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재능의 개화(1) >
이른 오전.
하렌 알머스는 ‘히아신스 관’에서 업무를 본다. 흰색 히아신스의 꽃말은 진실한 행복. 하지만 단 한 번도 행복을 느낀 적 없는 하렌 알머스였고, 또한 흰색을 증오하는 그녀였기에 참으로 어울리지 않는 장소가 아닐 수 없었다.
차라리 노란색 히아신스(용기, 승부)로 바꿔 달라고 아버지에게 그렇게 요청했건만, 알머스 공작은 번번이 웃으면서 그 요청을 거부할 뿐이었다.
“저···. 아가씨?”
“말하라.”
평소와 같은 날이었다.
평범한······. 그런 날.
어젯밤, 자신의 손으로 여동생을 죽였다는 점을 제외하면.
정말로 아무것도 아닌. 그런 날.
그토록이나 좋아했던 여동생을 죽였음에, 어찌 사람이 아무렇지 않을 수 있을까. 그래서 겁 없는 기사 한 명이 하렌에게 질문을 던졌을 때, 그는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다.
“괘, 괜찮으십니까?”
“안 괜찮다.”
“······!”
“그러니 감당 안 될 질문은 하지 말거라. 페이클루스.”
“죄, 죄송합니다!”
이 여자는 정말로 괜찮은 게 맞다고.
사실, 평범하게 생각했을 때 제아무리 하렌이라도 사랑하던 동생이 죽으면 마음이 편할 리는 없었다.
엘라헤 알머스. 자신의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첩으로 들인 여자의 배에서 나온 배다른 동생. 원래도 애정이 있는 건··· 아니 오히려 상당히 싫어하던 존재였는데 어째서인지 최근 들어서 그녀에게 상당히 애정이 가던 상태였다.
하렌은 스스로의 그 점이 퍽 이해가 가지 않았다. 마치 세상 자체가 그리하도록 강요한 것처럼, 저도 모르게 하렌은 엘라헤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러다 그녀가 죽고 나니, 사랑하던 동생이 죽어서 가슴이 아프기는커녕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졌다.
마치, 원래부터 이렇게 됐어야만 하는 것처럼.
전혀 이상하게 느끼질 못했다. 엘라헤를 혐오하던 자신이 어째서 그녀에게 마음을 열었는지. 주변인들 또한 말을 하고 있지는 않았지만, 똑같은 심정이었다.
꼴에 검술명가의 자식이라고 조금이라도 화나면 검을 빼들질 않나, 입에는 거친 쌍욕과 폭력적인 행동을 달고 살았으며 예쁜 짓이라고는 한 번도 하지 않았던 엘라헤였다. 그런 그녀가 갑작스레 행동을 바꾸었다고, 좋아하게 되는 게 과연 맞기나 하단 말인가?
물론 이에 대해서는 ‘빙의’ 계열 클리셰에 포함된 ‘이미지 관리’와 ‘과거 청산’이라는 특수 스킬의 효과가 포함되어 있었지만 그들로서는 전혀 알 길이 없었기에 그저 풀리지 않는 의문으로 남아있었다.
‘헌데···. 이 남자의 정체는 대체 뭐지?’
하렌은 ‘유서담’이라는 남자에 대해 조사를 하고 있었다. 어느 날부턴가 갑작스레 나타나 마치 당연하다는 듯 저택 내에 스며들어서 생활을 하고 있던 자. 그리고, 무려 공녀의 검술지도를 맡고 있던 자.
검술명가 알머스다. 그런 명문가의 자녀를 가르치는 교사라면 당연히 알머스의 검술을 사용하는 자가 와야만 한다. 역사적으로도, 상식적으로 당연하다. 그런데 생판 남이 검술 지도 교사로 왔음에도 누구도 이상한 점을 느끼지 못했다.
“잠시 가볼 곳이 생겼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그래.”
하렌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교회에 다녀오겠다.”
*
서담은 햇빛이 잘 드는 교회의 구석에 앉아서 허공을 바라보았다.
[70레벨의 주인공을 사냥하였습니다.]
[레벨이 4+1단계 상승합니다.]
[수명이 700일 지급됩니다.]
[당신의 수명: 2728일 9시간 19분]
이전과 같은 70레벨의 주인공을 잡았는데, 그때보다 레벨이 더디게 오른다. 아무래도 레벨이 높아질수록 레벨 업의 조건이 박해지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의뢰인이 추천해주는 것을 완료하여 결과적으로는 저번처럼 5레벨이 올랐다.
거기에, 그럭저럭 쓸만한 스킬도 얻었다.
[주인공 엘라헤의 스킬 ‘백색 마녀의 도서관(F)’를 흡수하였습니다.]
고작해야 F랭크의 스킬. 그러나 효과만 보면 서담에게 상당히 유용한 스킬이었다. 무려 백색의 마녀가 사용하던 마법서가 보관된 도서관을 열람할 수 있는 것. 허공에 손을 뻗으면 책장이 나타나고, 거기서 원하는 마법서를 꺼내서 읽을 수 있었다.
