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3화 〉 항복 그리고 고구려위원회(7)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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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군 1군단장 이철영 중장은 항복의식 사회를 맡는 영공을 누린 것도 모자라서 이 만찬에서도 여러 참가자에게 집중적인 관심을 받고, 축하인사는 물론 평생 들어도 못들을 수많은 덕담까지 들었다.
사실상 그가 이 한중전쟁의 대한민국 대표선수 같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해병대 사령관 공경호와 특수전 사령관 박성혁, 국군 2군단장 강인철, 국군 5군단장 손석민 등등 이 한중전쟁에서 월등한 무공을 세운 이들도 있었지만, 그래도 관심은 그에게 집중적으로 쏠리고 있었다.
그런 그가 정작 만찬장에서는 수진과 민은정 소장을 발견하자마자 다가와서는 이렇게 자연스럽게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런데 민은정 소장이 환하게 웃으면서 자신을 알아주는 것까지는 좋은데, 자신의 직책을 길게 소개하자 호탕하게 웃으면서 그 말을 중간에서 끊고는 이렇게 말했다.
“하하하. 민은정 소장이 나를 알고 있다니 이거 무한한 영광입니다.”
“영광은 제가 더 영광인데요.”
“제가 더 영광입니다. 그런데 남북의 내로라하는 두 분이 무슨 재미난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지 실례가 안 된다면 물어도 될까요?”
“강수진 비서관이 장차 고구려위원회 위원장 비서실 남북협력관으로 근무한다고 해서 그 이야기하던 중이었어요. 장군님은 여기 남나요? 아니면······.”
“강수진 비서관이 여기 고구려위원회 위원장 비서실 남북협력관이 된다면 축하부터 해야 하나. 그리고 군인인 나는 그저 명령에 따를 뿐이니 남으라면 남고, 다른 곳으로 가라면 가야죠.”
“하긴 저도 군인이니 그 말이 정답이네요. 민간인인 강수진 비서관은 좀 다르겠지만 말이에요.”
“민은정 소장님, 이거 왜 이러세요. 그리고 솔직히 나는 이 전쟁 끝나자마자 고향으로 돌아가서 학교를 마치고 싶었지만, 민 장군님 말씀처럼 내가 군인도 아닌데, 위원장님이 거의 군인처럼 명령하시는 바람에 할 수 없이 남북협력관으로 가는 겁니다. 아시겠어요.”
“민재인 위원장님이 그렇게 명령했다면, 위원장님께 정식으로 계급장도 달아 달라고 해.”
“호호호. 진짜 그럴까?”
수진의 말에 민은정 소장도 한바탕 웃고, 이철영 중장도 다시 웃는데 웬 대령 한 명이 다가와서는 분위기를 깨면서 수진에게 이렇게 말했다.
“충성! 합참작전처 공필영 대령입니다. 의장님, 모시고 왔다가 강 비서관님이 보이시기에 실례를 무릅쓰고 한 말씀 올리겠습니다.”
“뭔가. 중요한 일인가?”
“예, 1군단장님.”
“그럼 나는 빠져줄 테니까 이야기하게.”
합참작전처 공필영 대령이 나타나서 수진에게 이렇게 말하는 바람에 국군 1군단장 이철영 중장은 다른 곳으로 슬그머니 자리를 피해줬다.
그러자 수진이 이렇게 물었다.
“중요한 이야기가 뭔데요?”
“이것입니다. 특전사 707특임단 서민재 중위가 쓴 편지입니다.”
“그 사람이 쓴 편지를 왜 공 대령님이 가지고 있죠? 그리고 이 편지가 한중전쟁의 일등공신이신 이철영 중장님과의 대화보다 더 중요한 것인가요?”
“그것이······.”
“강 비서관님, 지금 그게 뭐가 중요해. 그러니 어서 읽어봐. 서민재 중위가 보낸 연애편지 나도 좀 보게. 호호호!”
민은정이 이렇게 말하는 바람에 얼굴이 다소 붉어진 수진이 그녀의 기대와는 반대로 편지를 갈무리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민 장군님, 그만 놀리세요. 그리고 김 위원장님이 찾으니까 어서 가보기나 하세요.”
