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농사로 꿀 빠는 헌터-129화 (129/139)

129. 술

술.

망치의 후예들에게 신이 주신 수많은 선물 중 가장 감사한 선물로 여겨지는 산물. 그러나 그중에서도 가장 으뜸이 있으니.

‘대자연의 기쁨’이라 불리는 술이었다.

‘세계수 아래 열린 작물로 만든 술. 대자연의 기쁨 말이지.’

사실, 전설로만 내려오는 이야기가 정말 실재할지는 알 수 없었다.

하나, 그게 중요할까.

이미 망치로는 정점에 이르고, 평화의 시대를 이룩한 우노에게 새로운 두근거림을 준다는 점에서 여행을 떠날 가치는 충분했다.

“혼자 가려고? 술은 같이 마셔야 제맛이지 않아?”

“재밌는 걸 혼자 하려고 하다니, 과연 우노답게 욕심이 많네.”

평생을 투덕거리며 지내왔지만, 그 누구보다 자신의 등을 맡길 수 있는 친구이자 형제들. 그 고마운 녀석들은 자신의 새로운 모험을 비웃는 대신 동행을 선택했다.

하지만, 위대한 영웅의 여정에 역경이 없을 소냐.

‘우여곡절이 많았지.’

잘못된 소문에 속아 수없이 많은 던전을 돈 건 기본.

세계수인 줄 알고 갔는데 알고 보니 잠들어 있던 엔트의 제왕을 찾았던 일.

심지어는 드래곤 레어에 목숨 걸고 들어갔다가 단서는 못 찾고 목만 날아갈 뻔하기도 했다.

‘하지만 가장 최악은 그날이었지.’

순진해 보이는 앳된 외모의 인간. 그 인간에게 속아 모든 돈을 털리고 거리에 나앉았던 그날이었다. 겨우 스킬로 집은 지었지만, 돈이 없어 배를 굶주려야 했던 그 날.

“신의 물방울. 진짜 맛은 어떨까?”

“여태 마셨던 술과는 완전 다르겠지?”

“전설에 따르면 마시는 순간 그 술이 만들어진 세계를 여행하는 기분이라던데.”

“마음의 모든 부정한 감정을 씻어내는 치유의 물방울이라고 적어둔 서적도 있었고.”

삼 형제는 꿈을 곱씹으면 굶주림을 견디다 결국, 십보(十步) 전진을 위한 일보 후퇴라고 위안하며 마을로 돌아가려던 그때였다.

“제가 도와드릴게요.”

우연히 만난 여인의 도움으로 그들은 재기했다. 그녀는 금전적 지원을 넘어 모험가로서 돈을 벌 방법을 알려줬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여기러 오는 단서를 줬지.’

그런데 그랬던 그녀가 설마 은인이자 세계수를 지키는 신농, 김서준의 어머니였을 줄이야.

“과연 세상의 우연은 대단하군. 그렇지 않나. 트레스?”

“그걸 우연이라고 생각하는 네 생각이 놀랍다.”

트레스는 혀를 끌끌 찼다. 그리곤 두 은인만을 위한 양조장 투어를 이어갔다.

“이 통에서 나는 소리. 엄청 좋은데요? 크기도 대단하고. 이건 뭐예요?”

정인선이 물었다. 시끄럽기보단 고요한 마음을 가라앉히는 옅은 소리를 내며 미세하게 진동하는 거대한 통.

트레스는 미소를 지었다.

“역시 보는 눈이 있으시군. 직접 만든 특제 그라인더요.”

“그라인더?”

“사과를 부수는 파쇄기라는 거죠. 안에서 사과를 적당히 토막 내고 필요 없는 건 분해해내는 겁니다.”

“아 그럼 이 소리가 파쇄하는 소리라는 거예요? 근데 그거치곤 너무 소리가 좋은데. 백색소음처럼 귓가에 은은하게 울리는 게.”

