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2화 〉 석탄과 석유(4)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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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내가 그를 그 자리에 두었겠는가.
하여 요즈음은 협동농장에서 하루 18시간 강제노동을 하면서 아주 잘 지내고 있었다.
어떻든 내 동생 수진과 친구 이은주는 그렇게 판문역에 무사히 내렸으니 이 경의선 통일 식목행사에 온다는 연락을 내가 청와대로부터 받고, 통일전선부장 원영삼에게 특별지시를 했기 때문이다.
“이번 개성 경의선 통일 식목행사에 오는 남조선 참가자 중에 강수진이 있을 거야. 그러니 원 부장이 내려가서 남조선 민재인 대통령을 대우하듯 하라. 안 그러고 만약 약간의 불상사라도 발생하면 통일전선부원 전원을 총살해 버리고, 부서 자체를 영원히 없애버리겠어. 알겠소?”
“예, 위원장 동지!”
“아, 그렇다고 해서 절대 겉으로 드러나게 호들갑을 떨지 말고, 조용히 뒤에서 다른 사람 모르게 하라. 이도 알겠소?”
“물론입니다. 위원장 동지!”
이런 무시무시한 지시를 받은 통일전선부장 원영삼은 자신이 가진 모든 정보를 총동원해서 수진이 누군지 알아보려고 했으나 알아낸 것은 저번 백두산 관광에 왔을 때도 양강도당위원장 이상원에게 이런 지시를 했다는 것뿐이었다.
‘도대체 위원장 동지와 어떤 관계이기에 이런 지시를 할까. 도저히 알다가도 모르겠네. 그렇다고 소홀하게 대우할 수도 없으니 일단 귀빈 대우를 하면서 알아보는 것이······.’
원영삼은 이런 결론을 내리고 이곳 판문역까지 와서 수진을 만났지만, 쉽지 않으리라는 예상이 들었다.
그렇다고 또 소홀하게 얼렁뚱땅 물러날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때 통일부 장관 조명견이 끼어드는 바람에 그는 수진에게 달리 말을 걸 수가 없었다.
“원 통일전선부장이 아니오?”
“하하하! 조 장관.”
“원 부장이 여기까지 다 나오고, 북에서도 이번 행사에 관심이 많은 것 같습니다.”
“물론이죠. 조국 강산을 푸르게 가꾸는데, 왜 공화국에서 관심이 없겠습니까. 그런데 오는데, 불편함은 없었습니까?”
“예, 모쪼록.”
어떻든 그렇게 북에 입국한 수진은 행사 개회식에 참가했다가 곧 판문역에서부터 경의선 철로 옆에 나무를 심는 본 행사에 친구 은주와 함께 참석했다.
“보시는 것처럼 구덩이는 북에서 이미 다 파놓았으니 남자분들은 소나무를 심고, 여자분들은 그사이에 철쭉을 심으시면 됩니다. 다들 아시겠죠?”
그렇게 경의선 철로를 따라 북에서 쭉 파놓은 구덩이에 남자들은 키가 3m 정도 자란 소나무를 심었고, 여자들은 소나무와 소나무 사이에 백두산 철쭉 세 그루씩을 심어나갔다.
경의선 철로 변에서는 그렇게 남북 각 300명의 인원이 모여서 통일 식목 행사라는 이름으로 나무를 심었으니 이 행사는 나름대로 의미가 있는 행사는 행사였다.
그리고 이때에는 한국에서 올라온 묘목으로 평양 이남의 황해도와 강원도 거의 모든 산은 식목이 이루어진 상태였으니 황해도와 강원도의 헐벗은 북한산은 이제 옛말이 되고 있었다.
또 평양 이북의 산에서도 한국에서 올라간 묘목과 북한 자체에서 키운 묘목을 거의 인민군 전군과 전 북한 주민이 동원되어서 계속 심고 있었으니 올해가 가기 전에 북한에서 헐벗은 산을 찾아보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다시 한 번 더 강조하지만, 총리와 총참모장은 올해가 다 가기 전에 공화국의 모든 산에 나무를 다 식목하시오. 이는 내 특별명령이오. 알겠소?”
