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지갑에서 3만원을 훔친 그 날. 부모님과 함께 저녁을 먹는데 밥이 목구멍으로 넘어가질 않았다. 아버지를 쳐다볼 자신이 없어 고개를 푹 숙이고 젓가락으로 밥알을 깨작거리는데 그에 아버지가 엄격한 목소리로 밥상머리에서 뭐하는 짓이냐고 내게 호통을 치셨다. 나는 그 순간 기절할 듯이 놀래 국그릇을 엎어버렸다. 어쩔 수 없었따. 내가 한 짓을 알면 어떡하지? 혹시 이미 알고 계시는 건 아닐까? 그 생각으로 가득 차 불안에 떨고 있었으니 말이다. 도둑이 제 발 저린 셈이었다. 나는 벌벌 떨며 '죄송해요, 아빠. 잘못했어요.' 하고 싹싹 빌었다. 아버지는 그런 내 모습을 말없이 쳐다보더니 이내 엄숙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씀하셨다.
'잘못이라는 걸 깨달았으면 다시는 하지마라. 그럼 된다.'
아버지의 용서와 훈계가 뼈아프게 박혀들었다. 그 후로 다시는 아버지의 지갑에 손을 대는 일이 없었다. 뿐만 아니라 아버지의 지갑ㅇ르 보는 것조차 피했다.
나는 몇 시간 째 침대 밑에 웅크리고 앉아 멍하니 책장에 꽂힌 책등만 쳐다보았다. 내게 충동을 느끼게 만들고 죄책감을 안겨주게 만든 책. 그럼에도 기어이 저 책을 사서 책장에 꽂은 순간 나는 원하는 것을 가졌다는 것에 만족과 희열을 느꼈었다.
똑ㅡ 똑ㅡ
"수우야. 저녁 먹어야지."
조심스런 어머니의 목소리에 귀를 틀어막고 싶었다. 나를 배려하는 어머니. 나를 걱정하는 어머니. 나를 상행주기 위해 노력하는 어머니. 그래서 더 나를 죄책감에 빠뜨리는 어머니. 집은 차라리 감옥이었다. 나는 몇백히 죄수였고, 누나는 내 죄를 눈 감아 준 자비로운 피해자이며 마땅한 판결을 내린 판사였다.
"수우야?"
"아. 저. 지금 모의고사 테스트 중이라서요. 끝나고 나중에 챙겨 먹을게요."
집에 돌아오고 이제 사흘 째. 이제 부모님과 마주하지 않기 위한 핑계는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그래... 그럼 차려놓을 테니 나중에라도 꼭 먹으렴. .....공부도 좋지만 너무 무리하지 말고."
어머니는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나를 달랬다.
사흘 전 다시 돌아 온 나를 보고 놀라면서도 아무 것도 묻지 않은 어머니는, 단지 내가 누나와의 생활에 적응하지 못해 돌아온 것이라고 생각하시는 것 같았다. 어머니도 알고 있었다. 누나와 내 사이가 그다지 좋지 않다는 것을. 처음부터 집을 나가는 그 순간까지 아버지와 내게 거부감을 가지고 있던 누나를 어머니가 모르고 있을 히가 없었따. 걱정스런 마음에 나를 누나에게 억지로 맡기면서도 잘 지낼 수 있을까 불안해하던 그 마음을 어머니는 종종 전화통화를 하면서 무의식중에 내비치시곤 하셨다.
어머니가 내게 약한 것과 마찬가지로 아버지는 누나에게 약하셨다. 그래서 내가 다시 돌아온 것에 누나 탓을 하는 어머니의 앞에서 아버지는 나를 탓하셨다.
'재수하는 게 무슨 벼슬이라고 임신 한 애 스트레스 주면서까지 같이 살게 해? 저 놈이 붙임성이 오죽 없으면 그랬겠어.'
누나를 위한 번호는 곧 아버지의 진심이기도 했다.
내가 재수를 한다는 사실에 수치심을 느끼는 아버지셨다. 친구 분들과의 술자리가 부쩍 줄어든 것도, TV에 대학 관련한 내용만 나오면 채널을 돌려버리시는 것도 다 나 때문이었다. 가끔은 술에 취해 남의 자식들은 잘만 가는 대학 왜 너는 못 갔느냐며 화도 내셨다. 그 때마다 안절부절 못 해 하시고 눈치를 보는 건 어머니의 몫이었고, 나는 그저 죄인처럼 아버지 앞에서 고개를 숙인 채 입을 다물었을 뿐이었다. 어머니가 굳이 나를 서울로 보내고자 하신 이유의 절반 이상은 아마 아버지 때문일 것이다.
임신한 애 스트레스 주지 말라는 아버지의 말씀에 어머니도 누나에게 더는 잔소리를 하지 못하셨고 그저 내게 미안하다고만 말씀하셨다. 어머니의 사과는 나를 더 괴롭게 만들었다. 나는 용서를 구해야 할 입장이지 사과를 받을 입장이 아니었으니까. 속생해하는 어머니의 앞에서 나는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해 바닥을 노려보며 죄송하다는 말을 되풀이했다.
째깍ㅡ 째깍ㅡ
시계 바늘 소리만 가득한 방안에 앉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시간만 죽이고 있다 방안이 아예 어둠에 휩싸였을 때 비로소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느새 저녁 12시. 두 분은 잠자리에 드시고, 나는 비로소 숨통이 트이는 시간이었다.
부엌에 가서 어머니가 차려놓은 밥을 꾸역꾸역 먹기 시작했다. 먹고 싶지는 않았지만 안 먹으면 어머니가 속상해하실 게 뻔하니까 억지로라도 비우는 것이었다.
