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농사로 꿀 빠는 헌터-135화 (135/139)

135. 훈련

우거진 풀숲으로 가득한 빈 땅. 그 뒤로 침엽수가 잔뜩 자란 산세가 든든한 자태를 뽐낸다.

“어떤가? 충분하겠나?”

홍성필의 물음에 김서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충분해요.”

너비는 충분하다. 이정도 규모라면 농지로 개간했을 때, 모여든 헌터들을 모두 수용할 정도는 되었다.

‘땅 질도 좋아.’

이 구역은 그린벨트. 사람 손을 타지 않아 정체 모를 잡초들이 엉켜 있고 이리저리 나무가 빼곡하게 자라 있다. 그건 그만큼 이 땅의 영양이 넘친다는 소리. 농사를 짓기에도 딱 좋은 땅이었다.

“약속드린 대로 농지로만 쓰고 다시 돌려드리겠습니다.”

“알겠네. 단, 생태가 망가지지 않을 정도로만 부탁해. 그린벨트로 지킬 가치가 사라지지 않게.”

당연하다. 세계수인 아리아가 두 눈을 부릅뜨고 감시하는데, 마구잡이로 개간할 리가 없다. 애초에 그럴 이유도 없고.

“물론입니다.”

고민도 없이 흔쾌히 대답하자 홍성필이 물었다.

“그런데 진짜 이 사태 괜찮은 건가? 자네 덕에 사람들은 별일 아닌 것처럼 살고 있지만, 사실 이렇게 흐지부지 넘어갈 이야기는 아니지 않나? 무려 지구 멸망인데.”

홍성필이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마치 허철영이 처음 보였던 그런 얼굴. 정말 나라를 생각하는 정치인들은 저런 표정을 짓는 걸까.

김서준은 그렇게 생각하며 대답했다.

“이대로만 된다면, 계획대로만 된다면 문제없을 겁니다. 믿고 맡겨주세요. 주민분들도 안정시켜주시고, 정치권도 부탁드리고요.”

“믿기러 한 시점에서 이미 그렇게 하고 있어. 다만, 정말로 뭔가 잘못된 게 있다면 꼭 이야기하게. 모든 힘을 써서 도와줄 테니.”

“감사합니다.”

“와, 군대도 아니고.”

“이런 훈련 오랜만이네.”

“군장은 헌터가 돼도 무겁냐.”

홍성필과 헤어지고 얼마 후, 저 멀리서 뛰어오는 헌터 무리가 보였다. 그 가장 앞에는 빨간 모자에 군복을 입은 우노가 달리고 있었다.

‘대단하네.’

엘린이 만들어 준 교관용 훈련복. 언제 또 군대 드라마는 본 건지, 엘린은 옷과 함께 우노에게 그 지식을 전달했고 우노는 스펀지처럼 흡수해서 바로 행동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잡담하지 말고 얼른 뛰어! 이제 다 왔다!”

“넵.”

“목소리가 작다!”

“넵!!!”

우렁찬 소리와 함께 헌터들은 발을 굴러 뛰어왔다. 다들 잊은 군대 트라우마를 떠올리는 듯했지만, 그래도 난다긴다하는 헌터들답게 50km가량의 행군에도 여전히 힘이 넘쳤다.

“어이, 서준!”

“오셨습니까.”

마침내 김서준을 발견한 우노가 손을 흔들었다. 김서준은 역시 반갑게 우노를 맞이했다. 우노는 단번에 날아올라 김서준의 옆에 착지했다. 그리곤 주변을 둘러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땅이군. 이런 땅이면 밀을 심어서 맥주를 빚으면 딱 좋겠군.”

“이번 사태가 지나면 그렇게 하시죠. 여기보다 더 좋은 땅을 준비할 테니까요.”

“클클. 부탁하네. 이제 사과 와인과 사과 사이다는 충분히 만들었으니 말일세. 칼바도스(사과로 만드는 브랜디)는 우리 취향이 아니라서 말이야.”

“네. 알겠습니다.”

대답을 들은 우노는 웃으며 옆쪽 부지를 바라봤다. 김서준이 선정한 농지는 평평하지만, 잡초가 무성하다. 반명 옆에 있는 땅은 잡초는 적지만 밤에 보면 괴기스러울 정도로 크고 구불구불한 나무가 우거진 숲이었다.

“한 이 정면 되려나.”

숲을 보며 적당히 견적을 잡는 우노. 김서준은 걱정하며 물었다.

