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 평화
해가 저물고 무르익은 술자리도 점점 소강상태에 이르렀다. 김서준은 먼저 해야 할 일이 있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도 같이 가!”
전소민이 그 뒤를 따라 일어났다. 적당한 명분이 없던 정현민은 그저 자리에 앉아 두 사람을 보내줄 수밖에 없었다.
‘부럽다.’
정현민은 멀어져 가는 두 사람을 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저 옆에 자신도 서고 싶었다. 전소민의 신뢰와 애정이 듬뿍 담긴 시선을 자신도 받고 싶었다.
그러나 그러기에 김서준이란 남자는 너무 대단했다.
‘재력도 명예도 능력도 전부 갖췄으니까. 외모는 말할 것도 없고. 내가 더 가진 건, 길드 장이라는 타이틀뿐인가.’
에픽 길드의 장. 공식 랭킹 3위의 헌터라는 타이틀이 이토록 하찮게 느껴지는 적은 처음이었다.
정현민은 답답한 마음에 술을 한잔 더 들이켰다. 탄산이 없는 황금빛 투명한 액체는 이제껏 마셨던 사이다가 아닌 애플 브랜디였다. 김서준의 말에 따르면 사이다 다음으로 팔 예정인 제품이었다.
‘쓰네.’
살짝 단맛과 애플 브랜디 특유의 사과 향이 입안에 퍼졌다. 분명 여태와 같은 맛이건만, 좀 전까지만 해도 다디달았던 술이 갑자기 이렇게 쓸 줄이야.
‘취했나 보군. 나도.’
정현민은 스스로 자조 석인 비웃음을 던졌다. 한참 그렇게 감상에 빠진 정현민을 깨운 건 다름 아닌 강백호였다.
“무슨 고민이라도 있나.”
“아, 아닙니다.”
강백호 역시 브랜디가 담긴 얼음 잔을 비우며 말했다.
“그런 씁쓸한 표정이라니. 갑자기 술맛이 달라지기라도 한 표정이군.”
“하하···.”
정곡을 찔린 정현민이 멋쩍게 웃었다. 강백호는 여타 다른 어른처럼 계속 캐묻지 않았다. 그저 차분한 눈빛으로 정현민을 바라볼 뿐이었다.
“...즐거운 자리에 제가 주책을 떨었군요. 한 잔 올리겠습니다.”
강백호가 기꺼이 잔을 내줬다. 브랜디의 황금빛 액체로 각자의 잔이 채워지자 강백호가 건배를 제안했다.
-짠!
오겹살은 이미 다 먹은 지 오래. 두 사람은 음식 대신 맑은소리와 시원한 밤공기, 그리고 멋진 밤의 정취를 안주 삼아 술을 목으로 넘겼다.
“근데 말이야. 자네 아까 김서준이 한 이야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아까 한 이야기라면, 터전 말씀입니까?”
강백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놀라운 이야기죠. 아니, 실은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게 알려지면 헌터 세계를 넘어온 세상이 뒤집힐 겁니다.”
이건 과장이 아니었다. 김서준이 한 말은 이렇게 말할 만큼 놀라운 이야기였다.
‘토종 작물이나 김서준이 정해준 작물로 농사를 지으면 터전이 된다고?’
그리고 터전이 되면 더는 게이트가 나타나지 않는 효과를 받는다고 한다.
‘물론, 무조건은 아니고 조건이 있는 데 아직은 정확히 그 조건을 못 찾긴 했지만요.’
김서준의 말이 전부 진실인지는 알 수 없었다. 농사만 지으면 강해진다고 하더니, 이번에는 농사만 지으면 세상에 평화가 도래한다는 말이지 않은가?
‘사이비 종교도 이렇게는 안 만들 거야.’
하지만 헌터들은 농사만 지어서 강해졌고, 농작물을 먹고 강해졌으며, 정말로 게이트가 없어졌다는 메시지를 봤다.
‘믿을 수 없지만 믿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인 거지.’
그리고 사실 정현민은 김서준의 말이 사실이길 간절히 바랐다. 정현민은 그런 생각을 가지게 된 그 날을 떠올리며 말했다.
“평화로운 일요일이었죠. 저는 부모님과 놀이동산으로 놀러 갈 생각에 한참 신나 있었죠. 그리고 그때 집 옆에 게이트가 열렸습니다. 오우거였죠. 아파트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됐습니다. 하지만 다행이었죠. 저희 이웃에는 헌터들이 많았거든요.”
정현민이 냉수 한 잔을 들이켰다. 강백호는 고요한 눈으로 계속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더군요. 전투가 길어졌고 많은 헌터가 죽었습니다. 제가 살던 아파트는 반파됐죠. 그리고 부모님은···.”
“자네 구로에서 벌어졌던 오우거 사건의 피해자였군.”
