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 전대의 이야기(2)
세계수.
세상의 풍요와 번영을 가져온다는 전설의 나무는 오랜 세월 뿌리내리고 산 만큼 엄청난 힘을 축적했다.
“세계수여···.”
신농은 그 세계수의 파수꾼이자 눈과 귀, 동시에 유일한 친구이자 가족. 그런 신농이 위기를 발견했다.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부탁했다.
이 세계가 위기에 대항할 힘을 가질 수 있도록.
‘알겠어.’
세계수는 당연하게도 오랜 세월 함께한 그녀의 부탁을 받아들였다.
“감사합니다.”
정인선은 세계수의 힘을 받아 지구를 재구축하기로 했다.
과학의 발전 속 비활성화된 마나를 활성화하고, 게이트에서 흘러오는 마나도 지구의 마나와 쉽게 동기화할 수 있게 만들었다.
‘마나를 사용하는 방법을 익히고 학문을 만들며 발전하기는 시간이 부족하겠지.’
그래서 인간들이 즐겨 하는 게임이라는 시스템 체계를 만들어 세상에 입혔다. 비록 시스템의 판단에 따라 그들의 힘이 한정되겠지만, 그만큼 빠르게 힘을 키울 수 있을 터.
‘지금은 이게 최선이야.’
게이트로 뚫린 차원의 벽도 보수했다. 다른 세계와의 시간 선도 바꾼다. 대다수의 세계보다 훨씬 빠른 지구의 시간 선을 그와 비슷하거나 오히려 더 느리게.
그리고 마지막으로.
“지구상에 세계수와 나의 존재를 지워야 해.”
정인선 자신은 차원을 돌며 세계수의 흔적을 남기고 포식자를 유인할 생각이었다.
‘시간을 끌어야 해. 포식자를 이길 힘을 기를 시간을.’
그러려면 일단 지구에서 세계수의 흔적을 지워야 했다.
‘...나의 존재와 기억 모두···.’
지구상의 모든 존재. 가족은 물론 하물며 세계수까지 자신의 존재를 잊게 해야 했다.
다시 말하면···.
“이제 지구로는 돌아올 수 없어······.”
“괜찮습니다.”
레너드는 정인선을 바라봤다. 자기도 모르게 눈가에 흐르는 눈물을 언제나처럼 다정하게 닦아주며 말했다.
“비록 평생 다시 못할지라도 저는 괜찮습니다. 제 마음은 당신을 기억할 겁니다.”
“꺄!”
“우리 서준이도 그렇다고 하는군요.”
“...미안해.”
“저야말로 끝까지 옆에 있지 못해 죄송합니다.”
“서준이를 잘 부탁해.”
정인선은 그렇게 지구상 모든 존재로부터 자신의 흔적과 기억을 지웠다. 그 누구도 자신에 대해 떠올리는 것마저 허락하지 않게 만들었다
그리고 세계수가 다시 힘을 찾을 때까지 땅속에 잠들게 만든 후, 정인선은 지구를 떠났다.
*****
“...”
살짝 갈색에 가까운 눈동자. 검디검은 생머리. 마치 연예인처럼 나이를 가늠하기 어려운 외모 사이 보이는 옅은 주름들.
완벽하게 처음 보는 여인의 모습에서 김서준은 눈을 떼지 못했다. 오른손에 월광을 반사하는 검을 늘어뜨린 여자 역시 김서준의 눈을 뚫어지라 바라본다.
‘아···.’
머릿속으로 거대한 기억이 흘러들어왔다. 순간 모든 게 떠올랐다.
그리고,
머릿속에서 완전히 사라졌던 그 두 글자가 머리에 떠올랐다.
사무치는 그리움과 동시에 떠오르는 애정이 떠올랐다. 당장이라도 두 글자를 부르며 저 가녀린 어깨를 안아주고 싶었다.
“...”
하지만 입술이 떨어지지 않는다.
세계를 위해 모든 짐을 짊어진 여인에 대한 안타까움과 고마움?
‘아니, 그런 거창한 게 아니야.’
아무리 세계수의 힘이었다지만 단 한 번도 그녀에 대한 생각하지 않은 자책이, 미안함이 입술을 무겁게 짓눌렀다.
“...오랜만이야. 보고 싶었어.”
여인이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서준아.”
그 순간 짓누르던 모든 감정이 녹아내리듯 김서준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김서준은 누군가에게는 너무나도 평범하고 일상적인 그 소중한 단어를 토해냈다.
“엄마···.”
잠깐 시간이 멈춘듯한 느낌. 그러나 감격도 잠시 정인선이 말했다.
“재회는 잠깐 미루자. 시간이 없거든. 이제 곧 그들이 올 거야.”
[화재 진압은 완료 했고블!]
[잔당은 모두 제압했소. 클클.]
머릿속으로 울리는 목소리에 김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팡이를 들고 마력을 탐지하던 엘린도 말했다.
“마력은 느껴지지 않아요. 마법이나 다른 장치는 추가로 없는 거 같아요.”
“멍!”
