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농사로 꿀 빠는 헌터-103화 (103/139)

103. 믿지 못할 이야기.

금천면에 새로운 풍경이 자리 잡았다. 누구도 찾지 않던 야산 주변, 방치되어 있던 땅에 젊은 청년들이 몰려든 것이다.

게다가 그냥 청년들이 아니었다. 하나하나가 A급 이상의 대단한 헌터들이었다.

“이 겨울에도 웃통을 벗고 일하는 거 봐. 역시 헌터는 다르구먼.”

“젊음의 혈기지. 저러다 몸 상해.”

“노인들 질투하기는. 보기만 좋은데. 서준이 덕에 눈도 호강하는구먼.”

“아휴. 여편네들 나이 먹고 주책 떨지 말고 얼른 밭이나 갈러 가슈.”

어르신들은 신기하다는 듯 그 주변을 지나가며 한 번씩 힐끔거리곤 했다. 그 안에 일하는 헌터들은 그런 시선에 여유를 부릴 겨를이 없었다.

“거기! 잡초 뽑을 때 주변 땅 안 뒤집어지게 조심하라움! 힘만 쓰면 다가 아니다움!”

김서준과 모든 길드 장들에게 권한을 위임받은 정령이 그들을 매섭게 갈궜기 때문이다.

‘귀여운 정령이라 얕봤는데. 젠장.’

‘농사의 정령이라더니, 아빠보다 엄격하네.’

털모자에 짧은 몸은 누가 봐도 귀여운 모습이었지만, 그 실체는 아니었다. 누구보다 철저하고 깐깐한 농사감독이었다.

아니, 쉬는 시간조차 주지 않는 걸 보면 조금은 악덕 농장주랄까.

‘농사가 쉬운 게 아니구나.’

기꺼이 참여한 정현민 역시 그런 생각이 들 정도. 하지만, 사실 그들이 여유 없이 힘든 건 농사가 본래 힘들거나, 노움이 엄격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김서준이 얹은 몇 가지 장치 때문이었다.

‘이 날씨. 안에서 활동하고 있지만, 지금도 이해가 되지 않아. 비닐 없는 비닐하우스 같은 거라고 했지만 말이야.’

김서준은 그들이 일해야 하는 땅을 여름 날씨로 맞췄다. 미트루트가 가장 잘 자랄 수 있는 온도라고 했다.

덕분에 칼바람에 조금만 밖에 있어도 뼛속까지 한기가 스미는 겨울. 헌터들은 습하고 더워 조금만 움직여도 땀이 비처럼 흐르는 경험을 할 수 있었다.

‘게다가 이 저주들 때문에 몸을 움직이기도 쉽지 않아.’

엘린이 건 마법이었다. 그들은 이 땅에 들어오는 순간, 마법의 영향으로 움직이는 데 평소의 2~3배의 힘을 들여야 했다.

‘농사를 지으면 강해질 거라더니. 사실 이 과정만 거쳐도 강해지겠어.’

정현민은 쓴웃음을 지었다. 반면 전소민은 여기 온 뒤로 언제나 싱글벙글했다. 한 번도 심각하거나 인상을 찌푸리는 일이 없었다.

지금의 농사 역시 마찬가지였다. 지친 기색은 한 번도 보인 적이 없었다. 그녀는 노움의 잔소리에도 환한 미소로 대답할 뿐이었다.

“모두 힘내요!”

도리어, 저렇게 파이팅을 외치며 모두를 독려하기도 했다.

‘진짜 김서준이란 남자가 저분에게는 엄청난 의미가 있나 보네.’

정현민은 입안이 씁쓸했다.

이길 수 없는 싸움, 실패가 뻔한 도전.

평생 그런 걸 해본 경험은 없었다. 앞으로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지금, 왠지 그런 경쟁을 해야만 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이라도 포기할까.’

그러기에 눈앞에 있는 여자는 너무나도 눈이 부셨다.

“뭔 생각을 그렇게 하나.”

“아, 아닙니다.”

옆에서 열심히 잡초를 뽑던 강백호가 자세를 멈추고 말했다. 그는 우락부락한 근육을 뽐내며 열심히 일하는 중이었다.

“잠깐 딴생각을···.”

“이것도 수련이라고 생각하고 진지하게 임하게. 비록 대한민국에서는 둘도 없는 검사라지만, 전 세계적으로는 아니지 않은가.”

강백호의 말에 정현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어르신은 괜찮습니까?”

“이 일 말인가?”

“일도 그렇고 여기 머무는 것도 그렇고···.”

강백호는 별일 아니라는 듯 대답했다.

“강해지기 위해 이정도는 별일도 아니지.”정현민은 강백호의 몸을 바라봤다. 강백호의 몸 여기저기 흉터가 많았다.

