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 농사를 지어볼까요?
상황이 마무리되자 김서준의 머릿속에 미뤄두었던 의문이 다시 떠올랐다.
‘왜 이 세 길드가 여기까지 온 거지? 게다가 왜 함께?’
S급 던전 관리는 나라에서 직접 한다. 게다가 던전 토벌을 위해 입찰한 길드 중 한 곳을 선정하면 그 길드가 전담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여긴 아무리 봐도 3개의 대형길드가 함께 연합한 모양이었다.
‘블랙 바질리스크의 던전이 3개 길드가 힘을 합쳐야 할 정도로 어려운 던전은 아닐 텐데.’
김서준은 사태 수습을 위해 바쁜 세 길드장 대신 노을에게 물었다.
“원래는 비밀이지만, 사태를 수습한 영웅인데 숨기는 게 더 웃기겠죠? 이 세 길드는 특수한 임무를 부여받고 훈련 중이었어요.”
노을은 체념한 듯 순순히 속 사정을 털어놓았다.
“훈련이요? 어떤 임무길래 훈련까지 하는 거죠? 전쟁이라도 하는 겁니까?”
“북한 토벌이요.”
김서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1년 안에 북한 정벌을 시작하겠습니다.’
중국의 발표가 있었던 후, 한국도 어떤 조치를 취하겠다고 예상은 했다.
‘오히려 먼저 토벌을 나설 계획을 세웠을 줄이야.’
하기야 여론에서는 오래전부터 이야기했다. 북한은 본래 한국의 영토니 서둘러 토벌하고 가져와야 한다는 여론이 있었던 건 당연했다.
‘가뜩이나 적은 헌터 전력의 손실이 두려워 못했던 거지.’
북한은 알려진 이상으로 심각하다는 건 아는 이들은 모두 아는 이야기. 간혹 지뢰밭을 넘어 내려오는 몬스터들의 수준만 봐도 여간 높은 게 아니지 않던가.
‘그런 걸 다 알면서도 결단을 내렸다는 건 아마도 중국의 압박이었겠지.’
신기한 건 참여한 길드였다. 국가적 차원에서도 그렇지만, 길드, 즉, 사업가들 입장에서도 핵심전력을 잃을 수 있는 임무.
서로 참여하지 않으려 눈치를 봤을 게 분명하다.
‘아마 청룡 길드나 제일 먼저 참여했겠지. 에픽은 정의감 반, 도박 반일까.’
근데 황룡 길드는 아무래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황룡은 언제나 그들의 이득을 최우선 가치로 하던 길드가 아니었나?
“저번 사태를 보고 감명을 받으셨데요.”
“감명이요?”
“바이올렛 호퍼 사태 젊은 헌터들이 나라를 위해 노력하는 모습에 감명을 받았다고 하더라고요.”
“별일이네요. 저분이 그렇게 감정적인 분이 아니셨는데. 역시 늙으면 감성적이 되는 건가···.”
김서준은 강백호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과거 세대를 주름잡던 헌터들이 이런저런 사연으로 사라지던 와중에도 꿋꿋이 자리를 잡은 건 그의 지극히 개인주의적인 사상 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거기다 지독할 정도로 합리적이었지. 그런 분이 감명을 받아 태도를 바꿨더라.’
김서준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믿기지 않았다.
“그나저나 그럼 전부 좋은 취지로 모인 건 맞네요. 거기에 훈련도, 더 강해질 필요도 있고요.”
“그렇죠.”
김서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다시 포털을 바라봤다. 붉은빛으로 변한 포털은 여전히 던전의 입구에서 웅웅 거리고 있었다.
“저거라면···.”
“왜요?”
“노을 씨, 저 포털 우리 영농조합의 이름으로 독점할 수 있을까요?”
“길드가 담당 지역 던전 소유권을 사는 것처럼요?”
“네.”
“뭐, 여닫을 수 있는 게 서준 씨 뿐이기도 하고. 제가 한번 문의해볼게요. 근데 저건 사서 뭐하시게요? 설마 저 안에 골렘을 밖으로 꺼내서 난리라도 치려는 건 아니죠?”
노을이 장난스러운 말투로 말했다. 김서준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뭐, 그것도 재밌겠죠.”
“네?”
“농담이에요. 생각해둔 게 있는 데 저 포털이 그 계획의 마지막 조각이 될 수 있을 거 같아서요.”
이야기를 들은 노을이 눈을 반짝였다.
‘이번엔 또 뭘 하려나.’
그 눈에는 기대가 잔뜩 어려있었다.
*****
사태를 수습한 세 길드의 헌터들을 김서준은 금천면으로 데려왔다. 금천면에 있는 게스트하우스와 펜션 등에 헌터들이 편안하게 지낼 수 있도록 조치했다.
그 사이 길드장 들은 금호 영농조합의 사무실로 모였다.
“숙소는 괜찮으십니까.”
“나쁘지 않더군.”
강백호가 차가운 말투로 대답했다. 사실 강백호와 정현민 등, 헌터들은 좋은 호텔에 묵기를 원했다.
