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경 입성(9)
국군 1군단 1특공여단은 동경 포위 점령 작전이 개시되자마자 K-808 장갑차에 탑승해 거의 최고 속도로 달려서 동경국립박물관으로 향했다.
그 와중에 휴대용 대전차미사일 공격과 기관총과 소총, 유탄발사기 등의 공격을 당해 장갑차 몇 대를 잃었지만, 공중 지원을 해주는 A-1 흑룡 무인공격기와 F-2 삼족오 스텔스
전투기의 도움으로 기어이 동경국립박물관에 진입했다.
그러자 여단장 방홍일이 이렇게 지시했고, 그 지시에 따라서 1대대장 차현수가 대대원들을 이끌고 본관이 아닌 동양관으로 내달렸다.
“2대대는 본관과 평성관, 3대대는 표경관(효케이관)과 호류지 보물관 등 나머지를 장악해! 빨리!”
방홍일의 이어진 명령이 전달되자 2, 3대대도 본관과 평성관, 표경관 등을 장악하려고 달리기 시작함으로써 일본 동경국립박물관은 한국군의 손에 떨어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이 동경국립박물관 동양관에는 그 유명한 오구라 컬렉션을 비롯한 우리나라 문화재가 수두룩했고, 그중에는 고종 황제가 썼을 것으로 추정하는 양쪽에 날개를 달고 발톱이 다섯 개인 용이
새겨진 투구와 갑옷도 있었다.
또한, 경주 금관총에서 발굴된 금제 장식 유물, 경남 창녕에서 출토된 신라 귀걸이와 팔찌 등등 헤아릴 수 없는 도굴 유물도 있었으나 일본은 지금까지 이 유물의 반환을 거부해왔다.
“삑! 여기는 들어오시면······.”
“앞을 막는 자는 모조리 사살해. 탕!”
국군 1군단 1특공여단 1대대가 동양관으로 난입하자 경비원들이 호각을 불고 제지하려고 했으나 그들은 차현수 중령이 쏜 권총에 맞아 나자빠졌다.
그리고 그가 이렇게 명령함으로써 그때부터 1대대원들의 앞을 막는 경비원과 직원들은 가차 없이 사살됐고, 가장 먼저 동양관 그것도 우리 문화재가 있는 5층 10실로 들어간 것은
1대대 1중대장 박지철이었다.
“대대장님, 여깁니다.”
동경국립박물관 동양관 5층 10실은 한반도의 간석기와 청동기, 금속공예품을 중심으로 우리나라 각 왕조 왕들의 영화를 보여주는 작품, 우리나라 도자기와 불교미술, 조선왕조의 문화를
보여주는 생활용품, 의상, 장신구 등을 코너별로 전시해놓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그곳이 국군 1군단 1특공여단 1대대에 의해 점령되었으니 이제 한반도에서 건너간 모든 문화재를 회수할 수 있는 기반이 만들어진 것이다.
“유물은 그대로 다 있어?”
“그런 것 같습니다.”
“그건 다행이네.”
국군 1군단 1특공여단이 동경에서 그렇게 우리 문화재를 환수하는 그때 일제의 한반도침략조사위원회 소속 문화재 환수위원들은 아직도 오사카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만 봐도 얼마나 많은 우리 문화재가 일본에 있는지를 바로 보여주는 예라고도 할 수 있었다.
그 환수위원 10명은 한국 문화관광부 차관 최문호 등이 있는 다이센 고분이 아니라 국군 6군단 군사경찰단의 도움으로 이때 나라현 나라시에 있는 왕실의 유물창고 쇼소인(正倉院)에
진입해있었다.
그렇게 쇼소인을 장악한 다음 그곳에 소장된 신라장적(新羅帳籍)이라는 신라 민정 문서(통일신라 시대 서원경(西原京:지금의 청주) 근처에 있던 4개 촌락에 대한 인문지리적 내용을
기록한 문서)와 한반도에서 건너온 수많은 유물을 확보했다.
그들만이 아니라 다른 문화재 위원 3명은 역시 6군단 군사경찰단의 도움으로 나라 덴리대학교로 향했으니 그곳 중앙도서관에 바로 안견의 몽유도원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저쪽입니다.”
“어디?”
“저쪽요.”