“나 돌아오면 꼭 읽어봐야 해. 그 연애편지 꼭!”
“몰라!”
수진의 더 붉어진 얼굴 사이로 만찬 분위기는 점점 무르익어갔다.
그럴수록 전 세계 언론의 취재경쟁은 더 뜨거워졌고, 만찬에 참석한 내외빈들이 끊임없이 나와 민재인 대통령에게 질문 공세를 퍼부었으니 그만큼 우리 두 사람의 위상이 높아진 때문일 것이다.
어떻든 그런 가운데 옛 중국 항복기념 만찬은 밤늦도록 진행됐다.
그리고 그때 내외신은 다소 낯설었던 삼궤구고두례(三跪九叩頭禮) 또는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 항복의식을 자세한 설명과 함께 연달아 방송하고 있었고, 옛 중국이 과연 항복조건을 다 지킬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다.
***
국군 21사단 65연대 3대대 12중대 1소대장 원은철은 부대가 산둥 성 취푸(曲阜)에 주둔하고 있는 관계로 틈만 나면 취푸 공자묘(孔子墓) 공림(孔林)에 들렸으니 어지간히 공자를 좋아하거나 존경하기는 하는 모양이었다.
그것도 혼자가 아니라 자신의 장갑차 조종수이자 말년병장인 김종기를 데리고서 말이다.
“소대장님, 이제 그만 가시지 말입니다.”
“좀 더 있다가 가자. 그런데 김 병장 너는 이제 뭘 할 거야?”
“제대하면 복학해야지 말입니다. 그런 소대장님은 제대하면 뭐할 거지 말입니다.”
“제대하는 것은 좋은데 제대하면 직장부터 구해야 먹고살 것인데, 그래서 내가 걱정이다. 걱정. 어디 취직할 곳이 있겠냐?”
“학군단 출신은 제대하면, 거의 영업사원 하던데 말입니다.”
“그래서 걱정이라는 말이다. 이 자식아!”
“영업사원 하기 싫으시면 다른 것 하면 되지 말입니다. 그리고 여기도 이제 우리나라 땅에 우리나라 문화재가 되었으니 관리소장 해도 되고 말입니다.”
“공자님 후손들 다 쫓아내지 않고 몇 명 남겨놓았는데, 내가 무슨 관리소장을 하냐.”
“그러니까 그들을 관리하고, 여기도 관리할 관리소장이 필요하지 말입니다. 그러니 지원해 보시지 말입니다. 참전용사이자 장교 출신이자 이 취푸를 점령하는 데 공을 세웠으니 진짜 될지도 모르지 말입니다.”
“진짜 그럴까?”
이때는 중국의 항복 조건만이 아니라 고구려위원회에 관한 내용도 거의 알려졌기에 전역을 앞둔 장병들은 특히 고구려위원회 즉 그 위원회에 취업할 수 있는지에 지대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래서였는지 김종기가 얼른 이렇게 대답했다.
“소문에 의하면 고구려위원회에서 일할 인원을 공개 모집한다고 하니 지원하면 여기 공림 관리소장은 아니더라도 분명히 일자리는 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군단사령부에 있는 동기 놈 어제 만났더니 그놈이 자기도 들었다면서 말하기를 위원회에 협력국, 재무국, 교육국, 과학국, 외교국, 법무국, 국방국, 행정국, 문화국 등 33개의 국(局)을 두고, 그래도 모자라는 국은 차후 위원장이 재량으로 설치할 수 있도록 했으며, 위원회에서 일할 공무원 지원자도 받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한국 공무원들은 대부분 거절하고 있다고도 했습니다.”
“아니, 왜?”
“고구려위원회 지원하면 인프라 다 갖춰진 한국을 떠나야 하고, 또 월급도 한국에서 받는 것보다 적고, 공무원 연금도 없고, 뭐 그런 이유가 다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공무원들은 안 오려고 하고, 공무원 지망생들도 잘 지원을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니 소대장님이 지원하면, 그런 공무원 지망생보다는 훨씬 유리할 것입니다. 비록 월급 적고, 연금 없고, 이곳에서 살아야 하지만, 그래도 참전용사에게는 30년 동안 무상으로 임대주택을 준다는 소문도 있으니까요.”