‘돈이 없는 길드들도 아니고 굳이 여기까지 올 이유가 없었지.’
하지만, 김서준이 강하게 주장했다. 그들 모두가 금천면으로 와야 한다고.
‘미트루트 포션만 아니었으면 쳐냈겠지만···.’
강백호는 좋은 관계를 만든다는 일념에 억지로 그 말에 따랐을 뿐.
“생각보다 잘 만들었어.”
그런데 생각보다 숙소가 좋았다. 산골에 다 무너져가는 민박이 아닌, 깔끔한 현대식 건물이 대다수였다.
‘관광지로 뜨고 있고, 수완도 좋다더니 진짜였나 보군.’
강백호는 내심 놀라고 있었다. 더욱이 마을은 산 공기가 맑은 수준을 넘어, 하루 머물었을 뿐인데 머리가 상쾌해지는 기분.
어제 고집을 부렸던 일이 있기에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꽤 만족스러운 밤이었다.
“역시 좋은 동네네요.”
“덕분에 편하게 하루 보냈습니다.”
정현민과 전소민은 이미 겪어봤기에 당연하다는 듯 환하게 대답했다.
“다행이네요.”
김서준은 씽긋 웃으며 대답했다.
“자, 그럼 이제 말해주게. 우리가 꼭 여기로 데려온 이유가 무엇인가?”
강백호는 단도직입적으로 용건을 물었다. 이리저리 빙빙 주제를 돌리고 눈치를 보는 건, 딱 질색이었다.
‘아무리 은인이라 해도 말이지. 피차 시간 낭비를 할 필요는 없으니까.’
강백호의 말에 전소민과 정현민도 김서준을 바라봤다. 김서준은 씩 웃으며 말했다.
“다들 미트루트 포션의 효과는 보셨을 겁니다. 아마 벌써 사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계신 분도 있으실 거고요.”
“물론 일세. 효과가 훌륭하더군.”
“맞습니다. 트롤의 피로 다양한 장인들이 만들 포션을 사용해봤지만 그만한 효과는 처음이었습니다.”
예상했던 말이 두 사람의 입에서 쏟아져 나왔다. 김서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준비해 온 말을 털어놓았다.
“미트루트 포션에 대한 독점 거래권을 드리죠.”
“!!!”
모두의 눈이 커졌다.
‘다들 똑같은 생각이었구나.’
아마 첫 포션의 효과를 본 후, 어떻게 포션을 싸고 많이 납품받을까, 또는 사업권을 얻을까 고민했던 게 틀림없었다.
‘하긴 당연하지. 미트루트 포션은 그 정도로 엄청나니까.’
김서준은 그 점을 이용할 생각이었다.
“단, 제가 바라는 조건을 들어준다는 거래 하에 말입니다.”
“그 조건이 무엇인가?”
“저는 천산군을 헌터의 성지로 만들 생각입니다.”
“헌터의 성지?”
김서준은 화면에 지도를 띄웠다. 그리곤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저는 우리나라 헌터들이, 나아가 전 세계의 헌터들이 강해지기를 바랍니다. 그걸 위한 훈련의 성지로 천산군을 정했습니다.”
“이해가 안 되는군. 헌터가 강해지는 방법은 훈련과 더 좋은 장비로 무장하는 것뿐이야. 이런 시골에서 어떻게 강해진다는 건가?”
김서준은 온천을 가리키며 말했다.
“자연의 힘을 담은 특수한 온천입니다. 여기서 온천욕을 하면 신체 능력이 강화됩니다.”
“거짓말도 정도가 있지. 그게 말이 된다는 건가?”
강백호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동시에 얼굴에 노기가 살짝 서렸다.
“제가 무엇하려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직접 경험해보시면 금방 탄로 날 텐데요. 제 말은 전부 사실입니다.”
김서준은 오히려 더 당당히 강백호에게 이야기했다.
“그럴 리가. 그럼 그게 사실이라는 건가? 허···.”
“엄청 나군요.”
“대단하네.”
그러자 강백호가 입을 다물었다.
“계속하죠.”
김서준은 온천 옆 노지를 가리켰다.
“여기에는 미트루트 농사를 지을 겁니다. 여기서 지은 농사는 헌터들의 포션에 쓰일 재료가 되겠죠. 그리고 그 농사는 천산군에 머물 헌터들이 직접 짓습니다.”
“서준 씨, 농사를 비하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몸을 쓰는 일이라 해도 헌터들이 농사를 짓는 건 절대 훈련이 될 수 없습니다.”
“맞아. 차라리 더 많은 돈을 받고 미트루트 포션을 파는 게 좋지 않을까?”
김서준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이곳에 미트루트는 무조건 헌터들이 직접 길러야 합니다.”
‘신농의 재능’
신농이 키운 작물에 특별한 힘을 부여하는 이 능력이 미트루트에도 작용했다. 그런데 그 내용이 독특했다.
[신농과 함께 농사를 짓는 이들의 신체 능력을 키워줍니다.]
[함께 농사를 지은 이들이 미트루트를 섭취할 경우 효과를 두 배로 키워줍니다.]