느릿느릿 밥그릇의 반을 비웠을 때였다. 갑자기 조용한 집안에 전화벨 소리가 올리기 시작했다. 전화기는 거실에만 놓여 있었고, 혹여 어머니든 아버지든 깨서 나오실까봐 얼른 일어나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이 밤중에 집으로 전화가 오는 게 좀 이상했지만, 아버지가 핸드폰을 신경 쓰지 않는 탓에 연락이 안 되면 종종 아버지 친구 분들이 밤늦게 집으로 전화를 거실 때가 있었다. 그래서 이번에도 그런 건가 했는데...
-역시 거기 있었군.
익숙한 목소리에 순식간에 신경이 곤두서 버렸다. 마른 침을 삼키며 손에 힘이 빠져 놓칠 뻔 한 수화기를 고쳐 잡았다. 조금은 예상하지 못 한 상황에, 대답을 꺼내는 데는 얼마간의 용기가 필요했다.
"어. 어떻게..."
-중요한 건 어떻게 가 아니라 왜 네가 거기 있냐는 거지.
목소리가 더 없이 차디찼다.
-나와.
"...네?"
-나오라고.
"나, 나오라니..."
-오래 안 기다려. 내가 들어가기 전에 나오는 게 좋을 거야.
위압적인 명령을 끝으로 그는 내가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전화를 끊어버렸다. 한동안 수화기를 든 채 멍하니 눈만 껌뻑거리는데 갑자기 안방 문이 열리며 어머니가 나오셨다.
"누구 전화니?"
잠이 덜 깬 어머니의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와 생각지도 못한 접점이 생겨버린 이 시점에서 어머니는 세상 그 누구보다도 무섭고 두려운 존재였다. 떨리는 손으로 수화기를 내려놓고 잘못 온 전화라고 둘러댔다. 어머니는 별 의심 없이 고개를 끄덕이시고는 다시 방으로 들어가셨고, 나도 후들거리는 다리를 재촉해 방으로 들어갔다.
방문 앞에 주자앉아 입술을 잘근 잘근 씹어대며 나는 눈동자를 불안하게 굴렸다.
어떻게 해야 하지.
그는 내게 나오라고 했다. 나가면? 나가면 어떻게 되는 거지? 나가면... 나가면...
.......그가 있는 건가? ...볼 수 있는 건가? ...볼 수 있어?
그 순간 그를 보고 싶은 충동이 이성을 마비시켰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밖으로 뛰쳐나갔다. 운동화를 구겨 신고 엘리베이터 앞으로 달려갔지만 엘리베이터는 이미 올라가는 중이었다. 그래서 정신없이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아파트 밖으로 나가 숨을 몰아쉬며 미친 사람처럼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곧 그를 발견했다.
차에 기대 담배를 피우며 나를 노려보고 있는 그를...
가까이 다가가지 않고 우뚝 멈춰 서서 그를 쳐다보았다. 나를 노려보는 눈동자에 분노가 선연했다. 그게 두려우면서도 다시는 보지 못 할 거라 생각했던 그가 눈앞에 서 있다는 것에 희열을 느끼는 내가 있었다. 담배 냄새에 섞여 있는 서늘한 그의 향에 금세 취해버리는 내가 있었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 그가 피우고 있던 담배를 바닥에 던져 발로 비벼 껐다. 탐색은 그만 집어치우겠다는 뜻이었다.
"하나 묻지. 핸드폰 꺼 놓은 건 나 때문인가?"
그가 한 질문의 속뜻을 알아차리는 건 어렵지 않았따.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하자 그의 왼쪽 눈썹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내 대답이 그의 신경을 건드렸음이 분명했다.
"이유는?"
"....."
"당장이라도 네 목을 부러뜨리고 싶은데 억지로 참는 중이야. 그러니까 설명해."
무표정했지만 분노를 억누르는 듯한 기색이 역력했다.
"...누나가."
어렵사리 쥐어 짜낸 말을 꺼내기가 무섭게 그가 또 그 소리냐는 듯 인상을 구기며 됐어 하고 매섭게 내 말을 끊었다.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따.
"누나가 다 알고 있었어요."
"....."
"누나가 다 알고 있었다구요. 내가..."
"알아들었어. 그래서?"
그는 나를 단숨에 무너뜨린 그 사실을 너무나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다른 이유를 요구했따. 내가 도망친 이유가 그것뿐이라면 가만두지 않곘다는 듯...
그러나 내게는 충분했다. 그와의 관계에서 도망쳐야 할 이유로도, 끝내야 할 이유로도.
"그래서예요."
내 대답에 그가 사납게 웃었다.
"더 열 받게 하는 군."
그가 억누르고 있던 분노를 밖으로 드러내자 오싹 소름이 돋았다.
우두커니 서서 그 이상 아무 말도.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나를 훑어 내리는 시선이 마치 뱀의 눈처럼 오싹한 냉기를 뿜어냈다. 순간 그가 정말로 내 목을 부러뜨릴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만큼 그는 그 어떤 때보다더 날카롭고 선연하게 분노를 터트리고 있었다.
"이리 와."
가까이 다가가면 그는 나를 붙잡고 놔주지 않을 것이다. 지금 그에게 가까이 가는 것은 그저 거리를 좁히는 것에만 그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붙잡으면 붙잡힐 것이다. 관계를 끊지 못하고 죄책감과 불안감을 안은 채 관계를 지속하게 되겠지. 그리고 다시 관계를 이어붙이면 그건 더 이상 충동도 실수도 아니게 된다. 아무런 변명도 갖다 붙일 수 없게 된다.
