 살인이다-45화 (45/251)

< 떠나요, 몽환의 섬(1) >

대련은 첼레스테의 패배로 끝났다.

너무나도 당연한 결과.

애초에 고수가 하수에게 ‘한 수 가르침’을 주기 위한 대련이었으니까.

그러나 대련이 끝난 이후 사람들은 오히려 첼레스테와 유서담을 주목하였다.

D랭크의 초능력자가 S랭크를 상대로 한 번이지만 공격을 명중시킬 뻔했으며, 심지어 몇 번은 상대의 공격을 막거나 피해냈다. 그것도 유서담이라는 사범의 지시하에.

도대체 그가 대련 도중 했던 짧막한 지시에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그건 중요치 않다.

다만 유서담이 가르친 검술이 ‘자신보다 신체 능력이 우월한 강자’를 상대로 유효했다는 게 중요했다.

‘젠장······.’

아렌은 조용히 호텔 레스토랑에 한쪽 구석에 앉아 와인을 홀짝였다. 검술 토론회가 종료된 이후에는 항상 뒤풀이 자리가 생기기 마련이었는데, 올해는 한국에서 열렸기에 세워진 지 3년도 안 됐다는 ‘JS호텔’의 레스토랑에 달인들이 모두 모여든 것.

그 와중 유서담과 테일러는 따로 가볼 곳이 있다며 어디론가 홀랑 사라져버려서, 더 이상 마주칠 일은 없다지만 그래도 썩 기분이 좋지 않았다.

아렌도 알고 있다.

토론회가 끝난 뒤, 자신의 눈치를 보던 달인들이 은근슬쩍 유서담에게 접근해 연락처를 교환하거나 선물을 주고 받았다는 사실을. 그러나 그건 상관없었다.

‘······대체 부적이 왜 이러지?’

다른 4개의 부적은 멀쩡하다. 그런데 유독 근력, 속력 강화 및 조준 유도의 부적이 말썽인 것. 아까부터 이것들이 제대로 발동되지 않았다. 제아무리 에어 밤과 마찰 계수를 다루는 컨트롤이 좋은 아렌이라지만, 신체 강화 능력이 없으면 기껏해서 B랭크의 상위 능력자일 뿐이었다.

‘젠장. 하필 이럴 때 부적이 말썽이라 창피나 당하고. ···연락을 드려서 부적을 다시 받아와야겠어.’

그리 생각하며 아렌은 손목을 움켜쥐었다. 아까부터 시큰한 통증이 올라오고 있던 탓. 이 증상은 벌써 몇 년 전부터 시작되었기에 진통제를 자주 복용하고는 있었지만, 부적이 사라진 이후 유독 통증이 더욱 심해졌다.

마치, 그동안 참고 있었던 통증이 폭발적으로 몰리는 느낌이었다.

그는 식은땀을 흘리며 팔목을 주물렀다.

그리고 그때 갑작스레.

쿠쿵!!

“뭐, 뭐야!”

호텔 건물이 뒤흔들렸다.

위잉! 위잉!

-이상 게이트가 발생하였습니다!

-이상 게이트가 발생하였습니다!

-시민 여러분은 지금 즉시 피난 안내도를 따라 대피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허, 이게 무슨.”

“하필 이럴 때······.”

자주는 아니지만 아주 가끔 이런 일이 일어나고는 했다. 보통의 게이트나 던전은 관측소나 지구상에 단 한 명뿐인 ‘예언가’가 예언을 해주고는 했는데, 예상을 전혀 빗나가고서 갑작스레 게이트가 출몰하는 것.

-이상 게이트는 ‘A랭크’로 확인되었으며 발생 위치는 ‘JS호텔’의 옥상입니다.

-현재 ‘긴급지원부대’가 출동하고 있으니, 인근 지역의 시민 여러분은 안심하시고 대피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미친, 이 건물의 옥상이잖아!”

“모두 대피하세.”

사람들이 서둘러 움직이기 시작하자 아렌 역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적이 있었다면 모를까, 혼자서 A랭크를 제압하는 건 무리다.

그러나.

주변인들이 그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

“아렌 헌터님!”

정장을 입은 중년의 관리인 네다섯 정도의 웨이터를 끌고 서둘러 아렌을 향해 다가왔다.

“아렌 헌터님,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옥상의 게이트를 막아주실 수 있겠습니까? 아무래도 오대기가 오기까지는 시간이 굉장히 걸리는 바, 마침 이곳에 아렌 헌터님이 계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아.”

