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 눈물
박하 향이 가득한 온천 안에서 밤안개처럼 수증기가 낮게 깔려 안락한 풍경을 자아냈다. 아무도 없는 새벽의 온천은 금산마을의 아침과는 다른 방식으로 ‘힐링’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했다.
김서준은 가장 넓은 탕에 홀로 몸을 담갔다. 따뜻한 물이 마치 몸에 쌓인 피로를 서둘러 풀어주겠다는 듯 몸을 휘감았다. 그 감각의 몸을 맡기고 눈을 감았다.
“시원하네···.”
그 애매모호 하면서도 적절한 표현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는 좋은 감각. 푹신한 침대에도 비교할 만큼 편안한 감각이었다.
“역시 좋다움!”
“맞고-블. 일 끝나고 온천은 역시 최고인 고-블!”
“멍!!!”
옆에 있는 작은 탕에서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에 김서준은 눈을 떴다.
‘진짜 수영장이 따로 없네.’
아이들답게 온천 안에 유일한 냉탕에 몰려 들어간 녀석들은 물장구를 치며 즐겁게 놀고 있었다.
‘이게 애 키우는 기분인가.’
물론 아이들과는 다르긴 하다. 말도 잘 듣고 수완들도 좋으니까. 하지만 이럴 땐 정말 영락없는 아이들이다.
“애들아, 놀기 전에 부탁한 것 좀 해줘.”
“아!”
“알겠습니다움!”
“알겠고블!”
“멍!”
탕에서 빠져나온 녀석들은 곧장 김서준이 있는 탕으로 달려왔다. 그리곤 온천에서는 언제나처럼 슬라임의 모습이 된 고블이 김서준이 있는 탕으로 들어왔다.
“고-블!”
고블의 몸이 조금씩 파랗게 변하더니 마치 염료가 빠지듯 천천히 온천 전체로 파란색이 퍼져나갔다.
“모두 투하하라움!”
“움!”
뒤이어 리노의 지시에 따라 땅에서 솟아난 움들이 작은 나뭇잎을 들고 와 온천 위에 떨어뜨렸다.
-둥둥.
파란색의 작은 잎들이 물 위에 둥둥 뜨자 사비오 특유의 향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시원한 박하 향과 은은한 사비오 향이 어우러져 처음 맡아보는 상쾌한 냄새가 사방을 가득 채웠다.
“으음~”
“멍~”
“고-블~”
잠시 넋을 놓을 만큼 좋은 향에 취했다가 이내 다시 정신을 차린 노움은 작업을 마무리했다.
“고마워.”
김서준은 둘에게 인사하며 탕을 바라봤다. 사비오 차처럼 파란색과 청록색의 가운데 빛깔로 탕이 완전히 변모했다.
‘이정도면 충분하겠지.’
고블이 능력으로 흡수한 사비오의 진액과 노움이 가져온 싱싱한 사비오 잎을 잔뜩 넣었으니, 교감하기에는 충분하리라.
“다음은 리노 차례야.”
“멍!”
리노는 김서준의 머리맡으로 다가왔다. 그리곤 눈을 꾹 감고 무언가에 강렬히 집중했다.
[멍!]
리노의 울음소리가 머릿속에 울렸다. 그리고 동시에 묘한 감각이 몸 주변에 도는 게 느껴졌다.
‘이게 트레스가 말한 감각인가.’
자연의 선물로 만들어진 온천은 능력을 머금은 마력을 탕에 들어온 생명체에게 부여한다.
‘망치의 후예들은 이 점을 이용해서 다양한 능력을 얻고 건강을 챙기곤 했소. 이 방법을 응용해서 몸으로 사비오의 마력을 흡수해보시오!’
몸으로 사비오의 마나를 흡수하면서 사비오 특유의 마나 주파수에 민감해지도록 하게 하는 방식이었다.
‘리노의 교감은 이걸 촉진하는 거지.’
