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 애정
“차원의 입구를 부수고 세상에 혼란을 가져오는 장치라...”
정인선의 말을 들은 김서준은 혀를 내둘렀다.
헌터의 시대는 다시 말하면 힘이 곧 돈이자 권력인 무인의 시대지 않은가. 그런 시대에 엄청난 힘을 준다는 전설은 절대 가볍지 않다.
‘아니 모두가 눈독 들이는 게 당연하지.’
검은 성배는 바로 이 점을 이용한 함정이었다.
처음에는 정말로 힘을 준다. 관련된 일화도 만들어진다. 결국, 검은 성배는 정말로 차원의 보물이자 세계의 전설이 된다.
‘모두를 파멸로 이끌 전설이 되는 거지.’
힘에 눈이 먼 이들이 전설을 따라 검은 성배를 쥐기 위해 싸우다 자멸하게 만드는 방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세상에는 경우의 수가 너무나도 많다.
‘이렇게 허술한 장치는 오히려 허무하게 실패할 수도 있지.’
예를 들면 압도적 강자의 등장 따위로 말이다. 그리고 포식자는 그 점까지 예상했다는 듯 두 번째 장치를 심어 놓았다.
‘일정 수준 이상의 강자가 손에 넣었을 때, 폭발하는 거지.’
세기를 거쳐 모아온 마나와 최강자가 몸에 가진 마나를 이용한 마나 폭발. 이로 인해 세계를 지키는 최후의 보루라 부를 수 있는 최강자의 죽음과 차원의 입구를 부수는 두 가지 효과를 모두 거둘 수 있을 터였다.
‘역시 호락호락한 존재가 아니야.’
다행히도 전대의 신농이자 엄마인 정인선은 다른 세계의 멸망 속에서 이 과정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엄마가 있어서 속지 않았어.’
몰랐다면 김서준은 검은 성배를 현재 헌터들이 강해지는 장치로 삼았을 터. 꼼짝없이 함정에 넘어갈 뻔했다.
“검은 성배는 미세한 마나 농도를 따라 차원의 입구에 장착하게 되어 있어. 이걸 이용해서 차원의 입구를 막고 검은 성배는 폐기할게.”
정인선을 그렇게 말하고 북한으로 떠났다. 검은 성배 덕에 차원의 입구를 찾아 헤맬 필요가 없었다.
의도가 드러난 함정이 오히려 시간 낭비를 줄여준 셈이었다.
““저분은 어떻게 저런 걸 전부 알고 계시는 겁니까?”
정인선이 떠난 후, 라오친이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물었다. 하오위 역시 넋이 나간 얼굴이었다.
“말씀드렸잖아요. 최강이자 최초의 헌터 시라고.”
“저분도 그렇고. 김서준 씨도 그렇고. 알려진 것과 달리 어쩌면 세계 최강의 헌터 강국은 한국인지도 모르겠군요.”
하오위가 혀를 내두르며 대답했다. 김서준은 피식 웃으며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럼 우리도 우리 일을 해보죠. 세상의 멸망을 막아야 하니까요. 일단 라오친 임에게 부탁드릴 게 있습니다.”
“말씀하시죠.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힘 닫는 데까지 돕겠습니다.”
“그런 거창한 일은 아닙니다. 아주 간단한 일입니다.”
그랬다. 라오친을 찾아 부탁할 건 아주 간단하고도 쉬운 일. 매번 라오친이 해오던 가벼운 일이었다.
“예언하나 해주세요. 세상이 곧 멸망한다고.”
가벼운 예언 하나면 충분했다.
*****
“엘린, 잠시 쉬고 하는 게 어떻겠소?”
도스가 엘린을 보며 말했다.
새하얀 피부는 어딘가 탁해졌다. 바다와도 같던 파란 눈동자 아래로는 검은 골이 생겼다. 찰랑거리며 흔들리던 금발마저 떡 지고 엉켜 있었다.
‘엘프답게 저 상황에도 아름답지만, 참 꼴이 말이 아니야.’
누가 봐도 엘린은 휴식이 필요했다. 그러나 엘린은 단호하게 말했다.
“아니요! 조금만 더 할게요. 필요하면 먼저 쉬세요.”
“그러다 몸 상하오.”
“그럴 리가요. 이렇게 포션이 잔뜩 있는 데요.”
엘린의 말대로 그녀의 책상에는 미트루트 포션이 잔뜩 놓여있었다. 밑에는 그간의 흔적을 보여주듯 빈 병도 줄지어 늘어져 있었다.
“....”
그게 더 걱정스러웠다. 아무리 미트루트 포션이 성능이 뛰어나다지만, 저렇게 남용해도 괜찮은지는 장담할 수 없었다.
‘저렇게 사용한 적이 없으니까. 애초에 만들 때 저렇게 남용할 상황을 고려해서 만들지 않았잖아?’
그건 자신과 함께 포션을 만든 엘린이 더 잘 알 터.
