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왔니."
거의 5년만인가.
"네. 잘 지내셨어요... ....누나."
누나를 만나는 것은...
차가운 표정 무감한 시선. 무뚝뚝한 말투. 나를 반기지 않은 불청객으로 여기는 만큼 대하는 태도역시 찬바람이 불었다. 그런 누나의 태도는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리게 했다.
어렸을 적 처음 아버지 손을 잡고 낯선 아파트에 들어가 누나와 마주했을 때에도 저랬다. 저런 표정이었다. 낯선 것이 제 영역을 침범한 것에 대한 불편함과 불쾌함을 숨기지 않고 여실히 드러냈다.
달라진 것은 나였다. 7살 때의 내가 두려움을 느꼈다면 스무 살의 나는 두려움이 아닌 불편함을 느꼈다. 7살 때의 내가 두려움에 아버지 뒤에 숨어 눈치를 볼 정도로 소심하게 굴었다면. 스무 살의 나는 불편해도 피하지 않고 담담히 누나와 마주하고 있을 정도로 담대하게 굴 수 있게 되었다. 시간이 가져다 준 변화였다. 한마디로 대가리가 컷다는 뜻이다.
"저 끝에 있는 방 써."
반갑다는 말도. 앞으로 잘 지내보자는 의례적인 인사조차 하지 않았다. 하물며 부모님은 잘 계시냐는 안부조차 묻지 않는다. 하긴 어쩌면 필요가 없을지도 모르지. 누나는 아버지를 가족으로 인정하지 않았고. 어머니와는 거의 매일 연락을 주고받고 있으니까. 그러니 새삼 내게 안부를 물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네. 감사합니다."
나와 잘 지내려는 노력을 하지 않을 누나에게 나 역시 잘 부탁한다는 인사 따윈 하지 않앗다. 하등 쓸모없는 소리다.
나는 어색한 인사를 건낸 뒤 짐을 들고 내게 할당 된 방으로 향했다. 그 사이 누나는 핸드폰으로 내 걱정을 하고 있을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야. ....응. 도착했어. ....내가 알아서 할게. ...그래., 알았어. 걱정하지 말고... .... 알았다니까?"
어머니를 향한 짜증 섞인 목소리가 누나의 심정을 대신하고 있는 듯 했다.
그럴 만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누나가 달갑지 않은 이복동생을 어쩔 수 없이 책임지게 도니 이유는 오로지 어머니 때문이니까. 5년만의 불편하고 어색한 재회는. 대학입시에 실패한 아들을 홀로 서울로 올려 보내는 것에 불안함을 느낀 어머니의 고집에 의한 결과였다.
누나도 마찬가지겠지만, 나 역시 5년이나 얼굴을 보지 못한... 그것도 사이가 좋은 편도 아닌 누나와의 생활이 달갑진 않았다. 때문에 처음부터 나는 고시원에 들어가기를 희망했다. 차라리 혼자 생활하는 편이 나았다. 그러나 내가 아무리 혼자 있는 게 공부하는데 집중이 더 잘 될 것 같다는 이유를 내세워 고시원을 고집해도 어머니의 고집을 꺾을 순 없었다. 오히려 꺽인 쪽은 나였다. 이 세상에서 제대로 깨달았다. 나를 혼자 보내고 나면 걱정 되서 잠도 잘 못 잘 것 같다고 눈물짓는 어머니 앞에서 내가 어떻게 더 고집을 부릴 수 있을까. 가뜩이나 친자식이 아니라는 것에 예민한 어머니는 친자식부다 더 친자식처럼 나를 위로주려 노력하셨고. 그런 어머니의 정성에 아버지는 언제나 미안해하셨다. 무조건 어머니의 편에 서 계시는 아버지까지 나서서 나를 설득하니 어쩔 수가 없었다.
누나의 고집이 꺽인 것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어머니는 누나를 설득할 때 세 가지 방법을 쓰셨다. 처음에는 달랬고 두 번째엔 눈물을 보이며 사정했고 마지막엔 불같이 화를 내셨다.
'나쁜 년, 이 이기적인 년아! 집이 좁은 것도 아니고, 사람 부리면서 넓은 집에서 떵떵거리면서 사는 년이 불쌍한 네 동생 하나 못 보살피겠다고 이리 퉁바리맞게 굴어?! 썩을 년!"
평소 내겐 화 한 번 내본 적 없는 어머니의 입에서 욕설과 고함이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어머니의 분노는 누나에게서 그치지 않았다. 화살은 애꿎은 사람에게도 돌아갔다.
'네 남편 때문에 그래? 그 놈 눈치 보느라 그러느냐고!'
어머니는 결혼식도 치르지 않고 덜컥 혼인신고만 한 채, 단 한 번도 제대로 인사를 하러 오지 않은 누나의 남편을 사위로 인정하지 않으셨다. 그래서 항상 부를 때 '네 남편' 혹은 '나쁜 놈'이라고 불렀다. 어머니가 그러시니 나 역시 쉽게 매형이라는 말이 입에 붙지 않았다. 이제껏 부를 일이 없었다는 것을 차지하고서라도 말이다. 어머니가 굳이 그런 식으로 지칭 하는 것은 얼굴 한 번 비치지 않는 매정한 사위에 대한 섭섭함과 불만, 그러고 무언의 압밥을 표현하는 나름의 방법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껏 얼굴 한 번 비춘 적이 없는 걸 보니 그 방법은 영 먹히질 않을 모양이지만.