본래 리노의 교감은 생명체 간의 마나 주파수를 맞춰주는 역할. 하지만, 지금은 온천에 녹아든 사비오의 주파수와 김서준의 주파수를 맞춰 김서준이 사비오의 마나를 더 잘 느낄 수 있게 하는 역할이었다.
“됐어.”
그렇게 한번 마나 주파수가 연결되면 김서준은 그 기묘한 감각에 집중하여 감각을 익히는 방식이었다.
“멍!”
김서준의 말을 들은 리노가 눈을 뜨고 꼬리를 흔들었다. 연결된 감각이 사라질까 김서준은 움직이는 대신 눈으로 칭찬한 후 감각에 집중했다.
‘이 감각 그대로 내일 다시 사비오와 소통하는 거야. 내일이 안되면 그다음. 그래도 안 되면 그다음 날까지. 어떻게든 성공해야 해.’
스스로 마음을 다지며 김서준은 다시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귓가에 칭찬받아 기분이 좋아진 아이들이 노는 소리가 풀벌레 소리 너머로 들려왔다.
*****
헌터들의 힘은 대단하다. 초인적인 육체는 물론 불을 뿜거나, 모든 걸 얼리기도 하고, 하늘을 나는 것도 모자라 공간이동을 한다. 누군가는 검 하나만 들고 괴물을 모조리 베어내는가 하면, 맨손으로 엄두도 안 나는 괴물을 찢어발기는 헌터도 있다.
그러나, 그 모든 건 괴물이 상대일 때.
‘어차피 다 사람이지?’
총 앞에서는 모두 다 평범하게 죽기 마련이었다. 오만한 태도로 살 다 저격수의 소총을 맞고 허무하게 쓰러진 헌터가 한 둘이 아니었다.
‘그게 그들의 한계야.’
결국, 몬스터를 잡는 도구. 사냥개. 그게 그들의 수준이라고 생각했다.
중국의 주석인 자신에게는 다른 노예들과 다름없는 같은 부류라고 생각했다.
“이건 말도 안 돼!”
그래서 그는 절규했다. 자신과 함께 혼 특수부대가 전멸했다. 같이 왔던 랭커들도 모조리 죽었다.
단 한 명의 인간에게.
“넌 대체 뭐야!”
“나? 보시다시피 사람인데요?”
괴물 같은 여자는 태연한 모습으로 대답했다. 이 많은 인간이 죽었는데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저 많은 힘을 사용했는데 숨 하나 헐떡이지 않는다.
‘괴물···.’
그렇다.
“이런 괴물 같은 년! 어디서 저런 괴물이···.”
“괴물이라니. 독재는 물론, 정권을 지키기 위해 숱하게 사람을 죽였지. 그리고도 모자라 다른 나라 영토에 문화까지 눈독을 들여. 게다가 나라를 위해 충성한 여기 계신 헌터들과 그 가족까지 전부 죽이고 힘을 독차지하려던 네가 진짜 괴물 아냐?”
“개소리! 모든 건 나라를 위한 일이었다! 대중화인민공화국이 그에 걸맞은 위상을 지키기 위함이란 말이다! 저 머저리 같은 놈은 그 위상을 떨어뜨렸어! 당연히 받아야 할 대가였어!”
“국민이 죽는 것보다 국격이 중요하다고?”
“물론이다!”
“개소리. 네가 가진 힘의 근본이 국격이니까 그랬겠지. 그래놓고는 대를 위한 소의 희생은 당연하다고 지껄이고. 맞지?”
여자는 고개를 저었다.
‘검은 성배에서 만나는 새끼마다 이런 식으로 말하더라.’라고 중얼거리며.
“젠장!”
주석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무엇이 중요한지도 모르는 저런 년이 저런 힘을 가지게 된 걸까. 자신이 저런 힘이 있었다면 중화인민공화국이란 이름 아래 모든 인류가 행복한 삶을 영위 했을 텐데.
