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농사로 꿀 빠는 헌터-138화 (138/139)

138. 희생

“조심해요!”

“젠장, 성가시게!”

전소민은 겨우 함정을 피하는 정인선을 보며 걱정을 지울 수가 없었다. 이제까지의 여유가 사라졌다는 건, 그만큼 사태가 급박하다는 것.

하지만, 여기는 일반 던전이 아니지 않은가.

“피해요!”

함정이 난무하고.

“바로 뚫고 가야 해!”

몬스터들이 불시에 튀어나왔다. 고블린 같은 조무래기가 아닌, 하이 오크, 블랙 리자드맨 같은 최소 A급의 몬스터들.

‘실수라도 하면 큰 사고가 날 텐데.’

하지만 그런 그녀의 걱정을 풀어주기라도 하듯, 정인선은 엄청난 무위로 길을 열었다. 함정은 마주하는 족족 파괴되었고 몬스터는 눈 깜짝할 사이 넝마가 되어 사방에 널브러졌다.

“이럴 수가···.”

“이 정도라니···.”

국가를 대표하는 헌터들이 혀를 내두를 정도. 정인선은 그런 감탄도 무시한 채 앞만 보고 달렸다.

“좀 더 빨리 가야 해.”

오히려 이를 악물고 앞만 보는 듯 보였다. 그 의지에 감화된 전소민은 옆에서 뒤떨어지지 않겠다는 듯 전력으로 가세했다.

그렇게 한참을 이동하니 막다른 길이 나왔다.

“여기야.”

텅 빈 벽처럼 보이는 공간을 본 정인선은 확신에 차서 말했다. 그리곤 검을 열어 횡으로 크게 그어 내렸다.

-서걱!

썰리는 소리와 함께 벽이 정확히 반으로 갈라졌다.

“쿵!”

양쪽으로 떨어져 내리는 문.

-화륵!

동시에 벽에 달린 모든 등불이 타오르며 내부를 환하게 비췄다. 원으로 된 공간의 내부는 이제와는 달리 넓고 천장도 높았다.

“저기!”

“검은 성배?”

노을이 손가락으로 중심부를 가리켰다. 검은색의 화려한 장식을 가진 성배가 놓여있었다. 성배에 위에서 검은 액체가 가느다란 줄기를 이뤄 흘러내렸다.

액체는 성배를 넘쳐 성배가 놓인 돌을 따라 흘러내려 바닥으로 스며들었다.

“저게 검은 성배.”

“엄청난 힘이 느껴지네요. 전설대로 정말 강해질 수 있을지도···.”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노을과 하오위의 말에 전소민도 고개를 끄덕였다. 딱히 감정 스킬을 사용했다던가 정보가 뜨는 건 아니었다.

다만, 감이 그렇게 말했다.

이 액체를 마시면 어쩌면 세계 최강이 꿈은 아니라고.

“정신 똑바로 차려. 저거 마시는 순간 끝이야. 다들 주변 돌아봐. 분명 숨어 있을 거야.”

‘끝.’

한 음절의 단어가 모두에게 경각심을 일으켰다. 전소민도 금세 정신을 차리고 기감을 세웠다. 아까 대치했던 존재의 기척을 찾기 위해.

-쿠르르.

벽이 미세하게 떨리며 소리가 울렸다. 전소민은 다가가 벽을 살폈다.

“이 벽이 이상해요!”

진동은 점점 심해지더니 벽이 점차 안으로 움직이는 느낌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벽은 마치 문처럼 반으로 갈라지며 열리기 시작했다.

“뭐지?”

기척을 느낀 전소민은 물론 모두가 무기를 들고 열리는 벽과 대치했다. 그런데 이상했다. 열리는 벽 너머뿐 아니라, 일행들이 들어온 쪽에서도 기척이 느껴졌다.

“뭐야?”

“몬스터인가?”

다수의 기척에 당황한 그들은 점차 가운데로 모여들었다. 검은 성배 주변을 둘러싼 그들은 앞뒤로 무기를 든 채 다가올 적을 기다렸다.

-척척.

앞뒤로 쏟아져 오는 검은 옷의 존재들.

“무경···?”

무장경찰기동부대.

중국 경찰 내 특수대라 할 수 있는 이들이 그들은 한 명씩 자리를 잡고 포위망을 형성했다. 총구가 모두 그들을 향하고 중간중간 헌터로 보이는 이들이 마력을 끌어 올리며 일행들에게 살기를 쏘아 보냈다.

“그 주석이라는 녀석, S급 헌터들을 너무 물로 보는 거 아니야?”

노을의 비아냥과 달리 전소민은 고개를 갸웃했다. 아까 주석은 이상한 힘에 사로잡힌 게 아니었던가.

‘그런 존재가 굳이 인간의 힘을 다시 빌린다고?’

게다가 정인선의 반응도 이상했다. 정인선은 상대가 먼저 검은 성배를 차지할까 걱정했다. 이런 사태는 정인선이 염려했던 사태가 아닐뿐더러 아까처럼 쉽게 다시 제압당할 게 뻔하다.

