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김정은-438화 (438/470)

진격의 나팔 소리(2)

옛 일본의 모든 조선소는 이때 거의 문을 닫았지만, 남북한과 고구려에 필요한 함정을 건조하는 미쓰비시 중공업 등의 조선소만은 활발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각 함정은 아직 40%도 건조되지 못했기에 조성호 상장은 자신이 판단한 이런 특별한 조처를 한 것이다.

이 결과 이즈모급 건조를 책임진 미쓰비시 중공업 소속 책임자 두 명은 함정을 건조하는 독에 매달렸고, 함정을 건조하는 미쓰비시 직원들은 그 모습을 보면서 눈에 불을 켜고 하루

12시간씩 건조에 매달려야만 했다.

그리고 이때 옛 일본의 모든 조선소가 거의 문을 닫는 바람에 조선업계 실업자는 넘쳐났고, 그들을 고용하는 것은 식은 죽 먹기였으나 그들의 임금은 옛 일본 조선소들이 주던 임금의

20%도 안 됐다.

그래도 일하기를 원하는 이들이 부지기수였으니 이때는 옛 일본 정부가 주던 실업급여는 물론 모든 복지제도가 폐지되어 실업자가 되는 순간 저축해둔 돈이나 숨겨둔 돈이 없으면 곧바로

굶주려야 했기 때문이다.

거기다가 피난민 수백만 명이 유리걸식하는 것은 물론 조선업계만이 아니라 여타 업계의 실업자까지 더해져서 옛 일본 현 왜에는 일천만 명 이상이 심각한 의식주 문제에 직면해 있었으나

군정사령부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 대신 한국어 교육과 식민 통치에는 열을 올리고 있었으니 옛 일본인들은 자신들의 조상이 조선을 식민 통치하면서 주었던 그 고통을 고스란히 그대로 돌려받고 있다고 봐야 했다.

하나 강제 징용, 징병, 창씨개명 등이나 남북한과 고구려군 위안부를 모집하거나 강제로 동원하지는 않았으니 그때보다는 더 낫다고 해야 할 것이다.

***

고구려 심양, 고구려 국방과학연구소 야외 발사장에서는 여전히 탄도미사일이 발사되고 있었는데, 이번에 발사한 미사일은 사거리 5,000km짜리 현무-5A와 더불어서 사거리가 무려

1만km에 이르는 현무-5B와 사거리가 그보다 더 긴 1만 3,000km에 이르는 현무-5C, 이렇게 3종류였다.

“현무-5B와 현무-5C도 발사해. 발사!”

자신의 명령에 사거리 1만km에 이르는 현무-5B와 사거리 1만 3,000km에 이르는 현무-5C 미사일까지 발사되자 고구려 육군 전략유도탄 사령관 김종명이 다시 이렇게 지시했다.

“미사일 추적해. 그리고 각 정찰기에도 연락해!”

그동안 고구려 육군 전략유도탄 사령부는 고구려 국방과학연구소가 생산한 현무-5A, 현무-5B, 현무-5C 미사일 수십 발을 발사하면서 실전 성능시험을 계속하고 있었다.

이 현무-5A, 현무-5B, 현무-5C 미사일에는 지금처럼 재래식 탄두와 함께 장차 핵탄두도 탑재되어 미국과 러시아 등 핵 강국에 대응하는 고구려와 남북한의 최종병기가 될

예정이었으니 실전 성능 실험을 하루라도 빨리 끝내고, 완전한 실전배치가 이루어져야만 했다.

그래서 이렇게 계속 발사하고, 탄도를 추적하고, 정찰기 등 정찰자산으로 표적을 확인하고, 다시 발사하고, 성능을 개량하는 등등 하며 점점 미사일의 성능을 향상하고 있었다.

“표적은 어떻게 됐어?”

“타격했습니다. 사령관님.”

“오차는?”

“약 13m입니다.”

“현무-5B와 현무-5C는 얼마야?”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고구려 요동도 심양에서 발사한 사거리 5,000km 현무-5A 미사일이 직선거리로는 약 2,700km 떨어진 초나라 운남성 곤명시(昆明市)를 타격했으나 고각으로 발사했기에 실제

비행 거리는 약 5,000km였고, 그 거리를 날아갔음에도 원형공산오차(CEP)는 이처럼 약 13m였다.

개발단계에서부터 수십 차례 시험 사격, 그리고 실전에서의 성능 개량을 위한 발사 시험을 하고 또 하고 해서 그동안 줄이고 줄인 원형공산오차는 이처럼 약 13m였다.