A급 오우거가 아파트 단지 내에 나타났던 사건은 꽤 유명했다. 헌터들의 과잉진압으로 주변 아파트가 반파되고 무고한 희생자가 수두룩하게 나왔기 때문이었다.
‘역시 알고 계시는구나.’
정현민은 쓴웃음을 지었다.
“다른 사람들과 달리 저는 헌터들을 탓하고 싶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최선을 다했을 겁니다. A급 오우거지 않습니까?”
정현민은 씁쓸한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리고는 다시 이야기했다.
“그리고 몬스터가 있는 한 이런 일은 계속 반복되겠죠. 그리고 이 악순환을 끊을 수 있는 건···.”
최강의 헌터 중 하나라 불리는 자신이 아닌, 농부이자 현명한 남자.
“김서준 씨의 말이 맞다면, 그게 유일한 방법일 겁니다. 정말 김서준 씨의 말이 사실이라면 저는 적극적으로 김서준 씨를 지원할 생각입니다.”
“그런가.”
“네, 그게 제 이상을, 그리고 세상이 바라는 이상을 이루는 길이라고 믿으니까요.”
진지하게 말한 정현민이 이내 표정을 풀며 덧붙였다.
“물론 지금으로써는 믿기 힘들지만요. 일단 뭘 하기 전에 검증부터 해야 할 거 같아요.”
“흠···.”
강백호는 낮게 신음했다. 그리곤 고개를 끄덕이며 브랜디 한잔을 넘긴 후 중얼거렸다.
“정말 그럴까? 정말 세상은 평화를 바랄까? 우리가 밟고 일어선 게 평화가 아니었나?”
“네?”
“아니, 아닐세.”
정현민은 강백호를 바라봤다. 달을 보는 강백호의 눈이 보였다. 오늘따라 유난히 싸늘하게 느껴지는 건 술기운에 든 착각인지 아니면 정말인지 정현민은 알 수 없었다.
****
자리를 빠져나온 김서준과 전소민이 향한 곳은 사비오의 밭이었다. 정산이 끝나고 김서준은 마정석의 소유권을 얻었다.
그리고 오늘, 마정석의 가공이 끝났다. 하루빨리 열매를 얻고 싶었던 김서준은 사비오의 성장이 가장 활발한 시간에 맞춰 사비오를 찾았다.
“진짜 신기하다. 정말 파란색이네.”
달빛에 비친 사비오를 본 전소민이 감탄을 터뜨렸다. 하얀 달빛에 비친 파란 입은 언젠가 본 화려한 벌레의 껍질처럼 묘한 푸른색을 띠었다.
“생긴 건 동화에서 본 콩나무 같은데 색이 저러니까 되게 신비롭다.”
“그치? 잘 키워서 트리처럼 마을을 대표하는 관광 포인트로 만들려고.”
김서준은 웃으며 주머니에서 포션 하나를 꺼냈다. 마정석을 녹여 만든 포션이었다. 일전에 봤던 그 어떤 포션보다도 짙은 파란색이었다.
‘엘린이나 트레스도 본 적 없는 수준의 순도 높은 마정석답네.’
짙은 마나 농도는 붓는 순간 당장이라도 사비오가 열매를 맺을 거 같은 기분이었다.
“괜찮겠어? 그거 엄청 비쌀 텐데.”
“어르신 일어나면 이 값만큼 뽑아낼 거야.”
전소민이 김서준의 대답에 웃음을 터뜨렸다. 김서준도 함께 웃으며 포션의 마개를 열었다. 그리곤 파란 물감을 푼 거 같은 액체를 사비오 위로 조심스레 뿌렸다.
“와, 예쁘다.”
마나를 받아들이는 사비오가 발광(發光)했다. 땅에 가라앉은 어둠을 해치고 빛나는 사비오의 모습은 놀라운 모습은 연출했다.
“이렇게 마나를 흡수하는 거야?”
“그렇긴 한데, 나도 놀랐네. 평소에 이렇게 빛나지 않았는데.”
높은 순도의 마나에 사비오가 반응하는 듯했다. 아름다운 빛을 뿜어내며 바닥으로 흐르기도 전에 마나가 사라지는 걸 보니 아주 맘에 들은 듯했다.
[사비오의 성장이 3단계에 진입합니다.]
[성장 한계가 사라집니다.]
[사비오가 이제 열매를 맺습니다.]
[아쥴의 터전이 금천면 전체로 확장됩니다. 이제 신농의 터전이라면 모두 아쥴이 자라납니다.]
“됐다.”
쏟아지는 메시지 창을 보며 김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뭐가?”
“사비오가 받아들였어. 이제 곧 열매를 맺을꺼야. 이제 아저씨를 다시 되돌릴 수 있어.”
“진짜?”
전소민이 반색하더니 이내 눈물을 글썽였다.
“다행이야....”
