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 단서
고블과 같은 분신이 절실한 요즘.
바쁜 와중에도 김서준이 절대 빼놓지 않는 일이 있다.
“5개만 더! 스쿼트!”
“흐읍!”
드워프들과의 아침 운동. 드워프들의 운동은 효율적이고 효과적이었다. 건강 유지는 물론이고 조금씩 체력과 근력도 커지는 아주 훌륭한 수련방법이었다.
“좋소! 아주 좋소! 오늘은 특별히 한 세트 더 갑시다!”
“아···.”
물론 우노의 과한 열정이 조금 부담스러운 날도 있긴 하지만.
이렇게 아침부터 시원하게 땀을 쫙 빼면 트리에 올라 도리를 마주한다. 도리와의 명상과 마나 적응 수련 역시 빼놓을 수 없는 일과였다.
‘사실 그만하려고 했었지.’
근데 한 달 전.
김서준이 몸 안에 꿈틀거리는 무언가를 느끼게 되었다. 그것은 실과 같이 아주 미세한 기운이었지만, 김서준의 생각대로 몸 안에서 자유자재로 움직였다.
‘그리고 그 실 하나를 깨우친 것만으로도 대단했지.’
김서준은 마나로 몸을 강화하는 스킬을 사용할 수 있었다. 대표적인 게 안력 강화. 그런데 이 실 같은 기운을 느낀 이후, 스킬을 사용할 필요가 없었다.
‘필요한 곳으로 이 기운을 보내주기만 하면 돼.’
그럼 더 적은 힘으로 더 큰 효과를 얻을 수 있었다.
[인간의 스킬은 힘의 섭리를 무시합니다. 반면 지금 몸 안의 통로는 섭리를 그대로 따라 힘이 움직이는 일. 힘의 효율이 다릅니다.]
도리의 말이 맞는 듯했다. 실 같은 기운은 몸을 가로지르는 게 아닌, 마치 혈관을 따라 움직이듯 구불거리며 원하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신농이시여. 이제 실마리를 찾았으니 모든 힘을 다룰 수 있도록 더 수련에 정진해야 합니다.]
김서준은 도리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가 강해지는 일도 중요하지만, 김서준 역시 강해질 수 있다면 최고였다.
‘그만큼 할 수 있는 게 많을 거야.’
그랬기에 오늘도 운동을 마친 직후, 이렇게 도리 앞에 앉아 명상하는 중이었다. 물론 리노와 노움도 함께였다.
“자, 그럼 이제 마지막 코스로 가볼까?”
“멍멍!”
“좋다움!”
가벼운 명상을 마치면 노움과 리노를 데리고 세계수의 언덕으로 향한다. 아버지의 묘는 이장해서 세계수의 언덕 안으로 옮겼다.
‘관광객이 많아져서 괜히 훼손될 수 있으니까.’
금산 농장에는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오고 있었다.
“푹신한 양! 최고다움!”
“멍멍!”
양 떼 목장이 생기고 나서부터는 주말만 되면 사람이 너무 많아 고민일 정도. 김서준은 그 과정에 혹시라도 아버지의 묘가 훼손될까, 결계로 꼭꼭 숨겨 놓은 세계수의 언덕 안으로 묘를 이장했다.
“달려라움! 리노 공, 더 빠르게 부탁한다움!”
양 떼 목장에서 아침마다 양을 산책시키는 일도 주요 일과 중 하나다. 노움은 저렇게 양을 타는 걸 좋아했다. 처음부터 양을 고집했던 노움이 아니던가.
‘고집한 이유가 있었어. 저렇게 좋아하다니.’
리노는 양치기 개로도 훌륭했다. 그러나 리노는 김서준이나 노움과 있는 걸 더 좋아했다. 대신 그 일은 일호 가족이 대신했다.
“멍멍!!!”
“컹!!!”
리노가 짖자 일호 가족이 더 빠르게 양을 몰기 시작했다. 이런 식의 교육이 매일 이뤄지다 보니, 일호 가족은 금세 양을 모는 실력이 늘고 있었다.
