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농사로 꿀 빠는 헌터-136화 (136/139)

136. 새싹삼

“꼬끼오!!”

새벽을 깨우는 닭이 길게 운다. 하늘에서는 새가 지저귀는 소리가 들린다. 초록빛 풀밭과 촉촉한 흙길 위 낮게 깔리 안개는 묘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흐음.”

심호흡과 함께 폐부를 가득 채우는 상쾌한 공기. 어제의 고민과 미래에 대한 걱정, 바쁜 업무로 답답해진 몸이 조금은 풀리는 기분.

‘역시 좋아.’

귀농에서 가장 좋은 일이 있다면 매일 아침 금산마을에서 이렇게 훌륭한 아침을 맞이할 수 있다는 일이리라.

“멍멍.”

“하하.”

함께 걷는 리노도 김서준과 같은지 웃으며 대답했다. 리노를 쓰다듬은 김서준은 가볍게 제자리에서 뛰었다.

“멍!”

그 동작의 의미를 알아챈 리노고 자세를 낮추고 당장이라도 뛸 준비를 했다.

“가자!”

김서준은 소리치며 땅을 박찼다.

러닝머신 위를 달리는 것과 자연경관을 달리는 건 해본 사람이면 알 듯 완전히 다르다.

똑같이 다리를 움직이지만, 훨씬 더 가볍다.

똑같이 숨을 헐떡이지만, 지치는 대신 흥분하게 된다.

갈수록 지치기보단 점점 신나고 기분이 좋아진다.

‘바뀌는 경관이 눈에 들어와 도파민이 분비되어 좋아진다나 뭐라나.’

언젠가 읽은 과학 기사가 있었는데 사실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자신의 몸이 그렇게 느낀다는 것.

그래서 김서준은 전력으로 달렸다. 오늘도 최고의 하루를 시작하기 위해.

“멍멍!”

그렇게 한참을 달리니 저 멀리 꾸물거리는 신형들이 보였다. 리노가 그들을 보며 짖었다. 아니 정확히는 그 위를 날고 있는 작은 점을 보고 짖는다.

‘대단하네.’

엘린의 솜씨는 놀라웠다. 초록색 고깔모자 대신 쓴 빨간 교관 모자는 지난번과 같다. 그러나 복장은 기존의 귀여운 옷이 아닌 노움 전용 군복에 목에는 호루라기가 달린 목걸이가 걸려 있었다.

‘꼼꼼해. 엘린이 지구인이면 패션 디자이너 했어도 되겠어.’

잠시 디자이너가 된 엘린을 상상하던 김서준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곤 열심히 훈련에 열중하는 노움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척!

노움을 정확한 각의 경례로 답한 후 다시 훈련에 몰두했다. 아니 정확히는 훈련이 아니고 농사였다.

하지만,

“농사가 뭐 이래?”

“원래 그냥 땅 갈고 씨 좀 뿌리면 되는 거 아니었어?”

“거기! 조용히 하고 집중하라 움!!!”

노움의 방식은 훈련이라 부르는 게 맞았다. 잡담도 금지. 농담도 금지. 집중은 물론 동작 하나하나 정성을 다해 집중하기를 요구했다.

‘전시 상황이니 달라야 한다고 했나.’

워낙 외모와는 달리 지휘관 같은 면이 있는 노움이 아니던가. 김서준은 노움이 자유롭게 하도록 뒀는데 이번에는 좀 과하긴 했다. 사실 농사는 노동요도 부를 정도로 대화와 휴식, 재미 요소가 필요한 활동인데.

“멍! 멍!”

“하긴. 그러네.”

리노의 말대로다. 오히려 좋아졌으니까.

저렇게 농사를 짓자 새로운 효과가 나타났으니 말이다.

[농사에 집중하여 훈련 효과가 오릅니다.]

[농사를 마무리할 경우 농사에 참여한 농부들은 추가로 능력치 5%가 상승합니다.]

다만,

“거기! 손이 쉬다니 일이 부족한 거냐움!”