어쨌든 그 날. 어머니는 한 시간 가량을 전화기를 붙잡고 화를 내다 분에 못 이겨 서럽게 울기까지 하셨다. 내게 좋은 엄마가 되어주고 싶고, 원하는 대학에 가지 못한 것이 다 제대로 챙겨주지 못한 제 탓 같고, 어떻게든 다시 해보겠다고 서울까지 올라가겠다는데 같이 가서 챙겨줄 수는 없고, 그렇다고 가지 말라 말릴 수도 없고, 혼자 힘들고 외롭게 타지 생활 할 걸 생각하면 걱정 되서 잠도 안 오는데 네가 좀 도와주면 안 되는 거냐며 전화기를 붙잡고 그렇게나 서럽게 우셨다. 그렇게까지 하는데 아무리 누나라고 별 수 없을 거다. 그리고 그 결과 어머니의 뜻 대로 나는 누나의 집주소와 연락처를 들고 서울에 올라왔고, 고시원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고급 아파트의 방 한 켠을 내 공간으로 배정 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정작 이 결과에 만족스러워 하는 사람은 오로지 어머니뿐이었다. 남보다도 못한 사이인 이복동생의 보호자 노릇을 하게 된 누나도 그렇겠지만, 어머니 고집에 떠밀려 별 수 없이 신세를 지게 된 나도 불편하고 어색하긴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건. 다음 주부터는 아침 일찍 나가 밤늦게 까지 학원에 있는 거라는 것. 그래서 누나와 마주 할 시간이 그리 많지 않을 것이라는 정도다.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어머니와 통화하는 누나를 힐끔거리다 방으로 들어갔다. 잠시 방문 앞에 서서 앞으로 내가 적응해야 할 공간을 빙 둘러보았다. 방은 혼자 쓰기엔 조금 넓은 듯 했고, 침대나 책상 컴퓨터 옷장 등 필요한 것들은 모두 갖춰진 상태였다. 더한 나위 없이 이상적인 공간이었지만 그래서 더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물론 그렇다 해도 적응하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을 것이다.
짐은 바닥에 대충 놓아두고 침대 위에 걸터앉았다. 정리를 해야 했지만 당장은 아무것도 하기 싫었다. 몇 시간 동안 좁은 버스와 북적북적한 대중교통에 시달렸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누나와의 불편한 재회 때문만도 아니었다. 그냥 요즘에 나는 항상 지쳐있는 것 같았다. 아마 처음으로 실패를 겪어봤기 때문일 것이다. 아니, 그건 실패라기 보단 어쩌면 포기였을 지도 모른다.
나는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다 쓰러지듯 침대위로 몸을 뉘었다.
눈을 감았다. 피곤했다.
새로운 생활에 적응하는 건 예상보다 빨랐다. 그도 그럴 것이 생활 패턴이 굉장히 단순했기 때문이었다.
아침 일찍 나가 입시학원에 가서 수업을 듣고 오후엔 화실에 가서 그림을 그렸다. 사실 지금 내게 필요한 곳은 화실이 아닌 입시미술 학원이었다. 그러나 가기 싫었다. 이미 1년간 지겹도록 같은 것만을 그리도록 내게 강요했고 그 정답이란 무조건 대학이 원하는 형식이라는 전제조건을 달고 있었다. 그게 나와 맞지 않아서 싫었다.
나는 그저 손을 움직이는 게 좋았다. 머릿속에 있는 것을 연필을 이용해 흰 바탕 위로 끄집어내는 것이 좋았다. 시선을 잡아끄는 어떤 장면을 사진이 아닌 그림으로 남겨두는 것이 좋았다. 그래서 그리기 시작했고 그래서 선택한 전공이었다. 그러나 실패했다. 그리는 게 즐겁지 않다고 느낀 순간부터 내 그림은 언제나 실패작이었다. 강사들의 조언과 요구는 내게 버겁기만 했다. 똑같은 것을 반복해서 그리고, 그것을 평가를 받는 것이 버거웠다. 지겨웠다. 갑갑했다. 미술을 하는 게 아니라 입시 논술을 그리고 있는 것 같았다. 거기서 오는 괴리감은 자신감을 갉암거고 열등감을 키웠다. 결국 점점 내가 왜 이걸 그리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게 되었고, 그 결과 나는 시험장에서 아무 것도 그리지 않았다. 그래. 내가 그린 건 아무 것도 아니었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아무 것도 보여주질 못했다. 두 번째 시험도 마찬가지였고, 세 번째엔 아예 멍하니 앉아만 있다 돌아왔다. 불합격은 당연했다. 그래서 충격적이지도 않았다. 다만 허무했을 뿐이다.
똑같은 짓을 또 반복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봤자 더 악화 될 것이 뻔했으니까. 그래서 미술학원이 아닌 화실을 택했다. 회복하고 싶었다. 그리는 재미를, 그리고 그리고자 하는 의욕을, 그리고 회복은 생각보다 빨리 이루어졌다. 처음 며칠간은 명하니 캔버스만 노려보고 있었는데 일주일정도 되자 손이 저절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절대 익숙해지지 않을 것 같았던 누나와의 생활도 그럭저럭 괜찮았다. 왜냐면 내 예상대로 한 집에 살면서도 마주치는 일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다. 누나는 생각보다 외출이 잦았고, 집안일은 가정부의 몫이었다. 그러니 누나보다는 차라리 가정부 아주머니와 마주하는 시간이 더 많았다.