‘조만간 양 떼 목장도 쇼를 할 수 있겠어.’
양들이 뛰어다니는 쇼. 장애물까지 넘는다면 산책도 되고 관광객도 즐거운 좋은 쇼를 만들 수 있을 듯했다.
“야호! 너무 재밌다움!”
양 위에서 통통 튀며 노움이 신나 했다. 김서준은 그런 노움에게 말했다.
“노움, 이번 주 지나면 양털 깎자!”
“알겠습니다움!!!”
노움은 흔쾌히 대답했다. 이렇게 마지막 단계를 거친 후, 셋은 세계수의 언덕에 들어섰다.
“잘 자라고 있나.”
가장 먼저 확인할 건, 축복받은 송이버섯. 축복받은 송이버섯은 여전히 효자상품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다.
“오늘도 상태 좋네.”
김서준이 씩 웃으며 송이버섯을 캤다. 캔 송이버섯은 즉각 아공간 인벤토리로 들어간다.
“맛있겠다움...”
“멍···.”
둘은 버섯을 딸 때마다 저런 표정이다. 맘 같아선 주고 싶은데, 워낙 수요가 많다 보니 둘을 챙겨줄 수량이 없다.
‘생산기간이 줄어서 2주면 수확하지만, 개수는 약 100송이가 전부니까.’
그러나.
“오늘은 특별 선물이야. 자, 하나씩 먹어.”
“멍!!!”
“지, 진짜 입니까움?”
김서준이 씩 웃었다. 귀여운 녀석들의 입이 찢어질 듯했다. 김서준은 둘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노움의 손에 송이버섯을 쥐여 주었다.
“그래. 각각 2송이씩 먹어.”
“멍!!!”
“대박이다움!!!”
둘은 날아갈 듯한 표정으로 환호했다. 그리곤 언덕 한쪽에 자리를 잡고 둘만의 포식 시간을 시작했다.
‘귀엽네. 하나 더 줄까.’
김서준은 피식 웃었다. 사실, 오늘의 버섯은 납품하지 않아 여유가 있었다. 정 회장에게 양해를 구하고 버섯은 다른 데 쓰기로 했다.
‘헌터들 한번 챙겨줘야지. 그리고 아저씨에게도 드리고.’
김서준은 귀엽게 송이버섯을 먹고 있는 둘을 뒤로 한 채, 계속 송이버섯을 채집했다. 언덕에서 마지막 일과는, 단연 세계수 확인.
“이렇게 보면 별일 없는 거 같은데···.”
세계수는 지금 자고 있다. 금천면이 터전이 됐을 때도 따로 부름이 없었다.
[새로운 터전을 만드세요.]
다른 퀘스트가 나왔지만, 아리아의 부름은 없었다. 정말로 고블의 소환이 큰일이었던 듯했다.
‘하긴, 고블이 참 대단하긴 해.’
고블이 없었다면 이런 여유도 없었으리라. 김서준은 세계수의 막대한 생명력을 느끼며 잠시 명상했다.
본래라면 여기서 매일 하는 아침 일과가 끝난다. 그러나 오늘은 여기서 바로 다음 일과를 시작할 셈이었다.
“애들아 여기서 놀다가, 시간 늦지 않게 미트루트 밭으로 가.”
“알겠습니다움!”
“멍!”
아이들에게 인사한 김서준은 조금 통이 큰 나무 앞으로 갔다. 그리고는 대뜸 발을 밀어 넣었다. 그러자, 나무기둥 앞 공간이 일렁였다. 김서준은 그 공간 안으로 몸을 집어넣었다.
****
“이 세계에도 그런 병이 있군요.”
엘린이 안타깝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라이너스 대륙에서도 종족을 불문하고 그런 병에 걸리는 이들이 있었어요. 혹자는 저주라고도 했지만 확실한 병이었죠. 치료법이 없는···.”