‘과연 1세대 헌터답구나.’

1세대 헌터들은 사실상 영웅으로 지금의 헌터들과는 궤를 달리했다. 그저 각성했다는 이유만으로 몬스터들과의 전쟁에 몸을 던졌다.

하지만, 국가의 지원은 빈약했고, 무기도 허접한 장병기가 전부였다. 그러나 그들은 신념 아래에 전력을 다했고 희생에 몸을 아끼지 않았다.

‘그들이 존중받아 마땅한 이유지.’

그 수많은 희생 덕에 지금의 안정과 체계가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그들은 존중받아야 했고 존경받아야 했다.

그러나, 이미 너무 많은 이가 세상을 떠났다. 또 많은 이는 은퇴했다.

‘최강이라 불렸던 1위와 2위 헌터는 종적을 감췄고.’

이제 1세대 헌터 중 대중의 눈앞에 남겨진 이는 강백호뿐이었다.

‘저 흉터는 그때의 상처겠지.’

한때는 그의 행보를 욕하기도 했다. 돈에 눈, 지극히 개인적이고 감정적인 행보들. 그러나 지금, 다시 한번 저 시대의 흔적을 보고 있자니 죄송하면서도 존경심이 끓어 올랐다.

‘거기에 저 나이에도 계속 강해지고 싶은 열망이라니. 정말 대단한 분이야.’

정현민은 아무렇지 않은 듯 대답하는 강백호에게 고개를 숙였다.

“..정말 대단하십니다.”

“이런 태도가 아닌 녀석들이 문제인 거지. 내가 대단한 게 아니라. 그러니까 딴생각 말고 집중하게.”

그때 노움이 ‘-슝’하고 날아와 말했다.

“두 사람! 놀지 말하고 일 하라움!”

“멍멍!!”

땅으로 달려온 강아지도 나무라듯 짖었다. 그 귀여운 꾸지람에 정현민은 피식 웃었다.

****

“크.”

“캬.”

“이 맛에 훈련하지.”

탕에 들어가는 헌터들의 입에서 좀 전과는 다른 기분 좋은 탄성이 터져 나왔다. 누구 하나 불평하는 이 없이 모두가 흐뭇한 표정이었다.

“진짜 피로가 싹 날아가네.”

“그러니까. 온천이 이렇게 좋은 건지 이번에 알았다니까.”

“야, 여기가 특이한 거지. 다른 데 가 봐라. 동네 목욕탕이랑 똑같다니까.”

“크하하하.”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던 헌터들 사이 웃음이 터져 나왔다. 땀을 뻘뻘 흘리며 지쳐 터벅터벅 걷던 모습이 어제일 같이 보였다.

“박하 향 때문에 괜히 더 시원한 거 같고.”

“그러니까. 몸만 좋아지는 게 아니라 정신도 맑아지는 게, 진짜 천국이 따로 없다.”

방금 들어온 정현민은 헌터들의 대화를 들으며 미소를 지었다.

‘다들 생각이 똑같네.’

정현민의 생각도 그랬다. 한옥의 고풍스러움과 자연의 정취가 섞인 풍경, 기분 좋은 허브 향, 거기에 딱 좋은 온도로 몸을 감싸주는 탕까지.

정현민 역시 이 온천에 듬뿍 반해버렸다. 정현민은 설레는 마음으로 강백호를 찾았다.

‘저기 계시네.’

지그시 눈을 감은 채 탕 안에 앉아 있는 그의 옆으로 정현민이 나란히 앉으며 말했다.

“오늘도 고생하셨습니다.”

“자네도 고생 많았네.”

자리에 앉아 여지없이 안내창이 나타났다.

[금천온천을 사용하면 다음과 같은 효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30분 - 일시적 민첩성, 근력, 체력 강화, 신진대사 증가, 피부 미백 및 개선, 노화 방지.]

[1시간 이상 – 민첩성, 근력, 체력 영구 증가(1일 1회)]

[한 달간 일정 횟수 이상 사용– 생명력 회복]

정현민이 고개를 저었다.

“볼 때마다 신기하네요. 설마 이런 탕이 정말 있었을 줄이야.”

“말도 안 되는 이야기지.”

온천에서 쉬기만 해도 강해진다니. 처음 김서준이 말했을 때, 정현민도 사실 반쯤은 의심했다.

‘절대 있을 수 없는 일 같았으니까.’

몸을 담그기만 해도 강해지는 온천이라니. 이제껏 헌터들이 강해지기 위해 몬스터를 죽이고 목숨을 걸어야 했던 것에 비하면 이 얼마나 편하고 쉬운 방법이란 말인가.

“설마 이 온천수까지 만들어낸 건 아니겠지?”

강백호도 믿기지 않는 다든 듯 이야기했다.

