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농사로 꿀 빠는 헌터-116화 (116/139)

116. 이 정도는 되야지

“몸 안에 이상한 게 느껴지네. 마치 마나가 몸 안을 돌아다니는 느낌이랄까? 서준아, 이것도 네가 준 약의 효과냐?”

사비오로 만든 약을 먹은 장인섭의 말에 김서준은 화들짝 놀랐다.

‘설마 마나를 느낄 수 있게 되는 건가?’

김서준은 그 길로 엘린에게 부탁해 사비오 진액을 하나 더 만들어 복용했다.

“신기하네.”

그리고 김서준의 생각이 맞았다는 것을 확인했다. 실처럼 느껴지던 기운이 이제는 꽤 선명하게 느껴졌다.

마치 혈관에 흐르는 피가 느껴지는 듯한 묘한 기운. 그뿐만이 아니었다.

[천천히 몸 안의 마나 회전을 반대로 바꿔보겠습니다.]

차분히 눈을 감고 도리의 말처럼 마나를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실낱같은 기운으로 겨우 흉내만 내던 이전과는 완전히 달랐다.

‘어르신은 이렇게까지는 못한다는 거 보면 훈련의 성과겠지.’

매일 아주 미세한 마나라도 느껴보려고 했던 훈련이 뒤늦게 효과를 드러내고 있었다.

이건 대단한 발견이었다. 단순히 김서준이 강해질 가능성이 생겼다는 수준이 아니었다.

‘마법학이나 마공학에 대해 이제 제대로 다룰 수 있는 조건이 마련된 거지.’

스킬로만 마나를 사용하는 일반 헌터들은 마법학을 다루는 데 명확한 한계가 있었다.

‘어느 정도 틀 안에서만 기술을 사용할 수 있다는 거지.’

마공학은 특수한 재료의 힘을 빌어야 했고, 마나로 마법진을 그려내야 하는 마법학은 이론을 익히는 게 전부였다.

‘하지만 마나를 조금이라도 다를 수 있다며 다르지.’

미약하지만 간단한 마법진은 그려낼 수 있고, 재료의 잠재능력이나 없던 능력을 부여할 수도 있었다.

‘장인들의 능력이 한껏 더 크게 발휘될 거야.’

헌터들을 강하게 무장시키고, 헌터 시장을 선진화시키려던 계획이 날개를 단 셈이었다.

물론 먼저 계획을 이륙부터 시켜야 했지만.

“장인들은 여전히 무응답이야?”

“반응은 했고-블. 하지만 저희의 접촉을 의식한 MP사가 연봉을 인상하면서 다들 그냥 머물기로 한 거 같고-블.”

“역시 그런가···.”

MP사다운 반응이었다. 기업의 막대한 자본력으로 장인들을 지키리라는 건 예상했다. 하지만 장인섭이 정말로 자리에서 일어나면 이야기가 좀 다를까 했는데, 아니었다.

‘그렇다고 자본으로 부딪힐 순 없고···. 역시 그 방법으로 해야겠네.’

김서준은 결단을 내렸다.

“고블 일단, 길드 하나 설립 신청해줘. 장인 길드로.”

“알겠고-블.”

“그리고 지난번에 말했던 거 기억하지?”

“한국 헌터 박람회 말씀인고-블?”

헌터 박람회.

일종의 헌터들이 모이는 축제였다. 여기서는 새로운 유망주들이 나오기도 하고, 길드에서 얻은 아티펙트를 자랑하기도 했다.

“응, 거기 참석할 수 있게 신청해. 분야는 헌터 기술로.”

****

토종 작물이란 그 땅에 잘 적응하고 살아가는 작물이다. 다시 말하면 아무리 붙어 있다 한들 조금만 조건이 달라도 다른 토종 작물은 달라진다는 이야기.

금천면에 바로 옆에 붙어 있는 신황면이 그랬다. 옆에 하천을 끼고 있고 물이 많은 신황면은 밭농사보다는 논농사가 더 잘 어울렸다.