농사를 짓는 과정에서 강해진다. 그런데 그걸 먹으면 평소보다 더 큰 효과까지 얻는다. 이건 그야말로 대박.
“...그렇기에 헌터들이 직접 농사를 지어야 합니다.”
“저게 정말이라면, 당연히 모든 헌터들이 농사를 지어야 하긴 하겠지만···.”
“...믿을 수가 없군요.”
“이것도 직접 해보면 바로 알 수 있다는 건가?”
강백호의 물음에 김서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제 말에 하나의 거짓도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여기가 있습니다.”
김서준이 마지막으로 가리킨 곳은 그들이 겨우 빠져나온 결계가 있었던 곳이었다.
“여기에 다양한 몬스터와 다양한 환경을 마주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렇네. 보통 던전이 하나의 몬스터로 가득 찬 것과는 완전히 다른 형태였지.”
“맞아요. 다른 곳이 정말 게임의 던전이라면, 거긴 마치 동물 대신 몬스터들이 사는 아마존 같달까요.”
전소민과 강백호가 대답했다. 김서준이 헌터관리국을 통해 알아본 바에 다들 비슷한 의견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 동일하게 언급되는 이야기.
“그 다양하고 처음 보는 몬스터 덕에 많은 위기를 겪었다는 이야기가 많았죠. 그리고 전 그게 지금 북한과 비슷할 거로 생각합니다.”
위성으로 촬영한 북한의 모습을 보면 실제로 처음 보는 형태의 몬스터가 많았다. 촬영되지 않은 몬스터는 더더욱 많을 터였다.
“훈련 장소로 쓰겠다는 건가?”
“네. 제겐 열쇠도 있으니까요.”
김서준이 허공에 문을 따는 듯한 동작을 보였다.
“하지만, 너무 위험해요. 특히 그 거대한 골렘은···.”
“맞습니다. 서준 씨가 제때 안 오셨다면 저희 중에 몇이 죽었을지 모를 정도였습니다. 아니, 어쩌면 전부 죽었을지도 모르죠.”
“훈련을 위해 들어간다면 다시 그 골렘과 마주할 텐···.”
강백호가 김서준을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설마, 골렘을 공략할 방법도 알고 있는 건가?”
김서준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김서준의 맥빠지는 대답에 강백호가 한숨을 내쉬었다. 정현민과 전소민의 눈에도 의문이 가득했다.
“현재로서는 방법이 없지만, 찾아봐야겠죠. 여기 S급이 3분이나 있지 않습니까? 밖에는 A급 헌터가 수두룩하고요.”
“우리가 해결해라?”
“정확히는 앞으로 강해질 여러분들이 해결하는 겁니다. 분명 그 정도로 강해지실 거고요.”
김서준의 말에 강백호가 의자에 몸을 묻었다. 정현민도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래도 김서준의 말을 쉬이 믿기 어려운 표정이었다.
‘그럴만하지. 탕에 몸만 담그면, 농사만 지으면 강해진다니. 내가 생각해도 허무맹랑한 이야기야.’
하지만 사실이 아니던가. 이미 드워프 삼 형제와 김서준은 탕에서의 효과를 경험하기도 했다. 김서준은 자신했다.
“...자네가 한 말이 사실이라면 말이야.”
가라앉은 분위기 속 강백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분명 떼돈을 벌 수 있을 거야. 헌터란 헌터는 전부 이곳으로 모여들 테니까. 근데 자네는 모든 걸 무료로 제공하겠다고 했어. 이유가 뭐지?”
강백호의 물음은 타당했다. 이유 없는 호의는 없다. 사업을 할 때면 가장 우선시하는 원칙 중 하나가 아니던가.
‘맞아. 이유 없는 투자는 아니지.’
헌터들은 강해져야 했다. 바이올렛 호퍼와 같은 존재를 막기 위해. 미지의 무언가가 넘어올 그 날을 대비해서. 그리고 김서준이 살아갈 터전을 지키기 위해서.
‘이건 그걸 위한 투자. 하지만 그런 이야기보다는 두 번째 이유가 지금은 더 설득력이 있겠지.’
김서준은 강백호의 매서운 눈초리를 마주 보고 대답했다.
“저 역시 나라를 사랑하고 애국심이 넘치는 청년입니다. 여기 계시는 분들 못지않게요. 그러니까 바이올렛 호퍼 때도 발 벗고 나섰죠.”
“그랬다고 보기엔 너무 많은 것을 얻은 거 같군.”
“네, 그것도 맞죠. 이번에도 그렇습니다. 애국심과 시에 일종의 투자입니다. 천산군을 헌터의 성지로 만들어 줄 초기 투자죠. 여러분들은 걸어 다니는 홍보물이 되어 줄 테고요.”
“재밌군. 좋네. 우린 받아들이지.”
강백호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저 영감님은 여전해. 근데 왜 참여한 거지?’
의심스러운 속내를 감춘 채 김서준은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정현민과 전소민도 뒤따라 김서준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모두의 승낙을 얻어낸 김서준이 웃으며 말했다.
“자, 그럼 모두 열심히 농사를 지어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