엘린과 함께 이야기를 듣던 도스도 안타까운 표정이었다. 괜찮았다. 어차피 치매의 치료법이 명확할 걸 기대한 건 아니었으니까.
김서준은 가져온 이파리를 건넸다.
“제 능력으로 본 바에 따르면 사비오는 뇌 기능 회복 효과를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잎으로 일종의 포션을 만들어보려는 데 어떨까요?”
도스는 잘 모르겠는 눈치. 벨리르 대륙에는 이런 병이 없어서 감이 오지 않는 듯했다. 반면 엘린은 여전히 어두운 표정이었다.
“효과가 전혀 없는 건 아니겠지만 치료가 될지도 모르겠어요. 이파리뿐이라.”
엘린의 말에 따르면 사비오 내부에는 강한 마나가 응집되어 있다고 했다. 그 마나를 이용한 게 사비오 안테나였고.
“문제는 그 마나가 응축되지 않는다는 점이에요. 어느 하나로 모이지 않고 계속 순환하고 있어요.”
엘린은 이파리를 보며 말했다.
“사비오의 효과는 그 안에 품은 마나와 연관이 있어요. 마나가 응축된 부분에 약효가 높을 텐데 이파리는 아쉽게도 그런 부분은 아니에요. 도리어 약효는 약한 편이죠.”
“맞소. 사비오의 잎은 복용과 사용이 편하지만, 우리가 전설에서 봤던 정도의 효과는 아니오. 물론 그 덕에 미트루트 포션의 밸런스를 맞추긴 쉬웠지만 말이오.”
“그렇다면 역시 열매가 필요한 거군요.”
“아마도요. 전설 속 사비오는 열매, 즉, 콩과 관련이 있었던 거니까요.”
“벨리르에서도 그랬지. 그리고 하나 더 근거가 있소.”
김서준과 엘린이 놀라 도스를 바라봤다. 도스는 턱을 매만지며 말을 이었다.
“우리 망치의 부족 중 용사의 일행이자 최강의 전사, 토른이라는 전사가 있었소. 전설에 따르면 토른은 저주에 걸려 매일 조금씩 기억을 잃었다고 하오.”
“기억을요?”
“동료들의 이름을 까먹는다던가, 길을 잃는다던가, 심지어는 그렇게 좋아하던 전투기술을 까먹기도 했다더군.”
“증상이 치매랑 똑같네요.”
“비슷하지.”
엘린에 말에 도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김서준은 그다음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래서 어떻게 됐습니까?”
“일행들은 해결을 위해 대현자를 찾았다고 하오. 사비오의 나무로 이뤄진 현자의 탑 말이오. 거기서 만난 대현자는 지혜의 콩이라는 걸 토른에게 줬다고 하오.”
“지혜의 콩?”
“그게 사비오인지는 알 수 없소. 하나, 그 이후 토른은 저주에서 풀려났고 다시 용사 일행의 든든한 망치가 되었다고 하오.”
지혜의 콩. 사비오의 전설이 이미 퍼진 벨리르 대륙에서 굳이 사비오가 아닌 다름 이름을 불렀다는 건 이상하다.
하지만, 사비오 역시 콩이 아니던가. 같은 콩이라는 점에서는 지혜의 콩이 사비오 열매라는 생각도 들었다.
“저는 전설 속 지혜의 콩이 사비오 일 수 있다고 생각해요. 사비오 안에 가득한 정제된 마나가 제대로 농축되어 작용한다면 충분히 그럴 수 있을 거 같거든요.”
엘린이 도스의 이론에 힘을 실었다. 김서준도 고개를 끄덕였다.
“뭐든 해봐야겠죠. 일단은 그럼 열매를 맺게 해야겠네요.”
“근데 괜찮겠소? 지금과 같은 속도면 열매를 맺을 때까지 인간의 시간으로는 견디기 힘든 꽤 긴 시간이 걸릴 텐데.”
도스가 걱정스럽다는 듯 말했다. 사비오의 성장은 다시 정체기를 겪고 있었다. 이제는 어지간한 마정석으로는 성장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마치 무슨 벽이라도 걸린 것처럼.’