그가 내민 손을 물끄러미 쳐다보다 스스로도 놀랄 만큼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가면요? 누나랑 이혼할 거에요?"
"내가 깰 수 있는 계약이 아니야."
"누나랑 이혼 할 거예요?"
"윤수우."
"누구랑 이혼 할 거냐구요!"
그것은 질문이라기 보단 고집이자 요구였고 감정의 표현이었다. 그에 그는 침묵으로 답했고, 나는 자조적으로 웃으며 말했다.
"안 한다는 거네요."
내가 다시 관계를 이어 붙여야 한다며 그건 충동 때문이 아니어야 했다. 지금 완전히 끊어내지 못하는 것은 온전히 내가 그에게 가진 감정 때문이다. 더 이상 그를 볼 수 없다는 사실에 절망하고, 다시 만난 지금 기쁨을 느끼게 한 그 감정. 아직은 정체를 알고 싶지 않은 그 감정 말이다. 이제 모르는 척 할 수 없으리만치 자라버린 이 감정을 인식하고 있는 이상 충동에 휩쓸리듯 그에게 돌아갈 수는 없었다. 그가 무슨 말을 하든, 어떤 식이 되었든 그는 누나의 남자였으니까.
떨리는 손을 감추려 주먹을 쥐고 그에게서 뒤돌았다. 그가 침묵으로 답했으니 나는 행동으로 답한 것이다. 그래서 걸어 들어가려는 내 뒤에 대고 그가 말했다.
"넌 지금 네가 얼마나 큰 걸 내게 요구하는지 몰라."
누나와 아무 것도 아니라고 했으면서 누구와의 이혼은 큰 것이라 표현하는 게 모순적이었다. 그게 어떤 의미든 얼마나 큰 것이든 상관없다.
"...마찬가지잖아요."
그래. 마찬가지였으니까.
"그러니까... 그러니까 여기서 끝내면..."
"그렇게는 못 하겠는데."
웃음기 어린 목소리였으나 협박에 가까웠다.
울컥 화가 치솟아 그럼 어쩌자는 건데! 하고 소리치고 싶었다. 그러나 그가 더 빨랐다.
"난 가지고 싶은 건 가져야겠어."
"....."
"어떤 식으로든."
나를 가지겠다는 달콤한 말을 그는 협박처럼 속삭였다.
시간은 아무렇지도 않게 흘렸다. 나는 흘러가는 시간을 무의미하게 흘려보냈다. 그러다보니 어김없이 견디기 힘든 계절이 내게 찾아왔다. 더위를 많이 타는 내게 여름은 쥐약이었다.
성적은 여전히 오르지 않는다. 사실 떨어지지 않는 게 신기핡 정도였다. 최근의 나는 공부르 하는 게 아니라 그저 문제집의 굴씨를 읽어 내리는 수준이었으니까. 한 달 전부터 작년에 다녔던 미술학원에 다시 등록해 다니기 시작했다. 그동안 억지로 미워뒀던 실기 준비를 시작한 것이다. 하루는 석고소묘 하루는 정물 수채화로 매번 정해진 시간 안에 완성을 목표로 번갈아가며 기계처럼 그렸다. 실력이 느는 건지 어떤지는 내가 판단할 수 없는 문제였다.
그날 후로 부쩍 멍하니 넋 놓고 앉아있는 시간이 늘어난 것 같다. 뭔가를 하고 있지 않으면 멍 때리고 앉아 시간을 보냈다. 아니. 시간을 죽였다. 갈수록 느리게만 느껴지는 시간을 그렇게 죽이지 않으면 기다렸다는 듯 쓸데없는 생각이나 잘못된 미련이 나를 잠식했으니까.
그러다보니 모든 것에 다 소홀해졌다. 공부도 그림도 그저 흉내만 내는 수준이었고 집안일엔 아예 무심했다. 그래서 나는 집안을 감도는 분위기가 변하고 있음을 깨닫지 못했다.
"이제 어떻게 할 거에요! 왜 그러셨어요. 왜!"
며칠 전부터 새벽이 되면 들려오는 어머니의 원망으로 가득 찬 울음소리에 기어이 오늘은 억지로 끌고 왔던 수마가 도망가 버렸다.
어둠 속에서 두 눈만 껌뻑거리며 바깥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어머니가 흐느끼는 소리는 좀처럼 멈추질 않았고, 곧 현관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이어졌다. 아버지가 밖으로 나간 것이다.
도대체 무슨 일일까. 그냥 두 분이 싸우셨겠거니 하고 관심을 꺼두고 있었는데 이쯤 되니 단순한 부부싸움으로 보기에는 어려운 것 같다. 어머니가 저렇게까지 소리치고 우시는 것이 예사롭지 않았다.
그럼 혹시... 어머니가 아신 건 아닐까. 불현듯 떠오른 생각에 심장이 덜컹 내려 앉는다. 그렇지만 그동안 조용했던 누나가 이제와 말 할 이유가 뭐가 있단 말인가... 누나에게 들키고 다시 집에 내려 온 지 거의 세달 째였다. 그동안 누나에게 서는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그 역시 마찬가지였고.
그렇다면 뭘까... 뭣 때문에 두 분이 저렇게 싸우는 걸까. 이제야 집안에 감도는 음울한 분위기가 신경 쓰였다.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조심스레 발소리를 죽이며 안방 쪽으로 다가가 살짝 열린 틈으로 안을 살피자. 바닥에 앉아 울면서 뭔가를 뒤적이고 계시는 어머니가 보였다. 가만히 그 옆모습을 바라보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어머니."
내 부름에 어머니가 흠칫 몸을 떨며 들고 있던 뭔가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통장이었다.
"수, 수우야. 아. 안 잤니?"