다만 이상한 건 누나는 그렇다 해도 누나의 남편... 즉, 내게는 매형이 되는 사람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단 한 번도 보질 못했다. 이주일이 다 지나도록 말이다.
처음에는 별 생각이 없엇다. 그냥 바빠서 집에 잘 못 들어오는 건가 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이상했다. 아무리 바쁘다 해도 어떻게 이렇게까지 집에 안들어 오나 의구심이 들었다.
그래서 아주머니에게 물었다.
"저...아줌마. 누나 남편.. 아니, 그... 매...형 말인데요."
매형이란 호칭은 도통 입에달라붙지 않고 어색하기만 했다.
"응? 누구... 아~ 사장님? 사장님이 왜?"
"그게... 원래 집에 잘 안 들어오시나 해서요. 아직까지 뵌 적이 없어서..."
"아~ 그런 건 아니고 출장 때문에 해외에 나가계셔. 어디보자... 그게 한 한달전이었으니까 슬슬 돌아오실 때 됐네."
"아, 네."
출장... 출장이라... 그런 이유라면 지금껏 못 본 게 당연했다. 무슨 일을 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리 좋은 집에서 사는 걸보면 꽤 잘 나가는 사업가 정도 되는 모양이다. 하긴 어머니가 불평을 늘어놓으실 때마다 항상 빠지지 않고 들어가는 대목이 돈 많은 사위 두면 뭐하냐였지.
"그런데 실은 원래도 자주 집에 들어오시는 편은 아니야."
고개를 끄덕이는 내게 갑자기 아줌마가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마치 비밀 이야기를 털어놓는 사람처럼.
"일주일에 두세 번 정도? 그것도 밤늦게 들오셔서 일찍 나가버리신다니까?"
"...왜요?"
"글쎄. 잘은 모르겠지만 사모님이랑 사이가 안 좋아서 그런 게 아닐까? 사실 내가 일하면서 두 분이 같이 식사하는 꼴을 못 봤거든."
"....."
"바빠서 못 들어오는 건 그렇다 쳐도, 어쩜 출장 간 지 한 달이 넘도록 전화 한통이 없으니."
"....."
누가 봐도 안타까워서 하는 말이 아니었다. 아줌마는 그저 흥미로웠을 뿐이었고, 말을 함으로써 상대 또한 그 상황에 흥미로워 해주길 바라는 것 같았다. 다만 그 상대로 나는 적합하지 않다는 게 문제였다.
내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것이 무안했는지 아주머니가 서둘러 수습에 들어갔다.
"어머, 내가 괜한 말을 했나봐. 미안해. 수우학생."
물론 미안해 할 필요는 없었지만, 괜찮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아주머니가 어색하게 웃어보이시곤 다시 설거지를 시작하셨다.
사실 흥미를 느끼지 않으느 것은 아니었다. 다만 어떠한 반응을 보이기엔 내 위치가 애매했다. 누나는 내게 남이지만 남이 아니기도 했으니까. 표면적으로는 가족이었지만, 심정적으로는 남보다도 못한 게 누나와 내 사이였다. 우리는 서로에게 무관심했다. 정확히는 무관심을 원했다. 특히나 누나는 더더욱.... 그래서 나는 이번에도 이 이상 관심을 두지 않기로 했다. 궁금해도 굳이 알려고 하진 않았다. 누나에 고나한 건 모르면 모르는 채로 놔두는 게 제일 좋았다.
무관심. 그건 가족이란 끈으로 묶인 후부터 생겨난 누나와 나 사이의 암묵적인 룰이었다.
한 달이 지났다.
재수 생활은 생각보다 힘들지 않았다. 화실을 다니면서 감을 되찾은 뒤엔 뭐든 막힘없이 그릴 수 있게 되었고, 성적은 오르지 않아도 유지는 했다. 힘들 줄 알았던 누나와의 생활도 부딪힐 일이 거의 없다보니 문제도 생기지 않았다.
다만 가끔씩 저도 모르게 생겨나는 스트레스가 악몽이라는 형태로 찾아와 나를 괴롭혔다. 바로 지금처럼.
"...아. 젠장."
나는 어두운 천장을 노려보며 나지막이 욕설을 내뱉었다. 짜증이 났다.
이럴 때마다 처음으로 겪어 본 실패가 생각보다 더 내게 큰 타격을 주었음을 깨닫게 된다.
시계를 보니 새벽 두 시였다. 그대로 눈을 감았다가 곧 목이 말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굳이 불은 켜지 않았다. 제법 구조에 익숙해져서 이젠 어두워도 돌아다니는데 아무 문제가 없었다.
그대로 부엌까지 가서 냉장고 문을 열었다가다시 닫았다. 이상하게 다른 건 다 적응 되도 정수기를 이용하는 건 적응이 안 돼서 매번 물을 마시고 싶을 때마다 냉장고 문을 열었다 닫고는 했다.