김서준이 대답했다.
“이대로는 힘들겠죠. 하지만 생각해둔 방법이 있어요.”
처음 사비오의 성장이 더뎠을 때, 마정석을 투여하는 방법으로 성장의 벽을 깼다.
사비오 안테나를 만들면서 두 번째 성장이 막혔을 때, 무수하게 많은 마정석을 들이부어 해결했다.
‘계단식 성장을 하는 것 같아. 만약 정말 그렇다면...’
첫 번째는 방법. 두 번째는 양.
그렇다면 이제 남은 방법은 하나.
‘질이겠지.’
결론은 하나로 귀결된다.
‘골렘을 만들어냈던 마정석.’
S급 이상의 힘을 가진 골렘을 구성했던 골렘의 핵이라면, 마정석의 질로는 그 어떤 마정석보다 훌륭하리라.
“그 방법이라면 될 겁니다. 헌터들이 좀 더 힘을 내줘야 하겠지만.”
“알겠어요. 그동안 우리도 사비오 잎으로 포션을 만들어볼게요. 혹시라도 효과가 있을지 모르니까요.”
“최선을 다해 그대를 돕도록 하겠소.”
두 사람의 대답에 김서준은 마음 한편이 든든해졌다.
****
저 멀리서부터 하얀 새들이 모여든다. 새들은 모두 미트루트 밭으로 내려앉았다.
“저게 그 유명한 토리인가 보네요.”
“맞아요. 진짜 신기하죠? 오리 같기도 하고 닭 같기도 하고.”
“그러게요. 입은 뾰족한데 발에는 갈퀴가 있네요.”
전소민과 정현민이 신기하다는 듯 토리들을 바라봤다. 토리들이 앉자마자 그 위로 움들이 올라탔다.
“움!!”
“꽥꽥!!”
능숙하게 올라탄 움들은 토리를 마치 말처럼 몰기 시작했다. 토리들은 움들의 지시를 따라 잡초를 뽑아 먹고, 새로 돋아난 꽃을 따기 시작했다.
“대단하네.”
“저희보다 잘하는 거 같죠?”
“새한테 지다니 괜히 자존심 상하네.”
“저거 새 아니고 정령이야.”
“그게 그거지.”
그 장면을 보며 헌터들이 웅성거렸다. 옆에서 이야기를 듣던 전소민이 피식 웃었다.
“왜요?”
“헌터들이 농사일에서 졌다고 화내는 게 웃겨서요.”
“하하, 그렇네요.”
화기애애한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을 뒤에서 조용히 바라보던 강백호가 말했다.
“그쯤하고 우리도 슬슬 시작하지. 아까운 시간 축내지 말고.”
“아, 네!”
정현민이 깜짝 놀라 대답했다. 그리곤 헌터들을 인솔하러 움직였다. 오늘 농사를 쉬는 이유는 휴식이 아니었다.
강백호의 말마따나 농사를 지었으면 강해질 수 있는 아까운 시간을 축낼 이유가 없었다.
잠시 후, 정현민의 인솔에 따라 모두가 오와 열을 맞춰 섰다. 각, 길드별 30명, 총 90명의 A급 헌터들이었다.
“모두 모였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클클. 늦어서 미안하네.”
거대한 덩치에 망치를 든 사내. 그리고 옆으로는 도사와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은발의 남자가 나타났다. 둘은 이번 훈련을 위해 김서준이 파견했다.
‘둘 다 S급 수준이라고 했나.’
김서준은 그렇게 말하며 좋은 대련 상대가 될 거라고 했다.
“괜찮습니다.”
전소민과 정현민이 강백호를 대신해 두 사람을 반겼다. 인사를 마친 후, 강백호가 딱딱하게 말했다.
“그럼 시작하지.”
강백호가 양손을 합장한 뒤 넓게 펼쳤다. 그 순간 검은 그림자가 일대를 뒤덮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