‘원래 주종이 쌀이기도 하고.’

김서준과 임종철은 상의 끝에 신황면에는 토종 작물로 쌀을 선정했다. 밥을 지었을 때 형태가 고스란히 유지되고 윤기도 아주 좋은 데다 단맛과 구수한 향도 탁월했다.

‘거기다 품종을 강화해뒀지. 아마 유례없는 맛있는 쌀이 될 거야.’

잘 익어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인 벼들. 김서준은 그 벼를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아이고, 오셨습니까.”

신황면 흰돌마을의 이장이 김서준을 환하게 맞이했다. 40대에 일찍 귀농해 마을 대표 청년 농부이자 이장을 맡은 그는 풍채가 좋았다.

“정말 수확하시는 겁니까?”

김서준에게 꾸벅한 이장이 잘 익은 논을 보며 말했다. 본래 영호진미는 10월이 수확기. 그러나 김서준은 품종을 강화한 덕에 한 달 앞선 9월에 수확할 수 있었다.

“네. 제 논을 시작으로 이제 다들 수확을 시작하면 될 겁니다.”

김서준의 말에 이장이 걱정스럽다는 듯 이야기했다.

‘그럴 만하지. 수확기를 당기는 품종 개량은 처음 겪으셨을 테니까.’

품종 개량은 병충해에 강해지거나, 온도, 가뭄 등에 강해지는 수확 과정을 수월하게 만드는 과정. 그러나 김서준과 엘린의 품종 개량은 성장 속도까지 영향을 준다고 하니, 농부들이 낯설어할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김서준은 먼저 쌀을 수확하고 직접 그들에게 수확기라는 걸 보여주기로 했다.

“꽥꽥!”

논 사이로 토리들이 돌아다니는 게 보였다. 토리들은 벌레나 잡초를 먹는 건 물론, 종종 보이는 들짐승을 퇴치하는 역할도 하고 있었다.

“저기 너구리다움! 몰아내라움!”

“멍멍!”

김서준을 따라 나온 노움이 토리 한 마리의 등에 탄 채 소리쳤다. 그러자 벼를 가르며 리노를 필두로 토리들이 우르르 물려 갔다.

잠시 후 너구리 한 마리가 도망치고 노움과 토리들이 승리를 만끽했다.

“진짜 신기합니다. 오리가 너구리를 몰아내질 않나. 어제는 멧돼지도 몰아내더군요.”

“오리가 아니라 토리니까요.”

김서준이 씽긋 웃으며 대답했다. 그 사이 마을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이 정도면 마을 사람은 대부분 모인 거 같았다.

“자, 그럼 시작해볼까요?”

김서준은 맨몸으로 논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이장이 물었다.

“아니, 일일이 손으로 수확하시게요?”

“네? 아니요?”

“그럼 왜 빈손으로···. 견적 보시게요? 아니면 헌터 스킬 중에 벼를 수확하는 스킬도 있나요?”

“비슷한 게 있습니다.”

김서준이 웃으며 손을 들었다. 그러자 황금색 빛이 하늘로 모여들었다.

“저게 뭐여.”

“헌터 스킬로 뭔가 하는가 본데?”

김서준의 수확을 구경나온 마을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기왕 하는 거 화려하게 해볼까.’

몸소 구경하러 와주신 어르신들께 눈요기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김서준은 방금까지 떠올렸던, 평범한 콤바인 하베스터(Combine Harvester) 를 머리에서 지웠다.

그리고 논 전체를 덮을 수 있을 만큼 긴 수확기를 단 거대한 콤바인을 떠올렸다.

“어어?”

“저, 저거 괜찮은 거 맞지?”

“엄청 큰디?”

걱정하는 마을 사람들과 달리, 뭔가 신기한 게 나오는 걸 감지한 노움과 리노는 반짝거리는 눈으로 김서준을 주시했다.

