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 평화(2)
게이트와 달리 던전은 보스를 토벌해도 사라지지 않는다. 변형된 던전도 마찬가지. 다만, 형태가 변형된 던전은 한번 나오면 다시 돌아가지 못한다는 게 문제였다.
‘그런데 서준 씨의 능력은 그것조차 무시하는군.’
보스를 잡기 전에도 포털을 열더니, 잡은 후에도 김서준은 포털을 열고 헌터들을 들여보낼 수 있었다.
‘다른 능력이야 농부라고 하지만 어째서 이런 능력을 사용할 수 있는 걸까.’
정현민은 이내 그 호기심을 마음 한편으로 미뤄 두었다. 어차피 김서준 본인도 모른다고 하기도 하고, 악용할 능력도 아니었다.
“길드장님 준비 완료했습니다.”
중요한 건 덕분에 김서준의 말대로 북한을 모의 체험할 장소가 생겼다는 점이었다. 며칠의 휴식을 마친 헌터들은 다시 훈련을 위해 포털로 들어가기로 했다.
“6조 준비 완료했습니다.”
정현민은 입구에 들어갈 준비를 마쳤다는 각 조, 조장의 보고를 받았다.
“청룡 길드도 준비 끝났어요.”
전소민도 준비를 마쳤다고 알려왔다.
‘그날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었던 건가. 표정이 좋네.’
그날의 회식 이후 전소민은 계속 표정이 좋았다. 정현민은 혹시나 해서 살짝 떠보고 싶었지만, 잘못 물었다가 어색해질까 괜히 묻기가 꺼려졌다.
“우리도 끝났군. 바로 시작하지.”
황룡 길드가 마지막으로 준비를 마쳤다. 바로 입장하기 전 정현민이 한 번 더 물었다.
“어르신 혼자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물론일세. 어차피 북한에서도 나 혼자 다닐 생각이었네.”
“알겠습니다.”
강백호는 단호하게 말했다. 검은색 도복에 너클까지 챙긴 강백호는 철저히 혼자 훈련에 돌입할 생각인 듯 보였다. 정현민은 고개를 끄덕이곤 포털로 다가갔다.
포털에는 김서준의 동료인 우노와 정령이라 하기엔 너무나도 신비로운 사내, 도리가 서 있었다.
“이제 들어가겠습니다.”
“클클. 알겠소. 우리는 포털 입구에 서 있을 테니, 무슨 일 있으면 신호탄을 쏘아 올리시오.”
“알겠습니다.”
“그럼 무운을 비오.”
우노의 인사를 시작으로 헌터들은 다시 포털로 입장했다.
****
던전 토벌은 김서준에게는 큰 이벤트였지만, 마을, 그리고 세상에는 전혀 아니었다. 그들에게는 오로지 농사가 가장 중요했다.
“올해는 완전 풍년이여.”
“토종 종자라고 해서 반쯤 걱정했는디, 이거 완전 물건이구먼.”
“너무 잘 자라서 탈이여. 서준이 자네 헌터가 아니라 종자 사업을 해도 되겄어.”
그런 점에서 이번 농사는 대박이었다. 마을 사람들 모두가 감탄할 정도로 토종 종자는 번성하고 있었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이 아침 운동하는 김서준과 마주치면 반가운 인사와 칭찬을 늘어놓는 이유. 그리고 금천면에서 막대한 선물을 보내주고 천산군수가 빨리 천산군 전체로 토종 작물을 확대하자는 이유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자네 덕의 풍년이어도 가격 걱정하는 사람이 없어.”
임종철의 말대로였다. 토종 작물 캠페인에 힘입어 IW 그룹이 본격적으로 마트에 유통하고 있었다. 전국의 맛집에서도 소식을 듣고 금천면과 접촉하고 있었다.
‘모든 계약에 최저가격을 잡아둔 것도 주요했지.’
게다가 그래도 남는 작물은 금호 영농조합이 가진 가공공장에서 즙이나 기타 식품으로 가공하니 전혀 걱정할 게 없었다.
