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 강백호
“그럼 그렇지.”
연봉 20배.
평생 먹고 놀고 할만한 보수.
이런 게 쉽게 얻어질 리가 있나. 아니나 다를까 김서준은 무려 북한으로 노을을 파견해버렸다.
‘아무리 김서준의 부탁이지만, 북한 토벌은 싫다! 이건 탈출해야 해!’
그런 충동도 들었지만 결국 받아들였다. 다행히도 김서준의 제안은 토벌 전투에 참전이 아닌 박보현과 주민들에 대한 경호였기 때문이다.
‘지금처럼 주민들 옆에서 훈련을 돕기만 하면 되는 거라고 했지?’
반신반의했지만 김서준이었기에 한 번 더 믿었다. 그리고 그건 아주 탁월한 선택이었다.
[...오늘은 내가! 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놈이다!!!]
“뭐래.”
이렇게 드라마를 보고 웃고 우는 한가한 평일을 보내는데도 돈이 들어오니 말이다.
‘근데 진짜 북한 땅을 이렇게 바꿀 줄이야.’
황룡 길드를 따라 북한에 들어온 노을과 박보현. 그리고 주민들은 곧장 마을을 만들었다. 어려울 건 없었다.
‘집은 이동식 주택으로 가져왔고, 울타리는 금호 길드에서 만든 무기로 임시 방벽을 형성했으니까.’
사람들은 금산마을에 돌아온 것처럼 이제는 평화롭게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다음 개척지로 이사 갈 새로운 주민들도 속속들이 합류하고 있었다.
과연 이게 북한에 온 건지, 아니면 주인 없는 땅에 그냥 깃발만 꽂은 건지 헷갈릴 정도.
‘서준 씨 아니었으면 불가능했겠지, 정말 대단하다니까.’
터전화와 함께 게이트가 사라진다는 메시지. 아마 그 메시지가 없었다면 누구도 이렇게 정착하지 못했을 게 분명했다.
그뿐일까.
금호 길드는 무기 사업으로서 정식 출범했고, IW 그룹과는 종자 사업과 주류사업을 시작했다. 헌터 일은 헌터 일대로 사업은 사업대로 무엇하나 놓치지 않는 모습.
‘역시 내가 반한 사람답다니까. 진짜 대단해.’
그나저나 이 정도 실적이면 보너스가 좀 더 나오진 않을까. 그러면 지방에 작은 건물이라도 한 채 살까. 그런 행복한 상상에 빠진 그때였다.
-똑똑.
“들어오세요.”
노크 후 공손한 태도로 쟁반을 들고 남자가 들어왔다. 노을의 주요 경호 대상 박보현이었다.
“노을 씨! 차랑 쿠키를 좀 가져왔어요. 이거 드시면서 하세요.”
“이런 건 또 어디서 났어요?”
“이번에 온 주민들이 가져다주셨어요. 이제 조금 있으면 군인분들 통해서 택배도 받을 수 있을 거예요.”
본래 박보현은 경호의 대상. 하지만 이제와서는 박보현이 노을의 시중을 들고 있었다. 노을이 이런 관계로 만든 건 아니었고, 박보현이 노을에게 한 일종의 배려였다.
‘마을 안이 안전하니까 쉬라고 했지?’
실제로 솟대를 닮은 감시 장치로 주변을 감시하고 있기도 했고, 노을 자신의 기감도 펼쳐 놓았으니 안전하긴 했다.
그래서 고민 없이 알겠다고 했는데···.
“이렇게까지 안 하셔도 된다니까요. 거실에 두시면 제가 챙겨 먹을게요.”
배려를 넘어 이제는 거의 공주님 모시듯 하는 박보현이었다. 식사는 물론 간식을 챙겨주고 청소, 세탁 등등 모든 집안일도 박보현이 대신했다.
‘이러면 내가 너무 양심이 없어 보이잖아.’
노을의 죄책감과 달리 박보현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니에요. 저 때문에 북한까지 오셔서 죄송한데 이 정도는 제가 해야죠.”
노을은 괜히 보던 드라마를 내리고 다른 창을 켰다. 바둑판 형태로 나타나는 다중 화면들. 솟대가 촬영 중인 화면이었다.
“역시 아무 일도 없네요. 드라마는 자, 잠깐 쉬는 동안 본 거예요.”
“네. 더 쉬셔도 돼요. 와, 근데 진짜 대단하네요.”
박보현의 모니터 속 화면을 보며 감탄을 터뜨렸다. 화면에는 마을 곳곳의 영상뿐 아니라 토벌대의 영상도 함께 나오고 있었다.
‘특수한 드론이라고 했지.’