다른 사람의 냄새는 느껴지지 않는다는 리노까지. 사태는 확실히 제압되었다.
“헤헤···.”
아리아는 일을 마친 리노를 끌어안았다. 머리를 쓰다듬곤 행복한 표정으로 웃는다.
“서준 말대로 진짜 푹신하다.”
하긴, 아리아는 리노를 엄청 만지고 싶어서 했지. 솜뭉치 같다고.
“근데 아리아. 이제 이렇게 돌아다닐 수 있는 거야?”
“응. 그동안 힘을 축적하는 데 온 힘을 다했거든. 덕분에 서준이 만든 터전 안에서 돌아다니는 건 이제 얼마든 할 수 있어.”
김서준은 시선을 힐끔거렸다. 전대의 신농. 아니, 30년 넘게 보지 못한 어머니가 강백호의 몸을 꽁꽁 묶고는 마법으로 검은 기운이 뻗치지 못하게 막고 있는 게 보였다.
‘어색하네.’
물어볼까 고민하다 결국 김서준은 다시 아리아에 눈을 돌렸다.
“힘을 축적한 건 저것과 관련이 있는 거야?”
“응. 서준의 엄마가 내게 연락했거든. 이제 곧 그들이 온다고.”
“거기부터는 나랑 이야기할까?”
어느새 강백호를 제압을 마친 정인선. 그녀가 김서준의 어깨를 휘감으며 말했다.
“아···.”
정인선의 행동은 분명 자연스러웠다. 멋지고 털털한 모습은 어머니가 아니라 친구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친근한 모습.
‘근데 왜 이렇게 어색하지.’
김서준은 피식 웃었다.
‘어머니, 역시 어색하겠지.’
김서준도 애써 자연스럽게 대답했다.
“그. 래. 요. 오. 랜. 만. 에. 오. 봇. 하. 게. 대. 화. 해. 요.”
둘을 보던 아리아는 결국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
하나밖에 없는 해가 동쪽에서 떠오른다. 새들이 정겹게 지저귀는 소리와 함께 상쾌한 공기가 폐부로 스며들었다.
“음···.”
심호흡하니 냉수로 촉촉하게 만든 목부터 몸 안까지 시원해지는 기분이었다.
“좋다.”
그 옛날 기억 속 풍경과 금산마을은 정말 많이 달라졌다. 듬성듬성 보이던 논밭은 초록 잎으로 덮여 있고, 도로는 전부 포장된 것도 모자라 예쁜 표지판과 울타리로 장식되어 걷기 좋은 모습이었다.
“저건 진짜 장관이네.”
서준이가 드워프들과 만들었다는 트리. 논밭 사이, 우뚝 선 트리는 히알루에서 봤던 만년 묶은 콩나무 같은 위세를 보여줬다.
‘저기다 전망대처럼 장식하다니, 역시 내 아들이야. 아이디어부터 남다르다니까.’
고작 거대화 하나에서 저런 생각을 떠올리다니. 역시 비범하다. 김서준 최고.
그런 뿌듯한 감상을 두고 문 앞을 나가자 남자들의 거친 숨소리가 들렸다.
“흡!”
“하나 더!”
“스쾃!!!”
“크아아아!!!”
우노, 도스, 트레스는 아침부터 운동 중이었다.
‘여전하네. 쟤들은.’
벨리르 대륙에서 드워프 최고의 장인들을 찾으러 갔을 때도 그랬다. 최고의 전사이자 장인들이라더니 던전 한복판에서 헬스를 하는 기행을 보이는 중이었다.
‘몬스터 사냥과 운동은 기본적으로 다르오. 사냥이 근육을 움직이는 방법이라면, 운동은 근육을 기를 수 있소! 클클!’
특이하지만 생각한 신념만은 절대로 실천하는 자세.
‘특이하지만 대단한 거지.’
거기다 그에 못지않은 실력까지. 그래서 정인선이 그들을 지구로 보내기로 했다.
‘다행히 잘 지내나 보네.’
같이 저 멋진 나무도 지었지만, 지금도 저렇게 함께 운동을 즐기는 중이니 말이다.
“마지막이오. 서준! 스쾃!”
“으아아아아!”
김서준이 어깨에 진 거대한 벤치를 들고 겨우 무릎을 폈다. 그리곤 다시 벤치를 제자리에 둔 뒤 우노와 하이파이브를 했다.
“오늘도 좋은 운동이었소!”
“고맙습니다.”
땀을 훔친 김서준은 그대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곤 정인선을 발견하더니 환하게 웃었다.
“일어나셨어요. 어머니.”
“아침부터 대단하구나.”
“별거 아닙니다. 그냥 버릇 같은 거예요.”
김서준은 대답하며 웃는 어머니의 얼굴을 바라봤다. 하루, 아니 몇 시간의 대화였지만 피는 역시 물보다 진한 걸까. 아니면 각자 노력한 덕일까. 어제보다 대화는 훨씬 자연스러웠다.
“그럼 바로 가볼까?”
“네.”
김서준은 곧장 약속한 장소로 걸었다.