“너 또 점점 말이 짧아진다. 그런데 주택 30년 무상임대 그거 정말이냐?”
“무슨 말이 또 짧아진다고 그러십니까. 그리고 예전에 소대장님 명령으로 제가 청와대 홈페이지 국민청원에 전사자에게는 점령지의 주택을 한 채씩 무상으로 주라고 청원 올렸지 않습니까. 그래서였는지 전사자 가족에게는 50년, 부상자에게는 40년, 참전용사에게는 30년 주택 무상임대해 준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하하하! 이래서 네가 김 병장 널 좋아한다.”
“남자는 사양입니다.”
국군 21사단 65연대 3대대 12중대 1소대장 원은철처럼 장래에 대해 고민에 빠진 이들이 또 있었으니 바로 해남도에서 아직도 옛 중국인들을 옛 중국 본토로 쫓아내고 있는 해병대 1사단 상륙돌격장갑차대대에서 함께 근무하는 동기인 황종수와 윤은성이 그들이었다.
“야, 제대하자마자 여기 와서 살자니까.”
“여기서 뭐 먹고 살자고?”
“야, 우리가 그동안 모은 금목걸이와 금반지 등 금붙이와 금괴 2kg, 미화 2만 달러, 위안화만 팔아도 여기 땅 수백 평은 살 수 있을 거다. 아니, 수천 평은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추운 한국이 아니라 따뜻한 여기 살면서 관광객 상대로 장사하거나 아니면 농장이나 하나 사서 농사나 짓자니까.”
“무슨 농사?”
“여기까지 오면서 못 봤냐. 벼농사는 2기작도 하고, 고무나무, 야자, 사탕수수, 사이잘삼, 하이난면(海南綿), 커피, 여주, 파인애플, 바나나, 용안(龍眼) 등의 열대과일 농사도 된다. 또 너 커피 좋아하니까 커피 농사지어도 좋고. 하고 우리는 참전용사니까 여기 토지 분양하면 특혜도 받을 수 있을 거다. 그리고 소문에 의하면 참전용사는 30년간 주택 무상임대도 해준다더라. 그러니 집 걱정도 없다.”
“일단 제대부터 하고, 생각해보자. 야, 짱깨들 또 밀려온다.”
한중전쟁에서 생사를 함께한 전우는 그렇게 남은 평생도 자신들이 점령한 영토에서 함께 살기로 계획을 하고 있었으니 이것도 다 전쟁이 맺어준 인연 때문이었다.
어떻든 그들은 아직도 다 추방하지 못한 해남도의 옛 중국인을 오늘도 배에 태워서 레이저우(雷州)반도로 쫓아내고 있었다.
그리고 이 해남도 말고, 아직 옛 중국인을 다 소개하지 못한 곳이 있었으니 그건 바로 위구르였다.
땅이 넓은 이유도 있었지만, 교통이 불편하고 여기저기 산악지방에 거주하는 이들도 제법 많았기에 말이다.
그 반면 가장 늦게 남북한의 영토가 된 북위 37도 북쪽의 간쑤 성 북부와 영하회족자치구의 옛 중국인들은 비교적 쉽게 소개가 되어 북경에서부터 우루무치를 거쳐 유럽으로 가는 철도는 이미 남북한의 소유가 됐다.
하나 그 유럽으로 가는 화물열차는 아직 운행하지 않았고, 이때에는 부산이나 서울, 평양에서 북경, 천진 등까지 열차로 보급품과 생필품 등 화물을 실어나르는 수준이었다.
그 대신 그 철로를 대대적으로 정비하고, 끊어진 부분을 연결하고, 새로운 철로를 놓는 등의 공사는 바로 시작됐고, 그런 가운데 옛 중국의 항복의식이 있고 한 달이라는 시간이 바람처럼 흘러갔다.
그리고 2022년 4월 5일 화요일 식목일, 드디어 고구려위원회 설치와 운영에 관한 법률이 대한민국 국회를 통과했다.
북한에서는 똑같은 내용의 관련법이 이미 통과된 이후였기에 이제 본격적으로 점령한 옛 중국 영토를 관리할 고구려위원회는 닻을 올리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