식탁 위에 놓여 있던 컵으로 냉장고 바로 옆에 있는 정수기에서 냉수를 떠 마셨다. 생각보다 너무 차가워서 마시고나니 머리가 띵ㅡ 하고 울렸다. 아이스크림 두통이었다. 통증은 금방 가시지 않아서, 잠시 한손으로 머리를 부여잡고 두통이 가라앉길 기다렸다.
그런데 그 때였다.
바보 옆에서 탁ㅡ 하는 소리와 함께 냉장고 문이 열렸다.
"!"
놀란 나머지 들고 있던 컵을 놓쳤다. 바닥과 충돌한 컵이 날카로운 파열음과 함께 깨졌고 담겨있던 물이 바짓단과 바닥을 적셨다. 차가운 물이 발바닥 사이에 스며들었다. 뿐만 아니라 컵이 깨지면서 생긴 파편이 발목을 스치면서 상처도 생겼다. 그럼에도 얼어붙은 듯 서서 아무 것도 하지 못한 것은....
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시선을.
"....."
"....."
어둠 속에서 냉장고에서 흘러나온 불빛이 낯선 남자의 얼굴을 비추었다. 분명 처음 보는 얼굴이었음에도 누군지 단 번에 알아 챌 수 있었던 것은 어떤 이유가 있어서는 아니었다. 그냥... 정말 그냥 알아졌다. 그가 누나의 남편이라는 것을. 그러나 이것이 내가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 시선이 마주친 순간 머릿속이 텅 비어버리는 이유가 되지는 못한다.
색이 진한 검은 눈동자가 나를 탐색하고 있었다. 아주 약간의 움직임조차 없이 그 시선이 나를 파고들었다. 빛에 드러난 오른쪽 눈매는 날카로웠다. 언뜻 보아도 수려한 외모가 차갑게 느껴지는 것은 그 때문이다. 마치 핥듯이 뜯어보는 눈빛을 마주한 채 뭔가에 묶인 것처럼 나는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 이유는 알 수 없다. 그저 놀랐기 때문인가? 당황한 건가? ...아니. 이것은 긴장이었다. 심장이 조여들고 숨이 턱 막히는... 그리고 손끝이 저리는 이 감각은 분명 긴장 때문이었다.
감정이 읽히지 않는 무표정한 얼굴이 마치 그림 같았다. 아니 이 상황 자체가 그랬다. 그러나 곧 그의 느슨하게 다물려 있던 입술이 움직였다. 아주 작은 움직임으로 그림은 실제가 되었다. 멈춰졌던 시간이 다시 흘렀고 나는 휘청거렸다. 어떤 지독한 포박에서 이제 막 벗어난 사람처럼.
"아ㅡ!"
발바닥에서 느껴지는 아릿한 고통에 비명이 터졌다.
뒷걸음질을 치다 깨진 컵 조각을 밟아버린 것이다. 느닷없이 치고 올라오는 아픔에 다리에 힘이 풀렸다. 그대로 주저앉으려는데 허리에 팔이 감겼다.
"!"
"잠이 덜 깬 건지 아니면 기운이 없는 건지 모르겠군."
한 점 억양 없는 낮은 음성이 귓속에 달라붙었다. 미지근한 숨이 목덜리를 기어 오르는 것 같아 등골에 소름이 돋았다. 내가 미처 무슨 반응을 내보이기도 전에, 그가 내 겨드랑이에 손을 넣고 그대로 들어올렸다. 불안정한 자세에 본능적으로 떨어지지 않기 위해 그의 어깨를 두 손으로 꽉 쥐었다. 찰나의 순간 그의 시선이 어깨를 쥔 내 손에 닿았다 떨어졌다.
의자도 아닌 식탁 위에 나를 내려놓은 그가 갑작스레 내 발목을 붙잡아 들어올렸다. 거칠지는 않았지만 부드러운 것도 아니었다. 굳이 표현하자면 무심한 것에 가까웠다.
처음에는 그의 시선이 그 다음에는 손가락이 발바닥을 훑었다. 손가락이 닿자 나도 모르게 호흡을 멈췄다. 상처에 닿았을 땐 몸을 떨었다.
"박히진 않았어."
상처를 어루만지던 손이 어느 순간 짓누르는 것으로 바뀌었다. 아! 하고 작게 신음하자 피식 숨소리를 닮은 웃음이 돌아왔다.
"피는 나지만..."
닿을 듯 말 듯 그 미묘한 접촉을 유지한 채 손가락이 발목까지 올라왔다. 저려오는 손끝에 주먹을 말아 쥐었다.
그가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면서 다시금 시선이 얽혔다. 미묘하게 올라간 입술 끝이 위험해 보이는 건 왜 일까.
"걷기에 불편한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 데려다 줘야 하나?"
미소를 닮은 그 얼굴을 흘린 듯 응시하다 그 물음에 정신을 차렸다. 빠르게 눈을 깜빡이며 대답했다.
"아, 아뇨. 괜찮아요..."
우스울 정도로 떨리는 목소리였다. 나는 내게 닿아있는 그 손을 피해 발을 뒤로 빼며시선도 함께 내리 깔았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냉장고로 다가갔다.억지로 내리 깔았던 시선을 슬쩍 들어 올려 어둠 속에 잠긴 뒷모습을 쫓았다. 그가 냉장고 문을 열 고 꺼낸 것은 캔 맥주였다. 어쩐지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더 이상 내게 관심을 두지 않고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어헤치며 거실 쪽으로 걸어갔다. 문이 열리는 소리 그리고 문이 닫히는 소리가 연속적으로 들림과 동시에 다시 내 주위에 남은 건 납덩이처럼 무거운 고요와 어둠이었다. 나는 한 동안 그 속에서 움직이지 못했따. 이유를 알 수 없는 긴장이 풀리기까지 한참이 걸렸다.
