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 씨앗
“좋게좋게 하자고.”
강한 어조의 말이 남자의 입에서 튀어나온다. 그러나 말과는 달리 표정에는 초조함이 역력하다.
“피차 손해 볼 게 없잖아? 막대한 자금력과 인프라가 지원될 거야. 연구진은 물론, 인력도 엄청나겠지. 단숨에 그 작은 영농조합이 탄탄한 기업으로 변모하게 될 거라고.”
남자의 제안은 상대를 타이르는 것을 넘어 보채는 것처럼 들리기도 했다. 그러나 수화기 너머 남자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걸 왜 너희랑 해야 하지? 투자를 하겠다는 회사는 차고 넘친다.]
“그 투자가 어떤 의미인지는 너도 잘 알텐데?”
[그래. 이미 당해봤지. 너희 MP사에게 말이야.]
‘젠장.’
괜한 부스럼을 건드렸다는 생각에 서 이사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씹었다. 그러나 차분하게 마음을 다잡고 다시 입을 열었다.
“그때랑은 다를 거야. 한번 그랬는데 또 그럴 수 있겠어? 기업은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아. 그러니까 대기업이 된 거고.”
[실수라... 그게 실수 였다는 건가?]
“실수였고 오만했지. 네 능력을 제대로 못 알아봤으니 말이야. 그 부분에 대해서는 다시 한번 사과하지.”
-까득.
불끈 쥔 서 이사의 주먹에서 관절이 두둑거리는 소리가 났다. 진심에도 없는 사과와 인정이라지만 역시 이런 말을 입에 올리자니 토가 쏠린다.
‘참자. 지금은 가식을 부려서라도 이 자식을 잡아야 해.’
헌터 사업의 존망. 이건 단순한 경영권을 넘어 회사의 시간과 자원이 대폭 투자된 일이지 않던가.
‘우리의 연구개발이 무용지물이 된 상황에 유일한 탈출구는 이 새끼뿐이야.’
마법학이니. 마법공학이니.
전 세계 어딜 뒤져도 그런 기술은 없었다. 정보통을 통해 알아본 바 김서준이 가진 독보적, 독자적 기술이었다.
‘사기는 더더욱 아니었지.’
눈으로도 봤고, 금산마을에서는 이미 더 많은 증거들이 제작에 들어갔다고 했다.
이런 상황에 아무리 공을 들여 개발했다 한들 허접한 양산형 장비 기술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쓰린 속을 삼킨 서 이사가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다른 대기업들이 지난 우리와 같은 속셈으로 다가온 걸 모르지 않을 테지? 반면 우리는 이미 한번 데인 상황에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금호 영농조합과 파트너쉽을 제안하고 완벽하게 협력사로서 대우하지.”
[한번 속인 사람이 두 번 못 속이겠느냐고 생각하는 게 맞지 않나?]
“그렇게 생각한다면 우리가 사람을 잘 못 본거고.”
[잘 못 봤어. 그럼 통화는 이만하지. MP사의 무운을 빈다.]
“자, 잠깐만!!”
서 이사가 당황에 소리쳤다.
‘이런 *새끼! ’
이를 단단히 갈았어. 어줍 잖은 도발은 먹히지도 않겠군.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한번 상황을 깨닫는다. 이제는 인정해야 했다. 살면서 단 한 번도 느껴 본 적 없는 기분.
‘MP사가, 내가 을이라니. 씨발!’
당황이라니. 조급함이라니. 부탁이라니. 사과라니. 꿈에서도 일어나지 않을 일과 감정을 느낀다.
그러나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방금의 소리침에 서 이사는 철저하게 현실을 께달았다.
“그래. 네가 어떤 상태인지 잘 알겠어.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엘리트답게 그는 빠르게 현실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내가 뭘 어떻게 하면 우리 제안을 받아주겠어?”
[...]
잠깐의 침묵이 이어지고 수화기 넘어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일단 그 재수 없는 반말부터 그만두지.]
“뭐?”
[뭐?]
“아...아닙...니다...”
그리고 서 이사는 깨달았다.
현실은 생각보다 더 암울했고, 실수의 대가는 생각보다 훨씬 더 많은 자존심과 돈을 필요로 한다는 걸.
****
“대단하군.”
오랜만에 금산마을까지 직접 행차한 정회장은 차를 한 모금 들이키며 감탄은 터뜨렸다. 민트도 아닌 것이 머릿속을 맑게 하는 은은한 박하 향을 풍기고 그 끝에는 아련한 단맛을 남기니, 서둘러 다시 한 모금을 마시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이건 팔 생각이 없는 건가?”
“죄송하지만 이건 어쩔 수 없습니다. 사비오는 한 그루밖에 없어서요. 그 한그루도 겨우 키워 낸 거 구요.”
“소량에 프리미엄을 붙이면 되지 않겠나. 송이버섯처럼 말일세.”