트레스와 엘린, 김서준이 함께 고안한 감시용 특수 드론. 김서준은 이 드론으로 강백호를 감시하는 걸 별도로 부탁했다.
‘황룡 길드가 무언가 꿍꿍이가 있는 거 같다고 했지.’
이런 사정을 모르는 박보현은 그저 강백호가 보여주는 엄청난 무위에 감탄을 터뜨리고 있었다.
“S급 헌터라는 건 정말 대단하네요. 주먹 한 번에 저런 위력이라니.”
“괜히 S급인가요. 게다가 강백호잖아요. 권왕 강백호. 당연한 거죠.”
“음, 근데 저거 괜찮나요? 불이 너무 심하게 번진 거 같은데요?”
그러고 보니 화면에 회색 연기가 점점 짙어지고 있었다. 황룡 길드가 상대하고 있는 몬스터가 뿜어대는 불이 일대를 불사른 것 때문이었다.
“아무리 대단한 S급 헌터시라지만, 저런 매연을 계속 마시면 안 되실 텐데···.”
“괜찮을 거예요. 산전수전 다 겪으신 분인데 설마 그걸 모르실까. 저거 봐요.”
강백호는 단숨에 하늘을 날아 거대한 소처럼 생긴 몬스터의 뿔을 부숴버렸다. 그러자 충격에 주저앉은 소가 낑낑거렸다.
“저렇게 점점 속도를 올리시잖아요. 금방 제압하고 자리를 이탈하실 거예요.”
노을은 그렇게 말하며 화면을 확대했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제압만 할 뿐 몬스터를 죽이지 않았다.
[크아!!]
결국, 다시 정신을 차린 몬스터들은 발악하듯 아무렇게 불을 뿜어냈다. 순식간에 화재가 커지고 이제는 창문으로도 연기가 보일 정도였다.
“!!”
뿌연 매연이 드론의 시야를 가리고, 찰나의 시간, 강백호의 섬뜩한 시선이 드론에 달린 카메라를 향했다. 온몸에 끼치는 소름.
-쾅! 치지직!!
충격과 함께 연기로 가득했던 화면이 꺼졌다. 얼핏 사고로 보일 수 있는 장면. 그러나 노을은 그 잠깐의 시간, 강백호가 보인 표정을 확실하게 기억했다.
절대 사고일 리 없다.
“노을 씨!”
“저 잠깐 다녀올게요!”
****
“볼수록 놀랍군.”
거대한 트리 앞에 선 복면의 남자는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허허벌판이던 이 시골 한가운데 이렇게 거대한 트리를 만들었으니 말이다.
“예전에 있던 그 나무보다 훨씬 크군. 그런데 이게 세계수가 아니라는 건가.”
남자는 놀랍다는 듯 나무를 어루만졌다. 평범한 나무의 질감이 손끝에서 느껴졌다. 뒤로는 일반인, 아니 어지간한 헌터도 알아채기 힘든 작은 기척들이 느껴졌다.
마침내 기척이 사라졌을 때, 부하 하나가 말했다.
“모두 모였습니다.”
남자는 뒤를 돌았다. 30명. 한 명도 빠짐없이 모두 모였다.
“오늘 대의를 위해 우리는 필요악이 되려 한다. 사사로운 정을 이기지 못할 이들은 지금이라도 이 자리에서 빠져라. 나 강백호의 이름을 걸고 결코 어떤 보복도 징계도 없을 테니.”
어둠 속에 드러난 30쌍의 눈동자. 그들 중 누구 하나 망설이는 이는 없었다. 방금의 이야기를 듣고 흔들리는 이도 없었다.
마치 15년 전 그날처럼.
“그럼 시작하지.”
강백호가 손을 가볍게 휘둘렀다. 그러자 강백호로부터 그림자가 넓게 펼쳐졌다. 거대한 원을 그린 그림자 속으로 하나하나 빨려 들어가는 부하들.
‘그래. 이번에야말로 세계수의 싹을 뽑아버리리라.’
강백호도 눈을 감고 전이를 시작했다.
“....”
그렇게 모든 괴한이 사라진 고요한 땅.
-뾱. 뾱. 뾱.
땅속에서 작은 요정들이 튀어나왔다.
“움?”
“움.”
“움!”
세 마리의 움은 방금 보고 들은 내용을 일말의 고민도 없이 자신들의 주인에게로 전달했다.
****
관광객.
직원.
신규 농부.
다양한 방식과 형태로 잠입한 부하들. 그리고 함께 동고동락하며 보내며 깨우친 건 김서준의 철두철미함이었다.
솟대를 닮은 CCTV는 물론, 쉴드 발생기에 함정, 곳곳에는 환각을 유도하는 마법이 걸린 곳도 있었다.
이뿐이랴.
