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 의외의 부탁
[서재명 이사, 책임 퇴진이 아닌 비리? 이면 계약 강요로 내부 감사 진행 중.]
[대기업의 갑질! 서재명 이사가 벌인 갑질들, 줄줄이 밝혀져 충격!]
[영웅도 예외는 아니다! 김서준에게 조차 그의 갑질은 멈추지 않았다!]
MP사 서 이사에 대한 기사를 보던 정 회장은 휴대폰을 내렸다.
“역시 만만치 않은 친구야.”
감정적인 복수만 한게 아니었다. 복수를 통해 이득도 취했다. 서재명 이사의 반대 라인에 서있던 이들은 이번 사건에 대한 대가로 김서준의 요구를 모두 받아들였으니 말이다.
김서준으로서는 얻을 수 있는 건 모두 얻은 셈. 정 회장은 새삼 그 수완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회장님의 눈이 역시 정확했던 거 같습니다.”
운전기사가 정 회장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그래. 그런 친구를 적이 아닌 친우로 둬서 다행이지.”
“새로 제안한 사업도 좋은 거 같습니다. 종자업
이라니. 과연 서준 씨 다운 생각이네요.”
정 회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IMF시절 한국의 종자 산업은 망했다. 잘 나가던 회사는 외국에 매입된 건 물론 대다수의 종자가 외국의 것으로 대체 되었기 때문이다.
‘압도적인 세계 1위 종자 회사 몬칸토가 독점한 시장이나 마찬가지지.’
몬칸토가 국내 종자 기업을 모조리 집어삼킨 여파였다.
이제와서는 종자 전쟁을 통한 종자 독립이 필요하다며 정부가 나섰어도 해결할 방법이 없는 게 이 시장이었다.
‘하지만 미트루트, 사비오 같은 특수작물 토종 작물로 승부보는 김서준이라면 이야기가 다르지.’
몬칸토와 차별화된 완벽히 다른 종자. 그를 통한 종자 독립은 가능해 보였다.
‘아니, 충분하겠지. 그러면 독과점이 해결되면서 농부들도 한결 편해질 거고.’
사업가답지 않게 혼자 잘사는 게 아닌, 지속 가능한 발전을 도모하는 사업. 기사의 말대로 김서준다운 사업이었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건 그 뒤에 내용이야.’
김서준은 분명 이렇게 말했다.
[제가 개발한 종자가 땅에 자리를 잡으면 게이트 청정 구역이 됩니다. 저는 제 사업으로 게이트 없는 세상을 만들려고 합니다.]
정 회장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하지만 그 굳은 표정, 그리고 김서준의 평소 심성을 생각할 때 절대 헛말을 했을 리 없다.
[단순한 사업이 아닌 세상을 바꾸는 일이기에 가장 믿을 수 있는 사업 파트너인 회장님과 함께하고 싶습니다.]
김서준의 그 말은 정 회장의 가슴에 와 닿았다. 한낱 사업가의 힘으로 지역도 나라도 아닌, 세상을 바꾸는 일을 도울 수 있다니. 그 얼마나 가슴 뛰는 일이던가.
“...그래서 회장님이 거기서 거절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무언가 걸리는 거라도 있으신 겁니까?”
김 기사가 창밖을 바라보는 정 회장을 백미러로 보며 물었다.
“거절은 아니야. 받아야지. 하지만 말이야.”
정 회장은 저 멀리 김서준이 일군 아름다운 풍경을 바라봤다. 그리곤 넌지시 물었다.
“김 기사. 우리가 저 위에 건물을 짓고 여길 도시로 바꾼다면 모두가 행복할까?”
“반발하는 사람도 많지 않을까요? 재개발이 시작되면 이런저런 파리들이 꼬이니까요. 강제로 떠나야 하는 사람도 생길 거고.”
“그래. 아주 좋은 조건을 제시해도 누군가는 반발하겠지. 세상을 바꾼다는 건 그런걸세. 그 세상에서 잘살고 적응한 사람이 존재하기 마련이지. 아무리 힘든 세상에도 말이야.”
****
“왔구나.”
“형님!”
“대장!”
“스승님!”
장인섭의 무뚝뚝한 첫인사. 그 인사에 반쯤 감격한 장인들이 소리쳤다. 감격스러운 얼굴로 인사했다. 각자의 호칭으로 장인섭을 부르며 달려간 이들은 치매를 완벽히 극복한 장인섭을 보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드워프의 거친 훈련 속에 잔뜩 벌크업 한 장인섭은 넓고 굵은 팔로 그들을 다독였다.
“형님 예전보다 더 건강해진 거 같소!”
“이 팔뚝 좀 보게. 서준이가 먹을 것도 잘 챙겨주나보오!”
오랜만에 만난 소회를 잔뜩 풀던 장인들이 다시 김서준에게 다가왔다. 그리곤 고개를 푹 숙이며 말했다.