“근데 정말 괜찮겠어요? 굳이 텐트를 치고 잘 필요는 없잖아요?”

햇빛조차 잘 듣지 않는 우거진 숲 아래, 습습한 땅. 돌과 뿌리가 들어나 울퉁불퉁한 음지까지. 텐트 치고 야영 훈련하기에는 딱 맞다 만, 사실 그런 훈련은 ‘전혀’ 필요하지 않았다.

‘한 번의 전면전으로 일망타진. 이게 우리의 계획이니까.’

하지만,

“야전에서의 경험은 중요하오! 전쟁이라는 게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지 않소? 걱정하지 마시오. 클클.”

우노는 미소를 지으며 김서준을 만류했다. 그리고 비릿한 미소는 뒤이어 오는 헌터들에게 향했다.

“뛰어! 뛰어!”

“하나! 둘!”

“하나! 둘!”

최현석의 구령에 맞춰 헌터들. 그들을 바라보는 우노의 눈빛을 봤다면 모두 온 길을 돌아갔을지도···.

“덕분에 숙소는 따로 안 해도 되겠네요.”

“걱정하지 마시오. 씻을 때는 기동해서 온천에 다녀올 테니 그때만 좀 부탁하오.”

“알겠습니다.”

김서준의 답을 들은 우노는 헌터들을 보며 소리쳤다.

“자, 도착한 자리에 엎드려서 바로 팔굽혀펴기 50회 들어간다! 실시!”

“...실시.”

“목소리 봐라! 100회! 몇 회?”

“100회!!”

“실시!”

“실시!!!”

김서준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

금산마을을 대표하는 상징물은 누가 뭐래도 크리스마스트리다. 하늘 높이 뻗은 소나무와 그 줄기를 타고 이어지는 계단, 오르기만 해도 느껴지는 자연의 정취와 마을을 한눈에 보는 전망대까지.

누구나 금산마을에 오면 가장 먼저 들르는 게 당연한 장소였다.

그런데, 그 아성을 넘보는 식물이 나타났다.

“와, 진짜 예쁘다.”

“색 봐. 색이 엄청 묘해.”

“주변에 오면 마음이 차분해지는 향이 난다더니···. 흠. 뭔가 기분 좋은 향이야.”

최근 관광객들의 관심을 한눈에 받는 사비오였다.

열매를 맺은 후 복 성장을 시작한 사비오는 급속도로 성장하기 시작한 사비오는 잭과 콩나무의 콩나무처럼 하루가 다르게 자라고 있었다.

‘괜히 현자들이 보금자리로 썼던 게 아니네.’

“오늘도 많이 자랐네.”

김서준과 함께 온 아리아가 사비오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열매처럼 묘한 푸른색 줄기를 가진 사비오는 마치 반응이라도 하듯 바람에 줄기를 떨었다.

“그럼 오늘도 바로 시작해볼까?”

정인선, 엄마는 하오위 일행의 건을 해결하고, 함께 검은 성배를 찾아 돌아오는 일을 맡았다. 이곳으로 가져오기로 했다.

그리고 김서준의 신농으로서 힘을 가꾸는 일은 아리아가 대신하기로 했다.

‘그냥 힘을 잘 쓸 수 있게 스킬 화해줄 수 있다면 좋았을 텐데.’

그랬다면 편했겠지만, 세계수의 힘을 다루는 신농은 그런 식으로 스킬을 얻어서는 안 된다는 게 정인선과 아리아의 지론이었다.

“신농 자신이 자연의 마나와 교감하고 가장 자신에 걸맞은 힘을 얻어야 해. 그래야 자연이 품은 마나를 모두 사용해서 제대로 능력을 사용할 수 있어.”

두 사람의 말을 따라 김서준은 어쩔 수 없이 다시 훈련에 매진했다. 사비오와의 교감도 그중에 하나였다.

사비오와 아쥴이 바이올렛 호퍼를 막았을 때와 같은 힘을 내준다면, 블루 페퍼와 함께 최고의 대군 무기로 사용할 수 있을 터였다.

“지난번에 했었던 그 감각을 다시 떠올려 봐.”

바이올렛 호퍼 사건 날. 사비오는 분명 김서준의 명령을 받겠다고 했다. 그리고는 그 엄청난 습격을 막아냈다.

하지만, 그 날 이후, 사비오는 물론 아쥴 한 포기도 김서준의 명령에 대답한 적은 없었다.