“다행입니다.”
생각한 프로세스가 톱니바퀴처럼 딱딱 들어맞고, 완벽하게 돌아갔다. 아니 생각 이상이었다.
“전부 어르신과 모두의 도움 덕입니다.”
“아니지. 자네가 잘 짜준 거고 우린 그에 맞춰 움직인 거뿐이지.”
임종철의 말에 옆에 있던 최 씨도 격하게 동의했다.
“종자도 계약도. 이런 판매 전략도 전부 이사님의 의견이지 않았습니까. 전부 이사님 덕입니다.”
그러자 회의에 참석한 박보현과 김 씨, 금천면의 유지인 김철수마저 나서 김서준을 칭찬했다. 김서준은 사방에서 칭찬하는 상황에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한동안 칭찬 퍼레이드가 끝나고 김서준은 우노가 만든 술을 판매하는 건과 다른 지역에서 토종 종자를 심는 건에 관해 이야기했다.
특히, 지역별 토종 종자에는 모두가 관심이 많았다.
‘아무래도 경쟁자가 늘수록 걱정되겠지.’
금천면의 토종 종자가 이렇게 성황인 이유는 아직 금천면까지만 보급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좋은 취지로 시작했다지만, 수익도 중요하지 않겠는가. 어르신들의 모호한 태도는 충분히 이해가 됐다.
“무엇을 걱정하시는지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전 각, 지역별 토종 작물을 다르게 키워보려고 합니다.”
“특산물처럼 말인가?”
“맞습니다. 토종 작물이란 건 결국 그 땅에 알맞게 진화한 종자를 말하지 않습니까? 같은 한국에서도 지역이 다르기에 작물도 다르게 배분하려고 합니다.”
“흠···.”
“그런 식이라면 좀 더 납득할 수 있겠구먼.”
임종철을 비롯한 가까운 이들은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지만, 이제 막 작물 농사를 시작한 금천면의 사람들은 여전히 미적지근한 반응.
‘이제 시작하셨으니 더 불안하시겠지.’
그들의 입장에서는 굳이 경쟁자가 생길 수 있는 길을 가고 싶지 않을 터였다.
“토종 작물을 다른 지역에도 활성화하려는 건 사실 저희 사업의 확대를 위한 일만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제 토종 작물과 농사 확대는 필수 불가결한 일이 되었다. 이유는 단순했다.
“...토종 작물이 단순한 농작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게 무슨 소린가?”
“얼마 전 메시지를 보셨을 겁니다. 더는 게이트가 생기지 않는다는 메시지였죠.”
어르신들이 웅성거렸다.
“내가 본 게 헛것이 아니었다는 말인가?”
“그 말이 진짜였다는 거여?”
“그럼 정말 여기는 게이트가 안 나타나는 거여?”
동시에 쏟아지는 질문. 김서준은 모두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이제 금천면은 완벽한 게이트 청정구역이 되었습니다.”
“대, 대단하구먼.”
“이제 두 다리 쭉 뻗고 잘 수 있겠어.”
“밤 중에 갑자기 몬스터 경보 울릴 일도 없고 말이야!”
“자네 능력은 정말 끝을 모르는구먼!”
이미 게이트 청정구역을 누리던 금산마을 사람들과 달리 다른 주민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몇몇은 떡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한 채 말을 잃기도 했다.
“그리고 이건 토종 작물 농사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제가 지키는 토종 작물이 자라는 땅만이 게이트 청정구역이 될 수 있습니다.”
“그 말인즉슨···.”
“설마···.”
주민들은 시선을 교환했다. 확장 계획이 무엇을 위한 건지 눈치를 챈 모양이었다.
“네. 저는 대한민국 전체를, 나아가 전 세계를 게이트 청정구역으로 만들 생각입니다. 그러기 위해 더 많은 지역에 토종 작물이 자라야 합니다.”