게다가 백색의 마녀가 사용하는 마법은 거의 비비안타 마도제국의 것과도 비슷한 수준이었고 심지어 어떤 부분에서는 더욱 뛰어났다. 아무래도 인간들이 이뤄낸 위대한 마도 문명보다, 마법의 종족이 일궈낸 마법이 더욱 뛰어난 건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유서담>
[도합 레벨: 37]
*능력치
[근력 34] [체력 31] [민첩 32]
[기력 1] [마력 37]
*재능
[검술 A+] [사냥 D+] [사격 C]
[요리 D-] [직감 A] [기민 A]
[기타···.]
*스킬
[주인공 사냥꾼 Lv. 2]
[백색검법(S)]
[육감(F)]
[바람 걸음(D)]
[아라셀리 식 마나 써클링(SS)]
[백색 마녀의 도서관(F)]
최근 레벨은 빠르게 올려서 이제 레벨 자체만 놓고 보면 거의 D랭크라고 해도 무방한 수준이었다. 운동을 거의 하지 못해서 레벨에 비해 능력치가 상당히 부족했지만, 마나 써클링 덕분인지 마력 자체는 한계치를 찍은 상태. 이것만 놓고 보자면 육체파가 아니라 그냥 평범한 마법사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서담은 허공에 손을 뻗어, 투명한 책 한 권을 꺼냈다. 남들에게는 보이지 않겠지만 서담에게는 무려 천 페이지짜리의 두꺼운 책이 들려있었다.
“······.”
그리고 책장의 첫 페이지를 넘기는 순간, 그는 그것을 덮었다.
‘미친, 존나 어렵네.’
가장 기초 마법서를 펼쳐서 보았음에도 머리가 깨지는 줄 알았다.
그래도 이제는 비비안타 때와는 다르게 천천히, 그리고 여유롭게 마법을 공부할 수 있게 되었다. 딱 서담이 원하던 스킬이 아닐 수 없었다.
<원래의 세계로 귀환하시겠습니까?>
“그럴까.”
이곳에서의 일도 모두 마무리했겠다, 남아있을 필요는 없었다. 그래서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뒤쪽에서 누군가가 교회의 문을 당차게도 열고 들어왔다. 아무리 신을 안 믿는 사람이라 해도 저럴 순 없을 텐데 말이다.
“하렌?”
“그래. 이제는 이름도 막 부르는구나.”
“아니 뭐···. 그럴 수 있죠.”
“그럴 수 없다.”
하렌의 똑부러진 말에 서담은 고개를 갸웃했다.
“저를 찾아온 겁니까?”
“그래···. 네 존재가 상당히 의문스러웠던 참이거든.”
“말 안 해줄 건데요.”
“애초에 대답을 순순히 들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하렌은 자신의 허리춤을 만지작거렸다. 자신의 아버지로부터 하사받은 명검. 이것을 뽑아, 저 남자의 목에 겨눈다면 원하는 대답을 들을 수 있을까?
아니, 애초에 자신은 무슨 연유로 이 남자를 찾아왔는가. 그에게서 무슨 대답을 원하는가. 그냥 정말로 평범한 검술 지도교사일 수도 있지 않은가?
“모르겠군.”
“대뜸 찾아와서 한다는 말이 그겁니까? 뭘 모르겠는데요?”
“널 모르겠단 말이다. 넌 도대체 누구지?”
검술 지도교사, 라고 대답할 뻔한 서담은 이내 대답을 고쳤다.
“사냥꾼입니다.”
“···무엇을 사냥하는?”
“엘라헤 공녀같은 존재를 사냥하는.”
“마녀 사냥꾼이란 말인가?”
“꼭 대상이 마녀일 필요는 없죠.”
서담은 거기까지 말한 뒤 입을 다물었다. 의뢰인이 이전번에 굳이 주인공 사냥에 대해 이야기하지는 말아 달라고 부탁했기 때문이다.
하렌은 잠시 고민하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너는 이미 엘라헤의 정체를 알고서 찾아왔던 모양이군.”
“예.”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알머스 공작가의 그 누구도, 심지어 아버지조차···. 그 사실을 몰랐단 말이다. 그런데 넌 어떻게 알았지?”
하지만 서담은 대답하지 않았고, 하렌은 그런 그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내가 지금 이 검을 뽑아서 네 목에 겨누면. 들을 수 있나?”
“협박을 꽤 디테일하게 하시네. 못 들을 겁니다.”
그에, 하렌은 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거기까지였다. 더 이상, 그녀는 서담에게서 무엇을 캐물을 생각은 접었다.
단지.
“···내가, 아니 우리가. 엘라헤를 죽인 것은 옳은 일이었나?”
어쩌면. 이 질문 하나를 위해 이곳에 찾아왔을지도 모른다고 하렌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한 부분에 대해서는 서담 역시도 꽤 많은 고민을 했지만, 역시 죽이는 게 옳았다. 잘잘못을 따지기 이전에, 결국 세상의 근간을 흔들어버릴수도 있는 위험한 존재였으니까.
그래서 서담은 그렇게 답했다.