어머니가 다급히 떨어진 통장을 옆에 있던 상자에 넣고 침대 밑 공간으로 밀어 넣는다. 필요 이상으로 당황하는 어머니가 이상했다.
"...혹시 집에 무슨 일 있어요?"
"일은 무슨... 아무 것도 아니야."
아무 것도 아니라는 어머니의 대답은 오히려 무슨 일이 있긴 있다는 소리처럼 들렸다.
"하지만 아까..."
"응? 아, 아~ 내가 큰소리내서 놀랐나보구나. 그냥 네 아빠랑 좀 싸운 거니까 신경 쓰지 말고 어서 자렴. 내일도 일찍 학원 가야되잖니."
나를 안심시키기 위해 만든 어머니의 억지 미소는 역효과였다.
"아휴 참. 아무 일도 아니라니깐. 어서 가서 자. 응?"
대체 무슨 일이냐는 질문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필사적으로 괜찮은 척 나를 안심시키려는 어머니의 태도에 애써 참았다.
안녕히 주무시라고 인사한 뒤 다시 방으로 돌아 와 침대에 누웠다. 한 번 도망간 수마는 역시 좀처럼 다시 올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대체 무슨 일이지..."
울며 떨리는 손으로 통장을 보고 계시던 어머니의 모습이 뇌리에서 떠나질 않는다. 원인을 알 수 없는 불안감에 속이 체한 것처럼 답답해졌다.
이래저래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거리다 결국 일어나 책상 앞에 앉았다. 아무 생각 없이 스케치북을 펼쳤다가 그 안에 언젠가 습관처럼 그려재낀 그의 손을 발견하고 멈칫했다. 거칠게 그러나 가끔씩은 부드럽게 나를 만졌던 단단한 손, 그 손이 닿을 때마다 피어로는 감각에 나는 정신을 못 차리고 빠져들었다. 떠올리자니 몸에 열이 오르는 것 같아 급하게 다시 스케치북을 덮었다. 신경질적으로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리면서 그에 대한 생각을 같이 털어내려 애썼다. 길게 한숨을 내쉬곤 채꽃이에서 문제집을 꺼내려는데 시선 끝에 핸드폰이 걸렸다. 여태껏 전원을 켜두지 않은 핸드폰... 그렇지만 항상 내 신경을 잡아끄는 핸드폰... 가만히 핸드폰을 쳐다보다 손에 쥐었다. 전원버튼에 손가락을 댄 치 고민했다. 누를까 말까. 어느 쪽이든 달라지는 건 없겠지. 알지만... 차마 켜지 못했던 것은 아마 그에게 더 이상 나와 연락하고자 하는 의지가 없음을 확인하고 싶지 않아서일 거다. 나는 아직도 집 전화가 울리면 건강하고 기대한다. 혹시나 그일까 봐. 그리고 또 나는 종종 학원이 끝나고 집에 들어가기 전에 놀이터 그네에 앉아 아파트 정문을 멍하니 쳐다보며 기다리곤 한다. 혹시나 그가 나를 만나러 올까 봐.
"거짓말쟁이. 가지겠다면서..."
쓰게 웃으며 중얼걸렸다.
기대가 무너지고 그와 내가 완전히 끝났다는 것을 깨달을 때마다 자조했다. 무서워서 도망친 것도 나고. 돌아오라는 말에 등을 돌린 것도 난데 나를 붙잡지 않는 그를 원망하고 있으니 웃길 수밖에 . 하지만 그게 내 진심이었다.
결국 핸드폰을 켜지 않고 다시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그대로 엎드려 고개를 처박고 눈을 감았다.
아버지는 아직도 돌아오지 않고 계신다.
일주일이 지나자 음울한 기운은 이제 무시할 수 없으리만치 완전히 집안을 뒤덮어버렸다. 뭔가가 우리 집의 평화를 빠른 속도로 갉아먹고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와 어머니는 내게 그 벌레의 정체를 숨기려고만 하셨다. 문제는 숨긴다고 해서 숨겨질 만큼 작은 일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결국 얼마 안가 나는 우리 집을 뒤흔들고 있는 문제의 원인이 뭔지, 그 벌레의 정체가 뭔지 직접 마주할 수 있었다.
"윽!!!"
현관문이 열리자마자 우악스런 손이 내 멱살을 틀어쥐었다. 그대로 거실까지 질질 끌려 가 본 것은, 말 그대로 쑥대밭이 된 거실과 그 거실 한 가운데에서 겁에 질린 표정으로 벌벌 떨고 계시는 어머니와 아버지였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아. 멍청히 아버지와 어머니를 쳐다만 보는데 그런 내게 소파에 느긋하게 앉아 담배를 피워 물고 있던 남자가 손을 흔들며 비열하게 웃어보였다.
"아!! 드디어 오셨네. 이 집 아드님께서."
척 봐도 남자가 어떤 부류의 사람인지 알 수 있었다.
갑자기 뒤에서부터 다리를 걷어차였다. 짧게 신음하며 털썩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러자 소파에 앉아있는 남자가 험악하게 인상을 구기며 말했다.
"조심해라. 걔는 함부로 굴리지 마. 수틀리면 괜히 우리만 좆 되는 수가 있어."
"죄송합니다. 형님."
"뭐. 어쨌든 아드님도 왔으니 다시 사이좋게 얘기 좀 나눠볼까요?"
남자가 피우고 있던 담배를 소파에 눌려 비벼 끄자 탄내가 났다. 자리에서 일어나 목을 좌우로 꺾으며 남자가 아버지 앞으로 다가갔다. 아버지의 몸이 사정없이 떨리고 있었다. 아버지의 약한 모습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그래서인가. 두ㅕㄹ운 한편 묘한 기분이 들었다.