옥상에서 발생한 게이트라지만, 분명 그 괴수는 건물을 만신창이로 부수며 아래로 내려올 것이다. 오대기, 즉 긴급지원부대가 도착하기까지는 시간이 꽤 걸릴 터. 하지만 S랭크의 아렌이라면 충분히 막아낼 수 있을 것이다.

“오오.”

“다행이군. 아렌 헌터가 이곳에 있어서.”

“한시름 덜었군.”

그러나, 아렌은 대답할 수 없었다. 어째서 상황이 이렇게 됐단 말인가. 운이 좋지 않아서? 날이 좋지 않아서? 모르겠다.

다만.

지금은, 도저히 거절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하하. 물론이지요. 제가 올라가 보겠습니다.”

그는 주먹을 꽉 움켜쥐고서 그리 말한 뒤 서둘러 휴대용 에테르 디스펜서를 챙겨 입었다. 3등급의 에테르 슈트보다 방어력이 낮지만, 주머니 속에 넣고 다니다가 몸에 간편하게 입을 수 있는 이 에테르 슈트는 무려 ‘네임드’급으로서 수십억을 호가하는 장비였다. 또한 네임드급의 에테르 블레이드를 손에 쥔 아렌은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뒤로 한 채, 결국 옥상으로 향하고 말았다.

꿀꺽.

벌써부터 괴수가 미쳐 날뛰며, 모든 것을 파괴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가득하다. 아무래도 옥상에 있던 사람들이 게이트의 몬스터에게 당하고 있는 소리로 추정된다.

그러나. 아렌은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부적이 없는 자신은 고작해야 B랭크란 말이다. A랭크의 게이트에게 대응해봐야, 죽을 게 뻔하지 않느냔 말이다.

‘이건··· 이건 안 돼. 이건 안 된다고.’

문 하나만 열면, 옥상이 나타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렌은 그것을 열 수 없었다. 명예를 잃는 게 차라리 낫다. 그래, 그냥 이대로 도망치자. 그렇게 생각한 아렌이 뒤돌아서 가려는 순간.

“우리도 도우러 왔습니다, 아렌 헌터.”

“······예?”

그의 뒤로, 검의 달인들이 각자의 에테르 디스펜서를 장비한 채 서 있었다.

···다시 말하지만, 달인들이다. 즉 무능력자라는 의미. 긴급 상황용으로 준비해둔 에테르 디스펜서가 어디서 났는진 몰라도, 무능력자가 상대할 만한 종류의 게이트가 아니었다.

“다, 당신들은 상대하지 못할 겁니다. 개죽음이라구요!”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 안쪽에 무고한 사람들이 죽어나가고 있지 않습니까. 비록 초능력은 없지만, 평생을 이 검 한 자루와 살았던 몸. 오대기가 도착하기 전까지 괴물을 물려내는 것 정도는 가능하겠지.”

그리 말하며 달인들이 먼저 문을 열고 당당히 나아갔다.

아렌은 허탈하게 웃으며, 고개를 푹 숙였다.

그들이 신체 능력은 분명히 F랭크 남짓. 그럼에도 그들은 자신들이 상대할 수 없을 게 뻔한 적에게 맞서 싸우려 하고 있었다.

‘뭐가 B랭크고 S랭크인지.’

그는 문득 테일러가 자신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초능력이 F랭크라고 해서, 사람이 F랭크겠느냐.

그 말의 의미를 이제는 알 것 같았다.

자신은 당장 B랭크의 육체를 가지고서도 A랭크를 코앞에 두고 벌벌 떠는 꼴사나운 짓을 벌이는데, 유서담은 F랭크로 15년이나 전장에서 살아남지 않았떤가.

그는 다시 고개를 들었다.

아직도 팔목을 비롯하여 온몸이 통증이 저릿저릿하고, 부적은 제대로 발동되지도 않았지만. ···그래도, 한 명의 헌터였다.

“씨발···. 정말 좆같은 하루군···.”

그렇게 말하며, 아렌은 옥상의 문을 박차고 들어갔다.

비록 능력은 약화 되었지만 그 눈빛만큼은 그 어떤 때보다도 S랭크였다.

*

다음날.