작물 농사를 짓는 게 세상의 평화를 가져온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가 김서준의 입에서 튀어나오자 장내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러니까, 자네 지금 농사로 세상을 평화롭게 만들겠다는 이야기를 하는 건가?”
임종철이 재차 확인하듯 김서준에게 물었다. 조용한 가운데 모두의 눈동자가 김서준의 입을 주목했다.
김서준은 짧고 간결하게 대답했다.
“네. 농사로 세상을 구할 겁니다.”
****
사비오는 이제 2층 건물 높이만큼 자라고 두께도 어지간한 집보다 클 정도로 커졌다. 그만큼 열매도 꽤 많이 열려 있었다. 가만히 그런 사비오를 살피던 노움이 말했다.
“적절한 수확기 입니다움!”
열매가 맺은 지는 좀 됐지만, 완전한 상태를 이룰 때까지 기다렸다. 그리고 노움의 말처럼 작물의 상태를 알려주는 황금색 고리가 완전해진 지금.
김서준은 수확을 시작하기로 했다.
“사비오! 사비오! 짱 멋지다움!”
노움은 새로운 작물을 재배하는 게 즐거웠는지, 콧노래를 불렀다. 노움과 움들답게 열매를 따는 작업은 체계적이었다.
움들이 줄기를 타고 올라가 어디서 가져 왔는지 모를 자기 몸만 한 가위로 열매꼭지를 자른다. 그러면 밑에 바구니를 담당한 움들이 움직여 열매를 받는 방식이었다.
“안 된다움! 들어 가라움!”
혹시라도 방향이 안 맞거나 바닥에 따라질 법한 열매는 노움이 직접 받아서 바구니에 쏙 집어넣었다.
“멍멍!!”
리노도 바구니를 들고 뛰어다니며 노움을 도왔다. 작을 때의 리노는 솜뭉치처럼 통통 튀어 다니지만, 매우 빨랐다.
“멍!”
“잘했어. 리노.”
또 하나를 받아내는 리노의 머리를 김서준이 쓰다듬자 리노가 함박웃음을 지었다. 김서준은 사비오 열매 하나를 집어 들었다. 체리랑 비슷한 크기의 파란 열매는 꽤 단단했다.
“볼수록 신기하네.”
광이 나는 청록색의 열매는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금속으로 만든 장식품으로 오해할 법한 모습이었다.
“그러니까요. 이렇게 생긴 과일은 사비오가 유일할 거예요.”
김서준의 뒤에서 함께 열매를 보던 엘린이 말했다.
“진짜 신기해요. 이게 현자의 열매라니.”
엘린은 당장이라도 열매를 먹어보고 싶은 눈치였다. 김서준은 혹시 몰라 말했다.
“사비오는 생으로 먹으면 독이 있으니까 조심하세요.”
“알겠어요.”
엘린은 그렇게 말하며 열매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리곤 이리저리 둘러보더니 말했다.
“근데 정말 신기하네요. 생긴 것도 생긴 거지만 안에 마나가 신기해요.”
“마나요?”
“작물 안에서 마나가 느껴져요. 본래 사비오가 가진 그 마나의 파장이요.”
엘린은 그렇게 말하며 신기하다는 듯 열매를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역시 예상대로 사비오가 머금은 영양분이랑 마나는 다 열매로 가나 봐요.”
“괜히 현자들이 즐겨 먹었던 게 아니었겠죠.”
김서준이 맞장구를 치며 열매를 내려놓았다. 그리곤 목장갑을 끼며 말했다.
“그럼 우리도 시작할까요?”
“그러죠.”
두 사람도 열매를 따는 데 동참했다.
쨍쨍한 햇볕이 내리쬐지만, 신농의 힘 덕분에 사비오 밭은 시원했다. 그런데도 작업을 마친 김서준과 엘린의 머리칼은 땀이 흐른 흔적으로 엉겨 붙어 버렸다.
“생각보다 힘드네요.”
“의외로 억새기도 하고 양도 많아서요.”
가득 찬 바구니를 내려다보며 둘은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둘은 지치지도 않나 봐요.”