"윤정구씨. 돈 갚아라 안 갚으면 재미없다 뭐 이런 얘기는 너무 뻔해서 재미없지? 나도 같은 말 반복하기 귀찮고 해봤자 없는 돈 생길 것 같지도 않고... 사실 그래. 내가 돈 장사 하루 이틀 해본 사람도 아니고 갚을 사람 도망 갈 사람 보면 딱 아는데. 윤정구씨는 아무리 봐도 후자야 후자. 솔직히 말해 봐. 내 말 맞지? 아니라고? 그럼 지금 돈 갚을 수 있어? 거 봐. 못 갚잖아. 오늘 못 갚는데 내일이 라고 갚겠어? 그러니까 길게 끌지 말고 온르 얘기 끝냅시다. 엉? 저기 마누라 얼굴 좀 봐. 아이구 불쌍해라. 겁 먹어가지고 말이야. 마누라 보기 미안하지?"
사근사근한 말투 속에 예리한 날이 서있었다. 남자는 협박에 능숙한 사람이었고, 무력한 아버지는 그저 겁에 질려 남자가 무슨 말을 하던 기계처럼 고개를 끄덕이셨따. 그에 남자가 비열하게 웃으며 아버지의 머리를 토닥거렸다. 마치 말 잘 듣는 강아지를 칭찬하는 것처럼.
남자가 곧 안쪽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냈다. A4사이즈의 종이였다. 그것을 아버지의 눈앞에 대고 가볍게 흔들며 남자가 말했다.
"여기에 지장만 찍으면 끝나. 그럼 오늘처럼 예의 없이 구는 일 없을 거야. 읽어보면 알겠지만 사정 많이 봐줬어. 오늘도 그래. 좀 특별한 케이스라 손은 안 댄 거라구. 원래 이렇게 순하게 일 안 하거든."
아버지를 향해 윙크하며 야비하게 웃어대는 익살스러운 남자의 태도는 일견 양아치처럼 가볍고 천박해보였지만 분명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위압적인 카리스마가 존재했다.
남자가 주머니에서 잭나이프를 꺼내 아버지의 눈앞에 대고 보란 듯이 휘둘렀다. 날카로운 칼날이 베일 듯 아버지의 볼을 스치자 어머니가 비명을 질렀다. 아버지 역시 기절할 것처럼 놀라하시며 다급히 몸을 뒤로 내빼셨다. 그러나 남자가 더 빨랐다. 익히 예상했다는 듯 남자가 아버지의 팔을 붙잡아 억지로 끌어당기더니 엄지손가락을 꽉 붙잡았다.
"어허~ 안 되지. 도망가면. 고개 끄덕였잖아. 내 말에 동의한다는 뜻 아니었어? 난 그렇게 들렸는데? 고내히 힘 빼지 맙시다. 우리. 내가 자른다는 것도 아니고 인주가 없어서 대신 만들자는 것뿐인데."
"허억!!!!"
남자는 말이 끝남과 동시에 아버지의 손가락 끝을 칼끝으로 찔렀다. 단순히 가볍게 찌르는 것에 그치지 않고 찌른 상태에서 칼끝을 돌려 상처를 후벼 팠다. 겁에 질린 아버지의 비명소리가 상처보다 더 끔찍했고 태연하게 웃는 남자의 얼굴이 날카로운 칼날보다 더 무서웠다. 남자는 피가 흐르는 아버지의 엄지손가락을 하얀 종이 위에 강제로 누르게 했다
"옳지~ 됐다. 수고했어."
남자는 아버지의 피를 흡수해 빨갛게 물든 부분을 쳐다보며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차, 그런데 이거 자세히는 읽었나? 급해서 읽어 볼 겨를이 없었던 것 같으니 짧게 요약해 줄게. 그러니까 윤정구씨는 나한테 삼일 내로 1억 2천을 갚아야 되는데, 아무래도 못 갚을 가능성이 높잖아? 그래서 내가 1억 2천을 갚아야 되는데, 아무래도 못 갚을 가능성이 높잖아? 그래서 내가 1억 2천 대신 윤정구씨 마누라랑 아들을 데리고 가겠다 이런 내용이야. 이해되지?"
"뭐, 뭐라구요?!"
어머니가 경악에 차 소리쳤다. 그리고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말해두는데, 솔직히 이거 손해 보는 장사거든? 나이 든 아줌마 데려다 써먹을 데가 그리 많지가 않아. 그런데 어쩌겠어. 그렇게 하라는데. 나도 시키면 시키는대로 해야 되는 입장이라 어쩔 수 없으니 뭐... 너무 나 원망하지 마. 애초에 윤정구구 씨가 보증만 안 섰더라면 이런 일 없었잖아? 이참에 좋은 거 하나 배운 셈 쳐. 사내새끼들 의리니 염병이니 그 딴 거 돈 앞에선 아무 쓰잘데기 없다는 거."
남자의 이죽거림에 아버지는 죄인처럼 고개를 떨구셨고, 어머니의 절망에 찬 울음소리는 더욱 커졌다. 그리고 나는... 이 상황이... 이 상황이 정말 너무 갑작스러워서... 이해가 되질 않았따. 분명 눈으로 직접 보고 있고, 귀로 직접 듣고 있음에도 실제가 아닌 것 같았다.
할 일을 다 마친 남자가 몸을 일으키더니 아버지를 뒤로 하고 내 쪽으로 걸어왔다. 시종일관 여유롭게 웃고 있던 남자의 표정이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미묘하게 굳어졌다. 위아래로 훑어보는 시선이 나를 사람이 아닌 사물로써 관찮가ㅗ 있음을 명백하게 드러냈다. 값어치를 매기는 장사꾼의 시선 그러나 그 속에 왠지 모를 호기심이 섞여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내 착각인가.