내각총리 박봉구와 총참모장 김진성에게 이런 지시를 올해 벌써 3번이나 하고, 나도 개성에 이어서 평양 인근 산에서도 식목행사를 했으니 북한 산림녹화는 이제 시간문제였다.
어떻든 이렇게 통일식목행사가 펼쳐지는 그 시간 경의선에서 가까운 개성공단 옆 통일 마을에서는 남북 이산가족 300명이 3박 4일, 개별로 제공된 주택에서 상봉 행사를 하고 있었다.
“형식아! 네가 진짜 형식이냐? 형식아!”
3살 먹은 아들이 73살이 될 때까지 못 만나다가 이번에 만나게 된 남측의 구순 노모는 아들 이름을 이렇게 부르다가 오열했다.
잠깐 옆집에 맡겨놓고 남편과 장사를 나왔다가 전쟁이 터지는 바람에 헤어졌는데, 그 세월이 벌써 70년이었으니 어찌 아니 그렇겠는가.
그러나 이제는 3박 4일 같이 생활하면서 그동안 쌓인 이산의 한을 풀 수 있었고, 원하면 언제든지 다시 상봉할 수도 있었으니 이곳 평화마을에 상시상봉 장소가 문을 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서신 교환은 물론 선물 교환에 영상통화를 통한 화상 상봉도 이루어지고 있었으니 이제 이산가족 중 누구도 임진각에서 북녘땅을 보면서 오열하는 이는 없었다.
“형식아! 이 엄마랑 가자. 가서 한국에서 살자. 응.”
“그것이······.”
“원하는 가족이 있으면 이주를 허락한다고 김정은 위원장이 공포했잖아. 그러니 이 엄마랑 한국으로 가자. 가. 이놈아!”
“저도 그러고 싶지만, 가족이 있으니 그도 마음대로 안 됩니다.”
“다 데리고 가면 되지. 이, 엄마 네 가족 아니지 이제 내 가족 돌볼 돈을 벌었다. 네 아버지가 남겨놓으신 재산도 좀 있으니 우리 가족 먹고사는 것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 그러니 가자. 가!”
그러나 한국의 구순 노모 김정순은 아들 박형식을 한국으로 데려갈 수 없었다.
왜냐하면, 아들만이 아니라 며느리, 손자 손녀, 증손자, 증손녀까지 합쳐서 가족이 무려 13명이 되었기에 말이다.
만약 아들에 며느리 손자, 손녀 이렇게 4인 가족만 되었어도 한국으로 이주할 수 있었으나 이런 대가족은 이주 자체가 불가능했다.
그렇지 않고 원하는 모든 이산가족을 한국으로 이주시켜주면 심각한 사회문제가 발생할 것 같아 내가 이산의 아픔에도 불구하고 4인 가족으로 인원수를 제한했기 때문이나 서신 교환, 선물 교환, 화상 상봉, 수시 상봉은 가능했기에 그렇게 비인도적인 조처는 아니라고 할 수 있었다.
“4인 이상 가족은 한국으로 갈 수 없으니 이렇게 자주 만나는 것으로······."
“이놈아. 이놈아. 그것이 70년 만에 만난 이 어미에게 할 말이냐.”
“정책이 그러니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그래도 가자. 가.”
시어머니를 오늘 처음 본 박형식의 아내 이영애가 나선 것은 그때였다.
“어머님, 공화국의 정책이 그러니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그리고 이제 이렇게 만났으니 수시로 다시 만나면 되니 이만 고정하세요. 그러시다가 쓰러질까 걱정입니다.”
“공화국! 공화국! 그놈의 공화국이 뭐라고 어미와 자식도 같이 살지 못하게······.”
“누가 들어요.”
박형식 가족만이 아니라 다른 이산가족도 모두 이 비슷한 만남을 가지면서 평화마을은 눈물바다를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그중에는 박형식 가족처럼 한국으로의 이주를 희망하는 가족도 있었지만, 이루어질지는 미지수였다.
물론 4인 가족이라면 가능하겠지만, 대부분 가족이 그 수를 넘었으니 말이다.
