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 신농의축복
헌터의 장비는 두 가지 방법으로 구해진다. 첫 번째 방법은 전리품. 게이트, 던전 등을 토벌하면 일정 확률로 특별한 장비를 얻을 수 있다.
하지만 자주 일어나는 일은 아니라 주로 두 번째 방법으로 장비를 마련하는 데, 바로 제작 관련 직업을 가진 헌터를 통해 제작하는 방법이다.
‘그러다 보니 길드마다 전속 장인을 두기 마련이지.’
전속 장인과 휘하에 있는 제조 헌터들을 통해 장비를 마련하는 방식이었다.
사실 이런 형태는 단순히 외부에서 장비를 사는 돈을 아끼기 위한 건 만이 아니었다. 더 대단한 장인과 계약해 더 좋은 장비를 선점하기 위한, 경쟁 중에 만들어진 결과물 중 하나였다.
‘그런 부분에서 아저씨는 참 고마운 분이었지.’
그는 대단한 실력을 갖춘 장인이었다. A급 장비는 물론 S급 무기도 만들 수 있는 장인 중의 장인.
‘진작에 외부 활동을 했다면 국가 공인 명장이셨을 테지.’
하지만, 장인섭은 그러지 않았다. 명장일수록 사람을 가린다는 속설처럼 그는 자신의 무기를 사용할 수 있는 이들을 가려 받았다.
김서준과 전소민은 그런 면에서는 행운이 따랐다. 당시 패기와 정의감이 넘치던 두 소년 소녀의 마음에 정인섭이 감명을 받았던 덕이었다.
“너희들이 정말 말한 신념대로 사는지, 내가 평생 감시하겠다.”
정인섭은 그렇게 말하며 김서준과 전소민에게 무기를 만들어줬다.
그 뒤로도 정인섭은 든든한 뒷배이자, 멘토이자, 동료로서 그들과 함께 해왔다. 김서준은 정인섭이 평생 그렇게 함께 할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치매라니! 그렇게 정정하셨는데!”
“...”
전소민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왜 내게 일찍 말하지 않은 거야? 알려줬다면 방법을 찾았을 텐데···.”
“아저씨가 원하셨어. 억지로 은퇴하면서 가뜩이나 힘들 텐데, 말하지 말아 달라고···. 알아봤자 걱정만 늘고, 달리 질 것도 없을 거라고···.”
김서준은 무어라 더 항의하려다 입을 닫았다. 아저씨와 전소민의 판단이 맞았다. 마법은 만능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포션은 정신병이나 불치병에는 효과가 없었다.
‘치매 역시 마찬가지···.’
더군다나 김서준은 의사도 아니지 않은가. 옆에서 걱정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을 터였다. 어쩌면 치매에 걸린 아저씨의 수발을 드느라 지금 이룩한 모든 것을 이루지 못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래도···.’
김서준은 주먹을 꾹 쥐었다.
“그래도 얼마 전까지는 무기를 만들곤 하셨는데, 증상이 심해져서 이제는 요양원에 들어가셨어. 지금이라면 말해도 될 거 같아서···.”
전소민이 말끝을 흐렸다. 그리곤 살짝 붉어진 눈시울로 김서준을 바라보며 말했다.
“...미안해.”
김서준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는 크게 한숨을 쉬었다.
“그래도 다행이다. 치매라서.”
그래. 지금의 격렬한 감정은 단순히 충격적인 이야기에 의한 잠깐의 격통. 냉정하게 이 상황은 절망스러운 게 아니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치매라서 다행이라니.”
“다행히 당장 돌아가시는 건 아니잖아. 시간만 준다면 치매는 고칠 수 있거든.”
김서준의 말을 들은 전소민의 눈에 희망이 차올랐다. 동시에 그 큰 눈이 다시 한번 붉게 물들었다.
****
“자자, 어서 꽃을 다 따야 한다움! 조금만 늦으면 시간을 놓친다움!”
미트루트 줄기에 빨간 꽃봉오리들이 개화하기 직전이었다. 미트루트 뿌리에 담은 영양분을 꽃이 개화하기 직전까지 모은 후, 개화와 동시에 위로 전부 올려보내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반대로 말하면 개화 직전에 꽃을 따주면 모은 영양분이 고스란히 미트루트 뿌리에 남는다. 그러니 지금이 딱 꽃을 따야 할 타이밍이었다.
“움움!”
노움의 명령을 들은 움들이 재촉하듯 옆에 있던 헌터에게 소리쳤다. 움들은 일대일로 한 명씩 헌터들을 담당하고 있었다.
노움이 전체적인 지도를 담당하는 감독이라면, 움들은 코치 역할이었다. 농사가 익숙하지 않은 헌터를 위해 김서준이 만든 교육체계였다.