“클클. 그건 특제 칼날 덕분이오. 자이언트 멘티스의 날카로운 앞다리를 이용해 만든 칼날을 마공학으로 설계한 모터를 이용해서 돌리는 방식이오. 덕분에 소음이 아닌 이렇게 기분 좋은 소리가 나는 거요!”

‘트레스는 역시 저 때가 가장 행복해 보이네.’

남에게 자신의 발명품에 관해 설명하는 시간. 위대한 공학자가 자신의 작품을 설명하는 건 당연히 즐거운 일이겠지만, 트레스는 그 이상으로 행복한 얼굴이었다.

‘아마도 자신의 실력에 대한 자부심과 공학에 대한 사랑 때문이겠지.’

어차피 한번 다 들은 이야기였지만, 김서준은 그런 트레스의 성향을 알고 있었기에 고개를 끄덕이며 적극적으로 반응했다.

“역시, 벨리르 대륙 최고의 공학자답네요.”

엄마 역시 그 성향을 눈치챘을까. 누구보다 뛰어난 리액션으로 트레스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근데 과육이랑 불순물은 어떻게 나눠요?”

“클클. 그것도 간단하오. 마나 농도의 차이를 이용하는 것이오!”

아니나 다를까.

트레스의 목소리는 전례 없는 격양된 목소리였다.

“...씁쓸한 듯 술맛은 나는 거 같지만, 거부감은 전혀 없어요. 알코올 특유의 역한 향도 거의 안 나고. 대신 달큰하고 상큼한 사과 향이 가득한 게 사과밭에 들어온 기분이에요.”

-꿀꺽.

“으흠. 거기다 이 적당한 탄산. 새콤달콤한 맛을 한층 더 높여주는 데다, 술맛을 한층 더 상쾌하고 시원하게 만들어주네요. 이거 진짜 대단한데요? 앞으로 그냥 맥주는 못 마실 거 같아.”

사과 맥주를 들이켠 엄마는 살짝 양 볼을 붉힌 채 함박웃음을 지었다. 그러자 삼 형제 역시 파안대소를 터뜨렸다.

“클클, 모자가 술맛은 제대로 아는군. 역시 피는 못 속인다니까.”

“신농의 어머니여, 걱정하지 마시오. 술은 잔뜩 있으니까! 게다가 신농이 재배한 사과로 만든 만큼 모두 무료요! 형제들이여. 안 그런가?”

“우노, 그런 당연한 이야기는 할 필요가 없어. 클클.”

이러다 술판이라도 벌어질 기세. 그러나 오늘의 방문 목적은 이 맛 좋은 술을 감상하고 얼마나 양조장이 대단한지를 자랑하기 위한 게 아니지 않던가.

‘아쉽지만, 할 일은 해야지.’

-꿀꺽, 꿀꺽, 꿀꺽.

잔에 담긴 맥주는 단번에 들이킨 김서준이 말했다.

“근데 정말 신기하네요. 효과가 다르다니.”

‘신농의 재능’ 스킬로 사과 역시 특별한 효과를 얻었다. 사과의 효과는 피부가 맑아지는 미용 관련 효과였다.

그런데, 술로 만들었을 때는 효과가 달랐다. 지금 눈앞에 보이는 바도 그렇고 몸이 느끼는 바도 그랬다.

‘감정을 고양(高揚)시키는 효과라니.’

기존의 술이 살짝 기분이 좋아지게 만드는 정도라면, 이건 좀 더 흥분 상태에 가까웠다. 내향적인 사람도 외향적으로 바뀔 것처럼 기분이 확 좋아지고, 없던 자신감도 끓어 넘쳐서 당장 무엇이든 도전할 수 있을 거 같은 느낌인 건 물론, 마음의 벽도 한결 더 얇아지는 느낌이었다.

“역시 내 생각이 맞았군. 낮은 등급의 감정 스킬이 가져온 오류가 아니었어. 클클클.”