그리고 현무-5B도 운남성 곤명시를 타격했고, 원형공산오차는 약 31m, 현무-5C의 원형공산오차는 약 52m였지만, 이들이 날아간 거리는 고각으로 계산했을 때 약 1만km와 약

1만3,000km였다.

이렇게 보고를 받은 고구려 육군 전략유도탄 사령관 김종명이 탄도미사일 개발을 책임진 국방과학연구소 부소장 단병호에게 이렇게 말했다.

“좀 더 원형공산오차를 줄여 현무-5A는 10m 이내, 현무-5B와 5C는 30m 이내가 나오도록 해야 할 거요. 공화국의 화성-15형과 화성-16형도 원형공산오차가 70m

이내인데, 우리 고구려와 북남 그리고 옛 중국과 일본의 미사일과 로켓 기술자까지 모두 붙어서 만든 현무 미사일이 그 정도 성능을 못 내면 안 되겠지.”

“우리도 최선을 다하고 있으니 이 전쟁이 끝나기 전에 이 세상에서 가장 정교한 탄도미사일과 순항미사일을 보게 될 것이니 염려 마시죠.”

“그러기를 바라겠소. 그건 그렇고 잡아온 짱깨와 쪽발이들은 순순히 협조하오?”

“협조하지 않고는 안될 분위기와 그런 환경이라서 그런지 제법 잘 협조합니다.”

“조금이라도 말을 안 듣거나 협조를 거부하는 자가 있으면 언제든지 말씀하시오. 그럼 그런 자는 모두가 보는 앞에서 아주 껍질을 벗겨버리겠으니까.”

옛 중국과 일본의 미사일과 로켓 기술자는 물론 전투기와 폭격기와 무인기, 함정과 잠수함, 전차와 장갑차, 자주포와 로켓 하다못해 소총과 기관총 기술자까지 모조리 잡아 오고, 강제로

데려와서 고구려 국방과학연구소에서 일을 시키고 있었다.

거기에다가 한국 국방과학연구소와 북한 국방과학원의 관련 최고 기술자들도 모두 고구려 국방과학연구소에서 일하고 있었으니 고구려 국방과학연구소는 비단 고구려와 남북한만의 합작이 아니라

남북한과 옛 중국과 옛 일본의 합작품이라고 해야 했다.

그랬으니 남북한의 기술로는 개발할 수 없었던 제법 많은 것도 일정 부분 성과를 내고 있었으니 그중 대표적인 것이 항공모함에 실릴 함재기였다.

현재 건조 중인 남북한과 고구려의 첫 항공모함인 고구려함에는 이미 미국의 F-35C가 함재기로 채택되어 있었기에 합동 해군 항공대 소속 조종사들과 운용 예정 요원들이 미 해군에서

F-35C 운용훈련과 항모 운용훈련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두 번째 항공모함인 한국함과 조선함에는 아마도 고구려 국방과학연구소가 그들 기술자의 도움으로 F-1 삼족오 전투기를 개량해서 만들 함재기가 실릴 확률이 상당히 높았다.

그리고 이들 옛 중국과 일본의 기술자들은 비단 고구려 국방과학연구소에서만 일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 현장인 대련조선소에서 고구려함 등을 건조하는 작업에 투입된 인원도 이때에는 근

7만 명을 웃돌았다.

하고 왜 군정사령부 부사령관이자 인민군 4군단장 조성호 상장의 지시로 옛 일본 미쓰비시 조선소 등에서 남북한과 고구려 해군 그리고 합동해군이 사용할 함정을 건조하기 시작한 조선

기술자들도 이때에는 약 7만 명을 웃돌았다.

그러니 약 14만 명에 이르는 옛 중국과 일본 기술자들이 강제 또는 반강제, 일부는 자발적으로 남북한과 고구려를 위해서 일하고 있다고 보면 됐다.

물론 그들을 관리·감독하고, 감시할 고구려 국방과학연구소 소속 기술자들과 한국과 북한에서 파견 온 기술자들도 그들과 함께 일을 했고 말이다.

“핵심 기술자들은 가족을 인질로 잡고 있고, 의식주까지 우리가 통제하는데 그런 자는 없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우리 선조들이 독립을 위해서 목숨을 내놓고 투쟁했듯 그렇게 목숨까지

걸고, 협조를 거부하는 자는 더더욱 없습니다. 그러니 다 민족성의 차이겠죠.”