긴장이 풀린 뒤엔 갈증이 일었다.
침 삼키는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다.
.....잠을 설쳤다.
새벽 내내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아 눈꺼풀을 감았다 뜨기만을 반복했다.
그러다 결국 커튼 사이로 빛이 새어 들어오는 것까지 보고 말았다. 괴로워하며 시계를 확인했다. 일어나야 할 시간이었지만 잠을 자지 못한 탓에 머리가 무거웠다. 누운 채 뒤척이고 뒤척이다 힘겹게 자리를 털고 일어났을 땐 평소보다 한 시간이나 늦은 뒤였다.
아침을 먹고 학원에 갔다. 무거운 머리는 아무것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고 손은 굳은 채 어떤 것을 그려도 원하는 결과물을 내지 못했다. 하루라는 시간을 그렇게 날렸다.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화실에서 나와 집으로 향했다. 중간에 약국에 들려 두통과 약과 연고 그리고 밴드를 샀다. 오늘 내내 걸을 때마다 발바닥의 성처에서 아릿한 통증이 느껴져 거슬렸고, 그럴 때마다 상처를 훑던 손가락의 감촉이 떠올라 알 수 없는 기분에 휩싸였다. 그 기분은 초조함과 흡사했다.
"여기 있습니다. 9천원이네요."
"아, 잠시만요."
멍하니 딴 생각에 빠져있다 약사의 말에 황급히 지갑을 꺼냈다.
"그런데 입술이 많이 트셨어요. 바셀린 드려볼까요?"
"아뇨, 괜찮습니다."
나는 원래가 입술이 잘 트는 편이었지만 입술에 뭔가를 바르는 게 너무 싫어서 그냥 내버려두다가 심하면 침이나 대충 발라버리고 마는 편이었다. 그러다보니 한가지 나쁜 버릇이 생겼는데, 그것은 뭔가에 골몰하다보면 저도 모르게 입술 겁질을 이빨로 물어뜯어버린다는 것이다. 어머니는 그런 내 나쁜 버릇을 굉장히 싫어하셨지만, 잘 고쳐지지가 않아서 아직도 입술에 자잘한 상처를 달고 살았다.
거스름돈을 받고 약이 든 봉투를 챙겨 밖으로 나갔다.
봄이라곤 하나 살갗을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은 아직 찼다. 약국 앞에 잠시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비 냄새가 나느 것 같다.
집에 거의 다다랐을 때쯤 내린 비에 약간 젖은 머리를 탈탈 털며 거실로 들어섰다. 집은 무서우리만치 적막하다. 납덩이처럼 무거운 어둠 속에 있는 거라곤 욕실에서 나는 물줄기 소리뿐이었다.
누나인가, 보통은 안방에 딸린 욕실에서 씻던데 웬일이지. 찝찝해서 얼른 씻고 싶엇는데 좀 기다려야 할 듯하다.
방에 가방을 내려놓고 약을 가지고 부엌으로 향했다. 별 생각 없이 정수기에서 물을 뜨다 불현듯 어젯밤 일이 떠올랐다. 하루 종일 이런 식이었다. 갑자기 떠올라서 순식간에 의식을 사로잡는.... 미지근한 물이 흘러넘쳐 손을 적셨을 때 다시 정신을 차였다. 젖은 손을 대충 옷에 문질러 닦고 서둘러 두통약을 삼켰다.
머리가 다시금 아프기 시작하는 것 같아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거실로 나왔다. 물소리가 끊긴 걸 보니 누나가 곧 나오려는 모양이다. 속옷과 갈아입을 옷을 챙기러 방으로 향하는데 욕실 문이 벌컥 열었다. 빌어먹을 타이밍이네. 속으로 혀를 차며 걸음을 멈추고 누나가 밖으로 나오길 기다렸다. 그러나 밖으로 나온 건 누나가 아니었다. 누나가 아니라.... 그렸다.
"!!"
"....."
시선이 얽혔다. 순간 말문이 막혔다. 심장이 꽉 죄이기 시작한다.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털며 그는 가늘게 뜬 눈으로 나를 위아래로 훑었다. 탐색은 오제처럼 노골적이었다. 그의 시선이 닿는 곳마다 저릿한 기분이 들었다. 단 몇분에 불과한 시간이 무척이나 길게 느껴졌다.
다물린 그의 묽은 입매가 어느 순간 유려한 곡선을 그리며 위로 올라갔다. 그 미소가 위험해 보이는 건 착각이 아니었다.
점점 숨 막히는 정적과 긴장을 견디기가 힘들어져, 어제처럼 시선을 내빼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억지로 쥐어짜낸 인사는 목소리만큼이나 어색했다. 그는 내 인사에 가벼운 웃음 소리로 대꾸했다. 무슨 의미의 웃음소리인지 알 수는 없다.