김서준이 웃으며 손을 내렸다.

-쾅!

그 순간 옆으로 길게 뻗은 빛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동시에 빛이 사라지고 황금빛 자태가 논 위에 드러났다.

“우와!”

“멍!”

리노와 노움이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리고.

“저, 저게 콤바인이여? 무슨 콤바인이 저렇게 커?”

“저런 건 그 미국 같은 데나 가야 있는 거 아녀?!”

“살다 살다 이런 콤바인은 처음 보네. 미쳤네! 미쳤어!”

“대단하구먼. 비상한 농부라더니···.”

케레스의 농기구를 처음 보는 마을 사람들은 더더욱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역시 멋지네.’

점점 신농의 힘이 강해지고 불러낼 수 있는 농기구의 규모와 디테일도 다양해졌다.

‘넓이도 논에 딱 맞고···.’

몸체와 밑에 달린 바퀴는 흡사 탱크를 연상시키는 웅장한 모습. 상상 그대로 구현된 콤바인은 김서준의 마음에 쏙 들었다.

“이, 이런 걸 막 소환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겁니까?”

신황면 이장이 놀라 김서준에게 물었다. 김서준은 이장을 보며 말했다.

“이거보다 더 대단한 것도 가능합니다.”

미소와 함께 대답한 김서준은 콤바인에 올라탔다. 물론 리노와 노움도 함께였다.

-구구구···.

엔진이 꺼지고 김서준이 조종석에서 내렸다.

“역시 큰 게 짱이 다음!”

“멍멍!”

리노와 노움도 싱글벙글 웃으며 내렸다.

“하지만 짧아서 아쉽다움!”

“멍!”

노움과 리노는 마치 김서준이 들으라는 듯 밝고 큰 목소리로 말했다.

‘은근히 더 타고 싶다는 걸 어필하다니. 둘 다 많이 컸네.’

하긴, 그럴 만도 했다. 김서준 역시 아쉬웠다. 단 한 번 논을 가로지른 것만으로 작업이 끝나버렸으니 말이다.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지금이 딱 좋은 거 같거든.’

김서준은 마을 사람들의 놀라움과 동경의 눈빛을 느낄 수 있었다. 저런 시선은 직업을 농부로 가진 헌터라는 김서준의 특별함과 신뢰도를 키워준다.

김서준은 아닌 척 시치미를 떼는 둘의 고개를 쓰다듬어 주었다.

“다음에 또 태워줄게.”

“알겠습니다움!”

“멍!”

기특한 녀석들을 한 번 더 쓰다듬은 김서준은 콤바인의 소환을 해제했다. 그리곤 마지막으로 베어낸 벼를 움들의 도움을 받아 정리했다.

“저게 그 유명한 정령들인가 벼.”

“대박이네. 저렇게만 농사지으면 소원이 없겠네.”

부러움의 시선을 한눈에 받으며 김서준이 작업을 이어가던 그때였다.

[주민들의 신뢰도가 올라갔습니다.]

[토종 작물의 안정도가 올라갔습니다.]

[토종 작물의 안정도가 충분히 올랐습니다. 신황면이 토종 작물(영호진미)의 터전이 됩니다.]

[신황면이 김서준의 영지가 됩니다.]

기다렸던 메시지가 떠올랐다.

“이게 뭐여? 이거 헌터들이 본다는 그 메시지창 아녀?”

“그러네! 메시지창이네! 이거 대박이잖아?”

마을 주민들이 술렁거렸다. 그들은 찬찬히 메시지창을 읽어내려가 말했다.

“헌터의 영지가 되었다고?”

“세계수의 가호가 내려져서 작물이 빠르게 자란다고?”

“아쥴이라는 작물이 자라서 병충해가 사라진다는 디! 대박이여!”

메시지창을 읽는 사람들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박 씨 아저씨 말이 사실이었네.”

“금천면에 그 박 씨?”

