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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주인공은 살인이다-32화 (32/251)

< 재능의 개화(3) >

나는 멍하니 화분을 바라보았다.

헬 게이트에서 보냈던 3년의 시간이 문득문득 떠오른 탓이다. 테일러도 그 점을 생각하고는 있는지, 꽤 조심스러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 은혜에 내가 해줄 말은 하나였다.

“고맙다.”

그제야 그녀가 안심했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사실, 나한테 이 화분은 썩어 문드러진 추억을 아로새기는 흉터에 가까웠다. 헬 게이트에서 있던 일은 정말로 떠올리는 것조차 고통스러운 일이었으니까. 물론 시간이 흐르며 나는 그곳에서의 일을 극복해내는 데에 성공했고, 지금에 와서는 정말로 아무렇지도 않았다.

‘헬 게이트라······.’

많은 일이 있었다.

정말로, 엄청나게 많은 일이 있었다.

헬 게이트 제7차 원정대. 역대 가장 많은 인원이 살아 돌아왔다는 500명 중 47명의 생환자. 그중 한 명.

내가 살아 돌아올 수 있던 이유 중 하나는 ‘감’이 좋아서였다.

이상한 소리처럼 들리겠지만, 정말로 그랬다.

어렸을 때부터 줄곧 ‘너는 이상하게 감이 좋단 말이지’라거나 ‘너 그냥 돗자리나 깔지 그러냐?’라던가. 실제로 헬 게이트 내에서, 정말 그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 것들을 내가 감지했을 땐 반드시 무슨 일이 터졌고, 아무리 위험해 보이는 곳이라도 그곳에 가야만 살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을 땐 정말로 그곳으로 간 덕분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

지금에 와서야 그것이 [직감 A]의 재능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당시에는 정말로 순수하게 감이라는 미지의 영역에 의존해서 움직여야만 했고, 그것이 결국 지금까지 나를 살아있을 수 있도록 만들어주었다.

“옛날 생각나네.”

“어때. 예쁘지?”

“집에서 키워야겠는데.”

“으, 그걸? 자칫 크리스털 보호막 깨져서 거 뭐냐··· 방사능이라도 나오면 어떻게 하려고?”

“···헬 게이트가 무슨 원자력 발전소인 줄 아냐?”

화분을 유심히 살펴본다. 은빛 정령의 꽃. 과거에는, 아니 현재 그리고 미래에도 전혀 알지 못했을 정보가 너무나도 손쉽게 떠오른다.

‘이거 정말 F랭크 스킬 맞아?’

아니면 이계에서는 정령이라는 존재가 생각보다 흔하다던가.

현대에서 정령이라는 존재는 거의 미신에 가까웠다. 유령과 마찬가지로 존재하는지 아닌지조차 알 수 없는, 그런 존재. 물론 나는 알고 있다. 유령과 정령은 실존한다. 살면서 단 한 번이지만 유령을 본 적이 있으며, 정령에 대한 이야기는 신뢰도가 확실한 동료에게 들은 적이 있다.

즉, 15년이나 전장에서 구른 나조차도 이야기를 한번 들어본 게 고작인.

그런 존재.

<은빛 정령의 꽃>

*설명: 많은 생명이 빛을 잃은 자리에서 피어난다는 정령의 씨앗. 특별한 방법으로 키워서 개화시키면 정령이 탄생한다.

*관리방법

햇빛: 정령들은 기본적으로 항성의 힘을 받아먹고 자랍니다. 하지만 은빛 정령은 죽음으로 물들어 있어, 햇빛을 많이 받지 못해 굉장히 예민한 상태입니다. 늦은 오후, 나지막이 드리우는 햇빛을 하루 5분씩 볼 수 있도록 해주세요.

온도: 생육적온은 섭씨 20도 이상의 환경이 가장 이상적입니다.

토양: 은빛 정령들은 죽음의 땅에서 자라났지만, 생명의 활기를 기반으로 하여 에소텐의 요정가루를 깔아놓은 뒤 에자텐의 풀잎피리를 300일 동안 듣고 자라난 현휘초의 씨앗을 빻아서······(후략)

영양분: 부정적인 감정 속에서 태어난 정령의 꽃이지만, 반대로 긍정적인······(후략)

심신관리: 당신이 만약 요정족이나 용족, 혹은 그 외의 초월종이라면 정령의 꽃과 대화를 나눌 수 있을 겁니다. 때때로 질문을 던져서 정령의 마음을 체크해주세요. 태어나기 직전의 그들은 마음이 굉장히 연약하여······(후략)

가만히 ‘백색 마녀의 도서관’에서 펼쳐진 책을 바라보던 나는 이내 고개를 들어 테일러를 바라보았다. 마치, 나 잘했지? 라는 듯한 뿌듯한 표정으로 생글생글 웃으며 나를 바라보고 있는 그녀를 보고 있자니 어떤 묘한 감정이 들었다.