그가 열린 문 사이로 아무렇게나 수건을 내던지고 걸음을 옮겼다. 거리가 점점 좁혀져옴에 따라 저도 모르게 주먹을 쥐었다. 내 바로 앞까지 다가온 그가 걸음을 멈추더니 허리를 숙여 내 귓가에 대고 낮게 속삭였다.
"좀 조심하지 그래."
"!"
"수작 걸고 싶어지니까."
경고인지 아니면 질 낮은 농담인지 모를 그 한마디에 심장이 쿵쿵 뛰었다. 불안하게... 몹시 불안하게 뛰었다.
도망치듯 방에 들어왔다.
문을 닫자마자 바닥에 미끄러지듯 주저앉았다. 심장이 아프리만치 크게 뛰었고 머릿속은 엉망진창이었다.
내가 이상하다는 걸 안다. 그러나 왜 이러는 지는 알 수가 없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뭔가가 나를 집어삼키려 하고 있다. 그럼에도 나는 무방비하게 잠식당하고 있었다.
가슴부근을 움켜쥐며 숨을 몰아쉬었다. 젖은 머리카락에서 떨어져 내린 물방울이 먹덜미 타고 내려가던 그 모습이 뇌리에 박혀 떨어지질 않는다. 그가 스치고 지나가며 남긴 냄새가 지나치게 강렬했다. 인공적으로 만들어낸 냄새가 아니었다. 어딘지 모르게 서늘하고 어딘 모르게 끈적한 그 냄새는....
떠올리면 떠올릴수록 몸에 변화가 일어났다. 믿을 수가 없었다. 다리를 오므리며 머리를 쥐어 뜯었다.
"왜...!"
내가 미친 것 같았다.
평소보다 늦은 기상이었다. 잠을 설쳤기 때문이었다. 힘을 받아 뻐근한 하체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고 그 갑작스런 현상이 왜 일어났는지 알 수가 없어 혼란스러웠다. 그래서 잠을 설쳤다.
무거운 몸을 가누지 못해 휘청거리며 밖으로 나가자 부엌에서부터 익숙한 소리가 들려왔다. 아침마다 듣는 이 소리는 아주머니가 부지런히 부엌일을 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바로 옆에 붙어 있는 화장실에 들어가 적당히 세수를 한 뒤 부엌으로 향했다. 부엌에 들어서자 아줌마가 기분 좋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일어났어? 깨울까 어쩔까 하다 피곤한가 싶어 내버려뒀는데..."
그런데 아줌마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소리가 작아서는 아니었다. 오히려 아줌마의 목소리는 언제나처럼 조금 시끄럽다 싶을 정도로 컸다. 들리지 않는 건 받아들일 여유가 없기 때문이었다. 신경이 순간적으로 한 곳에 집중되어버려서... 아무도 없는 게 당연한 식탁 앞에 앉아있는 그에게로.
우뚝 멈춰 서서 신문을 보고 있는 그의 뒷모습을 멍청히 응시했다.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느른한 목소리가 나를 붙잡았다.
"앉아."
그가 나에게 말을 한 건지. 아니면 누나인줄 알고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 왜냐면 그느 신문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으니까.
"...아. 저는 속이 안 좋아서."
"앉아."
내 목소리를 들었음에도 행동도 어조도 변화가 없다. 즉, 등 뒤에 있는 사람이 나라는 걸 안다는 뜻이었다.
"....."
"앉아. 세 번째야."
높낮이가 전혀 없는 목소리는 묘하게 강압적이었다. 주춤거리다 결국 의자에 앉았다. 그와 나 사이에 오고가는 미묘한 부누이기를 감지한 아줌마는 눈치를 보다 내가 앉기가 무섭게 기다렸다는 듯 내 앞에 샐러드와 주스를 놓아주었다.
"잘 먹겠습니다."
습관처럼 인사를 하고 포크를 쥐었다. 그는 여전히 신문에서 눈을 떼지 않았고 그건 내게는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무거운 적막감 속에서 아침식사를 시작했다. 평소엔 이런저런 말을 늘어놓던 아줌마조차 오늘따라 조용했다. 식기 달그락 거리는 소리와 신문 넘기는 소리만이 전부인 가운데 나는 무슨 맛인지도 모르고 무작정 샐러드를 씹어 넘겼다. 그러던 중 누나가 나타났다.
"일어나셨어요. 사모님."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씹어 넘긴 양배추가 목구멍에 턱 하고 걸린 기분이었다.
누나는 아줌마의 인사를 깔끔하게 무시하며 내 맞은편에 앉아 '커피'하고 말했다. 그에 아줌마는 잠시만 기다리라며 다시 분주하게 몸을 움직이셨고 누나가 나를 쳐다보았다. 시선이 마주친 순간 저도 모르게 아래로 눈을 내리깔았다. 그럴 리가 없는데도 어제의 내 비정상적인 행동이 들킬까 두려웠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누나는 금세 내게서 관심을 거둬갔다. 아줌마가 놓아 준 커피를 스푼으로 휘휘 저으며 누나가 무감한 목소리로 물었다.
"언제 들어왔어요?"
질문의 방향은 내가 아니라 그였다. 누나의 등장에도 아무런 변화가 없던 그는 누나의 물음에 지독히도 무심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이틀 전에."
선의 없는 대답은 다소 귀찮아하는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다. 내가 이렇게 느끼는데 질문한 당사자가 아무렇지 않을 리 없다. 누나의 표정이 미세하게 일그러 졌다.