“이러다 흑룡이 오기 전에 엘린이 먼저 죽겠소.”
“걱정하지 마세요. 나름대로 적당히 쉬면서 하고 있으니까요.”
도스가 결국 엘린의 고집에 못 이겨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엘린의 연구실로 익숙한 신형의 남자가 들어왔다.
“서준, 왔소?”
“안녕하세요.”
김서준은 반갑게 도스와 인사하며 고개를 돌렸다. 안경을 쓴 엘린이 책상을 바라보며 입으로만 인사하는 모습.
“여전히 바쁘네요.”
“서준 씨 때문이죠. 종자 물량을 감당하려면 쉴 시간이 없어요.”
그럴 리가.
종자에 저주를 걸어 엄청난 성장을 만드는 일은 마법학을 배운 엘린만이 가능한 게 맞았다. 하지만 양산하는 건 좀 달랐다.
‘성장에서 재배하고 씨를 배포하면 되니까.’
김서준이나 박보현의 급속성장을 이용해서 성장시킨 후, 씨앗을 채취하는 게 훨씬 빨랐다.
‘그리고 금호 길드 소속의 헌터들이 이미 하고 있지.’
엘린이 하는 일은 종자를 개량하거나 새로운 종자에 저주를 걸어주는 연구. 물량은 엘린과 큰 상관이 없었다.
그런데도 엘린은 잠도 줄여가며 혹사하고 있었다.
‘이유는 알겠지만, 저러다 몸 상해서는 안 되지.’
김서준이 손뼉을 치며 말했다.
“자, 신농으로써 명령입니다. 지금부터 이 공방은 하루 동안 휴식입니다!”
도스는 나오자마자 양조장으로 향했다. 드워프에게 최고의 휴식은 역시나 술이었다. 반면 엘린은···.
-까득.
뭐가 그리 초조한지 드라마를 보면서 손톱을 물어뜯고 있었다.
‘눈이 공허하네. 완전 정신이 딴 데 팔려있어.’
휴식을 주려고 했는데 휴식이 아니라 고문을 당하는 모습이랄까. 다른 대안이 필요했다. 고민 끝에 김서준은 머릿속으로 말했다.
[리노, 반달이. 지금 당장 집으로 와!]
그리고 엘린에게 말했다.
“우리 오랜만에 거기 좀 가죠.”
엘린은 퀭한 눈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꺄!!!”
김서준은 리노가 엘린을 태우게 하고 자신은 반달이를 타고 뒤를 따랐다.
“너무!!! 빨라요!!! 리노!!!”
엄청난 속도로 위아래 좌우 쉴 새 없이 움직이는 리노는 엘린의 목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달렸다.
“잘하고 있네. 우리 리노.”
리노의 속도는 가히 바람처럼 빠르다. 점프력은 마음먹고 땅을 박찬다면 어지간한 건물 옥상까지는 단번에 올라설 정도.
‘간이 놀이기구나 다름없지.’
살면서 놀이기구는커녕 미끄럼틀 한 번 경험할 일 없는 엘프지 않던가. 작정하고 날뛰는 리노는 그 어떤 롤러코스터보다 긴장감 넘치는 어트랙션이 따로 없을 게 분명했다.
‘일전부터 엘린이 리노를 탈 때마다 살짝 떨기도 했고.’
예상은 그대로 적중했는지, 엘린은 리노를 꼭 안은 채 마음껏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스릴 덕에 아드레날린하고 도파민이 잔뜩 나올 테지. 저러면 스트레스가 좀 풀릴 거야.’
게다가, 저렇게 목이 터져라, 비명을 지르고 있지 않은가. 저것 역시 이제껏 묵은 긴장과 스트레스를 한결 가볍게 해주리라. 마치 노래방에서 목이 쉴 때까지 고음을 지르듯이 말이다.
“서준 씨!!!”
엘린이 마치 어린아이처럼 김서준을 불렀다.
“네! 엘린 님! 화이팅이요!”
김서준이 웃으며 말하자 엘린이 눈을 흘겼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더 크게 날뛰는 리노 덕에 엘린은 한 키 더 높은 고음으로 비명을 질러야 했다.
금호 농장이 있는 곳과는 다른 금수산의 또 다른 높은 봉우리 정상에 도착해서야 엘린의 비명도 끝이 났다.
하도 비명을 질러 지친 엘린은 풀 위에 대자로 뻗어 버렸다. 김서준에게 눈을 흘긴 엘린은 말없이 그대로 눈을 감아버렸다.
김서준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멋진 경치가 들어왔다. 하염없이 경치를 보며 땀을 훔치는 시원한 바람을 느끼고 있으니 김서준 역시 마음이 편해지는 기분이었다.
“구오오.”
“멍!”
다시 귀여운 댕댕이로 돌아온 리노가 반달이와 아웅 거리며 뛰어노는 소리가 들렸다. 그 밑으로는 거대한 마법진이 보였다. 엘린이 그린 커넥션 링의 마법진이었다.
