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검술 토론 경기회(1) >
“돌아가자.”
내 한 마디에, 무뚝뚝한 메세지가 떠올랐다.
[원래의 세계로 귀환합니다.]
세상이 흐릿해지며, 서서히 무너져 내리기 시작한다. 예전에는 심한 멀미 때문에 눈을 질끈 감고는 했는데 이제는 그러지 않았다. 나는 그저 가만히, 세상을 지켜보았다.
저 멀리.
멀리, 세상이 멀어진다.
그리고.
마침내 아라슈 월드가 한눈에 들어오게 되었을 때, 볼 수 있었다.
세상을 덮을 것처럼 거대한 거인과 똬리를 튼 채로 입에 구슬을 물고 있는 거대한 용, 온몸에 불이 붙은 어떤 존재, 마치 우주를 연상케 하는 반짝이는 무언가······.
그것들은 모두 아라슈 월드를 가만히 내려보고 있었다.
본능적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아, 저자들이 바로 ‘성좌’라 불리는 존재구나.
왜 인간을 그저 유희 거리로 생각하는지 이해가 갈 정도로 너무나도 압도적이고, 위압적인 존재들이었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무너져내릴 것만 같은 존재들.
······그리고.
의뢰인은 한낱 인간일 뿐인 나를 임시지만 저런 성좌들과 비슷한 위치에 세워놓았다.
세상이 완전히 새카매졌을 때. 나는 입을 열어서 물었다.
“의뢰인. 원래 난 의뢰인에 대한 건 안 묻는데.”
<······.>
“당신은 대체 뭐야?”
여전히 세상이 새카맣다. 마치, 우주를 부유하는 듯한 감각을 느끼며 의뢰인의 대답을 기다린다.
<······아직은 때가 이릅니다. 하지만, 시기가 다가온다면 당신께 반드시 말씀드리겠다고 약속하겠습니다.>
“그럼 왜 때가 이른지는 말해줘야지.”
<때가 일러서, 왜 때가 이른지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무적의 개소리네.”
의뢰인은 세상의 모든 주인공을 사냥하길 원한다.
차원을 자유로이 이동할 수 있으며, 세상 모든 개연성을 혼자서 독차지하는 말도 안 되는 존재를 죽일 수 있는 자.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너, 주인공은 아니지?”
그러자 마치 어디에선가 여인의 웃음소리가 들려온 듯싶었다. 착각이겠지. 저 여자는 감정이 없는 것처럼 굴었으니까.
<그럴 리가요.>
“그러냐.”
<저를 보고 싶으신가요?>
“당연하지.”
<······그렇다면, 아주 잠시만.>
그때.
나를 둘러싸고 있던 우주가 마치 하나의 점으로 모이는 듯싶더니.
찬란한 금색의 빛무리와 함께 어떤 여인이······.
*
“···헉!”
[세계의 시간배속이 정상화되었습니다.]
정신을 차리니, 원룸의 이불 위였다.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가슴을 더듬었다.
가슴이 먹먹해지도록 답답한 기분이 드는가 싶더니, 그대로 정신을 잃어버렸다.
‘방금 그건 뭐였지?’
아니, 방금이 맞기는 한 건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시계 대신 나의 남은 수명을 보았다.
하루가 줄어들었다.
즉, 하루가 지났다는 이야기.
“···하루나 퍼질러 자다니.”
그 노란색의 무언가를 보았기 때문일까.
아니면, 아라슈 월드에서 보낸 100일에 가까운 시간이 피로했기 때문일까.
알 수 있는 건 없었다.
무심코 스마트폰을 들어 올린 나는 달력을 확인하였다.
예상대로, 지구에서는 고작 25일 정도가 흘렀을 뿐이었다.
“야, 의뢰인.”
<······.>
“자냐?”
<······.>
이상하다.
원래는 부르면 재깍재깍 대답을 했는데.
아니지, 그러고 보면 이연준 사건 이후로도 한번 대답을 하지 않았던 적이 있긴 했다. 그때 그녀의 말로는 피곤해서 잠깐 쉬고 있었다고 했는데···. 특이하네.
하는 수 없다. 나중에 물어보는 수밖에.
“으음.”
어쩐지 몸이 답답해서 가슴을 매만지니, 검은색의 에테르 슈트를 입은 채였다.