“정말 고맙네!”
“이렇게 다시 모두가 모이게 될 줄 꿈에도 몰랐어!”
“자네 아니었으면 꼼짝없이 MP사에 묶여있었을 걸세!”
서 이사의 악덕 계약에서 풀려난 장인들은 다시 한번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김서준이 멋쩍은 미소로 대꾸하자 그걸 보던 장인섭이 말했다.
“자, 인사는 그쯤하고 이제 가자고. 다들 망치질하러 온 거잖아!”
“넵!”
우렁차게 대답한 장인들은 장인섭의 뒤를 따라 걸었다. 행선지는 당연히 공방이었다.
“엄청 크네!”
“대단하군!”
-탕! 탕!
망치 소리가 사방에서 울려 퍼졌다. 땀을 뻘뻘 흘리는 장인들은 사정없이 망치를 두들겼다. 드워프의 특별한 불이 들어간 가마에서 뿜어진 열기는 마법으로 환풍 되고 있음에도 공간을 가득 채웠다.
“앞으로 일하실 공방입니다.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 이야기해주세요.”
드워프 삼형제와 김서준, 장인섭이 함께 설비한 공방은 어마어마한 규모를 자랑했다.
“두근두근하지?”
감탄에 입을 떡 벌리는 장인들에게 장인섭이 자랑하듯 말했다. 그러자 장인들이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누군가는 벌써 망치를 휘두르고 싶은지 주먹을 불끈 쥐기도 했다.
“하지만 그 전에 볼 분들이 있어.”
장인섭이 말하자 기다렸다는 듯, 세 사람이 걸어나왔다.
“이게 우리 제자의 팀원들인가.”
“하나같이 비실하구만.”
장인들은 어디 가서 시비는 걸리지 않을 만큼 건장했지만, 우노는 혀를 끌끌 찼다.
“뭐?”
“넌 뭔데..”
먹을 만큼 나이를 먹은 장인들이 아니던가. 건방진 우노의 태도에 반발하려 할 때, 장인섭이 먼저 고개를 조아렸다.
“스승님들 오셨습니까. 모두들 인사해. 앞으로 우리에게 기술을 가르쳐 주실 우노, 도스, 트레스 스승님들이시다.”
“스, 스승님이요?”
“그럼 그게 내가 만든 기술인 줄 알았어? 다 저분들이 알려주신 거지. 앞으로 우리 길드는 모두 스승님의 가르침을 받고 명령을 따를 거야. 불만있는 사람은 지금 당장 나가라!”
장인섭이 소리쳤다. 잠시 당황한 장인들. 그러나 판단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정신적 지주인 장인섭을 따라 장인들은 고개를 숙였다. 장인섭은 뿌듯한 얼굴로 말했다.
“하나같이 부족한 녀석들입니다. 저만큼, 아니 저보다 더 혹독하게 굴려주십쇼!”
“클클. 더 혹독하게라.”
“재밌겠어. 클클.”
그때 장인들은 몰랐다. 드워프들의 그 웃음이 무슨 의미인지를.
장인들의 합류로 공방의 설비를 마친 김서준은 다시 밭으로 나왔다.
“멍멍!”
밭에는 새로운 농기구로 잔뜩 신이 난 리노가 땅을 개간하고 있었다. 얼마 전 수확을 마친 밭은 리노의 놀이터나 다름없었다.
“리노 공! 서두르라움! 이러다 진다움!”
그 옆 밭에는 고다이노 장난감을 연상시키는 트랙터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노움은 뚜껑이 없는 트랙터 한 대를 몰며 리노를 도발하고 있었다.
“멍!”
그러자 도발에 넘어간 리노가 속도를 올린다.
“또 저러네.”
놀이처럼 일하는 건 좋지만, 둘이 모는 트랙터나 호리가 장난감은 아니지 않은가. 자칫 실수하면 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기에 너무 흥분하지 않게 타이르려는 찰나.
“리노! 이겨라!”
“노움 화이팅!”
구경 온 관광객들은 저마다 좋아하는 캐릭터를 응원하는 소리가 들렸다. 트리 위에서도 현란하게 움직이는 리노와 트랙터들을 보며 환호하는 게 보였다.
“어쩔 수 없지."
김서준은 이번만은 넘어가 주기로 하고 팔짱을 낀 채 잠시 구경하기로 했다.
-쿠구구구!
“멍멍!”
확실했다. 녀석들은 이 상황을 즐기고 있었다. 노움은 괜히 베기음을 키우기도 하고 대형도 맞추며 관객들의 눈을 즐겁게 했다.
리노 역시 이제는 능수능란하게 다루게 된 호리를 괜히 들썩이며 화려하게 움직였다. 호리가 마치 농기구가 아닌 거대한 장식처럼 느껴질 정도.