‘대단하네.’
정현민은 움들의 지시를 따라 움직이는 헌터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김서준의 생각대로 작은 정령 하나를 붙였을 뿐인데 헌터들의 몰입도는 엄청나게 올라갔다.
“악!”
정현민이 깜짝 놀라 비명을 질렀다. 손등이 빨갛게 부어오르고 따끔한 통증이 느껴졌다.
“움움!”
움이 방금 꽃을 딴, 부분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힘이 조금 과했는지, 꽃만 떼어낸다는 게 줄기까지 끊어버렸다. 농사가 서툰 정현민에게 힘 조절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알겠어. 다음부터는 좀 더 조심할게.”
정현민이 미소를 지으며 사과한 뒤, 다시 작업을 시작했다.
“이런 여린 풀을 뜯는 것만으로도 힘 조절의 묘미를 익힐 수 있지. 더 집중해서 얼마나 단단한지 느껴보게. 그리고 가볍게 힘을 줘 따게.”
옆에서 덤덤히 빨간 미트루트 꽃을 따던 강백호가 말했다.
“대단하십니다. 정말 모든 상황을 수련과 연결하시네요.”
“일분일초도 낭비할 수 없지 않은가. 이 메시지만 믿고 말이야.”
농사를 짓고 있으면 김서준의 말대로 근력, 체력, 민첩성, 집중력 등이 올랐다는 메시지가 떠올랐다.
‘볼 때마다 놀라워. 그저 농사를 지은 것뿐인데.’
눈으로 보면서도 믿을 수가 없었다. 이제 농사일에 불만은 가지는 헌터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어제는 다른 밭농사도 도와주면 강해지냐고 묻는 헌터도 있었지.’
헌터에게 강함은 가장 중요한 능력. 그 능력을 이렇게 쉽게 키울 수 있다는 사실에 모두가 열광하고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중 으뜸은 역시 강백호였다.
“언제 중국이 움직일지 모르네. 그러니 최대한 효율적으로 수련하세.”
강백호는 딱딱하게 말한 뒤 다시 일에 전념했다.
“알겠습니다.”
정현민도 심기일전한 후, 다시 빨간 꽃을 집어 들었다.
‘집중해서 붙어있는 정도를 느끼고, 적당한 힘으로···.’
정현민이 힘을 주려는 순간.
-촥!
무언가 찢어지는 소리가 났다. 정현민이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강백호의 손에 줄기째 찢겨버린 미트루트 잎과 꽃이 들려있었다.
“앗!”
아니나 다를까.
레이더처럼 주변을 돌아보던 노움이 강백호를 보고 소리쳤다.
“뭐 하는 거냐움!!!!!!”
강백호는 특유의 점잖은 표정으로 낮게 신음했다. 정현민이 터져 나오는 웃음을 기를 쓰고 참아야 했다.
****
[근력이 올랐습니다.]
김서준은 눈앞에 나타난 창을 보며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이건 내가 생각해도 너무 날로 먹는 거 같네.’
미트루트 농사는 신농과 다른 사람이 함께 농사를 지으면 신체 능력을 증가시켜 준다. 여기에는 신농, 즉 김서준이 포함되어 있었다.
물론 김서준이 미트루트 밭에 함께 있는 건 아니었다. 근데 왜 능력치가 올랐는가.
‘노움과 움들 덕분이지.’
노움과 움들이 미트루트 밭에서 농사를 짓는 것이 정령의 계약자인 김서준이 함께 농사를 짓고 있는 것과 같은 판정을 받고 있었다.
덕분에 김서준은 헌터들이 있는 흰돌마을 대신 금산마을에 있으면서도 그 효과를 고스란히 받을 수 있었다.
김서준은 상태창을 지운 뒤 다시 길을 걸었다.
“저기요!”
누군가 김서준을 불러 세웠다.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자 셋. 금산마을에 놀러 온 관광객인 듯했다.
“혹시 사진 한 번만 찍어도 될까요?”
“저요? 아니면 리노요?”
김서준이 아래를 보며 말했다. 오늘도 하얀 눈처럼 몽글몽글한 자태를 자랑하는 리노가 여자들을 바라봤다.
“멍!”
리노의 귀여운 울음소리가 나오자 그녀들의 입에서 까르르 웃음소리가 터져 나온다.
“너무 귀엽다.”
“진짜, 인별에서 본 거보다 더 귀여워!”
리노의 인기는 여전했다. 금산마을의 걸어 다니는 포토존이랄까.
“감사합니다!”
“여행 재밌게 즐기세요.”