"설마 했더니 이거 진짜 남자새끼잖아... 하ㅡ 대체 무슨 생각이신 건지..."
남자가 들릴 듯 말 듯 낮은 목소리로 뜻 모를 말을 중얼거렸다.
"아까도 들었겠지만 사람 하나 망가지는 거 순식간이야. 망가뜨리는 것도 순식간이고."
"....."
"기회 줄 대 처신 잘 하는 게 좋을 거다."
남자가 침을 뱉듯 경고를 던지고 내 옆을 지나갔다. 한바탕 폭풍이 쓸고 간 거실은 어머니의 서러운 울음소리와 아버지의 죄책감으로 가득 찼고 나는 혼란 속에 내던져졌다.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이혼하자고 말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싫다고 하셨다.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멀리 도망가자고 애원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소용없는 짓이라며 고개를 저었다.
이렇게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지.
나는 갑자기 닥친 이 불행을 나의 것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헤맸다. 남들보다는 아니어도 남들처럼은 그럭저럭 잘 살던 집이 하루아침에 풍비박산 날 지경에 이르렀다. 그것도 평생 나와는 관련이 없을 거라 여겼던, 그저 영화 속에서나 접해보고 얘기로만 들어봤던 사채 때문에... 아버지가 도박 빚에 허덕이던 친구의 사채보증을 해줬다는 얘기를 들었을 땐 어이가 없어 말이 안 나왔다.
그 친구가 그런 친구가 아닌데... 도박 같은 거 할 친구가 아니었는데... 분명 갚겠다고 했는데... 도망쳤을 리가 없는데... 아버지는 허탈하게 중얼거리셨고 어머니는 이제와 그게 다 무슨 소용이냐며 화를 내셨다.
"이제와 그런 소리해서 뭐해요. 이제 어떻게 할 거에요. 나는 어떻게 할 거에요! 수우는 어떻게 할거냐구요!"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라는 게 이런 건가.
어머니와 나는 하루아침에 빚 대신 팔려갈 처지가 됐다. 이 비현실적인 상황이 얼마나 어처구니가 없으면 눈물이 아니라 헛웃음이 다 나왔다.
아버지는 나를 쳐다보지 못했따. 죄책감 때문일 것이다. 당연했다. 나 역시 아버지를 쳐다보지 못했다. 아버지가 원망스러워서는 아니었다. 그저 나를 죄인취급 했던 아버지가 오히려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는 것이 이상했고 또 그런 아버지를 어떤 표정으로 봐야할지 몰라서였다.
멍하니 침대에 앉아 아무 것도 하지 못한 채 밤을 지새웠고. 다시 돌아 온 아침엔 어머니가 울며 누나에게 전화하는 소리를 들었따.
"너 돈 없어? 정말 없니? 장서방한테 부탁해보면 안 될까> 나중에 이 엄마가 꼭 갚을게. 응? ....이 기집애야! 그 돈 없으면 우리 죽어! 죽는다고! 나쁜 기집애...! 이 엄마가 언제 너보고 돈 달라고 한 적 있었니? 그러니까 장서방한테 말해서 좀 도와주렴. 얘. 지윤아. 응? 엄마 말 듣고 있지?"
어머니는 이 것짓말 같은 최악의 상황을 벗어나게 해 줄 유일한 돌파구가 누나라고 생각하신 듯 필사적으로 매달리셨다. 누나가 그에 어떻게 대답했는지는 알 수가 없었지만 분명한 건 어머니의 반응으로 보아 그리 긍정적인 답을 준 건 아닌 듯 했다. 그러나 그 보다도 내 신경을 잡아 끈 건, 어머니의 '장서방'이라는 호칭이었다.
장서방... 장서방이라... 매형이라는 호칭만큼이나 거부감이 들었다.
그는 누나가 부탁하면 도와줄까. 그가 무슨 일을 하는지는 여전히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어머니의 부탁을 들어줄 수 있을 정도의 재력은 있을 것이다. 1억 2천, 쉽사리 가늠이 안 되는 그 액수는 나나 아버지에게 있어 평생가도 만져보기 힘들 만큼 엄청나게 큰 금액이었다. 그러나 그는 다를지도 모른다. 어쩌면 아무 것도 아닐 수도 있지. 그러니까 도와줄지도 모른다. 더군다나 그와 누나는 엄연히 가족이라는 끈으로 묶여 있지 않은가. 그는 그 끈이 감정적인 것이 아니라 했지만 어떤식이든 그는 누나의 남편이고 누나는 그의 아내다. 부부였다. 남은 아닌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놓이는 한편 짜증이 났다. 이런 식으로 또 다시 그와 누나의 관계를 다시금 확인하고 내가 한 짓을 되돌아보고 결국엔 절망하고 절망하는 내게 또 절망하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감정을 소모하는 무의미한 짓거리가 싫었다.
그러고 보면 당장 내일까지 돈을 갚지 않으면 무슨 꼴을 당할지 모를 이 상황에 서도 이런 생각이나 하고 있다는 게 우습다.
아버지는 이리저리 뛰어다니시며 돈을 마련해보려 노력하고 계시지만 삼일 안에 1억 2천을 구한다는 건 사실상 불가능했따. 내가 알기론 아버지 주위엔 그 큰돈을 빌려 줄 만큼 여유 있게 사는 사람은 없었따. 어차피 안 되는 일이라는 사채업자의 말은 허튼 소리가 아니었다.
