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0화 〉 유비무환(有備無患)(2)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https://t.me/NovelPortal
옛 중국 잠수함과 인공위성, 공중조기경보통제기가 남북한의 손에 들어온 며칠 후 20대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가 있었다.
권력구조가 5년 단임에서 4년 연임으로 바뀐 덕분에 잘하면 8년이나 대통령을 할 수 있는 20대 대한민국 대통령은 예상을 벗어나지 않고, 여당의 이세연 후보가 득표율 71.3%로 당선됐다.
“위원장 동지. 이세연 후보가 한국 대통령에 당선됐습니다.”
“그래서 축전이라도 보내줘.”
“반응이 그것뿐이십니까?”
“그럼 축하파티라도 할까.”
“그건 아니지만, 하여튼 알겠습니다. 그 대신 축전은 보내겠습니다.”
“그래, 축전은 민 중장이 알아서 보내.”
“예, 그런데 취임식에는 북남의 현 관계를 생각해서라도 참석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굳이 내가 참석할 필요가 있을까.”
내가 심드렁하게 이렇게 말하자 민은정이 이상한 눈빛으로 축전을 보내겠다면서 밖으로 나가는 모습을 보면서 맥주 한 잔을 들이켰다.
민재인 대통령이 아니라 앞으로는 저 이세연 대통령을 상대하려면 또 얼마나 머리가 아플까를 생각하니 또 맥주 한잔을 더 마시지 않을 수 없었다.
아직은 통일을 할 시기도 그럴 가능성도 적었으니 남북한 양국은 이제 남북한과 고구려라는 삼각체제에서 서로 협력하고 발전해서 서서히 통일 한국의 기틀을 다져야 했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려면 얼마나 머리싸움을 하는 피곤한 나날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여하튼 생각이 많아지는 가운데 시간은 흘러 2022년 5월 10일 대한민국 이세연 대통령이 공식 취임했고, 나는 그 취임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그리고 민재인 대통령은 그 새로운 이세연 대통령 취임식이 끝나자마자 홀가분한 마음으로 자택 양산으로 휴가를 떠났다.
그러나 수진은 아파트를 비워주고, 이삿짐은 고구려위원회 비서실 남북협력수석비서관실 앞으로 보내달라고 우체국 특별수송팀에 부탁한 다음 여행용 가방만 챙겨서 역시 특별기편으로 북경으로 날아갔다.
그리고는 북경 중남해 인근의 어느 최고급 빌라로 향했으니 그곳이 바로 고구려위원회에서 근무하는 장 차관급 고위직 직원들의 관사로 지정된 곳이었다.
그랬기에 벌써 경비원들이 일일이 출입자의 신분을 확인하고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강수진 남북협력수석비서관님. 수석님의 관사는 8동 508호입니다.”
“어디로 가죠?”
“제가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수석님.”
수진의 이때 직책은 위와 같이 고구려위원회 남북협력수석비서관으로 차관급이었기에 경비원의 안내로 8층 높이, 8개 동의 빌라가 조화롭게 자리 잡은 단지로 들어가서는 자신 앞으로 배정된 8동 508호로 들어갔다.
그런데 아무리 장 차관급 고위직 직원들을 위해서 배정된 관사라고는 하지만, 자신이 살던 서울 아파트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휘황찬란한 실내에 잠시 할 말을 잃은 수진이 자신을 안내해준 경비원에게 기어이 이렇게 묻고야 말았다.
“여기 뭐하던 곳인데 이렇게 호화롭죠?”
“옛 중국의 고위관료들이 살던 곳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들이 좋아하는 숫자 8을 따서 8개 동, 8층짜리 건물로 건축했고, 각 집의 평수도 모두 88평입니다. 그리고 여긴 모든 시설이 다 갖춰져 있어 불편하신 것은 없을 것입니다. 그래도 불편한 것이 있으시면 언제든지 경비실로 연락해주십시오. 수석님.”
“그래요. 그리고 수고했어요.”
“네, 편히 쉬십시오. 그리고 이용하실 차량은 지하 주차장에 있고, 자동차 열쇠는 여기 있습니다.”
“고마워요.”
하얀 천연대리석과 군데군데 금장(金裝)으로 마감한 88평짜리 호화로운 고급빌라에 덩그러니 남은 수진은 그때부터 가져온 여행 가방을 풀어 대충 짐을 정리하면서 집안을 둘러봤다.
그러니 가전제품은 거의 모두가 있었고, 자신이 사용한 것과 같은 제품의 생활용품도 준비되어 있었다.