‘억울해. 억울해. 억울해. 억울해.’
‘제길. 제길. 제길. 제길.’
힘없는 자가 된 주석의 터질듯한 분노는 표출할 방법을 잃고 머리를 맴돌 뿐이었다. 가증스러운 매국노 하오위는 이런 상황에도 자신의 편을 들지 않았다. 중국의 편을 들지 않는다.
‘저런 새끼들만 왜 힘을···.’
[힘이 필요한 거지? 이제는 받아들이라니까. 내가 힘을 준다고.]
얼마 전부터 속삭이던 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매번 무시했던 환청. 주석은 그 환청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말했다.
‘필요해.’
“역시 너였구나.”
간혹 이런 세계가 있다. 검은 성배의 존재가 알려지지 않는 세계. 혹은 너무 평화로워 갈등이 유발되지 않는 세계. 그런 세계에서 검은 성배는 작동하지 못한다.
‘누군가는 검은 성배의 힘을 받아들여야 하니까.’
그런 일을 방지하기 위해 포식자를 위해 일하는 가신이 있었다.
‘탐욕의 사도. 세라짐.’
탐욕스러운 존재의 탐욕을 키우고 키워 파멸로 이끌고 검은 성배로 몰아넣는 최악의 사도.
‘엄백호라고 했나. 그 남자에게서 빠져나가 어디로 갔나 했더니 저놈한테 갔었군.’
주석의 등 위로 뻗어 나오는 거친 마기. 저건 세라짐이 몸을 차지할 때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마기는 점점 주석의 몸을 잠식했다.
“저게 어떻게 된 거죠? 주석은 평범한 인간이었을 텐데···.”
검은 마기로 온몸이 둘러싸인 주석을 보며 하오위가 말했다.
“간단하게 말하면 몸을 뺏긴 거야. 욕심에. 온다. 준비해.”
정인선의 말을 들은 일행들이 다시 자세를 취했다.
“크르르.”
일대의 공기가 말 그대로 차갑게 변한다. 숨을 헐떡이는 주석의 입에서 하얀 연기가 뿜어졌다. 마기로 뒤덮인 얼굴에서 붉은빛이 번뜩였다.
“...너···.”
검은 존재는 정인선을 바라봤다. 순간 그 싸늘한 시선에 모두가 흠칫했다. 정인선만이 그 눈을 제대로 바라보며 말했다.
“세라짐. 오랜만이야.”
“...”
세라짐이 무릎을 굽히자 정인선은 검 자루에 손을 가져갔다. 김서준에겐 시간이 더 필요했다.
‘억지로라도 검은 성배를 발동시킬 속셈이겠지. 그 전에 바로 죽인다.’
자루를 쥔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그때였다.
-스륵.
“이, 이런!”
정인선은 황급하게 검을 휘둘렀다. 검풍이 공간을 찢으며 날아갔다.
-콰직!
굉음이 울려 퍼졌다. 그러나 몸을 찢는 소리는 없었다.
“..이런 낭패를!”
당연히 덤벼 올 거로 생각한 게 오산이었다. 지난번 세계에서 세라짐은 자신에게 죽을 뻔했다.
‘그 자식들이라면 또 덤빌 줄 알았는데. 설마 그냥 도망칠 줄이야.’
후회해도 늦었다.
“사라졌어요!”
“어디로 간 거죠?”
당황하는 일행들에게 정인선은 말했다.
“갈 곳은 뻔하지. 가자.”
검은 성배. 녀석이 성배를 강제로 발동하기 전에 서둘러 막아야 했다.
*****
‘다르다.’
약 일주일. 매일 탕에 몸을 담그고 사비오를 느끼기 위해 교감한 효과가 나타난 걸까. 사비오 역시 내게 말을 걸기 위해 노력하는 게 느껴졌다.
‘잡아. 이 느낌을. 이 느낌을 확실하게 잡아야 해.’