흰돌마을 헌터들이 추후를 대비하는 것과는 상관없이 금산마을과 금산 농장은 여전히 호황이었다.
게스트하우스, 체험농장, 가온길 등 모든 업체 역시 훌륭한 매출을 달성했다. 그뿐일까. 토종작물의 인식도 나날이 좋아지는 덕에 마을 사람들의 손은 쉴 틈이 없었다.
하지만 누구 하나 울상인 사람은 없었다.
“아유, 좀 바쁘면 어뗘.”
“이런 적이 얼마만 인지. 한 30년만인 거 같어.”
“요즘만 같으면 즐겁지. 즐거워.”
돈 관리를 도맡아 하고 있는 고블도 행복해 죽겠다며 난리였다.
‘돈이 쌓이는 걸 보면 기분이 좋아진다더니.’
매일 회사 통장과 세무 기록표를 보며 즐거워하는 고블을 보고 있자면 가끔 무서울 정도였다.
“멍멍!”
마을도 살피고, 관광객들과 인사도 나누며 걷다 보니 금세 사비오의 밭에 도착했다.
“안녕하세요!”
“인사 한번 해주세요!”
여전히 멋진 자태를 보여주는 트리 위에서 소리치는 관광객들이 보였다.
‘무슨 연예인 된 거 같네.’
김서준이 피식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전망대에서 사람들의 함성이 울려 퍼졌다. 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잠시 서비스를 해준 김서준은 사비오로 다가갔다.
“많이 컸네.”
처음에는 작은 묘목 같던 사비오는 이제 콩나무답게 여러 줄기가 엉킨 모양이었다. 엉켜있는 줄기가 날로 두껍고 거대해지는 게, 현자들의 집이었다는 전설처럼 크게 자라날 조짐이 보였다.
김서준은 사비오 잎을 하나 땄다.
파란빛의 오묘하고도 신비한 느낌의 색은 그저 바라만 보는데도 마음이 차분해지는 기분이었다.
“멍멍.”
“그래. 가서 사진 찍어.”
사람들과 어울리고 싶어 하는 리노를 보내준 채, 김서준은 이파리를 계속 쳐다봤다. 그러자 메시지 창이 떠오른다.
[사비오]
쌍떡잎식물 장미목 콩과의 한해살이풀. 이제는 멸종되고 딱 한 개의 씨앗만이 남아있다. 푸른색 껍질을 가지고 있으며 생으로는 먹으면 독성이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
차로 끓여내면 머리를 맑게 하는 데 탁월한 효과가 있다.
<재배 방법>
- 열매에 들어있는 푸른색 콩(종자)을 땅에 심는다.
<용도>
-차로 우려내어 섭취.
-심신안정. 집중력 향상 등에 효과.
일전에 봤던 상태창이 나타났다. 그리고 그 밑에 김서준이 확인하고 싶었던 새로운 한 줄이 더 적혀 있다.
[신농의 축복으로 새로운 효과가 추가됩니다.]
[사비오를 복용하면 뇌 기능을 회복시키고 강화합니다.]
파킨슨 치매, 혈관형 치매, 알츠하이머.
치매의 원인과 증상은 다양하다. 그러나 결국 이런저런 원인으로 나타나는 증상은 비슷하다. 뇌가 줄어들고 뇌 기능의 어딘가에 문제가 생긴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어떤 식으로든 뇌 기능을 회복할 수 있다면 분명 치료도 가능하겠지.’
문제는 사비오를 복용한다는 점이었다.
‘사비오 잎으로도 효과가 있다면 좋겠지. 하지만 만약 열매를 먹어야 하는 거라면 문제야.’
사비오는 심은 이래 열매를 맺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사비오 위에 떠 있는 성장도가 이제 30%를 넘겼지만, 여전히 열매는커녕 꽃이 필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소민이 말에 따르면 다른 데는 아직 정정하다고 하셨지.’
그 말인즉슨 시간은 충분히 있다는 이야기. 이파리를 연구하고, 열매를 맺고, 그 열매도 연구하고.
‘엘린과 도스의 도움까지 받는 가면 분명 할 수 있어.’
김서준은 확신에 가까운 각오를 다졌다.
이 일만은 ‘만약의 사태’가 있어서는 안 됐다.
헌터의 성지를 만들고. 헌터들을 강하게 만들려면 장인섭 장인의 힘이 꼭 필요했다. 아니, 그런 이유를 모두 다 던지더라도 해내야 했다.
‘은인이니까. 이번에는 내가 도와드릴 차례야.’
김서준은 사비오로 손을 뻗었다.
-툭.
그리곤 이파리를 떼어 바구니에 넣었다.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연구는 오늘부터 시작되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