일이 바빠지고 자주 오진 못했지만, 금산마을에서 가장 소중한 장소. 금수산에서 마을이 가장 잘 보이는 곳.
“레너드···.”
아버지의 묘였다.
“잠시만요. 어머니.”
김서준은 챙겨온 회와 소주를 묘 앞에 내려놓았다.
“이건···.”
“아버지가 가장 좋아하셨던 음식이에요.”
“정말?”
정인선이 놀라워하며 말했다.
“나한테는 소주 같은 게 무슨 술이라더니. 죽을 때는 한국 사람 다 됐었나 보네.”
“하하. 맞아요. 소주를 엄청 좋아하셔서 밥이랑도 많이 드셨어요. 그리운 맛이라고···.”
그리운 맛.
‘설마 모든 기억이 사라졌지만, 어머니와 나눴던 술맛을 기억하신 건가?’
진실은 알 수 없었다. 다만, 어머니의 얼굴에 살짝 스치는 슬픔에서 그렇게 추측할 뿐.
“아, 자꾸 눈에 먼지가 들어가네. 하여튼 나중에라도 소주 맛을 알아서 다행이다. 내가 회에는 소주가 잘 어울린다고 그렇게 말했거든. 이 초고추장이랑!”
애써 밝게 말하며 눈시울이 붉어진 채 그녀는 음식을 깔았다. 그리고 술을 따르고 절을 하고 하는 동안 두 사람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아무래도 두 분의 시간이 필요하겠지.’
“어머니, 저는 주변에 심어둔 삼을 좀 확인하고 올게요. 잠깐 이야기 나누고 계세요.”
“그래, 얼른 와.”
자리를 떠난 지 얼마 후.
김서준은 어렴풋이 들리는 흐느끼는 소리에 함께 울지 않을 수 없었다.
제사를 마친 두 사람은 묘 앞에 앉아 마을을 바라봤다.
“이쪽은 감자밭입니다. 감자로 처음으로 농사를 시작했어요.”
“그래? 대단하네.”
정인선은 한눈에 들어오는 마을 한곳 한곳을 가리키며 자세한 설명을 부탁했다. 아들이 만든 일이, 아들이 산 삶이 궁금했다.
“저쪽은 미트루트 밭이에요. 미트루트는 아시죠?”
“물론이지.”
김서준은 귀찮아하지 않고 하나씩 자세하게 설명했다. 들으면 들을수록 참 대견했다.
‘잘했네.’
능력을 허투루 쓰지 않고, 사리사욕을 채우는 데만 매진하지도 않았다. 힘을 과시하거나 함부로 휘두르지도 않았다.
‘제대로 잘, 아니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잘 했어.’
실은 힘을 키우기 위해 터전화를 넓혀갔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사람의 욕심은 당연한 일이지 않은가.
하지만, 김서준은, 아들은 아니었다.
‘진짜 터전의 의미를 제대로 실천하고 있어.’
모두가 행복할 수 있는 세계.
그것은 세계수와 신농이 궁극적으로 전달하고자 하는 가치. 김서준은 평화라는 가치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일까.
혼자만 잘사는 게 아닌, 모두의 터전으로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레너드. 고마워요. 이렇게 잘 키워줘서.’
김서준이 마침내 마지막 금수산까지 설명을 마쳤다. 정인선은 대견한 아들을 안으며 말했다.
“고생했어. 아들.”
김서준은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 그 모습마저 귀여웠다. 역시 엄마의 눈은 어쩔 수 없는 듯했다.
그렇게 잠시 힐링의 시간을 가진 후 포옹을 풀고 정인선은 말했다.
“하지만 중요한 건 지금부터야. 내가 어제 말한 대로.”
김서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을 끌고 위기에 대비한다.’
정인선이 세운 작전은 반쯤 성공했다.
인간들은 스스로 힘을 기르기 시작했고,
세계수의 존재를 찾기 어렵게 만드는 데 성공했으며,
김서준이 무사히 다음 신농으로 각성해 세계수의 힘을 다시 키우기 시작한 데다,
차원에 퍼져있던 전 동료들의 후손을 지구로 모으는 건 역시 순조롭게 이뤄졌기 때문이다. (여기서 김서준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정령이나, 엘린, 드워프들은 그렇다 치더라도 리노까지 포함이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문제는 이 모든 게 너무 빨랐다는 점이었다.
‘너무 빠르게 한 세계가 강해지자 반쯤 눈치를 챘다는 거였지.’
여기에 쐐기를 박은 게 강백호였다. 강백호가 가진 검은 힘은 포식자가 세상에 뿌린 미끼. 욕심을 가진 자가 그 힘을 가지고 세계수에 다가가면 차원을 넘어 포식자에게 위치를 알려주는 장치였다고 한다.
“다행히도 내가 먼저 그 신호를 가로채긴 했지만 완벽하게 막지는 못했어. 시간은 걸리겠지만 결국 녀석도 알게 될 거야. 우리는 그 전에 녀석을 막아낼 힘을 길러야 해.”
“걱정하지 마세요.”
김서준은 마을을 바라보며 말했다.
“계획은 이미 이 안에 다 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