“그게 둘의 매력이죠.”
노움과 리노는 잡초 제거를 위해 날아온 하얀 토리들과 저 옆에서 뛰놀고 있었다.
“이제 리노공이 술래다움!”
“멍멍!”
“꽥!”
술래잡기하며 노는 녀석들의 모습은 농사만큼이나 마음을 편안하게 만드는 풍경이었다. 관광객들 역시 그랬는지 꽤 많은 사람이 자리를 잡고 서서 그 모습을 보고 있었다. 물론 엘린이나 김서준을 찍는 사람들도 있었다.
“사진 찍는 데 그렇게 편한 모습으로 있어도 돼요?”
김서준이 엘린을 보며 말했다. 서서히 사람들에게 잊혀가는 김서준과 달리 엘린은 여전히 SNS 스타. 그러나 엘린은 떡 진 머리를 아무렇게나 쓸어 넘겼다.
“괜찮아요. 그럴 수도 있죠. 오히려 이게 인간적이지 않나요?”
“하긴, 엘프 적이진 않지만, 인간적이긴 하네요.”
김서준의 말에 엘린이 웃음을 터뜨렸다. 함께 웃던 김서준이 말했다.
“열매를 포션처럼 만드실 거죠?”
“정확히는 진액을 빼내는 방식으로 하려고요. 포션처럼 특정 성분을 수집해서 극대화하는 방식은 아니고요.”
“알겠습니다. 그럼 저는 차를 끓여보죠.”
도스와 엘린이 문헌에서는 공통으로 언급되는 부분이 있었다. 현자들이 사비오를 차로 마셨다는 것. 김서준이 보는 식물 감정에서도 사비오는 차로 음용 했다고 나왔다.
‘차로 마시는 게 어떤 식으로든 도움이 되긴 할 꺼야. 하지만 약효로는 부족할 수 있지.’
그래서 연금술에 뛰어난 엘린과 도스는 약용으로, 요리를 잘하는 김서준은 아무 때나 음용 할 수 있는 차로 끓여내기로 했다.
“잘 부탁드려요.”
김서준의 말에 엘린은 화사하게 웃으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이런 건 제 전문이잖아요?”
엘린은 장담했던 것처럼 빠르게 독성을 뺀 진액을 모은 사비오 약을 만들어냈다. 약이 완성되자마자 김서준은 약과 자신이 직접 끓인 차를 가지고 장인섭을 방문했다.
“후, 긴장된다.”
물론 전소민도 함께였다. 문고리를 잡은 전소민의 손이 떨렸다.
“왜?”
“모르겠어. 아저씨랑 오랜만에 다시 볼 생각해서 그런가?”
“좋은 긴장이네.”
김서준은 전소민의 어깨를 토닥인 후, 병실 안으로 발을 디뎠다.
“오셨어요?”
요양사 아주머니는 오늘도 반갑게 그들을 맞이했다. 가볍게 인사를 나눈 두 사람은 장인섭에게 다가갔다.
“요즘은 어떠셨어요?”
“똑같아요. 매일 아침 일어나서 이렇게 창밖을 보는 게 일과세요.”
김서준은 측은한 눈으로 장인섭을 바라봤다. 장인섭은 창밖을 영혼 없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최근에는 식사도 잘 안 하세요. 거의 억지로 드리긴 하는데···. 참···.”
김서준은 주먹을 꾹 움켜쥐었다.
‘제가 다시 일으켜드릴게요. 아저씨.’
그리곤 약과 차를 꺼냈다. 김서준은 요양사에게 보온병에 담긴 약과 차를 건네며 말했다.
“잘 부탁드립니다.”
김서준의 진지한 모습에 요양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작은 수저를 가져와 컵에 따른 약을 떠 장인섭의 입으로 흘려보냈다.
김서준과 전소민은 숨을 죽인 채 반응을 기다렸다.
“...!”
반 컵 분량의 액체가 입으로 흘러 들어갔을 때, 장인섭의 눈썹이 꿈틀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