생각해보니 무려 1등급의 슈트를 마련하고서 뛰어들었건만 사용할 일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슈트의 장착을 해제하고서 박스의 형태로 만들어 방구석으로 어기적어기적 밀어 넣은 나는 허공을 확인하였다.
[주인공 더 아라슈의 스킬 ‘인벤토리(B)’를 흡수하였습니다.]
그것이 이번 주인공에게서 얻은 스킬이었다.
다른 좋은 스킬도 상당히 많았고, 아라슈는 학자였는지 지능 쪽으로 재능이 상당했으나 결국 그것들을 얻지는 못했으므로 나도 미련은 없다.
그저 지금은 얻은 것에 대해 알아봐야 할 필요성을 느꼈을 뿐.
━
<인벤토리(B)>
*설명: 자신만의 공간을 만들어 물건을 저장할 수 있습니다.
*최대 수납 용량: 70(kg)
*최대 수납 부피: 10(m3)
*주의! A랭크 이상의 에너지를 보유하고 있는 물건은 수납할 수 없습니다.
━
인벤토리, 즉 ‘아공간’과 굉장히 흡사한 형태의 스킬인 이것은 내가 가장 얻고 싶어 했던 종류였다. 아공간과는 여러모로 상당히 다른 것 같지만, 어떠한가. 어찌 됐든 인벤토리 또한 이계에서 물건을 한정적으로 가져올 수 있는 건 똑같다는 걸 증명했으니까 말이다.
인벤토리를 열자, 허공에 반투명한 벽돌 무늬의 창이 생겨나며 그곳에 보관되어있던 물건의 목록이 나타났다. 아라슈 월드에서 떠나오기 직전, 나는 영체의 몸으로 곳곳을 돌아다니며 ‘백색 마녀의 도서관’에 기록되어있는 재료와 흡사한 물질을 찾아다녔고 그 결과 맞는 건 없었지만 흡사한 것들을 구해올 수는 있었다.
정령의 기운이 듬뿍 담긴 토양에 허공에 흩날리던 요정 가루를 담은 봉투까지.
그것은 은빛 정령의 꽃을 개화시킬 수는 없으나, 그래도 적당히 숨 쉴만한 환경을 조성해줄 수는 있을 터였다.
물건들을 꺼낸 나는 피곤한 몸을 이끌고서 에테르 금고에게 다가가 그것을 열었다. 안쪽에는 화분이 시들시들한 꽃잎을 흔들거리고 있었다.
“야. 살아는 있지?”
-으응···.
“쓸만한 거 구해왔으니까 좀만 참아봐.”
-추워···.
흙을 조심스레 덜어내 꽃의 주위에 덮어준 뒤 마법으로 포장된 크리스털 유리관의 안쪽에 요정가루를 흩뿌렸다. 요정가루는 거의 꽃가루와 비슷한 수준으로 공기를 타고 날아다니는지라 상당히 신중히 작업을 할 수밖에 없었고, 거의 30분이나 자리에 앉아서 씨름을 한 끝에 마무리를 지을 수 있었다.
-···시원해.
“좀 살 것 같지?”
-으응.
아직 제대로 된 재료는 하나도 구하지 못했다. 다른 차원을 또 돌아다녀야 하긴 했는데, 일단 당장은 첼레스테와의 약속이 있기 때문에 그러지는 않았다.
화분의 정리를 끝낸 뒤 내 능력치를 확인하였다.
<유서담>
[도합 레벨: 42]
*능력치
[근력 39] [체력 38] [민첩 40]
[기력 1] [마력 42]
*재능
[검술 A+] [사냥 D+] [사격 C]
[요리 D-] [직감 A] [기민 A]
[기타···.]
*스킬
[주인공 사냥꾼 Lv. 2]
[백색검법(S)]
[육감(F)]
[바람 걸음(D)]
[아라셀리 식 마나 써클링(SS)]
[백색 마녀의 도서관(F)]
[인벤토리(B)]
레벨이 무려 42가 되었다. 이제는 정말로 완전히 D랭크라고 봐도 무방한 수준.
이 정도면 어디 가서도 꿀리지 않는 헌터 생활을 할 수 있을 터였다. 게다가 바람 걸음이나 마나 써클링 등을 이용해서 신체 능력을 더욱 한도까지 끌어낼 수 있었고, 백색검법으로 효율적인 사냥이 가능하니 제대로 일을 하러 다닌다면 돈 걱정 없이 살 수는 있을 것이다.