축복받은 송이버섯.
이제는 한국 대표 상품이 된 송이버섯은 벌써 수년 치 예약까지 경매가 끝나있었다.
일반인이 먹으면 다시 태어났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대단한 효능을 자랑하는 건 물론, 헌터들이 먹었을 경우 능력치 10% 상승효과가 알려진 덕이었다.
‘송이버섯만 재배해도 농장 운영에 지장이없을 정도였지.’
하지만,
“사비오는 어렵습니다. 그 정도 양도 안 되고..”
김서준이 코로 들어오는 기분좋은 향기를 맡으며 말했다.
“제 주변 사람들이 너무 좋아해서요. 그들이 우선이니까요.”
대답을 들은 정 회장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고향을 지킨다느니, 터전을 만들겠다느니 할 때부터 그랬지만, 자네는 참 사업가답지 않은 인간적인 면이 있어. 뭐, 그게 자네 매력이지만...”
“배려 감사합니다.”
“그렇게 감사하면 지금 할 얘기에서 양보를 좀 하지.”
지금 할 이야기. 역시 그거였나.
찻잔을 다시 한 모금 들이키고 정신을 차린 김서준이 귀를 기울였다.
“정녕 우리가 아닌 MP사와 기술 제휴를 맺을 셈인가?”
송이버섯 판매는 물론,
청룡 길드에 대한 후원과 지원. 그리고 협력. 하늘 농원 브랜드를 통한 농사까지.
IW그룹이야 말로 김서준의 진정한 파트라 부르기에 손색이 없었다.
‘회장님 입장에서 기술 제휴를 맺지 않은 게 이상할 건 당연하지.’
김서준도 처음에는 그러려고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MP사와 하려고 합니다.”
“우리라면 어느 정도가 되든 자네에게 모든 조건을 맞춰 줬을 텐데? 물론 신뢰도 더 높았을 거고.”
“아니요. 이번에는 MP사처럼 투자금을 맞추기 어려우셨을 겁니다. 다른 조건도 그렇구요.”
“우리를 무시하는 군. 아무리 MP사가 재계서열로 우리보다 높다지만, 그 정도는 아닐세.”
정회장이 심기가 불편한 지 언성을 올려 대답했다. 그러자 김서준은 손가락을 쫙 펼쳤다.
“5배 였습니다.”
“5배?”
“제가 MP사에게 부른 금액. 회장님이 부른 투자금의 5배였습니다.”
“5배라니. 그럼 1조를 받았다는 건가?”
김서준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허허...’
김서준의 기술은 대단한 발견이었다.
‘하급 헌터들이 더 많은 문제를 해결하는 건 물론, 일반인도 몬스터에 대응할 수 있게 되는 거니까.’
당장 그 무기들이 출시되면 많은 민간인과 하급 헌터는 물론, 몬스터 앞에 무릎 꿇었던 군관 역시 막대한 물량을 매입하려 들게 분명했다.
하지만 딱 그 정도.
‘리스크도 만만치 않아.’
만든 무기의 성능, 생산성 등 아무것도 확실한 게 없지 않은가.
‘사업으로 연결될 정도의 성과가 나지 않거나 실효성이 없는 기술로 끝날지도 모르지.’
많은 초기 기술에 대한 투자가 지지부진한 게 전부 이 때문 아니던가.
‘이미 효과가 입증된 미트루트 포션과는 달라. 그런데 그 투자비용으로 1조를 받았다는 건가?’
그 MP사가?
그럴 리가 없다. 그런 바보 같은 선택을 했을리가 없다.
가능성이 있다면 단 하나.
“자네, 무슨 수작을 벌인 건가? 설마 이사가 사퇴한 것도 그와 관련된 건가?”
김서준은 씽긋 웃으며 차를 홀짝였다. 무언의 긍정. 순간 정회장은 저도 모르게 간담이 서늘해지는 걸 느꼈다.
“방심할 수가 없다니까. 역시 자넨 천상 사업가야.”
정 회장이 미리 그를 알아보고 가깝게 지낸 자신의 눈에 다시 한번 자부심을 느끼며 말했다.
“그래 그럼, 어떻게 구워삶은 건지 무용담 한번 들어볼까?”
*****
“씨발.”
욕을 지껄인 서 이사는 한숨과 함께 의자에 몸을 묻었다. 얼굴에는 비릿한 조소가 흘렀다.
“드디어 끝났네. 개같은 새끼.”
인생 최악의 시간이었다.
“장인들 보내면서 이렇게나 돈을 받겠다고?”
“어차피 안 쓰는 연구 설비 좀 넘기는 데 비용이 좀 크네?”
반말을 지껄이며 이어지는 말도 안 되는 소리들.
“그, 장인들이 계약할 때 쓴 비용만이라도 회수할 최소한으로 책정했...습니..다...”