우노의 빡센 훈련과 더불어 노움까지 저러니 숨 쉴 틈 없이 빡빡한 헌터들은 고생이지만 말이다.

“그럼 우리도 할 일을 해볼까.”

김서준은 그대로 밭을 가로질러 걸었다. 그린벨트로 가로등 하나 없던 산골에 작은 한옥 한 채가 보였다.

‘잘 만들었네.’

기와집을 베이스로 한 양옥인 가온 길이나 뫼와는 다른, 초가집 베이스의 한옥. 민속촌에나 있을 법한 집은 우노, 도스, 트레스가 김서준의 도안을 받아 급조한 식당이자 음식 연구소였다.

“멍멍.”

맛있는 냄새에 리노가 꼬리를 격하게 좌우로 흔들었다. 누룽지의 고소함과 쌀의 부드러운 향이 함께 나는 걸 보니 가마솥 밥을 지으신 듯했다.

“가보자. 조금은 리노 줄 게 있을지도 몰라.”

“멍!!!”

리노가 그 말에 짧은 다리를 서둘러 움직였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누군가 리노를 들어 올렸다.

“우리 애기 왔구나!”

“좋은 아침입니다. 명인님.”

“오셨습니까.”

리노는 품에 안아 든 남자. 딱딱한 인상에 속은 부드러운 한식 명인, 엄민호였다.

“아침부터 부지런하시네요.”

“이사님만 하겠습니까? 마침 잘 오셨습니다. 아침 식사 준비 중이었는데 함께 드시죠.”

김서준은 맛있는 초대에 흔쾌히 응했다.

삼을 심은 지 4주 정도. 이제 막 위로는 줄기와 잎이 자라고 삼이 아주 작게 형성될 무렵. 그 무렵의 삼은 아삭하고 삼의 향도 적당해서 먹기 좋은 상태가 된다.

‘그게 바로 새싹 삼이지.’

물론 영양분은 다 큰 삼에 비해는 턱없이 부족하다. 하지만 신농의 재능을 부여받은 새싹 삼이지 않은가. 당연히 특별한 효능이 있다.

[3개 이상 섭취 시 경험치 + 10%]

이건 중요한 효과였다. 모두가 헌터의 성지, 농사, 우노의 훈련으로 강해지는 중이지 않던가. 이 모든 게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경험치. 그 경험치가 더 많이 오르니 다들 성적 속도도 빨라지는 효과를 가졌다.

‘하지만, 이것도 가공하면 좋지 않을까?’

사과가 단순한 미용효과뿐이었지만, 술로 빚으면 다른 능력을 갖추는 것처럼. 아니 새싹 삼뿐 아니라 모든 재료가 가능하지 않을까.

그래서 초청한 게 엄민호 셰프와 그의 사단이었다.

“삼이 참 자랐어. 과연 자네의 농산물다워.”

엄민호 셰프는 새싹 삼 무침을 내왔다.

간단한 무침이지만, 이 양념 배합에 장인의 솜씨가 녹아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고, 그걸 아는 혀에는 침이 고였다.

“멍!”

“우리 애기 건 여깄다.”

엄민호는 연하게 무친 쌈을 리노에게 줬다. 리노는 마치 미트루트 샐러드를 먹듯 단번에 접시에 코를 박았다.

“감사합니다.”

김서준은 당장 젓가락을 들고 싶은 마음을 참고 새싹 삼을 바라봤다.

[3개 이상 섭취 시 경험치 + 15%]

좋다.

‘효과 자체가 강화되는 경우도 있는 거구나.’

5%면 두 번 먹으면, 하루 치 효과를 얻어내는 샘. 이건 분명 좋았다.

“대단한데요?”

“그건 전에 말한 효과를 말하는 건가?”

“네. 대단해요.”

“맛은 더 대단할 테니 먹어보게.”

앞으로 헌터들의 식단 한쪽에는 새싹 삼 무침을 놓는 거로 정한 후, 젓가락을 들었다.

-아삭.