“그나저나, A랭크 이상의 장비라는 건 무슨 뜻이지?”
[임의로 지정된 등급으로서, 해당 물건에 들어있는 에너지 양에 따라 등급이 결정됩니다.]
대답은 의뢰인 대신 기계처럼 울리는 시스템이 답해주었다.
[지구의 장비를 기준으로 삼자면 1등급의 에테르 장비가 A랭크에 해당합니다.]
“오···. 그럼 메가 슈터는 인벤토리에 들어가는 건가?”
그동안 메가 슈터를 휴대하고 다니는 게 얼마나 불편했던가. 이것만 해도 큰 수확이었다. 내친김에 메가 슈터를 포함하여 내 원룸 곳곳에 잠들어있던 낮은 등급의 장비를 적당히 인벤토리에 때려 박은 뒤, 스마트폰을 들었다.
자주 이계로 파견 나갈 일이 많아진 터라 그 공백 동안 나는 지구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질 모른다.
그래서 쓸만한 어플을 여럿 알아보았는데 그중에는 지난 몇 주간의 뉴스를 짧게 요약해서 기록해두는 타임라인 어플리케이션이 있었다. 신문을 읽기는 시간이 촉박하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빠르게 파악하고 싶을 때 쓰면 좋은 것들. 자세한 정보를 알고 싶다면 해당 뉴스를 눌러서 확인하면 된다.
뉴스를 확인하면서, 동시에 나는 테일러에게 문자를 보냈다.
[유서담: 나 왔어]
굳이 왜 그러는진 모르겠지만, 테일러는 나보고 ‘그 이상한 곳으로 갔다가 올 거면, 올 때마다 꼬박꼬박 보고해’라고 말을 한 터라 그냥 그러려니 하면서 따르고는 있었다. 이어서 첼레스테에게도 문자를 보냈다. 아무래도, 며칠 뒤면 검술 토론회가 있다 보니까.
첼레스테에게는 즉시 답장이 왔다.
[첼레스테: 사진(링크)]
“엥?”
그것은 첼레스테 본인의 셀카였다. 답다고 해야할까, 표정 하나 없이 인형처럼 무뚝뚝한 셀카. 사진에는 링크가 함께 달려있었다.
[첼레스테: 제 별스타 계정이에요]
[첼레스테: 팔로우 해주세요]
팔로우?
[유서담: 계정이 있는지부터 물어봐야 되는거 아냐?]
그러자 한 30초 동안 답이 없더니, 시무룩해진 듯한 문자가 돌아왔다.
[첼레스테: 죄송해요. 요새는 다 하길래 서담 헌터님도 하시는 줄 알고...]
[유서담: ...]
그럼 또 내가 할 말이 없다.
[유서담: 근데 이건 왜?]
[첼레스테: 이번 검술 토론회 참여하면서 SNS 인증을 하려구요]
[첼레스테: 서담 헌터님의 계정을 링크하고 싶어요]
[유서담: 그런 건 됐는데]
[첼레스테: 제가 하고 싶어서요]
음···. 나보다 더 늦은 나이에 SNS를 시작하는 사람은 많다지만, 별로 크게 내키지는 않았다. 이제 와서 뭘 새로 배우기도 상당히 귀찮았고. 그래도 무슨 느낌인지 보기나 할까 싶은 마음에 첼레스테의 계정을 누르자.
“미친, 팔로워가 100만?”
분명 몇 개월 전 헌터 데뷔전을 할 때만 해도 SNS 계정조차 없다고 했던 그녀였다.
아니지. 그 이후에 계정을 만들어서 당시 라이브 방송을 진행했던 UTV 리포터와 맞팔을 했다고 듣긴 들었다. 그 이후로는 관심이 없어서 몰랐는데, 설마 이 잠깐 사이에 폭발적으로 성장했을 줄이야.
하긴, 외모에 가문에 재산에 재능까지 전부 다 가졌는데 유명해지지 않던 예전이 더 이상하다. 애초부터 SNS 계정을 만드는 순간 이렇게 될 건 뻔한 수순이었다.