국군 6군단 군사경찰단장 오수원이 앞장을 서서 중앙도서관으로 내달리자 놀란 학생들이 뿔뿔이 흩어졌으니 전쟁 중이라도 학교는 멀쩡하게 돌아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6군단 군사경찰들이 기어이 중앙도서관이 들어가서 경비원들을 향해서 총을 쏘자 그제야 혼비백산 도망치는 학생들로 도서관은 일순간 아수라장으로 변하고 말았다.
“저깁니다.”
안견의 몽유도원도는 안평대군(安平大君)이 꿈에 도원에서 논 광경을 안견에게 말하여 그린 산수화다.
그러나 그 몽유도원도에는 안평대군의 제서와 시를 비롯해 당대 고사(高士) 20여 명이 쓴 20여 편의 찬문이 들어 있어 그야말로 일생일대의 걸작이라고 할 수 있는 작품이다.
그런 몽유도원도가 이제 드디어 이 일본 나라 덴리대학교 중앙도서관이 아닌 우리 민족의 품에 안기게 된 것이다.
“진짜네. 그런데 저거 진짜겠지?”
“예, 진짜가 맞습니다.”
“그럼 회수하자.”
6군단 군사경찰단장 오수원이 아닌 다른 문화재 위원들은 그 6군단 군사경찰단의 도움을 받아 나라의 야마토 문화관도 점령해서 그곳에 전시된 겸재 정선의 산수화와 고려, 조선의 회화,
도자기 등도 모두 회수했다.
그랬으니 이 한일전쟁은 진짜 문화재 회수 전쟁인지도 몰랐으나 아직 전투 중인 부대도 많았다.
“쏴!”
국군 2군단 21기동보병사단 2연대 3대대 4중대 1소대장 오세혁의 발사 명령에 소대의 120mm 자주박격포 3문이 불을 뿜었다.
이 소대는 한중전쟁 때만 하더라도 K281A1 81mm 자주박격포를 운용했으나 그 이후 부대가 보병사단에서 기동보병사단으로 개편되자 무기도 개편되어 120mm 자주박격포 3문을
운용했다.
그랬으니 화력이 더 막강해졌고, 그것이 보병사단에서 기동보병사단으로의 변화라면 변화였다.
어떻든 이 소대의 소대장은 한중전쟁 때는 원은철 중위였고, 그는 지금 고구려 문화재국 공림 관리위원회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 이 연대는 2연대가 아니라 65연대였으나 국군 거의 모든 사단이 개편되면서 예전 63, 65, 66연대 대신 이렇게 1, 2, 3연대로 개칭했고, 중대도 12중대에서
3대대 4중대로 바뀌었다.
어떻든 그런 소대의 120mm 자주박격포 3문이 대대의 지원요청에 포격에 나섰으니 그 목표는 다름 아닌 일본 신사의 총본부이자 종교계 우익의 핵심 단체이자 일본 왕을 정점으로
따르는 일본 우익집단의 총본산 역할을 맡아온 메이지 신궁이었다.
그리고 이 메이지 신궁이 바로 메이지 일왕 부부의 신위를 봉안한 곳이었으니 포격 지원요청이 없었더라도 충분히 한국군이 공격할만한 곳이었으니 바로 그 메이지 일왕 시기에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2연대 3대대가 이 신궁으로 접근하자마자 아니나 다를까 수를 헤아릴 수 없는 민병과 일부 자위대 패잔병이 곳곳에 진을 치고 84mm 무반동포, 110mm 개인 휴대용
대전차탄, 01식 경대전차유도탄은 물론 자위대의 각종 소총인 64식 7.62mm 소총, 89식 소총과 20식 소총, M4, HK-416, FN SCAR 소총까지 사격한 것도
모자라서 64식 7.62mm 저격소총에 62식 7.62mm 기관총, 12.7mm 중기관총까지 사격을 가했다.
더 가관인 것은 60mm 박격포 공격도 모자라서 92식 대전차 지뢰와 각종 급조폭발물(improvised explosive device; IED)까지 깔아 놓은 것이었으니 이것만
봐도 이 신궁이 일본 우익세력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단박에 알 수 있었다.
그 바람에 3대대 1중대는 신궁 진입을 포기하고, 우선 4중대에 포격 지원을 요청하는 한편 대대를 통해서는 연대와 공군에도 지원을 요청했다.
“쾅! 쿠콰쾅!”
