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 전대의 이야기(1)
만화 속 그런 장면을 본 적이 있었다. 동료가 당해서 분노한 용사가 악당을 격파하는 이야기. 당시에는 그 희열과 반전에 형언할 수 없는 카타르시스를 느끼곤 했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지.’
헌터로 일하면서 이 모든 게 환상의 이야기라는 걸 깨달았다. 아무리 분노해도, 아무리 극한의 상황에 내몰려도 인간의 능력은 명확한 한계가 있다는 걸 지금의 김서준은 누구보다도 뼈저리게 느꼈었다.
‘근데 지금은 왜 이렇게 가능할 거 같지?’
강백호가 입을 놀릴 때마다 치미는 분노와 함께 몸속에 힘이 요동치는 게 느껴졌다. 마치 그때의 주인공처럼.
격한 감정 속 이성을 잃은 걸까.
‘아니야.’
머리는 오히려 더 차갑게 식는다. 저 궤변이 그 얼마나 추악한지 단번에 파악할 만큼.
“너무 늦게 알았지. 그건 미안하게 됐네. 하지만 세상을 유지하는 일에는 시행착오가···.”
하나뿐인 가족을 죽여놓고 시행착오라고 할 수 있는 뻔뻔함. 자신의 욕심을 대의로 포장하는 가식. 말하면서 숨겨둔 힘을 꺼낼 기회를 노리는 눈과 몸짓. 모든 게 다 눈에 들어올 만큼.
‘그리고 더는 저 궤변을 듣고 싶지 않아.’
아버지를, 자신의 과거를 짓밟고도 별일 아닌 듯 말하는 저 남자를 저렇게 두고 싶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
말이 끝나는 순간.
다시 무언가 말하기 위해 호흡을 하는 타이밍. 그 타이밍을 반 박자 빠르게 잡은 기습이라면 가증스러운 면상에 한대는 먹일 수 있으리라.
그렇게 생각한 김서준은 말끝과 동시에 땅을 박찼다.
강백호의 눈이 불의의 기습을 포착했다. 주름이 하나씩 움직이며 놀라운 표정을 만들어 간다. 손은 그보다 늦게 이제야 움찔한다.
‘역시 다르다. 모든 게 보여.’
그리고 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주먹을 휘두른다.
-쾅!
주먹 끝에서 묵은 분노 일부가 오랫동안 정체를 감춘 늙은 탐욕가의 얼굴에 발산됐다. 한번 터져 나온 분노는 부서진 댐에 갇혀있던 물처럼 폭발한다.
-쾅! 쾅! 쾅! 쾅!
다행이야.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최근에 강해진 덕일까. 터전화가 되며 어느새 이렇게 강해진 걸까. 세계수의 언덕 위에 있기 때문일까.
무엇이 정답인지는 모르지만, 지금 자신의 몸이 흘러넘치는 분노를 풀어낼 수 있게 되어 진심으로 다행이었다.
“크아아아!!”
그때였다. 아버지의 몸을 관통했던 검은 기운이 강백호로부터 뿜어져 나왔다. 지독한 느낌을 뿜어내는 기운은 김서준의 몸을 밀어냈다.
“서준 씨!”
엘린이 소리쳤다. 김서준은 손을 들어 괜찮다는 신호를 보냈다.
‘저 기운 도대체 뭐지?’
몬스터를 만났을 때도 이토록 불길한 기운을 느낀 적은 없었다. 도리의 말처럼 정말 블랙 드래곤이나 그를 따르는 마왕과 관련이 있을 건가.
‘무엇이 되었든 저건 지금 막아야 한다.’
김서준의 감이. 몸 안에 흐르는 힘이. 그렇게 말하는 듯했다. 김서준은 분노를 갈무리하고 모두에게 협공을 지시하려 했다.
“이, 이게 왜···.”
검은 기운에 사로잡힌 강백호의 목소리에 김서준이 다시 고개를 돌렸다.
“뭐 하는 짓이냐!!!”
녀석은 알 수 없는 말을 지껄였다. 동시에 검은 기운은 마치 불꽃처럼 더욱 맹렬히 타오르더니 하늘로 검은 기둥을 뿜어 올렸다.
-촤악!
그 순간.
하늘에서 유성처럼 하얀빛이 검은 마기를 베어 갈랐다.
“물러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김서준은 설마 하는 생각으로 뒤를 돌았다.
“서, 설마···?”
초록색 옷에 금발 머리를 길게 늘어뜨리고 맨발로 풀숲 위에 서 있는 숙녀. 앳된 모습은 전부 사라졌지만, 김서준은 확신했다.