“사비오는 분명 서준을 인정했어. 분명 다시 할 수 있을 거야.”

아리아의 말을 떠올리며 김서준은 조심스레 눈을 감았다. 살짝 말랑하면서도 단단하고 거칠기보단 촉촉하고 부드러운 줄기의 촉감이 느껴졌다.

‘대답해. 사비오.’

머릿속으로 말해본다. 그러나 아무런 대답도 들리지 않는다. 사람 없는 방에 노크하듯, 김서준의 부름도 이어진다.

사비오의 촉감이 더 강해지고 발아래 느껴지는 땅의 느낌, 피부로 느껴지는 짙은 생명력을 머금은 공기, 사비오가 흘리는 기분 좋은 향이 오감을 가득 채운다.

‘사비오.’

기분 좋은 감각 속 김서준의 머릿속 외침은 공허하게 울려 퍼진다. 아이러니한 기분. 교감보다는 명상에 가까운 느낌이랄까.

김서준은 천천히 눈을 떴다.

“후···.”

심호흡하자 머릿속이 상쾌했다. 훈련에 성과만 있었다면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겠지.

“실패?”

쓴웃음을 머금은 얼굴을 본 아리아가 물었다. 고개를 끄덕이자 아리아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럴 리가 없는데···. 서준이 거짓말할 리도 없고.”

사비오는 한번 교감한 상대와는 지속적으로 교감한다. 하물며 신농에게는 한번 종속 관계가 되면 충심을 가지고 따른다고 한다.

그런데, 지금의 사비오는 마치 아무런 일도 없다는 태도.

“서준이 뭔가 달라졌나? 아니면 사비오가 달라진 건가?”

“내가 달라진 건 없지. 나야 똑같고. 사비오는 좀 많이 커졌지만 여전한 거 같은데···.”

줄기는 두꺼워졌고 많아졌으며 규모는 훨씬 커졌지만, 여전히 사비오 그 모습 그대로지 않던가. 그때와 달라진 게 있다면···.

“...어? 있잖아. 달라진 게.”

“응? 달라진 게 있어?”

“그때는 그냥 사비오가 아니었어.”

사비오의 위에 거대한 안테나를 설치했다. 사비오가 뿜는 특유한 마나 주파수를 극대화 시키기 위해.

‘바이올렛 호퍼들이 좋아하는 그 주파수를 뿜기 위해 그랬었지. 설마 그 안테나 덕분인가?’

사비오가 김서준과 연결되기 위한 마나 주파수가 극대화된 덕에 연결되었다. 그러나 안테나를 제거한 지금은 소통이 안 된다면?

“어떻게 생각해?”

김서준의 가설을 들은 아리아가 고개를 갸웃했다.

“음······.”

아리아는 심각한 얼굴로 고민했다. 턱에 손을 괴고 이리저리 귀여운 모습으로 머리를 갸웃거리던 아리아가 마침내 고개를 끄덕이고 대답했다.

“근데 마나 주파수가 뭐야?”

“아······.”

“말이 되는군. 그럴 수 있겠소.”

마나 공학은 역시 공학자에게 물어야 했다. 김서준의 가설을 들은 트레스의 의견은 ‘일리가 있다.’ 였다.

“텔레파시와 같은 마법은 전부 마나 주파수를 활용하는 거니까. 충분히 말이 되는군.”

“그럼 다시 안테나를 씌워야 할까요? 그건 좀 힘들 거 같은데.”

사비오는 하루가 멀다고 자라고 있었다. 안테나를 매일 새로 설치할 수도 없고, 이건 문제가 있었다.

“서준, 반대로 하는 건 어떻겠소?”

“반대요?”

“상대가 신호를 약하게 보낸다면, 우리 안테나를 크게 키우는 거지.”

신호가 약하다면 좀 더 민감하게 감지할 수 있는 장치를 사용하자는 논리. 트레스다운 합리적인 방식이었다.

“좋네요. 바로 만들 수 있겠어요?”

“아니. 그건 좀 어렵겠소.”

“네?”

“아무리 서준이 튼튼하다지만, 그만한 크기의 안테나를 달 수는 없지 않겠소?”

“하지만 그래서는···.”

“장치가 아닌 본인의 능력을 키워보는 거요. 클클.”

트레스는 그렇게 말하며 ‘클클’ 웃었다.

****

검은 복면에 방탄조끼, 라이플로 무장한 사내들은 건물을 둘러쌌다. 입구는 물론 건물 어디로든 아무도 나올 수 없게 조치가 완료됐다.