트레스로서는 좋은 일이겠다만, 김서준에게는 당혹스러운 일이었다.

‘자칫 다른 작물도 효과가 맘대로 바뀌어 버리면 큰일이야. 미트루트의 회복 효과나 사비오의 진정효과는 특히 안 되지.’

통제되지 않는 변수는 언제나 많은 문제를 일으킨다. 이유를 찾아야 했다. 김서준의 시선이 자연스레 엄마를 향했다.

“혹시 이런 경우 보신 적 있나요?”

“아니. 신농의 재능은 내게는 없는 스킬이거든.”

전대의 신농, 그러니까 엄마와 마주하고 깨달은 사실이 있었다.

‘신농은 신농마다 다른 스킬을 가진다.’

물론 겹치는 스킬도 있지만, 다른 스킬이 더 많았다. 아리아에게 물어보니 세계수의 힘이 그 사람의 안에 흡수되어, 그 사람이 성향과 재능에 맞게 변화되기 때문이라고 했다.

‘엄마는 나와는 완전히 다른 전투형 스킬을 많이 익혔어.’

김서준의 스킬이 농사에 집중된 것과는 달랐다. 신농의 재능도 그중 하나였다.

“뭐, 어찌 됐든 좋은 거 아니겠소. 사실, 모두 이 술을 마시고 행복하길 바랐으니 말이오.”

“음식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만드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라긴 했죠. 어···?”

그 순간, 아리아가 했던 이야기가 머리를 스쳤다.

‘작물은 모두 신농의 편이다.’

우노의 말대로 김서준 역시 이 술이 식탁에 모인 사람들이 더욱 즐겁게 되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랐다.

어색한 사람들이 술 한잔으로 고양되고 마음의 장벽이 풀어져 친해지는 그런 일을 바랐다.

‘어쩌면 이 마음에 맞게 작물이 자신의 효과를 변화시킨 건가?’

김서준은 도스를 보고 말했다.

“혹시 ‘대자연의 기쁨’도 완성된 거 있어요?”

대자연의 기쁨.

삼 형제는 김서준의 사과 중에서도 최상품으로만 모아 만든 와인에게 그 이름을 붙였다. 전설대로 세계수의 아래서 신농이 수확한 사과로 최고의 장인인 자신들이 만들었으니 가히 ‘대자연의 기쁨’이라 부를 수 있다고 했다.

도스는 그런 대자연의 기쁨으로 가득 찬 술 창고를 직접 관리했다.

“대자연의 기쁨은 맥주가 아닌 와인. 숙성의 시간이 있을 뿐 완성이라고 할 수 있는 건 없소.”

“맛을 못 보더라도 보기만 하면 돼요. 감정만 하면 되니까.”

“덜 숙성된 와인을 선보일 수는 없소. 술을 만드는 장인의 철칙을 위배하는 일이오.”

“....”

장인의 자존심과 철칙이 중요하다는 건 장인섭을 보며 익히 알고 있었다. 하물며 드워프의 철칙은 한결 더 견고하겠다고 생각은 했지만···.

‘주조(酒造)에서도 철칙이 있을 줄이야. 곤란하네.’

대자연의 기쁨은 조금 다른 마음을 담았으니 감정만 한다면 한 번에 알 수 있을 텐데. 이건 곤란했다.

그런데 그때, 고개를 저으며 맥주를 들이켠 우노가 두 형제의 어깨를 감싸며 말했다.

“..라고 평소에는 말했겠지만, 이 모든 축복을 준 은인들에게 그럴 수는 없지 안 그런가 형제들?”

동시에 삼 형제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러더니 다시 한번 양조장이 떠나갈 정도의 파안대소가 터져 나왔다.

“하하! 우노, 오랜만에 맞는 말을 하는군!”

“맞소! 이렇게 기분이 좋은 날. 그 정도는 양보할 수 있지.”