기존 K242A1 4.2인치 박격포보다 사거리는 최대 2.3배, 화력은 1.9배 늘어났고, 박격포를 탑재한 상태로 360도 회전할 수 있었기에 차량의 회전 없이도 목표에 빠르게
대응할 수 있어 효과적으로 화력지원이 가능한 3대대 4중대의 120mm 자주박격포 9문이 그렇게 불을 뿜었다.
그러자 메이지 신궁 이곳저곳에서 폭발음이 들리고, 포탄의 살상반경 안에 있던 골수 우익 민병과 자위대 패잔병들이 피를 토하면서 쓰러졌다.
“쏴!”
120mm 자주박격포에 이어서 연대 예하 포병중대의 K105A1 105mm 차륜형자주포까지 이 사격에 가세해서 포격을 시작한 지 약 15분도 지나지 않아서 한국 공군
제1전투기사단의 F-2 삼족오 스텔스 전투기 12대가 나타났다.
그리고는 한마디로 메이지 신궁을 불바다로 만들어버렸으니 지난 1945년 4월 14일 미군의 공습으로 건물 대부분이 파괴된 이후 두 번째로 폭격을 받은 것이었다.
그러나 경내 부지만 약 20헥타르(약 6만 평), 전체 부지는 약 73헥타르 정도인 메이지 신궁이 일시에 점령당하고, 골수 우익 민병과 자위대 패잔병들이 모두 죽은 것은 아니었기에
곧 지원을 온 1대대의 K-2 흑표전차들이 남은 민병들과 자위대 패잔병들을 처리하려고 준비를 시작했다.
그건 그렇고 이 21기동보병사단 2연대의 편제는 전차 1개 대대와 장갑차 2, 3, 4대대, 연대 예하에 포병중대와 방공중대 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리고 이 3대대 4중대는 120mm 자주박격포 각 3문을 가진 1, 2, 3소대와 40mm K-4 고속유탄기관총 탑재 장갑차와 현궁 대전차미사일 탑재 장갑차 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미클릭(MICLIC,mine-clearing line charge)이다. 피해!”
일본 육상자위대 육상총대 예하 수륙기동단 소속의 사토 이등육좌가 이렇게 소리친 것은 그때였다.
이 사토 이등육좌는 오구니 삼등육좌 등 부하 200여 명과 함께 가나가와현 이세하라시 탑의 산 등에서 한국 공군 전투기들과 아파치 공격헬기 등의 공격에 패퇴해 이곳 메이지 신궁으로
왔다.
그리고는 최후의 결전을 준비했다.
그러나 최후의 결전이란 거창한 이름처럼 모든 것이 그렇게 되지는 않았으니 우선 한국군의 120mm 자주박격포와 K105A1105mm 차륜형 자주포의 공격에 이어서 F-2 삼족오
스텔스 전투기가 또 나타나서는 그야말로 무자비한 공격을 퍼부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 K-2 흑표전차 수십 대가 12.7mm 중기관총으로 제압사격을 하면서 간혹 주포도 발사하는 와중에 미클릭까지 발사되었기 때문이다.
하나 한국군 입장에서는 자위대 패잔병들과 민병들이 깔아 놓은 92식 대전차 지뢰와 각종 급조폭발물(IED)을 그냥 무시하고 전차와 장갑차를 진입시킬 수 없었으니 어쩌면 당연한
조처였다.
“쿠콰쾅!”
미클릭이 발사되어 폭발하는 소리까지 들은 국군 2군단 21기동보병사단 2연대 3대대 4중대 1소대장 오세혁이 이렇게 말한 것은 그때였다.
“저래도 살아남는 쪽발이들은 있겠지?”
“당연한 것 아닙니까. 안 그럼 쪽발이들이 아니죠.”
“김 병장 너는 쪽발이들이 무슨 바퀴벌레라도 되는 듯 이야기하네.”
“솔직히 바퀴벌레보다 더한 놈들이죠. 그러니 이번 기회에 아예 박멸해야 합니다. 박멸!”
“그래도 사람인데, 박멸은 너무 심하다.”
“소대장님, 그런 물렁물렁한 소리 다음에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에 가서 한번 해보시죠. 아마 돌 맞아 죽을 겁니다.”
“가봤어?”
“저는 당연히 가봤죠. 그런데 소대장님은 그런 곳도 안 가보고 뭐 했습니까?”
“나야 공부한다고.”
학생군사교육단(ROTC) 출신인 오세혁이 이렇게 말하는 순간 또다시 미클릭 폭발음이 메이지 신궁을 가득 뒤덮었다.
“쿠콰콰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