어쩐지, 뭔가가 불안하다.

친구 사이에 보통 이런 선물을 주지는 않는다. 분명 테일러와 나는 수없이 목숨을 빚졌으며, 누구보다도 신뢰도가 깊은 관계라고 자부할 수 있다. 그래서 뭐든 선물해줄 수는 있다.

나와 그녀는 그런 관계다. 서로에게 뭐든 다 해줄 수 있는, 그런 사이.

그렇지만, 로스트 데이에게서 ‘헬 게이트 매터’를 빼앗아올 정도로 그녀가 무언가에 열정적이던가? 아니다. 그녀와 나 사이에서 오고 가는 ‘선물’은 그런 의미가 아니다.

친구 사이의 선물에 나는 단 한 번도 애정을 쏟은 적이 없다.

그저 툭 지나가면서 던지듯이 건네주는, 그런 정도의 선물. 그런데 한두 달도 더 전부터 미리 계획을 세워둔 것처럼 뛰어다녀 로스트 데이라는 커다란 길드에게서 갈취해온 헬 게이트 매터라는 물건은 여태까지와는 의미가 달라도 너무나도 달랐다.

그래서 나는 조심스레 물었다.

“너, 혹시 무슨 일 있어?”

“···뭐 인마?”

“나한테 말해봐.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거라면 힘이 닿는 한도 내에서 도와줄 테니까.”

내가 알기로 테일러가 이러한 행위를 할 때는, 정서적으로 굉장히 불안정할 때이다. 그녀는 이기적이었고, 폭력적이었으며, 자기 자신밖에 모르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건 사실 방어적인 성향을 공격적인 성향으로 바꾸기 위해 스스로 뒤집어 쓴 프레임에 불과했다.

그래서, 아주 간혹 그녀가 정말로 힘들 때면 이런 식으로 이타적으로 변하기도 한다. 테일러와 함께한 시간만 어느덧 15년이다. 이제는 하는 꼬라지만 봐도 뭐가 잘못됐는지 나는 다 알 수 있······.

“뭘 다 알아?”

“뭐?”

테일러는 묘하게 한심하다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너는 진짜 그냥 나가 죽어라. 여자가 기껏 힘들게 선물을 해왔더니, 뭐? 이게 확 진짜.”

“아니. 나는 진짜로 네가 걱정돼서······.”

“사람이 안 하던 짓을 갑자기 하는 게 무슨 이유가 있어서 그럴까?”

그러면서 피식 웃는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던 나는, 문득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너, 설마······.”

“왜.”

내 굳은 표정을 보더니 테일러 역시 웃음기를 지우고서 말했다.

“내가 이제 와서, 이러면 안 되냐?”

“······.”

“안 될 이유도 없잖아?”

10년도 더 이전. 우리 모두가 전장에서 살아남기에 급급했을 때, 한 가지 약속을 했다.

서로를 위로하고, 서로 몸을 섞고, 서로를 지켜주고, 서로 우애를 나누되.

마음을 나누지는 말자고.

하루마다 동료를 잃었으며 사랑하던 이를 잃었고 친구를 잃던 때였다. 자신 혼자만을 챙기기도 버거운데, 누군가에게 마음을 내주었다가 잃었을 때 그는 과연 어떻게 무너지게 되는가.

그래서 나는 누군가가 나에게 다가오려고 하면, 항상 선을 긋고서 거리를 두었다. 그것은 상대방도 마찬가지였다. 누군가를 잃는 게 두려워서가 아니라, 그 상대방이 나를 잃었을 때 느낄 감정을 잘 알고 있었기에.

“그랬었지. 근데, 이제는 너도 바뀌었고, 시대도 바뀌었어.”

이제는 내일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당장 오늘 밤, 잠든 사이에 내가 사랑하던 이가 죽을 걱정을, 그리고 내가 죽어서 사랑하는 이가 슬퍼하지 않아도 된다.