“아리아···?”
아리아는 씽긋 웃으며 손을 뻗었다. 초록색 빛이 반투명한 막을 만들었다.
-촤악! 촤악! 촤악! 촤악!
뒤이어 좀 전의 하얀 빛이 무더기로 쏟아져 내려 검은 마기를 헤집었다.
“크헉!”
강백호는 비명의 몸부림쳤지만, 검은 기운은 급속도로 줄어들어 갔다. 그리고 마지막 빛무리에 둘러싸인 신형 하나가 바닥으로 내려오며 긴 빛줄기를 그렸다.
“컥!”
단말마의 비명이 다시 한번 울렸다. 강백호를 감쌌던 마기가 전부 사라지고 나이에 비해 다부진 몸이 스르르 무너졌다.
“늦었나···.”
빛 속에서 나타난 중세풍 갑옷을 입은 여인은 강백호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리고 천천히 몸을 돌려 김서준을 바라봤다.
“어···?”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완벽하게. 그런데 어딘가 낯이 익다. 아니, 낯이 익은 게 아닌 기억의 저편 어딘가 묻어둔 그리운 기억이었다.
“누구···.”
김서준은 말을 잇지 못했다. 왜인지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
약 60년 전.
지구에서부터 전해온 차원 충격이 전쟁과 핵이라는 어떤 무기로 인한 작은 파동에 불가하다는 걸 확인했을 때.
정인선은 결정했다.
“모두 각자의 세계로 돌아가. 다시 필요할 때 내가 부를게.”
자신과 함께한 모든 정령과 동료는 원래의 세계로 돌려보냈다. 여러 세계에서 얼마나 긴 시간을 보냈을지 모를 만큼 오랜 시간 세계수를 수호했다.
그러나, 지구에서의 일처럼 모두 포식자의 위협은 아니었다.
“아마 한동안은 그러겠지. 셀 수 없는 차원을 돌았지만, 포식자는 없었으니까. 그러니까 이제 다시 모두 자유로워질 시간이야.”
물론 정령들도 동료들도 반대했다. 세계수를 지키겠다는 명분 아래, 동료들과 함께하고 싶다는 바람이 있었기에.
하지만 정인선은 알고 있었다.
“다들 남몰래 고향을, 가족을 그리워하는 거 알아. 평화도 친구도 좋지만, 가족도 중요하잖아. 그리고 너무 걱정하지 마. 무슨 일 생기면 너희가 바라지 않아도 내가 다 부를 테니까.”
“흑, 알겠습니다움.”
“꼭 불러주셔야 하는 고블!”
“멍멍!”
“기다리겠습니다.”
“우리를 잊으면 안 되오!”
동료들은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세계로 돌아갔다. 마지막으로 남은 건, 불의 정령이자 본래 인간이었던 남자.
“레너드.”
“주인과 평생 함께한다고 약속했습니다. 그 약속을 지키고 싶습니다.”
“레너드. 난 이 지구에 있으려고 해. 이 세계 내가 살던 세계랑 비슷하거든. 같은 글자와 문화도 가지고 있고. 그래서 이 세계에 세계수를 옮겨 심고 풍요를 선물하고 싶어.”
“저 역시 좋습니다.”
“하지만, 그러면 네 고향은···.”
지구는 다른 차원에 비해 시간이 너무 느렸다. 지구의 하루는 어느 세계에서는 1000년이나 다름없었다. 레너드의 세계 역시 그랬다.
레너드는 단호하게 말했다.
“상관없습니다. 당신이 제 세계입니다.”
그렇게 시작된 지구에서의 삶.
“레너드니까. 레넌은 좀 그렇고 래원으로 하자. 성은 김씨가 많으니까 김레원으로.”
새로 이름을 지어주고.
“저와 결혼해주시겠습니까?”
결혼도 하고.
“잘 숨겨야 하니까. 여기에 심자.”
세계수를 옮겨 심고.
“마법은 최대한 안 써야 해. 눈에 띄면 안 되니까! 그 대신 지금부터 농사를 배우는 거야!”
“알겠습니다.”
농사를 배웠다. 그리고···.
“나 임신했어!”
무려 50년에 걸려 임신도 했다.
행복했다. 신농의 직위도 잊고 평범한 가정으로 사는 건 신농의 삶에 밀리지 않을 만큼이나 행복했다. 영원히 이렇게 행복한 나날이 이어지기를 바랐다.
그러나 세상에 영원은 없었던 걸까. 기어코 이상한 징조가 시작됐다.
“이건······.”
슬라임 한 마리가 지구로 넘어왔다.
물론 얼핏 대단한 일이 아니었다.