‘무슨 꿍꿍이를 숨긴 거지?’

그때 정인선이 어깨를 잡았다.

‘아···.’

미묘한 미소와 확신의 찬 눈빛. 순간 그녀의 얼굴에서 김서준의 모습이 보였다. 저런 얼굴을 한 김서준은 단 한 번도 실수나 실패한 적이 없었다.

‘모전자전이네.’

전소민은 내심 웃으며 그녀의 옆에 나란히 섰다. 그리곤 언제든 정인선의 지시를 따를 수 있도록 귀를 쫑끗 세웠다. 그 옆으로는 정현민이 고개를 끄덕이며 나란히 검을 세웠다.

“이제 어떻게 할 거지?”

무장 군인들 사이, 다시 멀쩡한 모습으로 주석이 나타났다. 주석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 상태에서 또 덤빌 건가?”

양손을 벌리며 말하는 주석. 그러자 노을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말했다.

“아까 그렇게 당하고 또 한다고? 이번엔 뭐가 달라졌나?”

“주석이라면 이렇게 멍청한 일을 만들지는 않았겠지. 역시 그 안은 다른 게 들어가 있는 게 확실한가 보군.”

하오위마저 한심하다는 듯 노을의 말을 거들었다.

“쯧.”

혀를 ‘쯧쯧’ 찬 주석은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모든 부대원이 총구를 자신에게 돌렸다. 헌터들 역시 검 끝을 자신의 목으로 가져갔다.

“당신 말고 저 미개한 녀석들은 내 의도조차 눈치 못 채는군.”

주석의 한심한 눈빛을 받은 둘이 흠칫했다.

“설마···?”

“이 사람들···. 인질인가?”

주석은 대답 대신 가증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보이는 인원은 대략 50명. 아마도 녀석의 손가락질 한 번이면 모두가 저 방아쇠를 당기겠지.

“자, 선택해. 그 성배를 내놓고 이 50명을 구할지. 아니면 성배를 선택하고 이들 모두를 죽일지.”

어려운 선택은 아니다.

성배를 주면 멸망을 가져온다는 포식자가 이곳에 나타난다. 훗날 김서준과 우리가 어찌어찌 막는다 해도 세상이 파멸에 이를 만큼 큰 피해를 보고, 수없이 많은 사람이 죽는다.

반면 저들은 겨우 50명. 그것도 처음부터 그들을 죽이러 온 50명이었다.

“우리가 그들을 위해 세상을 희생하겠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맞습니다.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하는 건 어쩔 수 없습니다.”

“...”

다른 사람들도 똑같이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순식간에 결론을 내놓으려는 순간.

“크크크. 그래그래. 그 정도는 하는가 보구나. 그럼 이건 어때?”

주석이 다시 한번 손을 움직였다. 동시에 모든 이들이 복면을 벗었다.

“어···?”

그 순간, 모두가 할 말을 잃었다.

“신이···?”

“여러분이 여기 왜?”

그들은 중국의 무경이 아니었다. 무경의 복장을 한 그들의 동료들. 동굴 밖에 있어야 할 동료들이었다.

“거하게 전투를 벌이고 잘 쉬고 있길래 내가 데려왔어. 어때?”

주석이 낄낄거렸다.

“이 개새끼가···!”

“이런 미친 새끼!”

“이, 이럴 수가···.”

“왜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하는 건 당연하다고 하지 않았나? 아 생명의 가치에 따라 다른 건가?”

비릿한 미소의 사내는 다시 한번 우리를 비웃는다. 어찌나 즐거운지 광대까지 올라갈 것 같은 입꼬리에 이제껏 참아왔던 분노가 점점 한계에 다다르는 기분.

“너희 인간들은 항상 이래. 어차피 다 자기중심적이고 욕심으로 그득하면서 항상 아닌 척. 아주 가증스러워 죽겠어. 그래서 말이야. 그 가증 속에서 그냥 다 뒤질 수 있게 준비했어. 괜찮지?”

그러나 쓰레기 같은 지껄임은 멈출 기색이 없었다.

‘방법이 없나? 바람의 화살로 한 번에 녀석의 미간을 꿰뚫어버리면, 바로 죽일 수 있어. 그럼 조종이 풀릴까?’

그러려면 관심을 돌려야 하는데. 이 상황에 무슨 수로 관심을 돌려야 할까.

전소민은 궁리를 이어갔지만, 상황을 타개할 방법이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도리어 점점 방법이 없다는 걸 느끼며 스스로에 대한 한탄만 늘어갈 뿐.

‘이럴 때 서준이가 있었다면 어떻게 했을까. 서준이라면 해결했을 텐데.’

“걱정하지 마.”

전소민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정인선이 낮게 말했다. 다시 한번 김서준과 같은 얼굴로 전소민을 다정하게 본 정인선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그, 그래 대를 위한 희생이야.”