“아직 아저씨가 치료된 것도 아니고. 벌써 울면 어떡해?”
김서준은 장난스럽게 말하면서도 전소민의 어깨를 토닥였다.
마나를 전부 흡수한 사비오는 서서히 빛을 잃었다. 주변이 조금씩 어두워지자 전소민이 말했다.
“우리 저기 잠깐 갈래?”
전소민이 가리킨 곳은 바로 옆에 있는 트리. 김서준은 고민 없이 바로 전소민을 데리고 트리로 향했다.
“여긴 진짜 좋다. 이건 어떻게 만든 거야?”
전망대에 오른 전소민이 제자리를 빙글 돌며 물었다. 심호흡하며 맑은 공기를 만끽하는 전소민을 보자니, 헌터이자 랭커가 아닌 평범한 친구였던 전소민의 모습이 보였다.
“마도구로 나무를 크게 키우고, 주변에서 얻은 나무로 정좌도 만들고 그랬지.”
그렇게 말하며 김서준이 스위치를 눌렀다. 전망대 위를 덮고 있던 지붕이 돌아가며 열렸다. 전소민은 다시 한번 탄성을 터뜨리며 하늘을 바라봤다.
“신기하네.”
“임종철 어르신 아이디어였는데 좋지?”
김서준이 그렇게 말하며 전소민 옆에 나란히 섰다. 그리곤 함께 하늘을 올려 다 보았다. 하늘에는 별이 쏟아질 것처럼 많았다.
“별 진짜 많네. 엄청 예쁘다.”
“도시랑은 또 다르지. 이 맛에 귀농하는 거기도 하고.”
“역시 나도 여기로 돌아와서 살까.”
“맘에 없는 소리 하기는.”
“반쯤은 진심인데?”
김서준이 대답하지 않았다. 전소민은 그런 김서준을 흘깃하곤 미소를 지었다. 그리곤 다시 크게 숨을 들이쉰 후 말했다.
“달도 예쁘네. 별이 많으니까 더 예쁜 거 같기도 하고.”
“그런가.”
“근데 서준아, 아까 했던 말 진짜야?”
“어떤 거? 터전?”
“응.”
“진짜지.”
김서준은 대답하며 고개를 내렸다. 전소민도 고개를 내렸다.
“그럼 정말 게이트를 세상에서 사라지게 할 수 있는 거야?”
“아마도. 아직은 정확한 조건을 모르지만, 이건만 해결하면 분명 그럴 수 있을 거야.”
전소민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환한 미소를 지었다.
“기억나? 우리 그때도 이렇게 별 보면서 평화를 만드는 헌터가 되자! 막 이렇게 다짐했는데.”
“그랬지. 중2병에 영웅심까지, 아주 철이 없었지.”
어린 나이의 치기 어린 선택. 그게 삶을 이렇게 바꿀 줄, 그때의 김서준은 꿈에도 몰랐다. 김서준의 그때의 자신을 생각하며 피식 웃었다.
“맞아. 그리고 점점 클수록 생각했거든. 사실 우리 꿈은 이룰 수 없는 꿈이 아닐까. 근데 이렇게 네 덕분에 다시 이룰 수 있게 됐네. 고마워.”
“이제 실마리만 잡은 거지. 인사는 일러. 너한테 부탁할 일도 많을 거고.”
김서준이 사뭇 진지하게 말하다 멋쩍은 미소를 띄웠다.
“괜히 오그라드네. 하여튼 잘 하자.”
“그래. 그리고 다 끝나면 나도 귀농 할 테니까 방 하나만 내주라.”
“귀농하면 집 지어야지. 세 들어 살게?”
“...”
전소민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넌 진짜... 아니다······.”
“응?”
전소민은 다시 하늘을 바라봤다. 오늘따라 유난히 별이 손에 잡힐 것처럼 가까운 거 같은 기분이었다.
며칠 후.
“오늘날이 참 좋다움! 안 그러냐움?”
“멍멍!”
김서준은 평소처럼 아침 산책을 나왔다. 리노와 노움을 데리고 즐겁게 나온 산책이 얼마 지나지 않아 김서준은 발걸음을 멈췄다.
“신농님. 왜 그러십니까움?”
노움이 갑자기 멈춰선 김서준을 보고 물었다. 김서준은 눈앞에 광경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사비오 줄기 사이 청록색의 구슬 같은 열매가 주렁주렁 맺은 게 보였다.
“드디어 맺었다.”
“움?”
“멍?”
김서준이 기쁘다는 듯 두 귀여운 녀석을 껴안으며 말했다.
“드디어 사비오 열매가 맺었어!”
“축하 드립니다움!”
“멍멍!”
김서준의 품에 안긴 둘은 진심으로 김서준을 축하했다. 김서준은 주먹을 쥐며 생각했다.
‘어르신, 이제 다시 망치를 잡을 시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