“설마요. 운 좋게 온천수를 발견한 거라고 하더라고요. 주변 환경이 우연히 잘 만들어져서 마나가 스며든 온천수라고 합니다. 이거 지을 때, 이 환경 안 바꾼 채 온천수만 뽑아 올리려고 신경을 많이 썼다고 하더라고요.”

“우연치고는 운이 좋군. 바이올렛 호퍼 사태 때 사용했다는 그 특이한 식물도 좋고.”

“운도 실력이다. 뭐 그런 걸까요. 하하.”

정현민의 농담에도 강백호는 진지한 얼굴이었다.

“운이라. 그래, 너무 기이할 정도로 운이 좋아.”

“네?”

“아닐세.”

강백호는 말을 얼버무리며 다시 눈을 감았다.

****

금천온천은 기본적으로 혼욕할 수 있었다. 그러나, 강백호는 그럴 수 없다며 여자 헌터와 남자 헌터를 철저히 분리했다.

그 덕에 일찍 온천욕을 마친 전소민은 오늘의 일정을 마무리하고 집에 돌아와 소파에서 쉬고 있었다. 물론 김서준의 집이었다.

“농사는 어때?”

한참 주방에서 요리를 준비하던 김서준이 전소민에게 물었다.

“농사?”

전소민이 혀를 빼꼼 내밀며 말했다.

“우리 그래도 엄연히 잘 나가는 헌터들인데. 농사 대신 훈련이라고 해줄래?”

김서준이 그 말에 피식 웃었다.

“그래. 훈련은 어때?”

“다들 처음에는 농사라고 무시하더니 이제는 열심히 하고 있지. 특히 노움이 아주 혹독하게 시키던데?”

“노움이 그런 면이 있지. 귀엽다고 무시할 게 아니라니까.”

김서준이 그렇게 말하며 창밖을 바라봤다. 마당에 리노와 노움이 뛰노는 게 보였다.

“그러니까. 여튼 덕분에 농사가 육체와 함께 정신력도 강해지는 기분이야.”

“일석이조네.”

김서준의 말에 전소민이 킥킥거리며 웃었다.

“그래도 농사보다 다들 온천에 빠졌지. 나도 그렇고. 어떻게 그런 온천을 다 만든 거야?”

“물이 참 좋지?”

“좋다는 말로는 표현이 안 되지. 진짜 몸에 근육 하나하나 다 풀리는 기분에 능력치까지 오르는데.”

잠시 그 기분을 상상했는지, 전소민이 감격스러운 표정과 함께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근데, 그거 보다, 너무 예쁘던데? 한옥이랑 그 온천 있는 마당이랑 진짜 잘 어울리고, 장식 하나하나 엄청 예쁘고! 옆에 나무랑 풀이랑 하늘이랑 풍경까지, 뭐 하나 빠지는 게 없던데?”

“그래? 다행이네?”

“다행인 정도가 아니라니까. 아마 네가 처음 말 안 했으면 다들 인별그램에 사진 올리기 바빴을걸? 진짜 너무 예쁘더라. 네가 다 계획한 거야?”

“같이 한 거지. 다들 아이디어 담아서.”

“그래···?”

그 말에 전소민이 묘하게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김서준이 물었다.

“왜?”

“아, 아냐. 아무것도.”

전소민이 마치 장난을 치려다 걸린 아이처럼 화들짝 놀랐다. 그러더니 이내 빠르게 화제를 바꿨다.

“근데, 언제부터 다시 결계에 들어갈 거야?”

“그건 내가 결정하는 것보다 길드 장들이 직접 결정하는 게 좋겠지. 아무래도 자신의 실력은 자신들이 가장 잘 알 테니까.”

“하긴···.”

“아, 근데 소민아 나 궁금한 게 있어.”

“응? 어떤 거?”

“너 혹시 인섭이 아저씨랑 연락돼?”

장인섭.

청룡 길드의 전속 장인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에게는 좀 더 각별한 의미가 있었다.

‘우리에게 처음으로 무기를 만들어준 장인이니까.’

두 사람이 처음으로 장인의 무기를 쥘 수 있게 해준 게 장인섭이었다.

“아저씨 연락처가 바뀐 건지 연락이 안 되네? 그때 은퇴할 때 연락드리긴 했는데.”

“아, 그, 그게···.”

“왜?”

말을 얼버무리던 전소민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리곤 혼자 중얼거렸다.

“...이제는 말해도 되겠지?”

“무슨 일인데?”

“사실 아저씨가 지금 병에 걸렸어.”

전소민은 무겁게 입을 뗐다.

“네게는 걱정한다고 말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사실 아저씨 네가 은퇴할 때쯤 치매에 걸리셨어···.”

-툭.

김서준은 들고 있던 칼을 자기도 모르게 떨어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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