“···에휴. 그냥 그렇다고 이 한심한 새끼야. 네 대가리에 심하게 하자가 있어서 이런 걸 일일이 설명 해줘야 한다는 게 내 마음이 참 아프다.”

“나는······.”

내가 대답하려고 하자, 그녀는 씨익 웃으며 내 등짝을 살짝 후렸다.

“됐고, 난 가본다.”

테일러는 시원스레 그리 말한 뒤 순식간에 사라졌고, 나는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그녀가 나간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제야 테일러에게 뒤늦게 너무나도 고맙다는 감정이 밀려들어오면서, 어쩐지 뭔가 이상하고 달짝지근한 기분이 들었다. 이걸 뭐라고 표현해야될지 모르겠다. 꽤 예전에 애써 잊어버린 감각을 찾아버린 느낌이라서.

굉장히 낯설고, 싱숭생숭했다.

그러나 어쩐지 나쁜 느낌은 아니었다.

화분을 한참이나 물끄러미 바라보다 그것을 조심스레 근처에 있던 싯업 평벤치 위에 올려놓고 뒤를 돌아보니, 첼레스테가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왜?)”

“(운동 마저 해요.)”

“(어···. 그래.)”

그녀가 건조한 목소리로 목검을 겨누며 말하자, 나도 목검을 들 수밖에 없었다.

···아직 덜 쉬었는데.

*

집으로 돌아온 나는 화분을 조심스레 책상 위에 올려둔 뒤, 다시 ‘백색 마녀의 도서관’을 활성화하여 열람하였다.

“은빛 정령의 꽃······.”

헬 게이트에서 재배해온 이 꽃을 성공적으로 개화시키기 위해서는 상당히 독특한 재료가 많이 필요했는데, 대부분의 것들은 지구에서는 구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문제다. 애초에 나는 다른 세계를 왔다갔다 할 수만 있을 뿐, 물건을 가지고 돌아올 수는 없지 않은가?

다행스럽게도 그에 대한 해답은 의뢰인이 설명해주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해결책이 따로 있기는 합니다.>

“오? 뭔데.”

<‘아공간’ 계열의 스킬을 획득할 경우 제한적으로 타계의 물건을 가지고 돌아올 수 있습니다.>

“아공간···?”

생전 처음 듣는 종류의 능력이었다.

“옛날에 유명 소설에서 본 적은 있는 거 같은데······. 다른 공간에 물건을 수납할 수 있는, 그런 거였나?”

<그렇습니다.>

정말 이름만 들어도 구하기 더럽게 어렵다는 생각이 드는 스킬이었다.

“근데 그런 스킬을 내가 가져와도 상관은 없어?”

<아공간은 수준 높은 마법사나 과학자들도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긴, 어지간한 주인공들의 스킬은 개연성과 아무런 관계도 없다고 했다.

<게다가 차원을 건너서 물건을 운반하는 정도로는 세상의 개연성이 파괴되지 않습니다.>

<유서담의 집에서 만든 요리를 옆집으로 가져간다고 해서, 큰 문제가 없는 것처럼.>

<해당 세계의 기술력에 큰 변화가 있을 수 있으나, 약간의 계기가 있었을 뿐 기술의 발전은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말은 복잡하지만 요약하자면 그렇다.

내가 만약 아공간을 얻으면 이계의 물건을 들고 돌아올 수도 있고, 반대로 현대병기를 더 많이 들고서 이계로 찾아가는 것도 가능하다는 말.

“괜찮은데.”

이계에는 현대에서 만들 수 없는, 그리고 현대에서는 상상조차 못 할 물건이 많았다.

솔직히 내가 사용하는 에테르 디스펜서가 성능이 나쁜 편은 아니었으나, 무게에 비해 주인공들에게 큰 피해를 입히지 못하는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예전에 보았던 ‘성검’급의 물건을 구할 수 있다면, 좀 더 손쉽게 일 처리가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어찌 되었건, 당장 이 꽃을 키울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더 좋은 환경을 구성해주는 건 충분히 가능했다.

백색 마녀의 도서관 스킬은 비비안타 아카데미의 마법보다 쉬운 것 같으면서도 굉장히 독특하고 또 어려웠는데, 이해하느라 한참이 걸렸으나 결국은 마법을 사용할 수는 있었다.

공기의 농도를 바꾸고, 토양에 요정의 기운을 흩뿌리고, 햇빛을 적당히 필터링하고서, 감정을 마법적으로 걸러내는 각종 마법을 한참이나 낑낑대며 준비한 나는 바닥에다가 복잡한 마법진을 꾸역꾸역 그려냈다.