딱 한입에 깨닫는다. 명인의 말은 절대 허세가 아니라는 걸.

“맛있네요.”

저로 그 말이 튀어나왔다. 아삭한 삼의 식감과 함께 느껴지는 건 양념장의 자극적인 맛과 향이었다. 그 뒤로 은은하게 느껴지는 삼의 향은 이 음식이 쌈이라는 걸 증명하는 정도.

‘딱 좋아. 애들도 먹겠어.’

약재 특유의 거부감이 드는 향은 전혀 없었다. 그뿐일까. 양념장은 배합이 아주 잘 되어 감칠맛은 물론 적당히 매콤하고 짜고 달아서 계속 젓가락을 유혹하는 느낌이었다.

“진짜 맛있어요.”

“다행이군요. 사실 새싹 삼을 생이 아닌 요리로 쓰는 건 처음이었거든요.”

“역시 명인님은 다르네요.”

“이정도는 그 녀석들도 할 수 있었을 겁니다.”

그렇게 말하는 명인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걸린다.

‘참 대단하신 분이야.’

사실, 음식 연구는 가온 길의 셰프들도 시작했다. 처음에는 두 팀이 함께할 줄 알았다.

‘그런데 의외였지. 각자 따로 연구를 진행하다니.’

그건 서로가 동등한 위치에 올라섰다는 걸 인정하는 행위. 가온 길의 셰프들이 감격에 빠진 건 물론, 모두에게 꽤 놀라운 반향을 가져다주었다.

“녀석들은 잘 하고 있습니까?”

“하하. 네. 명인님에게 지지 않겠다고 밤낮으로 공부 중입니다.”

“젊음이 좋군요. 저는 해만 지면 잠이 쏟아지는데 말이죠.”

“한창 정정하시면서, 농담이 심하시네요.”

“농담인지 아닌지는 30년 후에 직접 느껴보시지요. 물론 그러려면 이번 사태를 잘 넘겨야겠지만요.”

엄민호 셰프는 껄껄거리며 웃었다. 가벼운 농담 속에 희망과 기대, 부탁, 그리고 간절함이 전해졌다.

“음···. 다 맛있네요.”

신농의 작물 본연의 맛을 최대로 끌어낸 것도 모자라 극대화한 맛있는 찬들은 뭐 하나 빼놓을 게 없었다.

김서준은 기분 좋은 포만감을 느끼며 말했다.

“30년 후에도 이거랑 같은 거로 부탁드립니다.”

****

산속 깊은 곳에 있는 땅굴. 아마 전쟁 통에 사용된 거로 보이는 지하갱도는 컴컴했다.

“여기서 느껴지네.”

정인선의 말에 하오위가 끄덕였다.

“그럼 들어갈까요?”

“다 들어갈 필요는 없지. 오히려 방해만 될 테니까. 소민이랑, 노을이, 당신하고. 현민이라고 했나?”

“네! 정현민입니다.”

정현민은 우렁찬 소리로 대답했다. 정현민은 기합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무려 태초의 헌터님이었다니!’

세계에 처음 게이트가 열렸을 즈음. 모두가 혼란에 빠졌던 그때. 한국에서 나타난 헌터 두 사람이 나타났다.

길 검을 뺀 여검사와 화염을 다루는 남자.

두 사람은 마치 홍길동처럼 세계 곳곳에 나타나 몬스터를 제압하고 한국의 위상을 떨쳤다. 그리고 어느 날 세상에 더 많은 헌터가 나타났을 때 즈음, 그들은 모습을 감췄다.

‘아직도 검신(劍神)과 염제(炎帝)라는 별칭으로 랭킹 1위와 2위와 올라가 게시지.’

많은 사람의 존경하는, 특히 세계를 구하는 영웅이 되고 싶었던 정현민의 롤모델이었던 게 바로 검신 정인선이었다.

‘어쩐지 김서준 씨. 범상치 않다고 했더니 이런 비밀이 있을 줄이야.’

이제야 이해가 됐다.