아직도 국정원에서 자신을 경호하고 있었으니 그들이 미리 준비해 둔 것으로 생각한 수진은 그렇게 짐을 정리하고, 샤워하고 나서 전화기를 꺼내 몇 곳에 전화한 다음 창가로 가서 낮게 가라앉은 북경의 하늘을 보면서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갔다.
***
국군 21사단 백두산 부대 65연대 3대대 12중대 1소대장이었던 원은철은 그사이에 전역하고, 고구려위원회에서 모집하는 문화재국 일반직 9급 공무원에 지원해 면접을 보고 있었다.
“대학도 좋은 곳 나오시고, 국군 21사단 65연대 3대대에서 소대장으로 근무하시다가 이번에 전역한 참전용사이자 일선 전투 경험까지 많으시고, 무공훈장까지 받으시고, 65연대장님의 추천서까지 있으시군요.”
“대충 그렇습니다.”
“그런데 희망 근무지역이 공림이군요?”
“예, 제가 공자님을 존경하거든요.”
“그렇군요.”
“합격하겠습니까?”
“이 정도 자격조건이면 제가 보기에는 충분합니다. 대한민국에서 지원하는 지원자 중에서 원은철 씨만 한 자격조건을 가진 이가 드물거든요.”
“한국에는 저보다 스펙 좋은 사람들이 널렸고, 일자리도 별로 없는데, 왜 지원자가 드뭅니까?”
“모집요강을 보셨겠지만, 고구려위원회 문화재국 일반직 9급이라도 월급이 한국의 70% 수준이고, 공무원 연금도 없고, 아직 고구려의 기반시설이 완전하지 않으니까요.”
“비록 월급이 70% 수준이라도 참전용사라면 집이 30년간 무상이고, 공무원연금 대신에 고구려 국민연금에 가입되고, 자부담 의료비도 거의 지원해 주고, 세제 혜택과 법규 때문에 한국과 비교하면 모든 물가가 훨씬 더 저렴할 것이라고들 예상하는데도 지원자가 드물다고요?”
당장 눈에 보이는 월급 부분과 공무원 연금, 그리고 고구려의 기반시설이 아직 완전하지 않은 관계로 한국 공무원 중에서 고구려 공무원에 지원하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대신 공무원 지망자는 좀 있었으나 그들보다 원은철의 자격조건이 너무나 좋았는데, 특히 한중전쟁 참전용사 그것도 장교라는 것과 무공훈장까지 받은 이력 등 때문이었다.
“예, 지금은 현실이 그렇습니다. 하나 좀 있으면 상황이 완전히 달라지리라 예상합니다. 그러니 원은철 씨는 미리 지원을 잘한 것이고요. 그런데 집은 구했습니까?”
“집은 합격하면 공림이 있는 곡부(취푸)에 구하려고 생각 중입니다.”
“그렇다면 먼저 신청하세요. 임대하는 주택과 아파트를 인터넷으로 확인할 수 있으니 다른 사람이 선점하기 전에요. 그리고 여유 자금 있으시면, 공림 인근의 주택이나 토지도 미리 사놓은 것도 미래를 위해서는 좋은 투자가 될 것입니다.”
“합격하면요.”
“제가 면접관인데, 이미 합격을 주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럼 다음은 제 상관에게 재가만 받으면 되거든요. 그러니 거의 100% 합격했다고 보셔도 됩니다.”
“정말요?”
“제가 왜 한중전쟁에서 무공훈장까지 받은 전쟁영웅에게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그러니 돌아가셔서 며칠만 기다리시면, 합격 연락이 갈 것입니다.”
국군 21사단 백두산 부대 65연대 3대대 12중대 1소대장 원은철은 예정대로 제대하자마자 이렇게 고구려위원회에서 모집하는 문화재국 일반직 9급 공무원에 지원해서 거의 합격을 보장받았다.
그러니 자신이 좋아하는 공자의 무덤 공림에서 근무할 수도 있을 것이다.
군에서는 빤질빤질했지만, 싸울 때는 싸울 줄 알았고, 소대원을 단 한 명도 희생시키지 않은 뛰어난 소대장이었기에 기어이 제대하기 전 인헌무공훈장(仁憲武功勳章)까지 받았다.
하여튼 그런 그가 제대해서 고구려위원회 문화재국에서 문화재 관리 일을 하게 된 것이다.