나는 천천히 그녀가 올린 타임라인을 둘러보았다. ······정말 평소와 다를 것도 없는 딱딱한 표정으로 감흥 없는 셀카를 찍어서 올려놓았는데, 어째서인지 수천에 달하는 사람들이 그게 또 좋다며 뜨거운 반응을 보여주었다.
가장 최근의 것들을 보니 간혹가다 테일러와 같이 찍은 사진이 보였는데, 그녀의 표정이 뾰로통한 것으로 보아 첼레스테가 억지로 찍자고 한 듯싶었다. 그래도 후배의 말을 무시할 정도로 그녀가 냉혈한은 아니었다. 겉으로 사나운 척을 하고 있을 뿐이니까.
“응?”
테일러의 사진을 가만히 보고 있는데, 어떤 댓글이 눈에 띄었다. 영어로 되어있었지만, 충분히 한글로 번역이 가능했다.
[ARen: 테일러 사진 오랜만이네♡♡ 여전히 예뻐 (좋아요 29개 / 답글 97개)]
└[9: 이 ■발 새■야 누가 댓글 처달라고 했어 뒤질라고 진짜 아 갑자기 기분 개■같네 이 ■발 아 (좋아요 4539개 / 답글 127개)]
···테일러의 답글이 더 압권이었다. 얼마나 열이 받았으면 댓글을 치던 와중 그대로 전송했을까.
아렌.
저 남자는 나와 테일러에게 상당한 악연이 있는 남자였다. 나보다 3년 늦게 데뷔한 12호봉의 S랭크 초능력자로서, 항상 전장에서 나를 멸시하고는 했는데 당시의 나는 자존감이 낮았던 탓도 있었고 무시는 항상 받았던지라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나서는 건 테일러였다. 그녀는 항상 아렌에게 온갖 모욕과 쌍욕을 들이붓고는 했는데, 오히려 욕을 먹더니 좋다며 테일러를 쫓아다니기 시작한 것.
“저 새끼도 진짜 일관성 있네.”
저 정도로 욕을 처먹으면 정신을 차릴 때가 되지 않았나? 그나저나 아렌도 별스타그램을 한다는 게 신기해서 놈의 계정을 눌러보았다.
“···부자잖아?”
아렌은 셀카 대신 손등에 해놓은 이상한 문구의 문신, 금이 치렁치렁 달린 목걸이, 값비싼 지갑이나 시계, 그리고 자동차 위에서 수상쩍은 손동작을 한 채로 찍은 사진을 잔뜩 게시해놓았는데 역시 만만치 않은 팔로워를 보유하고 있었다.
하긴, 아렌도 나름대로 명성 있는 S랭크의 강체 능력자였으며 동시에 ‘검의 달인 협회’에서 아주 막강한 지분을 차지하고 있기도 했다.
‘가만. 그럼 이번 검술 토론회 때 저놈도 오는 건가?’
별생각은 없다지만 사람이 징그러운 걸 보면 꺼려지듯, 나도 딱 그런 기분이었다. 그렇게 생각없이 아렌의 게시글을 천천히 내리던 나는, 문득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모든 사진에서 항상 다른 악세서리를 끼고 있는 아렌이었건만, 유독 두 개의 악세서리만큼은 반드시 착용을 하고 있던 것이다.
아렌의 오른 팔목에 착용 되어있는 낡은 백목팔찌와 목에 걸려있는 촌스러운 진주 목걸이. 도저히 ‘멋’을 추구하는 아렌이 좋아할만한 악세서리가 아님에도, 그는 이것을 몸에 항상 꼭 붙들고 다녔다.
아, 그래. 기억난다.
분명 몇 년 전에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도 저걸 몸에 지니고 있었던가.
“저건······.”
[스킬 ‘백색 마녀의 도서관(F)’이 발동됩니다.]
그 악세서리의 정체에 대해 내가 눈치를 채기도 전에, 먼저 스킬이 알아차렸다.
[해당 마법에 대해 검색을 시작합니다.]
[검색 중······.]
[검색 완료: 원시적 각인으로 인한 주문 부여]
[주문의 종류는 ‘근력 강화(B)’ 및 ‘속력 강화(C)’로 확인되었습니다.]
[해당 마법의 기술력이 하위호환으로 판단됩니다.]
[크래킹(Cracking)을 시도하시겠습니까?]
< 검술 토론 경기회(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