“그려! 그 아저씨가 토종 작물 키우면 땅 자체가 좋아져서 절대 손해 볼 건 없다더니 진짜였구먼!”

“작물도 좋은 데, 땅까지. 이거 최고네. 최고여.”

한결 표정이 밝아진 마을 사람들. 몇몇은 김서준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하기도 했다. 김서준은 환한 얼굴로 일일이 어르신들의 인사에 답했다. 하지만 마음 한편은 살짝 초조했다.

‘...게이트가 더 안 나온다는 메시지는 안 나오나?’

금천면을 넘어 천산군 내에 지역들은 속속들이 김서준의 영지가 되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중 몇몇은 여전히 게이트 청정구역이 아니었다.

‘그럼 던전이 없다면 한 번에 청정구역이 되는 건가?’

이게 김서준이 세운 가설. 신황면은 천산군 내에 던전이 없는 유일한 지역으로 이 가설을 확인하기 딱 적합한 지역이었다.

‘내가 틀렸나?’

김서준이 기다려도 나오지 않는 메시지에 실망하려던 그때.

[신황면에 더는 게이트가 열리지 않습니다.]

기다리던 메시지가 나타났다.

****

“사람 많네.”

헌터 박람회.

누군가에게는 새로운 기회의 장이고 누군가에는 즐거운 관광의 장인 만큼 수없이 많은 사람이 붐볐다.

가르마를 살짝 태운 정장의 남자는 그 많은 사람을 냉소적인 눈으로 바라봤다.

“쯧쯧.”

이내 남자가 혀를 끌끌 찼다.

“서 이사님. 왜 그러십니까?”

“아녜요. 다들 어떻게 든 튀어보려고 아등바등하는 게 가여워서요.”

남자는 그렇게 말하며 MP사의 부스로 다가왔다. 부스에는 하얗게 센 수염을 가진 남자가 분주하게 장비를 꺼내고 있었다.

“오셨습니까. 이사님.”

남자가 인사했다.

“준비는 잘 되셨죠?”

“물론입니다.”

“이번에 저희 MP사가 1등 해야 합니다. 아시죠?”

이번 박람회는 중요했다. 헌터가 처음 등장한 시기부터 등장한 아주 주요한 연구 사업이 있었다.

‘양산형 장비지.’

공장처럼 찍어낼 수 있는 가벼운 헌터 장비. S급 A급 같은 상급 헌터가 아닌 이들이 가볍게 살 수 있는 장비를 만드는 일은 오랜 시간 연구되어왔다.

‘헌터 장비가 너무 비쌌으니까.’

더군다나 그 돈은 대부분 또 다른 헌터인 장인들이 가져간다. 장인을 지원하고 관리하는 기업체는 가져가는 이득이 매우 적었다.

‘하지만, 값싸고 대량생산할 수 있는 양산형 장비를 만들 수 있게 된다면 시장은 뒤집히겠지.’

즉 새로운 공산품 시장을 만드는 일이나 마찬가지. 그리고 MP사는 얼추 성공했다.

‘장인섭 사단의 노력으로 말이지.’

숨은 실력자들이라 불리던 그들답게 그들은 해냈다. 문제는 해낸 게 MP사뿐이 아니라는 거다. 이름있는 몇 개 회사가 언론 보도로 그 사실을 알렸다.

‘이번 박람회로 누가 이 시장을 먹을지 결정되겠지.’

박람회는 그 언론 전의 결론을 지을 승부의 장이었다.

“음? 저 사람도 왔나?”

서 이사가 눈살을 찌푸렸다. 작은 부스에 들어서는 남자는 익히 아는 남자였다.

청룡 길드에서 자신이 내쫓았던 쓸데없는 남자. 얼마 전 MP사의 장인들에게 접선했던 무례한 남자.

그리고 지금은 영웅이라는 허명으로 불리는 남자.

“김서준이 여긴 웬일이지?”

고개를 갸웃한 서 이사는 김서준에게 다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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