“이미 알면서도 물어보지 마십쇼.”
대답이 들려왔을 때.
“···어?”
남자는 이미 사라진 뒤였다.
마치 귀신에게 홀린 것처럼 하렌은 멍하니 주위를 돌아보았다. 소드 마스터의 바로 아랫단계인 소드 프로페셔널의 경지에 올라선 하렌이다. 그런 그녀조차, 서담이 사라지는 것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대체 저 남자는······.’
가만히 서담이 서 있던 자리를 쳐다보던 하렌은 이내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런가.”
그의 말대로였다. 이미 그녀는 알고 있었다.
단지, 누군가에게 묻고 싶었을 뿐.
하렌은 뒤돌아 나오며 교회의 문을 쿵! 소리가 나도록 닫았다. 어쩐지, 모든 것을 털어낸 듯 가슴이 후련해졌다.
*
[세계의 시간배속이 정상화되었습니다.]
알머스 가에서 지낸 시간은 거의 3~4주가량이었고, 원래의 세계로 돌아왔을 땐 고작해야 일주일이 조금 넘은 채였다.
스마트폰을 들어서 가장 먼저 테일러 나인의 연락을 확인하니, 아주 신난 듯한 메세지가 여럿 와 있었다.
[테일러 나인: 사진]
[테일러 나인: 얔ㅋㅋㅋ이거봐 시발 존내웃겨ㅋㅋㅋ]
[테일러 나인: 사진]
[테일러 나인: 사진]
[테일러 나인: 야 나 TV나옴]
[테일러 나인: 사진]
대부분이 로스트 데이를 콕콕 쑤시는 내용이었다. 그 일주일 사이에 많은 기사가 나 있었고, 테일러 나인은 로스트 데이 측에서 여론을 잠재우지 못하도록 온갖 거친 행각을 보이고 다녔다. 게다가 항상 눈에 띄는 곳에서 행동하고 있었기에 로스트 데이에서 뭘 하지도 못했다.
사진 하나를 확인해보니 ‘오늘의 패션’이라는 잡지 사이트에 테일러의 전신 샷이 올라와 있었다. 그녀는 예쁜 얼굴만큼이나 패션에도 지대한 관심을 보였는데, 당연하지만 엄청나게 옷을 잘 입는 편이었다.
문제가 하나 있다면, 그녀의 복장이 대부분 시원스러운 여름이라는 것.
덕분에 가장 주목받는 유명인의 패션이 트렌드가 되어버리는 어처구니없는 한국 문화 덕분에, 한겨울이라는 날씨에 어울리지 않게도 시원한 복장이 유행하는 미친 결과가 탄생하고 말았다.
[테일러 나인: ㅇㅇ이전번에 던전에서 캐온 크리스털 정산됨.]
“오?”
이전번에 던전에 가서 얻었던 무수히 많은 에테르 크리스털은 모두 정산되지 못한 채였다. 단 둘이서 독식을 했기에 전부 처리하려면 꽤 시간이 걸릴 것으로 추정되었는데, 일주일 만에 그걸 거의 해내다니.
나는 테일러의 문자 메세지를 하나하나 확인한 뒤 답장을 보냈다.
[유서담: 나 왔어]
답장은 칼같이 왔다.
[테일러 나인: 야이 시발 어디서 뭘하고 돌아다닌거야?]
읽씹했다.
대답하기 귀찮아서였다.
그다음으로 첼레스테의 메세지를 확인했다. 일주일 동안 그녀에게 온 연락은 한 통. 오늘 온 것이 전부였다.
[첼레스테: 입국했어요]
새삼 시간을 딱 맞춰서 돌아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검술 지도를 하기로 했던가······.’
여태, 거의 한 달이나 무려 SS랭크의 검술을 옆에서 지켜볼 수 있었다.
S랭크의 백색 검법보다도 월등히 뛰어난 수준을 가진 명문가의 검술. 당연하지만 엘라헤와 하렌이 수련하는 것을 보며 나도 꽤 많은 것을 보고 배울 수 있었고, 많은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새로 얻은 마법? 물론 이것도 당장 실험해보고 싶어서 미쳐버릴 지경이었고, 해야만 하는 일도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테일러 나인과 만나 로스트 데이에 대한 일은 물론 에테르 크리스털을 정산해야만 했으니까.
하지만 그보다도 지금 당장은 더욱 검을 휘두르고 싶었다.
그간 실력이 뽀록나지 않기 위해 검을 쥐는 걸 참느라 얼마나 애를 먹었던가.
눈앞에 내가 모르던 새로운 검의 경지가 스쳐 지나가고 있는데. 조금만 더 앞으로 걸어가면, 내가 모르던 세상이 펼쳐질 것 같은데.
정말로 쉽지 않은 한 달이었다.
애써 검을 휘두르고 싶은 것을 꾹꾹 눌러 참았으니, 이제는 참았던 것을 모두 해소하여 내 검을 확인해볼 시간이었다.
[유서담: 바로 체육관으로 뛰어와]
[첼레스테: 네!!]
< 재능의 개화(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