“연구 설비는 다른 사업쪽으로도 충분히 바꿀 수 있는 설비입니다만....”
거기에 고개를 조아리며 무려 존댓말로 대답해야 했다.
‘아버지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이런 일이라니...’
그뿐만일까.
계약으로 잡아뒀던 장인들은 말도 안 되는 조건으로 넘겼다.
연구 투자 역시 막대한 리스크를 고려했다고 생각할 수 없이 엄청난 금액을 산정했다.
모든 계약을 마치 우리가 을인 중소기업처럼 계약했다.
방법이 없었다.
‘녀석은 내 상황이 어떤지 다 알고 있었어.’
여기서 실패를 인정하는 순간 자신이 어떻게 될지 김서준은 아는 게 분명했다. 또한 자신이 가진 기술의 가치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도 했다.
하지만 괜찮았다.
‘머리를 숙이는 건 지금뿐일 거다.’
김서준은 이면계약에 동의했다.
즉, 대외에는 정상적인 계약을 체결한 척 뉴스를 내보내고 자신의 위상을 지킬 수 있다는 이야기.
‘빌고 빌어서 겨우 얻어낸 대가지.’
김서준에게는 이사에서 퇴진하고 경영에서 손을 뗄 테니 제발 체면만 세워달라고 빌어 얻어낸 조건이었다.
아둔한 김서준은 이걸 받아줬다.
‘멍청한 놈. 오너 일가가 괜히 오너인 줄 알아?’
결국, 계약은 이뤄졌으니 체면은 세웠고.
출혈은 있지만, 사업도 결국 무너지지 않았다.
이렇게 어떻게든 수습만 해낸다면 주식을 쥐고 있는 오너 일가는 무너지지 않는다.
‘조만간 이번 일. 다 꼭 돌려주마. 아니 배로 돼 갚아주지.’
자본시장에는 결국 돈이 답이자 힘.
중소기업의 기술 따위 자본사회에서 아직 따지 않은 과실이나 마찬가지였다. 청룡 길드가 그랬지 않는가.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지금은 이렇게 꿇었지만, 이제 자본이 천천히 녀석들의 기업으로 스며들 것이다. 내부의 불안이 커지고 갈등을 키워 낼 거다.
‘김서준이 눈앞에 황금에 눈이 먼 사이 말이지.’
모든 준비가 끝나는 그 날.
그 날, 김서준은 이보다 더 큰 치욕을 견뎌야 할 터 였다.
[MP사의 마이다스의 손에서 마이너스의 손으로. 서재명 이사 전격 퇴사.]
서 이사는 뉴스에 적힌 자신의 기사를 죽 찢었다. 그리곤 서랍에 챙겨 넣었다. 지금 받은 이 치욕을 기억하기 위함이었다.
‘기필코 배로 돌려주마.’
서 이사는 지금의 분노를 식히고 스스로 모욕을 견뎌낸 자신은 달래고자 방 한카에 마련해 둔 작은 냉장고를 열었다.
그리곤 쟁여둔 위스키 한잔으로 작은 축하와 복수심을 몸 안에 채웠다. 그때였다.
-똑똑.
“뭐야?”
들어오라고 소리치자 문이 열렸다.
“이, 이사님 그게...”
쩔쩔 메는 비서의 뒤로 검은 양복의 남자들이 쭉 늘어섰다. 남자들의 목에는 감사팀 소속임을 알리는 명찰이 걸려 있었다. 그리고 그 앞으로 한 명이 나섰다.
“사내 감사팀 소속 한영민 부장입니다. 해사 행위 혐의에 대한 사내 감사 진행에 협조 부탁드립니다.”
“뭐?”
“전부 압류해.”
외마디 의문을 무시한 채 양복의 사내들이 움직이자 서 이사는 끝내 괴성을 내질렀다.
*****
이야기를 전부 들은 정 회장이 놀랍다는 듯 말했다.
“...그걸 다 이면 계약으로 체결하고. 마지막엔 그걸 빌미로 녀석의 목을 치겠다고?”
“네. 파트너라는 건 믿을 수 있어야 하는 거 잖아요. 회장님과 저처럼. 세상 누가 서 이사를 믿겠어요?”
“하지만 그렇게 하면 자네도 문제가 될 텐데? 새로운 이사가 호의적이라는 보장도 없고.”
김서준은 빙그레 웃었다.
“설마, 감사팀을 움직일 쪽과 사전에 접촉하고 있었던 건가?”
“그보다 좀 더 가깝습니다. 리스크가 있으니까요.”
“더 가깝다? 설마 자네 사람을 심은 건가?”
김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휴대폰이 울렸다.
[한영민 부장]
한때 자신의 오른팔이자 전소민의 비서.
그리고 소민이가 재기를 약속한 그 날, 김서준이 MP사에 심은 씨앗의 이름이 휴대폰 위로 떠 오르자 김서준은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