정말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구나. 하루아침에 빚 대신 팔려가는 신세가 됐다. 그런데 그게 무섭다기보다는 그냥 어이가 없었다. 아직도 그저 남 얘기 같기만 하고 지독히도 현실감이 없었다. 그나마 간간히 들리는 어머니의 울음소리만이 이 말도 안되는 일이 남 얘가 아니라 내 얘기라는 걸 깨닫게 해줄 뿐이다.
하루가 지났다.
누나에겐 연락이 없었다. 어머니는 하루 종일 초조하게 전화기 앞을 서성거리셨지만 새벽이 되도록 전화기는 단 한 번도 울리지 않았다.
해결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 절망적인 시간이 더해질수록 어머니의 불안에 찬 울음소리도 거세졌다. 나중에 듣는 내가 다 지쳤다. 아버지는 그런 어머니를 달랠 염치가 없었고 나는 여력이 없었다. 우리는 각자의 절망 속에 빠져 어쩔 줄을 모르고 시간만 보내고 있었다.
어쩌다가 이렇게 됐는지,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하면 할수록 머리만 아팠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아니, 어쩌면 딱 한 가지는 있을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자신이 없었다.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인지 해도 되는 일인지조차 불분명하다. 그래서 그저 전원이 꺼진 핸드폰을 붙잡은 채, 전화를 걸고 도와 달라 매달리는 내 모습을 상상하는 것으로만 그쳤다.
날이 밝아 오기 시작할 때쯤에야 반복되는 무의미한 상상 속에서 빠져나왔다.
이틀 째 잠을 자지 못한 탓인지 머리가 아팠다. 그렇지만 잠은 오지 않았고, 그냥 복잡한 머릿속을 비워버리고만 싶어 무작정 스케치북을 펴고 손을 움직였다. 뭘 그리고 싶은지 뭘 그리는지도 모르고 무작정 머리를 비우기 위해 마구잡이로 선을 그었다. 그 선이 어떻게 이어지고 어떤 형태를 만들어내는지는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뻔했다. 내가 뭘 그리는 것인지는.. 한참을 익숙한 형체를 그리는데 열중하다 느닷없이 뭔가를 던지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연필을 벽에 집어 던졌다. 이 갑작스런 충동이 뭘 뜻하는 건지 알 수가 없다.
신경질적으로 스케치북을 덮고 책상 위에 엎드렸다. 답답했다. 먹은 것도 없는데 단단히 체한 것처럼 속이 너무너무 답답했다. 무작정 바람이 쐬고 싶어져서 밖으로 나갔다.
놀이터 그네에 앉아 멍하니 푸르스름한 새벽하늘을 올려다보며 시간을 보냈다. 새벽이라 해도 여름은 여름인지라 공기가 후덥지근했다. 그렇지만 차라리 집에 있을 때보다 속은 시원했다.
그네를 흔들 때마다 끼익ㅡ 끼익ㅡ 쇳소리가 만들어졌다. 듣기 좋은 소리는 아니었지만 일부러 그 소리에 더 집중했다. 하기 싫은 생각이 떠오르지 않게 하려면 뭔가에 억지로라도 신경을 집중시키는 게 제일 좋았다.
"...팔자 좋네."
사채업자가 준 기회의 끝이 다가오고 있었다. 바로 오늘이었다. 오늘까지 해결하지 않으면 나는 내 자신의 소유권을 다른 사람에게 넘겨야 했다. 어머니 역시 마찬가지고... 그렇지만 어쩌겠는가. 발버둥 쳐도 어쩔 수 없는 일인데... 내가 어찌 해 볼 수 있는 일이 아닌데... 그러니 이 답답하기만 한 시간ㅇ르 어떻게든 죽이는 수밖에 없다.
멍하니 하늘만 쳐다보는데 갑자기 고요하나 아파트 단지 내에 차 소리가 끼어들었다. 그 소리에 고개를 쳐들고 다급히 정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 순간 나를 지배한 건 기대감이었다. 그렇지만 내 시야에 들어온 건 택시였다. 그의 차가 아니었다. 순간 치고 올라왔던 기대감이 허망하게 꺼져버렸고 그게 우스워서 피식ㅡ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고요한 새벽의 침묵을 깨고 나타난 택시는 제법 가까운 곳에서 멈춰 섰다. 아무 생각 없이 뒷문에서 내리는 손님을 쳐다보았다. 그러다 놀랐다. 택시에서 내린 손님의 얼굴이 낯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누...나."
손님은 바로 누나....였다.
느리게 흘러가던 시간이 일순간 멈춰 버린 것만 같았다.
누나 역시 곧 나를 발견했다. 누나는 지독히도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곧 택시 기사가 차에서 내려 누나대신 트렁크를 열어 캐리어 가방을 내려주었고 누나는 그런 택시기사에게 뭐라 얘기 하며 지갑에서 돈을 꺼내 건냈다.
누나가 캐리어를 끌며 내 쪽으로 다가왔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속도였지만 누나가 한 걸음 한 걸음 옮기는 것이 마치 슬로우 비디오처럼 느리게만 느껴졌다.
누나가 바로 앞에까지 왔을 때 비로소 나는 엉거주춤 그네에서 일어났다. 마른 침을 억지로 목뒤로 넘기곤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움직여 누나에게 인사했다.
"아, 안녕하세요. 누..."
짝ㅡ!!!
날카로운 소리만큼이나 날카로운 통증이 뺨에 내달렸다. 갑작스런 누나의 행동에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하고 눈만 껌뻑이는데 다시 안 번 짝ㅡ! 하고 누나의 손바닥이 뺨을 내리쳤다.