몬스터라면 모두 갖추고 있는 물리 내성도 갖추지 못한 질 낮은 녀석은 가볍게 인간들의 총에 제압될 정도로 약했으니까.
[괴생명체 발견! 기후 변화의 부작용?]
[외계인은 실존했는가?]
[과학계, 새로운 생명체 발견에 대한 기대!]
인간들도 심각하게 바라보기보다는 새로운 현상으로 취급했다.
하지만 그녀는 달랐다. 마력이 없는 지구에 슬라임은 절대 존재할 수 없었다. 다른 차원의 존재가 넘어온 게 분명했다.
‘절대 지구상에 나타난 새로운 현상 따위가 아니야. 차원을 넘어온 거야.’
세계수가 아닌 다른 방법으로. 강제로 차원의 벽을 찢고.
“왜? 누가?”
걱정이 솟구쳤다.
‘다른 차원의 탐구자인가?’
이 경우라면 큰일은 아니다. 차원을 넘어가 그의 탐구심을 죽일만한 일을 펼치거나 연구를 막으면 되니까. 정 안되면 다른 차원으로 가는 연구로 유도해버리면 된다.
‘중요한 건 세계수가 있는 세계로 못 오게 지키는 거니까.’
하지만 또 다른 유력한 가능성.
‘또 다른 차원 포식자의 등장···.’
세계수를 지키는 이들에게 대대로 이어지는 차원 포식자들의 존재. 한 세계의 정점에 올라 모든 걸 지배하는 것으로 모자라 다른 세계를 탐내는 탐욕자들.
그들이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그들에게 세계수는 무엇보다 가지고 싶은 존재기 때문이다.
‘세계수는 풍요와 힘을 줄 뿐 아니라 어떤 세계든 갈 수 있는 관문이 되니까.’
그랬기에 오랜 시간 구전되며 포식자의 존재는 신농의 주적으로 취급됐다.
‘지금의 징조가 포식자가 벌이는 일이라면···.’
“식사하시죠.”
심각한 상념에 빠진 그녀를 깨우는 저음에 정인선은 고개를 돌렸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이제 진짜 사람 다 됐다니까.”
“칭찬 감사합니다. 근데 안색이 안 좋던데, 무슨 일 있으신 겁니까?”
레너드, 아니 레원은 그렇게 말하며 가져온 음식을 내려놓았다. 잘 만든 브런치를 식탁에 올리는 손에 자신의 손에 낀 반지와 모양의 반지가 반짝였다.
‘포식자라면 이 행복은 끝나겠지.’
아니야.
판단은 시기상조다.
단, 한 번의 현상일 뿐이니까.
그리고 포식자는 그리 쉽게 나타나는 존재도 아니지 않잖아? 좀 더 기다려보자. 정인선은 그렇게 합리적 판단인지, 아니면 지금의 행복을 지키기 위한 합리화인지 모를 생각과 함께 방긋 웃으며 말했다.
“아냐. 맛있겠다. 얼른 밥 먹자.”
그렇게 애써 외면했지만······.
“...불길한 예감은 왜 언제나 빗나가지 않는 걸까.”
게이트가 빈번해졌다. 게이트를 통해 마나가 세계에 흘러들어오고 자연스레 능력을 각성하는 사람들이 생겼다.
“확실해. 이건 실험이 아니야.”
두꺼운 세계의 벽으로 넘어오는 몬스터들. 그건 실험이 아닌 공격이었다. 세계와 세계 사이를 지키는 벽을 약화하기 위한 공격.
“아마 벽을 헐겁게 만들어야 겨우 세계를 넘을 수 있는 엄청난 존재가 이 세계를 노리는 거야.”
“그 말씀은 포식자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남편의 말에 정인선은 고개를 끄덕였다. 순식간에 정적이 두 사람의 방에 내려앉았다.
말하면 끝이다.
그걸로 이 행복은 끝난다.
하지만,
“꺄!”
이제 막 태어난 김서준이 자신을 보며 웃었다. 이 아이를 위해. 이 아이가 밟고 살아갈 세상을 위해 결단을 내려야 했다.
“미안해. 하지만 우리가 해야 해. 어쩔 수 없어.”
“아닙니다. 언제든 명령하세요. 나의 주인이시여. 무엇이든 따르겠습니다.”
정인선은 고개를 저었다. 그에게 레너드는 이미 주종이 아닌 동반자였으니까. 그 날 둘은 사랑과 함께 눈물을 나눴다.
다음 날.
“다녀올게.”
두 사람은 작별했다.
그리고 지구는 헌터의 시대를 맞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