“누가 듣거나 말거나 이 나이에 내가 누굴 신경 쓴다고. 그리고 네가 한국으로 이주할 수 없다면 이 개성으로라도 이사를 와라. 그래야 자주 만날 것이 아니냐. 이놈아!”
“그것이······.”
“아니 또 왜? 이사도 못 하게 해.”
“그것이 아니라······.”
“돈 때문이라면 걱정하지 마라. 내 이럴 줄 알고 안 그래도 미국 돈 10만 달러를 가져왔으니까 이 돈으로 개성으로 이사해라. 그래야 자주 만날 것 아니냐.”
구순 노모는 이렇게 말하면서 작은 가방 하나를 박형식에게 건넸는데, 그 속에는 미화 100달러짜리 지폐 뭉치가 들어있어, 말처럼 10만 달러는 되어 보였다.
“이 큰돈이 어디서 나서······.”
“어미가 우리 가족 돌볼 돈 벌어놨다고 했잖아. 그리고 네 아버지가 남기신 재산도 좀 있으니 아무 걱정하지 말고. 개성으로 이사해라. 알았지?”
“어머니!”
“그래, 그래. 그런데 이사는 할 수 있지? 돈은 안 뺏기지? 그 돈이면 개성에 집 살 수 있지? 모자라면 어미가 100만 달러라도 더 줄 테니까 개성으로 이사해서 집도 사고, 먹고 살 방도도 마련해봐. 이 어미 살아봐야 얼마나 더 살겠느냐. 그리고 널 이렇게라도 만났으니 이제 여한도 없다.”
북한은 이때 주거 이전의 자유와 개인 주택 거래의 완전한 자유도 있었으니 다 누구 때문인지는 말하지 않아도 되리라.
그리고 이산가족이 준 선물도 일절 빼앗지 않았다.
그것이 이렇게 돈이더라도 말이다.
그랬으니 박형식은 지금 사는 함북 청진의 집을 팔아 마음만 먹으면 개성으로 이주할 수 있었고, 평화마을 상시 상봉 장소에서 구순 노모를 상시 상봉할 수도 있었다.
어떻든 이렇게 이산가족 상봉은 일주일에 한 번씩 3박 4일 동안 이어져서 그동안 목이 빠지라 자기 차례를 기다리던 이상 가족은 거의 대기표를 받아 놓고 기다리는 실정이었고, 그래도 급한 일부 이산가족은 화상 상봉, 서신 교환, 선물 교환 등으로 이산의 한을 달래고 있었다.
나는 이때 평양 인근에 이어서 평안북도 구성에서 다시 식목행사에 참가해 중국에서 지원받은 소나무와 백양나무 200만 그루를 식목했다.
이렇게 내가 개성, 평양에 이어서 구성에서도 식목행사를 하자 내각총리 박봉구와 총참모장 김진성은 눈에 불을 켜고 내 특별지시를 이행하려고 전 인민과 전 인민군을 동원해서 나무를 심기 시작했으니 한국에서 올라오는 묘목은 이내 북한 전 국토에 심어졌다.
그리고 북한에서 이렇게 대대적인 식목행사가 벌어지자 중국에서도 묘목을 지원했고, 러시아에서도 일부 묘목을 지원했으며, 일본에서도 묘목을 지원하기에 이르렀다.
“우리 총리께서 특별히 보내는 것이니 귀국의 김 위원장과의 정상회담을······.”
에사키 일본 외무상이 묘목을 지원하면서까지 나와의 정상회담을 요청하자 북한 외무상 이용호가 빙그레 웃으면서 이렇게 응대했다.
“위원장 동지께서 외무상이 이렇게 나오면 10조 달러가 먼저라고 말씀드리라고 했으니 그리 아시오.”
“......,”
“대답이 없으니 정상회담 제안은 없는 것으로 알겠소.”
일본 총리와 나와의 정상회담은 이렇게 다시 무산됐고, 민재인 대통령과 일본 총리와의 정상회담도 아직 열리지 않고 있었으니 일본은 이즈음 남북 사이에서 패싱을 당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