떨리는 손으로 뺨을 감싸 쥐며 누나를 쳐다보았다. 왜 이러냐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누나가 내게 무슨 짓을 하던 간에 그 이유는 하나뿐이니까.
뺨을 때리는 누나의 손은 날카롭고 가차 없었지만 나를 쳐다보는 시선을 무감하기만 했다. 누나는 한동안 말없이 나를 쳐다보기만 했다. 나는 그런 누나를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뺨을 감싼 채 땅바닥에 시선을 두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누나가 내게 씹어 뱉듯 말했다.
"꺼져."
"....."
"그리고 다신 엄마랑 내 앞에 나타나지마."
그 말에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무감했던 누나의 눈동자엔 어느새 차가운 분노가 서려있었다.
"너 같은 새끼 어디서 어떻게 굴러먹든 상관 안 하려고 했어. 그런데 우리 엄마는 안 돼. 그래서 원하는 대로 도장 찍어줬어."
도장? 도장이라면... 설마...
"!!!"
"설마 그 나마작 너 까짓 것 하나 갖자고 이런 개수작까지 부릴 줄은 몰랐지. 그래. 이제 만족하니?"
"...이혼... 했어요?"
"이혼? 그래. 네가 원한 건 이혼이겠지. 하지만 내가 잃은 건 기회야. 남들만큼, 남들보다 더 멋지게 살 수 있는 기회. 남부럽지 않은 인생. 걸레만도 못 한 취급받는 술집 년이 사모님 소리 들으면서 원하는 건 뭐든 할 수 있는 인생! 고작 1억 2천 짜리가 아니었어. 그건."
"....누나."
"누나라고 부르지 마. 역겨워. 미안한 척 하지도 마. 가증스러우니까. 그냥 꺼져. 그리고 다신 나타나지 마."
"....."
"미친 놈... 너나 그 새끼나 둘 다 미쳤어. 빌어먹을 개새끼들이야. 그러니까 니들끼리 마음대로 붙어먹어. 원하는 대로 해줬으니까."
그 말을 끝으로 누나는 미련 없이 내게서 등을 돌렸다. 나는 그런 누나를 붙잡지 않았다. 붙잡을 수가 없었다. 감히 쳐다 볼 수조차 없었다. 고개를 숙인 채 바닥만 멍청히 쳐다보았다. 누나의 발검음 소리. 캐리어 바퀴가 땅에 긁는 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힘없이 늘어뜨린 손에 천천히 힘이 들어갔다. 누나의 기척이 완전히 사라지기 전에 움찔거리는 손가락을 안으로 말아 쥐었다.
",,,저!"
머리로 생각하기 전에 소리가 먼저 튀어나왔다.
발소리가 멈췄다. 그래서 누나가 내 목소리를 무시 하지 않았음을 알았다. 벌린 입을 열었다 닫기를 반복하다 끝내 눈을 질끈 감고 말했다.
"...저 그 사람... .......좋아해요."
"....."
"좋아해서 그랬어요.... 좋아해서...."
누나의 앞에서 처음으로 내가 키우고 있던, 그리고 끝내 잘라내지 못한 내 감정을 인정했다. 그리고 이것은 변명이기도 했다. 감히 용서해달란 말은 하지 못했다. 그와 누나 사이에 아무런 감정이 없었다 해도 목적과 필요가 있기에 관계가 생성 됐고 유지됐을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내가 깨뜨렸다. 내가 깨게 만들었다. 그래서 나는 그 이유를 말하고 싶었다. 내가 나쁜 짓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 나로 하여금 충동을 느끼게끔 만든 이유를... 그래서 그랬다고... 그래서 어쩔 수 없었다고... 그렇게 변명하고 싶었다.
누나는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물론 누나에게서 어떠한 대답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기에 실망하지 않았다.
한참 뒤에야 누나가 싸늘한 조소를 담고 내게 말했다.
"차라리 그게 낫네."
"....."
"약으로 절여놓을까 발목을 부러뜨릴까 고민 중이라는 말보단 차라리 그게 더 나아. 그래봤자 똑같은 쓰게지만."
누나가 마지막으로 내게 보여준 것은 용서가 아니라 경멸이었다.
그래서 고마웠다.
누나가 들어간 뒤에도 한참을 멍하니 서있었다.
푸르스름한 하늘이 밝게 변하고 후덥지근한 공기가 몸을 휘감았다. 툭ㅡ 툭ㅡ
갑자기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살갗게 부딪혀 아래로 흐르는 빗방울을 망연히 쳐다보는 내게 아까부터 나를 살피고 있던 경비아저씨가 다가와 물었다. 학생, 괜찮아? 비 오는데 그만 들어가지? 경비 아저씨는 왜 이러고 서 있느냐고 묻지 않는다. 그저 안쓰러운 표정으로 나를 보며 혀를 찰 뿐이다. 며칠 전 들이닥친 불청객으로 말미암아 짐작했을 수도 있고 또 어쩌면 사실에 가까운 소문이 돌아다니는 것일 수도 있다.
경비 아저씨에게 괜찮다는 말 대신 고개를 끄덕인 뒷 고개를 처 들고 하능르 쳐다보았다. 먹구름 하나 없는 맑은 하늘에서부터 내리는 빗줄기가 점점 거세진다. 이런 걸 여우비라고 하던가.
느닷없이 웃음이 나왔다. 아니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숨을 터트렸다.
어렸을 때 아버지의 돈을 훔쳐 산 화보집은 책장에 꽂혀 있다. 그러나 나는 단 한 번도 그 책을 펴보지 못했다. 그 책을 볼 때마다 마음에 걸리는 그것, 죄책감을... 무시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 책을 펴봐야 할 것 같다.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