마치 불안전한 라디오처럼, 무언가 연결되고 통로가 열리는 기분이 드는 순간이 있다. 그 순간을 잡고 유지하기 위해 김서준은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사비오의 효과로 청명했던 머리가 열이 오르고, 식은땀이 방울방울 맺힐 무렵. 손 하나가 김서준의 어깨를 턱 잡아챘다.
“서준, 그쯤 하지.”
트레스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젓는 게 보였다. 김서준은 그제야 집중이 분산되며 자신의 몸 상태를 알게 되었다.
“땀에 절어버렸네요.”
그리고 잠시 후 다리에 힘이 풀려 ‘털썩’ 주저앉았다.
“아무래도 주파수를 낚아채는 것만의 문제만은 아니었나 보군.”
트레스가 혀를 끌끌 찼다.
“마나 양도 문제였네요.”
“정확히는 자네가 운용할 수 있는 마나 양의 문제인 것 같소.”
이 감각은 마나를 모두 소진했을 때의 탈진 증상. 신농으로써 엄청난 힘을 가진 건 맞지만, 실제로 느끼고 운용하는 마나는 매우 적었다.
이건 그 마나를 모두 소진했을 때 나타나는 증상이었다.
‘물론 금방 회복이야 되겠지. 저장고에서 마나가 차는 건 금방이니까.’
몸 안에 주유소가 있는데, 정작 엔진은 장난감 차 수준이다 보니 일어나는 문제였다.
“소통을 위해 충분한 마나가 생기지 않으면 감이 생겨줘 교감은 쉽지 않겠어. 역시 그냥 안테나를 만들어서 주파수의 대역폭 자체를 넓히는 게 답이었나?”
김서준은 대답 대신 스스로 궁리를 생각해보았다. 모든 문제는 답이 있다는 신념으로 항상 문제를 해결해왔던 예전처럼.
그러나 쉬이 답이 나오지 않았다.
“일단 한 번 더 해볼게요.”
잠깐의 휴식으로 금세 마나를 채운 김서준이 다시 일어났다.
“일단 해보면서 그 안에 개선할 점이 있는지 고민해볼게요.”
“알겠소.”
김서준은 다시 사비오의 손을 가져갔다.
‘큭···.’
역시나 수신기가 약한 곳에서 전화하듯, 사비오가 보내는 신호가 잡힐 듯 말듯 잡히지 않았다.
‘일 점으로 마나를 모은다면 순간적으로 연결이 가능하지 않을까?’
그렇게 방법을 바꾸려는 차. 갑자기 몸 안에서 마나가 파도처럼 밀려왔다. 동시에 오감을 넘어 마나를 느끼는 육감이 생긴 것처럼 너무나 확연하게 사비오가 뿜어내는 주파수가 느껴졌다.
‘아니, 모두의 마나가 전부 느껴져.’
리노, 트레스, 엘린이 만들어둔 커넥션 링, 하물며 크리스마스트리와 주변 작물이 뿜는 미세한 마나까지.
마치 몸 주변을 마나의 선들이 감싼 듯한 기분이었다. 이 넘치는 힘. 열린 기감.
‘왜 갑자기 이런 일이 벌어진 거지? 어떤 단계를 넘은 건가?’
김서준이 기분 좋게 눈을 뜨며 말했다.
“성공이에요.”
그런데 트레스의 반응이 이상했다. 트레스는 아주 의아한 눈으로 김서준을 보며 말했다.
“근데 자네 왜 우는 건가?”
김서준은 그제야 자신이 울고 있다는 걸 눈치챘다.
“이게 왜···.”
김서준은 눈물을 훔쳤다. 하나 다시 눈에서 물이 내려오더니 이내 비 오듯 쏟아지기 시작했다.
“슬픈 건 아닌데, 왜 눈물이 나죠···?”
이상하게도 눈물은 한참을 멈추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