"왜 연락 안 했어요."
"우리가 그런 걸 주고받는 사이는 아니지 않나?"
"...남에게 들을 만한 사이도 아니죠."
누나의 그 대답에 비로소 그의 시선이 움직였다. 차가운 시선이 누나를 향했다. 정말 너무나도 차가웠다. 그래서 놀랐다. 어떻게 누나를 저렇게 쳐다볼 수 있지. 그건 사랑하는 사람을 보는 눈빛이 아니라 발에 채인 돌멩이를 보는 시선에 더 가까웠다. 그런데 정작 그 시선을 받은 누나는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차가운 시선을 던지는 그도. 그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는 누나도 이상했다.
"다른 뜻은 없어요. 그저..."
어딘지 모르게 변명조로 들리는 누나의 말을 중간에 자르고 그가 시선만큼이나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챙ㅡ
순간 들고 있던 포크를 놓쳤다. 누나의 시선이 느껴졌고. 그의 목소리는 신경을 파고들었다.
"만약 선을 넘는다면...."
"....."
"그 다음부턴 애써 봐줄 필요가 없으니까."
누굴 향한 건지, 무엇에 대한 건지. 그 선이란 게 무엇인지 모든 것이 불분명한 경고였다. 그럼에도 누나는 알아들은 것 같았다. 그러나 그 경고에 해당되는 것은 누나 뿐 만이 아니었다.
누나 뿐 만이... 아니다.
그는 그 말을 끝으로 신문을 접어 던지듯 식탁에 내려놓은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부엌에서 나간 뒤에도 무거운 정적은 이어졌다. 아줌마가 준 커피를 마시는 누나는 일견 아무런 타격도 받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그런 누나를 멍하니 바라보다 어느 순간 시선이 마주쳤다. 마주친 순간 일그러지는 누나의 표정을 보며 깨달았다.
누나는 아무런 타격을 받지 않은 것이 아니라는 걸. 누나는 그저 숨기고 있을 뿐이다. 자존심을 잃지 않기 위해.
늦게 일어난 만큼 시간이 빠듯했따. 십중팔구 지각할 판이었다. 그럼에도 서두르지 않았다. 이왕 늦을 바엔 그냥 오랜만에 산책하는 셈치고 걸어가자 싶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못했다.
"너는 한 번 말하면 못 알아듣는 건가?"
"...아뇨. 그게 아니라..."
"그럼 타. 세번 말하게는 하지 말고."
솔직히 타고 싶지 않았다. 아니. 그보다는 타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러나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거절하면 모양새가 더 이상할 것 같기도 하고...
망설이다 결국 뒷자석 문을 열고 그의 옆에 탔다. 기사는 내가 타는 것을 확인함과 동시에 차를 출발시켰고, 그는 창문을 반쯤 열곤 담배를 빼어 물었다.
"혹시 담배연기 싫어하나?"
보통은 남자를 상대로 물을 때 담배를 피냐고 묻지 않나."
"...아뇨."
"다행이군."
대답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가 물고 있던 담배필터에 불을 붙였다. 나는 연기를 빨아들이고 다시 내뱉는 그의 입술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남자치곤 붉고 선이 강한 입매사이로 하얀 연기가 흘러나와 허공에서 흩어졌다. 차안을 뒤덮은 희뿌연 연기와 그 연기를 음미하는 남자의 나른한 표정이 몽환적인 느낌을 자아냈다.
구김 하나 없이 빳빳한 정장. 깔끔하게 뒤로 넘긴 머리. 차가운 쇠붙이 느낌 그대로의 시계. 그리고 긴 손가락 사이에 끼워져 있는 담배. 그 모든 것이 내 시선을 붙잡았다. 문득 굳이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이 자리에 있다 해도 시선을 빼았기기는 마찬가지 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에게선 분명 사람을 끌어당기는 뭔가가 있었으니까. 그것을 매력이라고 불러야 할지 아니면 카리스마라고 불러야 할진 모르겠다. 다만 어둠 속에서의 그가 어쩔 수 없이 빠져들게 되고야마는 퇴폐적인 분위기가 있었다면 지금의 그는 반대로 가까이 다가가면 베일 것 처럼 날카로운 부누이기로 무장되어 있었다.
필터의 반 정도를 태웠을 때 쯤 그가 내게 물었다.
"이름이 뭐지?"
"네?"
순간 잘 못 들어서 되물으니 그가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
"또 두 번 말하게 하는 군. 이름이 뭐냐고 물었어."
누가가 내 얘기를 하지 않은 건가. 내 이름을 모른다는 건 누나가 얘기 하지 않았기 때문이겠지. 하긴 나 역시 마찬가지다. 아니 이름은 알고 있으니까 내가 더 나은 건가? 서로 아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니 생각해보면 어이가 없는 일이었다. 엄연히 매형과 처남 사이인데 말이다.
"아. 윤수우...입니다."
사실 처음엔 그가 왜 누나와 성이 다른지를 물을 거라 생각했다. 누나는 아직 우리 아버지의 성을 따르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나와는 성이 달랐다. 그러나 그는 내 예상과 달리 그 부분을 아무렇지도 않게 넘겨버렸다. 아예 신경조차 쓰지 않고 다른 질문으로 넘어갔다.