깨질 듯한 머리를 부여잡으며 일어난 나는 문득 팔에서 느껴지는 무게감에 고개를 돌렸다. 이불을 걷어찬 테일러가 내 팔 꽉 껴안은 채 자고 있었다.

얘나 나나, 어젯밤 술을 진득하게 마신 탓에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스마트폰을 슬쩍 확인하자 달인은 물론 몇몇 헌터들에게 연락이 와 있었다. 대부분이 다음에 식사 한번 하자는 내용이었다.

[이준석: 다음에 식사 한번 할 수 있겠습니까?]

이준석에게도 연락이 와 있었다. 이 친구는 나한테 왜 이렇게 관심이 많은 건지 모르겠다. 어제 집에 가기 전에도 나보고 같이 스테이크나 썰러 가자는데, 거절했다.

[첼레스테: 어제 정말 감사했어요]

첼레스테에게는 우선 답장을 했다. 수고했다고. 나도 덕을 많이 봤기 때문에 쌍방향으로 이득이었다. 코스탄티니 가문의 그림자에 숨어서 당분간 로스트 데이가 나에게 헛짓거리를 못하도록 막을 수 있었으니까. 아마 당분간 나만의 작은 세력을 구축하기 전까지는 계속 이대로 지내지 않을까 싶다.

내 팔을 껴안고 있는 테일러를 쏙 빼낸 뒤 자리에서 일어나 거의 기어가다시피 낡은 TV 앞으로 이동한 나는 뉴스를 틀었다.

그건 그냥 버릇이었다. 아침에는 아침마당이나 뉴스 등을 틀어서 사운드를 채워야 한다는 그런 버릇.

-속보입니다. 어제저녁 7시경 JS호텔의 옥상에서 A랭크의 이상 게이트가 발생하였습니다.

“엥?”

JS라면 분명 달인들의 뒤풀이 장소가 아니던가. 관심이 생겨서 자세히 들어보니 더욱 가관이었다.

-당시 현장에 있던 검도 사범들과 S랭크의 헌터가 협력하여 게이트를 저지한 덕분에, 긴급대기조가 도착할 때까지 피해자가 단 한 명도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S랭크의 헌터 ‘아렌’은 달인들이 아니었다면 민간인을 이렇게 완벽히 구해낼 수 없었을 것이라며, 공적을 돌렸다고······.

“오?”

아렌이 저럴 놈이 아닌데. 그 잠깐 사이에 사람이 바뀐 건가? 그건 그거대로 신기하다.

“그나저나 큰일 날 뻔했네.”

아렌의 상태가 굉장히 심각하여, 아티팩트를 해제해놓았건만 하필이면 그 자리에서 게이트가 발생할 줄이야. 물론, 저 자리에 아렌이 아티팩트를 제대로 갖추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과연 제힘을 발휘할 수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미지수였다.

그날 아렌은 이미 아티팩트를 남용한 상태였고, 과부하가 잔뜩 걸린 채였으니까. 저 썩어빠진 신체로 더 아티팩트를 썼다면······.

별로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났을 수도 있다.

“야.”

“···어응.”

“라면 먹을 거냐?”

“ㅈ···.”

뭐라는 거지.

숙취가 꽤 심한 탓에 말도 제대로 안 나오는 모양이다. 나는 어기적어기적 움직여서 싱크대로 향했다. 일단 라면으로 아침밥 해결하고, 점심에는 일전의 DR에게 연락해서 ‘무림’이라는 곳에 대해 알아볼 생각이었다. 오후에는 마법에 대해 연구를 좀 해봐야겠고. 아렌에게서 배운 점이 꽤 많았으니까.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는 순간, 인벤토리 안에 넣어뒀던 화분이 갑작스레 낑낑거리기 시작했다.

-마녀야···. 마녀어.

“뭐야?”

서둘러 인벤토리에서 화분을 꺼내자 잔뜩 시들시들해진 채 몸을 흔들고 있었다.

-아파···.

“아프다고?”

-으응. 힘들어···.

그러고 보면 화분도 슬슬 한계였다. 억지로 에테르 크리스털과 이계에서 구해온 물질 등으로 환경을 조성해주긴 했지만, 결국 이곳은 현대였고 전부 임시방편이었을 뿐. 제대로 된 조치를 해줘야만 한다.

“젠장. 어떡하면 좋지?”

백색 마녀의 도서관에는 그저 ‘화분이 있으면 좋을 만한 환경’을 알려줄 뿐, 당장 어떻게 할지에 대해서는 알려주지 않았다. 말 그대로 도서관은 검색만 할 뿐인 스킬이었으니까.