“그런 면에서는 쪽발이들이 더 협조를 잘하는 것이고 말이오.”

“맞습니다. 옛 중국 기술자들은 초나라가 아직도 우리와 저렇게 싸우고 있기 때문인지 옛 일본 기술자들보다는 다루기가 더 힘들지만, 그와 반대로 이미 우리의 식민지가 된 옛 일본의

기술자들은 순순히 협조를 잘합니다.”

“초나라 놈들도 곧 쪽발이들처럼 잘 협조할 것이오. 내가 그렇게 만들어놓고야 말 것이니까. 그건 그렇고 한발씩 더 쏴 볼 테니까 이번에도 탄도 추적을 잘하시고, 자료수집 빈틈없이

하시기 바라오. 그럼.”

그렇게 고구려 국방과학연구소 야외 시험장에서 현무-5A, 5-B, 5-C 탄도미사일들이 다시 발사될 때 국군 1군단 저격대대 서한국 상사의 저격소총도 불을 뿜었다.

그리고 또 한 명의 초나라군이 사살당했으니 벌써 그의 소총에 쓰러진 적의 숫자만 해도 3번의 전쟁에서 총 127명이었다.

“서 상사님, 127명째입니다. 3명만 더 저격하시면 이제 130명. 그럼 준위로 진급하는데, 별 어려움은 없을 것 같습니다.”

“박 중사 너도 상사로 진급하고.”

“물론이죠.”

“전쟁이란 것이 진급에는 이렇게 유리하고, 기회도 많이 주니 우리에게는 좋은 기회라고 해야 하나. 참 알다가도 모르겠다. 죽어가는 전우들 생각하면 그건 아닌 것 같은데 말이야.”

“이 2차 한중전쟁이 일어나고 우리 대대에서는 아직 2명밖에는 안 죽었습니다. 그것도 적에게 저격당한 것이 아니라 급조폭발물에 의한 전사입니다. 그러니 그런 마음 약한 소리는

그만하시고, 이만 다른 곳으로 이동하시죠.”

“마음 약한 소리가 아니라 그 애들, 내가 잘 아는 애들이니까 그렇지. 그런데 어디로?”

“군단이 진격의 나팔 소리를 울리면서 진격하니 우리도 움직여야죠.”

박인철 중사의 말처럼 이때 국군 1군단의 선두는 이미 초나라 강소성 남통의 현급시인 여고시(루가오시, 如?市)까지 진격해 있었고, 서한국 등 저격대대는 그 북쪽인 해안시(海安市)

외곽에 있었다.

그랬으니 군단을 따라 서서히 남진 즉 초나라 강소성의 끝이자 장차 국경이 될 장강까지 가서 상해 앞바다 숭명도에서 북진을 해오는 대한민국 해병대와 만나야 했다.

“그래서 어디로?”

“저격하기 좋은 곳으로요.”

“걸어서?”

“대대 장갑차 타고요.”

서한국 상사와 박인철 중사는 그렇게 저격을 위해 몸을 숨기고 있던 파괴된 3층 건물 더미에서 나와 저격대대에서 운용하는 C-22식 8X8 차륜형 장갑차에 몸을 실었다.

그리고 군단 본부와 함께 초나라 강소성 남통의 현급시인 여고시로 이동해서 다시 전투할 곳을 찾아 대대와 함께 움직였다.

“서 상사, 몇 명 저격했다고?”

“제 부사수가 127명이랍니다.”

“박인철 중사가 잘 챙겨주는가 보지.”

“가끔 잔소리도 하면서 시어머니처럼 아주 잘 챙겨줍니다.”

“그것 잘됐군. 그리고 죽지 말게. 군단장님께서도 자네에게 지대한 관심이 있고, 자네와 자네 약혼녀가 결혼에 골인하는 것에는 우리 군단 장병들만이 아니라 인민군과 고구려군도 지대한

관심이 있으니까 말이야.”

“우리 군단에야 이미 소문이 다 났으니 그렇다 쳐도 인민군과 고구려군이 지대한 관심을 가졌다는 것을 대대장님이 어떻게 아십니까?”

“내가 이리저리 좀 알아봤지. 그러니 죽지 말고, 꼭 살아서 준위로도 진급하고, 약혼녀와 결혼도 해서 지금의 국적과 신분을 가지고도 남북한의 처녀와 총각이 많이 결혼할 수 있도록

서 상사가 길을 열어줘.”

“그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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