“내가 대한민국 육군 2군단장이자 앞으로 5년간 이 위구르를 통치할 대한민국 군정 사령관 강인철 중장이오. 여러분은 앞으로 5년간 우리 대한민국의 발전한 민주주의를 착실히 배우고 나면, 여러분 스스로 이 새로운 땅에 새로운 나라를 세우고, 새로운 지도자를 뽑을 수 있을 것이오. 그러면 우리 대한민국과 고구려 나아가서는 북한까지 여러분의 든든한 지원자가 되어 그 새로운 나라가 반석 위에 서도록 할 것이오. 그러면 그 새로운 나라와 우리 대한민국과 고구려, 북한은 혈맹으로 영원토록 생사고락을 함께하면서······.”
대한민국 육군 2군단은 재편을 마치자마자 위구르와 북위 37도 북쪽의 감숙성과 영하회족자치구, 내몽골 일부를 작전 구역으로 둔 군단이 됐다.
육군 1군단은 북경과 천진, 하북성 일부를 담당했고, 5군단은 하북성 일부와 산동성, 해병대 3여단은 강소성을 맡았다.
그리고 북한군 1군단이 국군 1군단과 같이 북경, 천진, 하북성 일부, 2군단이 내몽골, 3군단이 요령성, 4, 5군단이 흑룡강성과 길림성을 맡았다.
그렇게 위구르는 대한민국 2군단이 군정을 실시하면서 서서히 안정을 찾아갔으니 그들 2군단이 가장 먼저 한 일이 바로 모든 위구르인의 무장을 해제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과격 이슬람 테러 세력은 끝까지 추적해서 발본색원했기에 더 안정을 찾아갔으며, 그때를 틈타 강인철은 한국어와 한국 문화를 본격적으로 위구르에 심는 작업을 하기 시작했다.
더불어서 고구려의 영토가 된 천산남로와 G7 징신 고속공로와 G3014 쿠이아 고속공로, 난주(란저우)에서 신장웨이우얼 자치구 우루무치에 이르는 길이 1,903km의 난신철로(蘭新鐵路) 그리고 투루판, 쿠얼러, 카슈가르로 이어지는 남강철로(南疆鐵路)의 최북단 통과 지점 북쪽은 물론 투루판시가 지나는 북위 41도 남쪽에서도 고구려화 즉 한국화 작업에 박차를 가했다.
이미 그곳은 민재인 고구려위원회 초대 위원장이 취임하자마자 북위 37도 북쪽의 감숙성과 영하회족자치구, 동경 110도 서쪽의 내몽골, 그리고 북위 41도 북쪽의 신장 위구르를 묶어 지명을 신장 위구르, 감숙성 등이 아니라 고구려 배달도로 바꾸기로 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옛 중국의 신강 위구르 자치구 등은 고구려 배달도와 대한민국 군정사령부가 임시로 맡은 지역으로 나뉘게 됐고, 이 국군 2군단이 맡은 북위 41도 북쪽의 위구르 지역은 자칭 동투르키스탄으로 불렸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군정 통치로 아직 자치권은 없었고, 모든 것이 엉망인 상황이었으나 이제 고구려 배달도가 된 지역에서 이주해온 위구르인들은 우루무치와 투루판 등에서 살던 옛 중국 한족들이 쫓겨나면서 남겨놓고 간 주택과 토지 등을 배정받아 새로운 삶을 꾸리기 시작했다.
옛 중국의 박해가 없어진 대신 자유로운 생활은 보장되었으나 새로운 땅으로 이주해온 위구르인들의 어려움은 많았다.
하나 우루무치 인구의 약 80%, 투루판 인구의 약 30%, 위구르 전체로 따지면 약 45%에 이르던 한족들이 모두 추방당해 주택과 토지 등의 문제는 크게 없었다.
그 대신 당장 식료품과 공산품 등의 수급이 불안정해 그 부분을 남북한이 책임지는 관계, 너무 급작스럽게 바뀐 환경, 옛 중국어와 중국 문화 대신 이제 한국어와 한국 문화를 배워야 하는 현실, 그리고 한국의 민주주의를 배워야 하는 등등의 교육에 관한 문제 등등은 있었다.
또한, 동투르키스탄이 이슬람 공화국이 아닌 종교자유를 바탕으로 하는 민주공화국이 되도록 한국이 군정 통치를 하는 관계로 종교적인 문제도 일부 발생하고는 있었으나 그 모든 것보다는 옛 중국의 압제에서 해방되어 자신들의 나라를 건국할 수 있다는 희망이 그들에게는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