‘농사 쇼를 할 필요가 없네.’
사랑받는 법을 타고난 귀여운 녀석들은 관객들이 한시도 눈 떼지 못하게 만들며 개간을 완료해 나아가고 있었다.
‘개간 다 끝나면 한동안 안타까워서 어쩌려나.’
아무래도 트랙터나 호리처럼 다른 시기에 사용할 농기구도 만들어줘야 할 거 같았다.
*****
“부상자는?”
“없습니다!”
포털을 빠져나온 헌터들이 도열했다. 각, 팀장들은 자신들의 팀원을 확인하곤 보고를 이어갔다. 이제는 익숙해진 절차에 따라 헌터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청룡길드 전원 복귀했습니다.”
“에픽 길드도 무사히 복귀 완료했습니다.”
전소민과 정현민이 대답하자 묵묵히 헌터들을 바라보던 강백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무리하지.”
짧고 낮게 울리는 한마디. 정현민이 그 말을 듣고 소리쳤다.
“모두 고생하셨습니다!”
“와!!!”
모든 훈련이 끝났다는 사실에 헌터들의 우뢰와 같은 함성이 터져 나왔다.
“다들 많이 힘들었나 보네요.”
옆에서 보던 전소민이 웃음을 터뜨렸다.
“몬스터에 체력 훈련에 농사까지. 다들 한계까지 훈련했으니까요. 그럴만하죠. 저도 얼른 가서 온천에 몸 담그고 싶네요.”
“하긴, 저도요.”
대답하는 전소민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기대 이상의 훈련 성과 덕이었다.
‘서준이 덕이야.’
영약이라고 해도 믿을 말도 안 되는 음식들.
미트루트 포션과 온몸에 피로를 풀어주는 온천.
거기에 생전 보지도 못한 몬스터가 우글거리는 던전까지.
‘이거라면 지옥으로 변했다는 북한에서도 할만할 거야.’
금호 영농조합에 대한 홍보와 금천면, 나아가 천산군에 대한 홍보.
미트루트를 비롯한 금호 영농조합이 운영하는 여러 가지 사업에 대한 광고 등 대가가 있다지만, 그에 비해 받은 게 너무 컸다.
‘출정 전 마지막 협의를 하자고 했지. 여기서 뭔가 더 해줄 수 있으면 해줘야 겠다.’
전소민이 김서준을 떠올리며 생긋 웃었다.
“자, 그럼 돌아갈까요?”
돌아온 헌터들은 온천에서 몸을 씻은 후, 각자, 일주일 동안 집으로 돌아가 자유시간을 가지기로 했다. 다른 길드 장들과 협의한 후 내린 일종의 보상 시간이었다.
‘휴식도 중요하니까.’
물론 전소민 자신은 그럴 생각이 없었다. 금산마을에서 김서준과 시간을 더 보내고 싶기도 하고, 훈련도 더 하고 싶었다.
“그나저나 너무 받기만 한 거 같은데...뭘 해준다고 하지?”
김서준의 사무실로 가는 길.
전소민은 이런저런 생각을 해봤다.
광고에 출연한다고 할까. 엘린의 너튜브나 인별에 함께 나오겠다고 할까. 청룡 길드에 헌터들을 경비로 파견해준다고 할까?
뭘 해도 받은 게 너무 많아서 부족해 보였다.
‘장비나 포션에 대한 전속 계약은 당연하고. 식재료 계약을 하면 좀 도움이 되려나.’
전소민은 못 내 아쉬워하며 사무실로 들어갔다.
“왔어?”
맞이하는 김서준의 뒤로 이미 와있는 길드장 들이 보였다. 이제 이 장소에서의 회의도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 못내 아쉬웠다.
“다음 주에 출정하나요?”
“아마도 그럴 거 같아.”
“중국보다는 먼저 움직여야 하니까요.”
“이제 진짜 시작이군요.”
김서준의 말에 정현민이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강백호는 차만 홀짝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동안 금천면에서의 추억을 나누다 전소민이 생각했던 화두를 던졌다.
“아, 근데 우리가 받은 게 많은 데 정말 홍보만으로 괜찮겠어? 우리가 더 해줄 게 없을까?”
그러자 정현민이 맞장구를 쳤다.
“맞아요. 홍보 좀 해드리고 계약하고 물건 사드리는 것 말고 또 할 게 있으면 좋을 거 같은 데...”
“역시 그렇죠?”
김서준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대답했다.
“사실 부탁드릴 게 있습니다. 어쩌면 제가 드리는 부탁 중 가장 중요한 부탁이 될 거 같습니다.”
“그게 뭡니까?”
“뭐든 말만 해.”
연기가 솔솔 올라오는 향긋한 사비오 차를 살짝 홀짝인 김서준은 세 사람을 한 번씩 바라봤다. 그리고 진지하게 말했다.
“북한에서 농사를 짓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