‘놓쳐서는 안 돼.’

주석의 이름으로 직접 내려진 작전 명령. 사상 초유의 작전이 실패 직전이었다. 어찌 된 일인지, 타겟이 행방불명되거나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이번에는 안 놓친다.’

이번에는 완벽했다. 사전에 정보 확보도 확실했고, 쥐도 새도 모르게 건물을 봉쇄했으니 말이다.

“작전 시작.”

무전기에 낮게 말한 지휘관은 직접 선봉에서 부대원을 이끌고 건물로 들어갔다. 훈련받은 요원들답게 기도비닉(企圖秘匿)을 유지하면서도 빠르게 목표한 층까지 올라갔다.

-휙.

손가락을 움직이자 부대원들이 빠르게 복도를 가로질러 문 하나에 총구를 겨눈다.

[403호]

하오위의 동생이 사는 집이 확실했다.

‘하오위의 동생은 생포해야 해.’

지휘관은 손을 까딱였다. 그 순간 해머를 든 요원이 천천히 다가왔다. 그리곤 단번에 문고리를 내려쳤다.

-쾅!

큰소리와 함께 고철 덩어리가 되어 버린 문고리. 그 문고리를 단번에 뽑아버리고 문을 열어 재꼈다.

“공안이다! 움직이지 마!”

소리치며 들어간 집안. 잔뜩 겁에 질린 여자와 아이들이 깜짝 놀라 소리를 지르고 벌벌 떠는 게 보였다.

“무릎 꿇고 손들어!”

요원들은 경계하면서도 빠르게 집안 곳곳을 뒤적인다.

“자, 봤지?”

그 순간, 어디선가 목소리가 울렸다. 요원들은 깜짝 놀라 주변을 두리번거렸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지금 이런 상황이야. 어떻게 할 래? 내 말을 믿을래? 아니면 쟤들이랑 같이 갈래?”

목소리가 다시 한번 물었다. 그러자 지휘관이 소리쳤다.

“헌터다! 쏴!”

그 순간 일제히 사방으로 총격이 가해졌다. 투명화를 가진 헌터들이 간혹 존재했다. 그런 이들을 제압하기 위해 탐지를 사용하기도 하지만, 지금 생포 대상은 오직 하오위의 가족뿐.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꺅!”

“살려주세요!”

비명 위로 총격이 울리고 사방에서 파편이 튀는 공간 안, 한 부분이 일그러졌다.

“대책 없는 놈들이네. 이놈들.”

일그러진 공간에서 나타난 여자. 총알은 무엇에 막힌 듯 여자의 눈앞에 멈춰섰다.

“진짜 나쁜 놈들이구나. 여기서 다 처리하고 싶지만···.”

여자는 자신의 몸을 바라봤다. 마치 빛이 깜빡이듯 여자의 몸이 투명해졌다 다시 원래로 돌아왔다.

“시간이 없어서. 운이 좋은 줄 알아. 착하게 살고.”

그렇게 말한 여자들은 뒤를 돌아 하오위의 가족들에게 말했다.

“가자.”

그리고 다시 한번 공간이 일그러지며 여자와 하오위 일가가 사라졌다. 그 순간 지휘관은 머릿속에서 당장 도망쳐야 하는 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걸로 마지막이었지?”

하오위와 김서준의 약속. 그들의 일가를 전부 개성으로 데려와 정착시켜주는 일. 정착이야 그들과 김서준의 동료들이 알아서 해줄 일이고, 데려오는 일은 이로써 끝이었다.

‘이걸로 서준이에 좀 도움이 됐으려나.’

꽤 힘이 많이 드는 작업이었다. 꼭 그랬으면 했다.

“네, 맞아요. 어머님. 고생하셨어요.”

정인선의 마음을 아는 듯 다정한 목소리와 함께 따뜻한 차를 들고 여자가 다가왔다. 허리춤에 근사한 장도를 찬 여자는 웃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고마워. 우리 노을인 진짜 참하구나.”

“하하. 과찬이세요. 어머님.”

차를 한잔 들이키자 노을이 말했다.

“아까 쉬는 사이 하오 위씨가 오셨어요. 준비는 끝났다고 언제든 출발하셔도 된대요.”

“그래?”

정인선은 차를 내려놓고 웃으며 말했다.

“그럼 바로 가자 고 하자. 검은 성배를 찾으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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