‘덕분에 마을 안에서는 누구에게나 편하게 연락할 수 있게 되었지.’
김서준은 처음 엘린을 본 그때를 떠올리며 잠시 추억에 젖어 있었다. 그러다 문득 품에 푹신한 질감이 느껴졌다.
“멍!”
반달이와 노는 걸 마친 리노가 무릎 위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김서준은 그 귀여운 몸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저렇게 귀여운 데. 진짜 신기하다니까.’
에인션트 울프에 피를 이어받은 개라는 게 여전히 믿기 지가 않았다.
“여기 오랜만이네요. 그러고 보니 마법진 그린 후에는 한 번도 안 왔던 거 같아요.”
“일어났어요?”
엘린이 몸을 일으켰다. 그리곤 저 멀리 경치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때도 그렇고 참 경치가 좋네요. 공기도 바람도 좋고요.”
김서준도 엘린의 시선을 따라 다시 저 멀리 경치를 바라봤다. 금산마을 너머 다른 곳의 풍경이 함께 눈에 들어왔다.
“그쵸? 가끔 이렇게 새로운 공기 좀 쐬어주세요. 분명 연구에 더 활력을 넣어줄 겁니다.”
“그래서 그렇게 리노에게 시킨 거예요? 공기를 몸 안에 잔뜩 넣게 해주려고? 바람이 너무 쌔서 날아갈 뻔했는데.”
“하하···.”
엘린의 뾰족한 말투가 비수처럼 날아든다.
‘너무 심했나.’
멋쩍은 미소로 대답을 대신하자 엘린이 방긋 웃고는 말했다.
“농담이에요. 오늘 고마워요. 덕분에 완전히 머리가 상쾌해진 기분이에요. 수백 년 만에 처음으로 소리도 원 없이 잔뜩 지르고. 스트레스가 다 풀렸어요.”
내심 한숨을 쉬며 김서준은 말했다.
“제 마음이 전해진 거 같아서 다행이네요. 자주 이렇게 휴식해주세요. 일도 중요하지만, 엘린이 다치면 안 되잖아요.”
엘린이 다시 한번 방긋 웃고는 경치를 바라봤다.
“서준 씨. 저 지구가 마음에 들어요. 못 보던 식물이 잔뜩 있는 것도 좋고. 세계수님과 주변에 있는 초목들은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요.”
“드라마라는 문화도 재밌고 여기서 입는 옷들도 마음에 들어요. 맨날 의심과 경계의 대상이었던 인간들이 제게 ‘좋아요’를 누르고 사랑한다는 댓글 남긴 거 보는 것도 재밌고요.”
김서준은 경청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리노도, 노움도, 서준 씨도. 금산마을도 다 좋아요. 어쩌면 라이너스 대륙보다도 더 내 집 같을 때가 있어요.”
옅은 미소가 다시 아름다운 엘프의 얼굴에 피어오른다. 푸른 눈은 자신의 눈에 담긴 세상을 향해 애정을 듬뿍 담은 시선을 던졌다.
그리고 하얀 피부에 돋보이는 입술이 진심을 가득 담아 말했다.
“그래서 이 세계를 꼭 지키고 싶어요.”
김서준은 다시 한번 수차례 했던 다짐과 함께 엘린의 얼굴을 마음에 새겼다.
*****
“또 무슨 기자회견을 하려나.”
청와대 춘추관 브리핑 룸에 모인 기자들은 오늘은 또 어떤 대목이 터질까 기대하며 대화했다. 이유는 하나.
“이번 발표도 김서준하고 관련이 있다고 하던데?”
“그러니까. 또 김서준이야.”
바이올렛 호퍼 때도, 북한 토벌 때도, 얼마 전 토벌 사건 때도 그랬다.
청와대는 김서준과 관련된 발표를 할 때마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드는 화제 거리를 발표했고, 이번에도 김서준과 관련이 있다는 말에 기자들의 기대감은 최고치에 올라 있었다.
“온다!”
“사진!”
대변인이 입장하자 기자들의 이목이 집중됐다. 사방에서 카메라 셔터 소리가 울렸다. 그런데 들썩이던 기자 회견 장이 한 층 더 달아올랐다.
“대통령...?”
예정에 없던 허철영 대통령이 직접 브리핑 룸에 온 것이다. 게다가 그 옆에 있는 노인.
“라, 라오친...?”
“라오친이 언제 한국에 입국한거야?”
“대통령하고 라오친이라고? 거기에 김서준이 엮여 있어?”
“이건 특종이야!”
화들짝 놀란 기자들은 부랴부랴 생중계를 켜고 방송사에 연락하기 시작했다. 미리 서둔 기사들은 모두 지워졌다. 이건 어설픈 추측으로는 예상할 수 없는 사안이었다.
“안녕하십니까. 대통령 허철영입니다.”
모두의 기대가 부푼 가운데, 대통령은 말했다.
“여러분, 이제 곧 세상은 멸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