F랭크의 마법, 즉 가장 기초적인 1단계의 마법에 불과했지만 지구에서 만든 크리스털 유리관보다는 훨씬 더 좋은 환경을 구성해줄 수 있었다.

가만히 숨을 내쉬어보니 확실히 청량한 공기가 감돌고 있었다. 이 정도면 어지간한 깨끗한 숲의 공기보다도 훨씬 더 맑다.

헬 게이트에서 난 식물이 이렇게 맑은 공기를 맡으며 자라야 한다니. 참 모순적이라는 느낌이 들었지만, 어쩐지 아까보단 훨씬 더 생기가 넘치는 듯한 꽃을 보고 있자니 기분이 좋아졌다.

“······.”

테일러 나인이 그 고생을 해가면서 간신히 돌려받아온 내 꽃이다.

열심히 키워야지.

그런 생각을 하며 꽃잎에 손을 가져다 대어, 툭 건드는 순간.

목소리가 들려왔다.

-···숨 막혀.

“뭐, 뭐야?”

순간 깜짝 놀란 나는 나도 모르게 에테르 블레이드의 검날을 사출하며 뒤로 펄쩍 뛰었다. 목소리는 여전히 들려왔다.

-왜 놀라···?

“미친. 꽃이 지금 말을 하는 거야?”

-으응.

어린아이의 목소리였다. 여자인지 남자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꽤 맹한 듯한 그 목소리는 어쩐지 가슴을 울리는 신비로운 느낌을 주었다. 에테르 블레이드를 옆으로 치우고서 천천히 꽃에게 다가가자, 그것이 말했다.

-놀라면 무서워···.

“꽃이 말하는데 안 놀라겠냐?”

-···마녀는 원래 할 수 있어.

“마녀?”

그러고 보면, 은빛 정령의 꽃 설명에 요정족이나 용족 등의 ‘초월종’들은 정령의 꽃과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문단이 있기는 했다. 그럼 설마, 마녀가 초월종인지 뭔지 하는 그런 거란 말인가?

아무래도 나는 마녀가 아닌데도 마녀의 스킬을 가지고 있어서 저 정령과 대화가 통하는 모양이었다.

-···다행이다.

“뭐가?”

-아무도 내 말을 못 들어서 무서웠어···.

정령의 꽃이 덤덤하게 그리 말하자 어쩐지 묘한 기분이 들었다. 정령의 꽃과 대화를 나누기 위해서는 반드시 초월종 이상급은 되어야만 하는데, 지구에는 인간밖에 살지 않는다. 게다가, 헬 게이트 내에는 대화가 통하는 지성체가 존재할 리 만무. 정령은 그렇게 죽음 속에서 태어나, 결실을 맺지도 못한 채 외롭게 죽음 속으로 되돌아갔던 것이다.

-근데···. 너는 마녀치고 조금 특이하네···.

“난 마녀가 아니라서.”

꽃은 내 대답을 듣고서 말을 멈추더니, 한참이나 고민한 끝에 목소리를 다시금 내었다.

-으응. 너 엄청 마법 못해···.

“······.”

-마녀인데 왜 그런 거야···?

너무 순수한 물음을 던져오는 바람에, 상처를 받아야 하나 싶었을 때.

-그거···. 그렇게 하는 거 아니잖아.

“응?”

팔랑···!

정령의 꽃에서부터 빛가루가 터져나오더니, 마법진을 위에서부터 뒤덮었다. 그러자 희미하게 마력이 움직이더니, 내가 바닥에 그려놓았던 마법진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어, 어어?”

허공에 마법진을 새긴다? 이런 건 비비안타 아카데미에서도 본 적이 없다. 그 뛰어난 마도 제국에서조차 본 적이 없을 정도로, 정령이 보여준 행위는 말도 안 되는 기행인 것이다.

-왜···놀라?

“너, 너 이거 어떻게 한 거야?”

-내가 안 했어.

정령의 꽃잎이 살짝 흔들리며 마치 나를 가리키는 듯한 제스처를 취했다.

-네가 한 거잖아.

나는 그때까지도 몰랐다.

마법 하나로 초월종이 된 마녀의 마법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그것은, 내가 상상하던 것 이상으로 위대하고 또 아름다웠다.

< 재능의 개화(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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