이렇게 위대한 분의 자녀인데 어찌 비범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더군다나 그런 분과 함께 할 수 있다니 영광까지 주시다니. 진짜 감사합니다.’

정현민은 김서준에게 진심으로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기합 좀 빼고 그럼 갈까?”

“네. 어머님!”

노을이 대답하며 정인선의 옆에 찰싹 달라붙었다. 그러자 전소민의 눈썹이 꿈틀한다.

“하하···.”

정현민은 저도 모르게 지어지는 쓴웃음을 급히 감췄다. 그리고 다시 지금의 기회를 준 김서준에 대한 감사를 되새긴 후, 전소민에게 말했다.

“저희도 가죠.”

전원 S급 헌터로 구성된 파티는 거침없이 갱도를 헤치고 나갔다. 몬스터든 함정이든 그들을 막을 건 무엇도 없었다.

‘그래도 단연 대단한 건 역시 검신님이시네.’

정현민은 쉴새없이 눈으로 그녀의 검을 훔쳐보았다. 검신의 검은 유려하고 화려하지만, 그 안에 군더더기가 없었다. 검을 쓰는 이로서는 새로운 경지.

‘보는 것만으로도 큰 공부야.’

주기적으로 달려드는 몬스터는 방금 본 수업을 실천해보는 교보재로 딱 맞았다.

“근데 생각보다 별 게 없네요? 검은 성배가 있는 곳이라서 엄청 위험할 줄 알았는데.”

노을이 검을 다시 집어넣으며 말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허황한 전설이라지만, 세계 최고의 명약이라 불리던 성배가 아니던가.

“그런 성배를 둔 곳 치고는 몬스터 말고는 아무것도 없네요. 함정도 별거 없고. A급들이 와도 충분히 해결하겠는데요?”

“그러게요. 이정도면 밖에 있는 일행들을 데려왔어도 되었겠어요.”

정현민이 노을의 말에 덧붙였다. 그러자 정인선이 고개를 저었다.

“이 던전의 핵심은 검은 성배를 지키는 게 아니니까.”

“성배를 지키는 게 아니라고요?”

노을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자 전소민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하긴, 분쟁을 일으키는 장치라고 했죠. 성배 자체를 아무도 범접할 수 없게 지키면 분쟁이 일어나지 않겠네요.”

“그렇지. 그리고 또 하나.”

전소민의 말에 동의하며 정인선이 눈빛으로 앞을 가리켰다.

“저런 녀석들이 여기까지 오지 못했겠지.”

그 순간 모두의 시선이 그 눈빛을 따라 움직였다.

-사악.

정현민에 시선이 닿은 그곳에서 어둠이 마치 장막처럼 벗겨졌다. 마도구를 띄워둔 희미한 불빛이 장막 속에 숨어있던 무언가를 비췄다. 그 순간 정현민이 소리쳤다.

“피해요!”

외침과 동시에 거대한 총소리가 갱도를 울리고 총구가 번쩍였다.

-탕! 탕! 탕! 탕!

너무 가깝다. 왼손에 찬 쉴드를 작동시켜 손을 들어 올려보지만, 이미 늦었다. 설마 여기서 총알을 맞이할 줄이야. 안일했다.

‘이렇게 허무하게 죽는 건가?’

찰나의 순간, 그 불안한 대사가 머리를 스쳤다.

그러나,

“헉!”

매섭게 날아들던 총알은 바로 눈앞에서 멈춰섰다.

“어머니?”

“검신님?”

정인선이 만든 반투명한 역장이 비 오듯 쏟아지는 총알을 막아냈다. 정인선은 모두를 보고 말했다.

“하오위라고 했나. 네가 말한 사람이 저 사람인가 보네.”

하오위는 눈을 부릅뜨고 총구 사이에 선 남자를 바라봤다.

“주석···.”

“탐욕에 미친 인간처럼 생겼네.”

정인선은 비웃으며 손을 휘저었다. 그 순간 멈춰있던 총알이 다시 뒤를 돌아 날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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