“그래. 한 통 정도는 숙성도 체크 할 겸 주기적으로 보고 확인하고 하는 것도 좋겠어. 클클.”

드워프 형제들은 호탕하게 웃으며 한 번 더 채운 맥주잔을 비워냈다.

‘술의 효과로 벽이 얇아진 건가? 여하튼 다행이야. 이야기가 잘 풀려서.’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데 옆에서 시선이 느껴졌다.

“호오···.”

“왜 그러세요?”

“사과, 요 귀여운 녀석들. 서준아. 너 농사를 참 열심히 졌나 보다.”

“네?”

어머니는 대답 대신 흐뭇한 미소로 맥주를 바라볼 뿐이었다.

“음···.”

‘대자연의 기쁨’을 확인한 덕에 확신했다. 작물은 가공할 때 마음가짐에 따라 효과를 바꿀 수 있다.

‘대자연의 기쁨은 반대로 진정되고 차분해지는 효과가 있었으니까.’

정확히는 감정 정화. 즉, 사비오처럼 단순한 집중력이나 심리적 안정을 넘어 정신계열 스킬을 해제할 수 있을 정도로 강한 효과였다.

‘이런 식이면 신농의 재능. 이거 대박이잖아?’

그러나, 역시나 모든 게 맘 같지는 않았다.

“진심이 통하기라도 해야 하는 건가. 쉽게는 안 되네.”

곧장, 사과를 가지고 주스도 만들고 잼도 만들어보고 음식도 만들어봤다. 하지만, 모두 원래 사과가 가진 피부 미용 효과가 전부였다.

“장인이 가진 스킬, 아니면 좀 더 간절한 진심 그런 조건이 붙나 보네.”

아쉽지만, 연금술 외에도 포션이나 영약을 개발할 수 있게 된 건만도 큰 수확. 김서준은 만족했다.

“그나저나 이제 어떻게 해볼까.”

장인섭과 무기 공방은 빠르게 무기를 찍어내고 있었다. MP사의 설비, 인력 금전적 지원 덕에 장비에 대한 연구개발에도 속도를 더하고 있었다.

드워프의 맥주와 와인 역시 상품으로도 좋지만, 다가올 위기 포션처럼 사용할 수 있도록 양산하기로 했다.

같은 질은 아니더라도 비슷한 효과와 적당한 맛만으로 충분했다.

‘사기를 진작하기도 좋고, 전투 중에도 쓸모가 많을 거야.’

엘린이 담당한 미트루트 포션 제작도 장인 길드를 통해 영입한 연금술사들과 함께 그 양을 늘려가고 있었다.

‘다른 건 순조로운데 문제는 인력이야.’

장비와 물자는 충분한 데 싸울 병사가 없었다.

‘국가적 협력을 받긴 해야 해.’

헌터를 모아, 온천과 게이트를 개조한 훈련장, 농사 등 이번 북한에 간 헌터들처럼 강하게 만들어야 했다.

그런데.

‘내 마을 믿을 리가 없잖아.’

이제 곧 세상이 멸망할 대위기가 찾아온다. 이 말을 설득시킬 근거가 부족했다.

‘엄마 이야기를 해도 소용이 없을 테고.’

게다가 어중간하게 했다간, 혹시 모를 강백호와 같은 사상을 가진 자들이 역습할지 몰랐다.

‘별다른 거부감 없이, 헌터들이 결집할 장치가 필요해.’

몇 날 며칠, 고민 중이지만 여전히 그에 대한 해답이 나오지 않았다.

“예언가라도 포섭해야 하나.”

고민으로 하염없이 흐르던 시간. 그 시간을 깬 건 한 통의 전화였다.

[서준 님, 잘 지내셨습니까?]

노을의 번호로 걸려온 전화에선 남자의 목소리. 그리고.

[저 하오위입니다.]

중국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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