‘단순히 애완동물이 아닌 테이머 수준으로 동물을 다루고 있었지.’
다중으로 보안을 설치해둔 금산은 농장을 이용하는 고객들에겐 최고의 놀이터이자 관광지였지만, 침략자에게는 침투할 틈이 없는 철옹성이었다.
하지만.
‘그 철두철미함이 단서가 됐어.’
일정 지역 부근. 모든 장치가 과도하게 몰린 곳이 있었다. 수차례 부하들이 검증한 그곳. 그곳이 바로 세계수를 숨겨둔 곳인 게 분명했다.
“시작해.”
명령과 동시에 부하 하나가 양손을 모았다.
-파직!
스파크와 함께 충격파가 사방으로 퍼졌다. 이로써 CCTV는 잠시 먹통이 되자 강백호는 부하들을 이끌고 예정된 포인트로 달려나갔다.
[그림자 장막.]
그림자가 모두의 몸을 감쌌다. 기척을 차단하는 숨겨둔 스킬이었다.
‘이거라면 동물들의 눈도 피할 수 있겠지.’
-쾅!
산의 반대편에서 굉음이 터졌다. 유인조가 활동을 시작했다는 의미. 지금부터는 시간 싸움이었다.
‘저들이 제압되는 사이. 적어도 세계수를 찾아야 해.’
숨겨둔 무기인 그림자의 힘을 사용하더라도 우노, 도리 등 모두와 싸워서는 승산을 장담하기 힘들었다. 가벼운 훈련 대전이었지만 강백호는 확신했다. 그들 하나하나 S급 헌터에 필적하는 실력이라고.
“대장님! 여기입니다!”
부하 하나가 멈춰섰다. 일전에 탐색조가 관광객으로 위장해 들어갔던 장소. 길을 잃게 만드는 결계가 펼쳐진 장소였다.
“비켜.”
검은 기운이 오른손에 몰려들었다. 이내 검게 물든 주먹으로 허공을 두드렸다.
-콰직!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허공에 균열이 떠올랐다.
“합!”
기합과 함께 다시 한번 주먹을 내지르자 균열이 커지더니 이내 와르르 무너져내렸다.
“이번에야말로······.”
마치 유리처럼 부서진 음습한 숲 대신 반딧불이가 빛을 비추는 새로운 언덕이 나타났다. 월광에 비친 땅에는 균일하게 자란 잔디가 가득하고 나무는 이제껏 보아온 나무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생명력이 넘쳤다.
한눈에 봐도 범상치 않은 장소.
그리고 그 한 가운데 더 범상치 않은 물푸레나무가 보였다.
“..찾았군.”
쭉 뻗은 가지. 굵은 나무줄기. 보기만 해도 마음이 편안해지는 느낌. 15년 전 그것과 비슷하지만, 훨씬 신비로운 물푸레나무.
“세계수.”
세상에 풍요와 화합을 가져온다는 나무. 나무를 지키는 이에게는 세상의 풍요와 평화를 가져올 힘을 준다는 전설의 신목.
동시에,
이 세상의 헌터를 모두 무용지물로 만들고, 다시 혼란을 가져올 존재. 나아가 자신이 이룩하고 가진 모든 것을 앗아갈 존재.
강백호는 단호하게 말했다.
“태워.”
“넵!”
부하 하나가 허리춤에 차고 있던 방망이를 꺼내 휘둘렀다. 그러자 횃불처럼 방망이 위에 불꽃이 피어올랐다.
과거 금수산과 마을을 한번 태웠던 불씨가 다시 한번 세계수를 덮치려는 순간이었다.
-쿵!
그 순간 하늘에서 무언가 떨어져 내렸다. 검은 신형은 그대로 자신의 부하 하나를 짓밟아 죽인 후 들고 있던 횃불을 낚아챘다.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되는가···.”
불꽃이 신형의 얼굴을 밝힌다. 주름진 얼굴을 본 강백호가 중얼거렸다.
“우노···.”
그 뒤로 보이는 우거진 수풀 속. 여러 개의 기척이 느껴졌다. 그 기척의 가운데에 선 남자가 말했다.
“결국, 저지르셨군요.”
“김서준.”
“어르신. 한 가지만 묻겠습니다.”
김서준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15년 전 저희 마을에 몬스터의 습격으로 큰 화재가 일었습니다.”
“....”
“...그날 그 사건과 어르신은 관계가 있으신 겁니까?”
말하는 김서준의 목소리가 떨렸다.
‘여기까지 와서 숨길 것도 없겠군.’
강백호는 덤덤히 그리고 나지막이 평소처럼 말했다.
“그렇다.”
“강백호!!!”
그 순간 엄청난 기세가 강백호를 덮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