하지만 의뢰인은 이런 방면에서 꽤 똑똑한 편이었고 금방 해답을 내려주었다.

<정령이 숨쉬기 좋은 환경의 이계로 이동하십시오.>

<정령에게 좋은 다양한 물질과 접촉하면 한결 나아질 수 있습니다.>

“······괜찮은 방법이긴 하네.”

괜찮긴 한데, 지구에 남아 할 일이 많았던 관계로 골치가 아파왔다.

DR과의 접촉, 현대에 존재할 수도 있는 미지의 마법사, 그리고 달인들을 끌어모은 나만의 문파 창설까지. 물론 이 모든 것들을 안정적으로 수행하려면 결국에는 힘이 필요했고 내가 힘을 얻기 위해서는 하던 대로 주인공 사냥을 해야만 하긴 했다.

“얼마나 아파?”

-많이···.

은빛 정령의 꽃은 애초에 이계의 식물. 현대의 환경에 맞지 않으니, 인벤토리에 넣어서 최대한 감춰놓아도 결국에는 한계가 존재할 수밖에 없었다. 꽃이 개화하여 정령이 된다면 모를까, 아직은 너무나도 연약하여 버틸 수 없다는 의미.

“의뢰 목록 호출해봐.”

숙취 해소제를 벌컥벌컥 들이킨 다음 라면을 끓이며 에테르 디스펜서를 장착한다. 목록을 확인하자, 역시나 수많은 의뢰 목록이 주르륵 떴다.

생각해보자.

정령에게 좋은 재료를 구할만한 곳이라면 역시 마법과 관련된 세계가 가장 좋을 것이다.

<인간들의 세상에 범주를 두지 마십시오.>

<이종족이 사는 상식 외의 세계라면, 정령에게 더 좋은 환경을 제공할 수 있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여태 서담께서 다녀온 세계는 대부분 지구와 흡사한 환경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세계도 많다는 걸 기억하십시오.>

즉 지구의 환경과 다른 그런 다른 세계가 있다는 의미.

“음···.”

확실히 그런 세상이라면 평범한 마법사들의 세계보다 더 신기한 물건이 많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숨 막혀. 살려줘···.

“조금만 참아봐. 지금 괜찮은 데 찾고 있으니까.”

-죽어···.

“안 죽어.”

-나 대신 네가 죽어···.

“이게 돌았나.”

의뢰 목록에서 ‘시스템의 성좌’와 관련된 세계를 따로 호출하여 찾는 와중, 눈에 띄는 의뢰 하나. 레벨 61의 주인공이 존재하는 세상이었다.

#새벽요정은_꿈을_꾸지_않아

#판타지 #몽환적인 #전략적인 #파괴 #금지된사랑

···뭔가 해시 태그가 이상하다. 몽환에 사랑은 그렇다쳐도, 전략에 파괴는 또 뭐야? 애당초 저 해시 태그 시스템을 이해하기는 꽤 어려웠으므로 그러려니 했다.

이윽고 나는 스마트폰을 들어서 메신저의 상태 메세지를 변경했다. 오늘부로 파견을 나가느라 연락을 받지 못한다는 내용이었다. 아무래도 달인을 비롯하여 연락을 주고받을 일이 많아졌기에 이렇게 해놔야 편하다.

“테일러. 라면 먹어. 나 잠깐 자리 좀 비운다.”

그러자 테일러가 자리에서 부스스 일어나더니, 어기적 기어와 내 팔을 붙잡았다.

“···또. 이상한 파견 나가는 거야?”

눈도 제대로 못 뜬 채 그녀는 내게 그리 말했다. 말투가 15년 전으로 돌아간 것만 봐도 잠이 덜 깼다는 건 알 수 있다.

“급한 일이야.”

“······꼭 가야돼?”

“응.”

“그래······.”

내 대답이 떨어지자 테일러는 다시 바닥에 누웠다. 어쩐지 걱정을 받는다는, 그런 생소한 느낌에 기분이 묘해진다.

그녀의 머리맡에 라면을 밀어 넣은 뒤 의뢰인에게 말했다.

“가자.”

[61레벨의 주인공 ‘해니얼’의 세계, 떠나요, 몽환의 섬으로 이동합니다.]

< 떠나요, 몽환의 섬(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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