"나이는?"
"....스무 살입니다."
이번에는 반응이 있었다. 그가 조금 놀란 것 같은 표정으로 나를 돌아 본 것이다. 생각지 못한 부분에서 생각지 못한 반응을 보이는 것이 의아했다. 그가 눈을 가늘게 뜨고 내 얼굴을 빤히 응시하더니 이내 특유의 저으믕로 낮게 뇌까렸다.
"스무 살이라... 이건 또 예상외군."
"네?"
"어쩐지 교복을 안 입었다 생각했지."
그가 왜 놀란 건지 이제야 알았다. 그는 아마 내가 교복을 입고 다니는 정도의 학생인 줄 알았던 모양이다. 딱히 틀린 건 아니었다. 고등학생에서 벗어난 지 이제 딱 2개월 밖에 안 됐으니.
"올해 졸업했어요."
"아아... 그러고 보니 행선지를 묻지 않았군. 어디로 가면 되지?"
순간 다행이라고 생각한 것은 그가 내게 어는 대학에 다니느냐 묻지 않고 어디로 가야 되느냐고 물었다는 것이다.
내가 못한 것이니 대학에 떨어진 것을 창피해하진 않는다. 억울하지도 않다. 그건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그러나 내가 재수를 하고 있다고 말할 때 상대방의 시선은 대부분 둘로 나눠지곤 했다. 나를 패배자로 여기거나 혹은 동정하거나, 그예로 아버니는 전자에 해당했고 어머니는 후자에 해당했다. 그게 불합격이란 글자보다 더 나를 힘들게 했다.
"대치역에서 세워주시면 되요."
행선지는 보다 많은 것을 알려준다. 그가 눈치가 빠른 사람이라면 알았을 거다. 내가 가는 곳이 학교가 아닌 학원이라는 것을... 아니나 다를까 그의 한쪽 눈썹이 미세하게 찌푸려지는 것을 보니 역시 알아차린 모양이다.
다행인지 불행인 내게 더 이상의 질문은 돌아오지 않았고 차 안은 무거운 핌묵과 묘한 긴장감에 휩싸였다. 사실 나 역시 그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음에도 그처럼 물어볼 엄두는 나지 않아 그저 침묵했다.
때마침 그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차 안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끈 뒤 그가 전화를 받았다.
"무슨 일이야."
딱딱한 목소리는 몹시 사무적이었고 그 뒤로 이어지는 그의 말은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따. 애써 관심을 끄고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돌려지는 건. 시선분이다. 다른 감각은 모두 그에게로 쏠린 채였다. 언제부터인지 심장은 아프리만치 쿵쿵 뛰고 있었다. 빨리 차에서 내리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도망치고 싶은 기분이다. 차가 마치 좁은 감옥처럼 느껴졌다.
신경을 갉아먹는 불편한 시간은 그로부터 30분가량 계속 됐다. 드디어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는 안도의 한숨까지 다 나왔다.
가방을 챙겨 차에서 내리기 전 그에게 꾸벅 고개 숙여 인사했따.
"저. 그럼... 먼저 내릴게요."
내 인사를 받은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딱딱한 시선만을 내게 던졌을 뿐이다. 딱히 어떤 반응을 보여주길 바란 것은 아니었기에 속상하거나 하진 않았따. 오히려 그보다는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불안하게 뛰는 심장도 그리 재촉했다.
"태워다 부셔서 감사합니다. ....매형."
마지막 어렵사리 붙인 매형이란 호칭이 낯설었다. 뱉어놓고 나서야 후회했고 후회하는 내가 이상했다. 당연한 호칭에 왜 이토록 거부감이 드는 걸까.
혼란스런 속내를 감추지 못할까 두려워 재빨리 문손잡이를 잡았다. 그리고 힘을 줘 문을 열려는 찰나, 왼쪽 손목이 붙잡혔다. 채 무슨 일인지 파악하기도 전에 몸이 반대쪽으로 끌려갔다.
"아!!"
비명인지 신음인지 모를 소리가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나는 얼붙은 채 고개만 들고 나를 기습한 그를 올려다보았다. 나를 내려다보는 짙은 눈동자가 사나운 기색을 띄고 있음은 착각이 아니었다.
"왜. 왜 이러는..."
"좀 조심하라고 하긴 했지만 방법이 잘못 됐어."
"무슨..."
"경계는 입으로만 하고 나머지는 지나치게 무방비해. 어느 장단에 맞춰줘야 될지 햇갈린단 말이지."
"!!"
"홀리게 할 거면 마저 홀려 봐. 빠져 줄 테니까. 그게 아니면 확실히 발 빼고 도망치든가."
놀라 눈을 크게 떳다. 반즘 열린 내 입술은 무의미하게 달삭거릴 뿐 대답도 반박도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었따.
"어설프게 자극하지 않는 게 좋아. 나는 수틀리면 무슨 짓을 할지 모르거든."
그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위험해보였다. 독을 품은 뱀처럼. 그리고 그로 하여금 깨달았다. 그는 알고 있다. 내가 모두 알아들었다는 것을.
그가 고개를 숙여 천천히 내 귓가에 입술을 가져다대고 속삭였다.
"난 마음에 드는 건 박제해놓는 취미가 있어. 잘 알아둬."
웃음기 어린 목소리는 분명 독이었다. 치명적인 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