“미안하다. 신이···.”

“죄송합니다. 여러분. 하지만 전···.”

“아니. 다들 조용히 하세요.”

겨우 이성의 끈을 잡고 동료들을 포기하려는 사람들의 입을 막고 정인선이 말했다.

“알겠다. 내주지. 가져가.”

“크크. 그래. 신농이라도 인간이라 이거지.”

정인선은 대답 대신 일행들을 밀어 길을 열었다. 주석은 만족스러운 웃음과 함께 성배로 향했다.

-뚝.

주석이 성배를 들자 천장에서 흘러내리던 액체가 멈췄다. 주석은 붉은 이채를 띈 채로 성배를 이리저리 둘러보며 말했다.

“주인님. 드디어 다시 뵐 수 있게 되었군요. 어서 이 가증스러운 세상을 무너뜨려 주십시오!”

주석은 세상에 대한 경멸 어린 말과 시선을 던진 후, 검은 성배를 들이켰다.

“크아아!!!”

괴성과 함께 몸에 강렬한 마기가 치솟았다.

-털썩.

동시에 조종당하던 사람들이 쓰러졌다.

“조종이 풀렸어요!”

“지금이라도 죽여야 합니다!”

“내가 하겠소!”

노을과 정현민이 소리쳤다. 그러자 하오위가 도끼를 들어 당장이라도 주석의 몸을 반으로 갈라버리려 했다.

“아니.”

두꺼운 팔뚝을 가녀린 팔이 너무나 가볍게 막아섰다.

“어차피 죽여도 저 현상을 막을 순 없어.”

정인선은 이제와는 다른 인자한 미소로 지었다. 전소민은 그 미소를 보는 순간 여기가 갱도가 아닌 마치 집처럼 포근하게 느껴졌다.

“마지막 갈 때는 서준이 얼굴을 보고 가려 했는데, 안 되겠네.”

“네?”

“두 사람. 우리 서준이 부족하지만 잘 챙겨줘. 거기 근육질 아저씨는 나라 잘 챙기고.”

“어, 어머님?”

“아주머니?”

“검신님?”

정인선은 너무나도 다정한 눈으로 그들을 바라봤다. 동시에 정인선의 몸이 점점 하얀 빛으로 물들었다.

“지금 무슨 일을 하시려는···.”

“안 돼요!”

전소민은 이게 무슨 상황인지 몰랐다. 하지만 그렇게 말해야 할 것 같았다. 왠지 정인선이 영영 세상을 떠나 다시는 못 볼 것 같은 기분이었기에. 마치 지금의 온기는 그녀가 우리 모두에게 주는 마지막 사랑을 불태우는 것 같았기에.

“소민이. 이리 와봐.”

전소민은 왈칵 쏟아지려는 눈물을 참으며 정인선에게 다가갔다.

“어머니, 안 돼요.”

전소민은 외모와는 달리 투박한 손을 잡고 말했다. 정인선은 대답 대신 눈웃음을 지었다. 그리곤 손가락에 낀 반지를 전소민에게 건넸다.

“그 반지, 꼭 서준이한테 전해줘. 할 수 있지?”

전소민은 목이 메어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다시 한번 미소를 지은 여인이 말했다.

“이건 비밀인데, 난 저 처자보다 소민이가 더 마음에 들거든? 가서 잘 해봐.

“어, 어머니. 가시면 안 돼요.”

“어머니라. 참 듣기 좋은 말이야. 아쉽네.”

전소민은 어디도 못 가게 그녀의 손을 꽉 잡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 정인선의 손이 투명해지더니 이내 자신의 손을 빠져나갔다.

“세상을 구하기 위해 다짐했고, 그걸 위해 모든 힘을 다 사용했어. 그래서 후회는 안 하는데. 그래도 조금 아쉽다. 우리 서준이랑 소민이 잘 사는 모습 보고 갔으면 좋았을 텐데.”

“보고 가시면 되잖아요! 분명 다른 방법이 있을 거예요.”

“아니. 이제 내 시간은 끝났어. 다음 세대의 신농이 마무리할 차례야. 그러니까 우리 서준이 꼭 잘 도와줘.”

“어머니!”

전소민이 소리치는 동시에 투명해진 정인선의 몸은 온통 하얀 빛으로 변했다. 빛은 여러 갈래로 나뉘어 하늘 위로 솟구치는 검은 기운을 잡고 눌렀다.

“크아아악!”

주석의 비명은 더욱 거세졌다. 갱도는 무너질 것처럼 흔들렸다. 그러나 전소민은 저도 모르게 자리에 주저앉아 울음을 터뜨렸다.

“나가요! 일단 나가야 해요!”

정현민은 그렇게 소리치며 전소민을 잡아끌었다. 동시에 주석이 놓쳐버린 검은 성배를 챙겨 밖으로 탈출을 시도했다.

“여기까지야.”

전소민과 모두의 보고를 들은 김서준은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덩그러니 남은 반지를 바라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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