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 구출
“아음, 녹는다움.”
“멍멍.”
리노와 노움은 어린이용으로 만든 얕은 탕에서 놀고 있었다. 노움은 탕 안에서 살짝 얼굴을 붉힌 채, 정말 녹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지만 시선을 모두 가져가는 건 고블이었다.
“고-블······.”
고블은 슬라임 같은 모습으로 변해 물 위를 둥둥 떠다녔다. 노움이 녹을 거 같은 표정이라면 고블은 정말 녹아버린 것이다!
‘게다가 저 황홀한 표정이라니.’
고블은 세상 행복한 모습이었다.
“이렇게 좋은 물은 오랜만인 고-블···.”
하기야, 물을 손으로 찍어 먹으며 최고라고 부르짖던 고블이 아니던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근데 고블은 일 안 하냐움?”
“분신들이 일하는 중인고-블. 고블은 결제만 하면 되는 고-블. 걱정하지 말라는 고-블.”
파란 슬라임의 모습을 한 고블이 즉답했다. 그 말대로였다. 사무실에는 지금도 분신인 고블 들이 열심히 뛰어다니고 있었다.
‘일과 휴식을 동시에 할 수 있다니. 진짜 워라벨이네.’
김서준이 피식 미소를 지었다.
“클클. 정말 좋군. 탕에 몸을 담그고 있을 뿐인데 몸 안에 힘이 솟는 기분이야.”
“클클, 이 온천수 효과가 대단한 거지.”
“우노, 도스, 숨을 크게 마셔 봐. 이 향. 은은하고 시원한 이 향도 기가 막히거든.”
머리에 수건을 하나씩 두르고 나온 드워프들도 제대로 온천욕을 즐기고 있었다. 다행이었다. 최근 드워프들은 양조 사업으로 바쁜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김서준 역시 바빠서 제대로 챙기지 못했다. 그게 내심 마음이 쓰였는데, 온천욕으로 그들의 피로가 많이 풀리는 모양이었다.
“다들 좋아하네요.”
옆에 앉아 있던 엘린이 말했다.
“다행이죠. 엘린도 맘에 들죠?”
김서준은 대답하면서도 눈은 허공에 뒀다. 엘린은 어디서 구했는지 모를 비키니를 입고 왔다.
‘예쁘긴 한데···.’
하얗고 부드러운 피부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볼륨감 넘치는 가슴과 허리에서 엉덩이, 허벅지로 이어지는 굴곡도 아름답고 고혹적이었다.
복근까지 있는 건강미 넘치는 몸매인 점도 놀라웠다. 여러 가지 이유로 남자라면 절로 눈이 가는, 눈을 떼기 어려운 모습이었다.
‘엘프가 저런 옷이라니. 역시 편견은 편견일 뿐이구나.’
매우 놀란 김서준과 달리 엘린은 자연스럽고 태연했다.
“너튜브 보니까 이럴 때는 무조건 비키니를 입어야 하는 거 같던데 아닌가요?”
오히려 김서준에게 이렇게 반문했을 정도. 엘린의 적응력은 다시 돌아봐도 참 대단했다.
“...너무 좋아요. 다른 분들 말처럼 이렇게 몸을 담그고 있으면, 뭐랄까, 따뜻한 대자연의 어머니 품속에 안겨있는 느낌이에요. 거기에 옆에서 느껴지는 생명력도 좋고. 수증기에 섞여 있는 박하 향에 머리도 맑아지는 게 매일 오고 싶어질 거 같아요.”
엘린이 칭찬을 늘어놓으며 입을 호선으로 그렸다. 김서준이 슬쩍 엘린의 미소를 바라보다 자연스레 밑으로 내려가는 자신의 시선을 눈치채고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다, 다행이네요. 모두 호평이니까요. 우리가 이런 반응이라면 외부에서 오시는 분들도 전부 맘에 들어 하겠어요.”
“분명 그럴 거예요.”
김서준은 주변을 다시 한번 둘러봤다.
한옥형 건물과 구조물. 파란 녹림과 박하 향 아래 은은하게 풍겨오는 풀잎의 내음. 탕 안에서 이 모든 걸 보고 있으니 생각보다 더 조화롭고 만족스러운 경험이었다.
‘이정도면 관광 상품으로는 충분하겠지.’
하지만 그보다 더 김서준의 시선을 사로잡는 게 있었다.
[탕 속에 일정 시간 머문 경우 다음과 같은 효과를 얻습니다.]
[30분 - 일시적 민첩성, 근력, 체력 강화, 신진대사 증가, 피부 미백 및 개선, 노화 방지.]
[1시간 이상 – 민첩성, 근력, 체력 영구 증가(1일 1회)]
[한 달간 일정 횟수 이상 사용– 생명력 회복]
던전이나 게이트를 돌 다 보면 특별한 구역을 마주하곤 한다. 그 안에서 이와 비슷한 효과를 볼 수 있었다.
‘물론 이정도는 아니지. 일시적인 체력회복이나 마력회복인 경우가 많으니까.’
어쨌든,
그렇기에 헌터들에게 이 효과는 낯설지 않고, 동시에 크게 어필될 터였다.
‘실제로 헌터들에게 엄청난 효과를 부여하는 게 맞기도 하지. 내 계획대로.’
미트루트에 이어 포션까지. 이로써 지구의 헌터들을 강하게 만들 계획에 첫 단추가 완성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걸 시작으로 훈련장까지 만들면 이 구역을 헌터들의 성지로 만들 수 있을 거야.’
그러면 주변 일대는 헌터와 관광객으로 인한 수입을 얻고, 헌터들은 점차 강해지는 선순환이 생길 게 분명했다.
‘어쩌면 해외에서도 찾아올지 모르겠네.’
김서준은 각양각색 국가의 헌터들이 모여 인사하는 장면을 떠올리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근데 마지막 저 효과는 뭐지?’
한 달 동안 사용하면 생명력이 회복된다니. 저걸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체력이 좋아진다? 아냐, 체력은 따로 있잖아.’
몸 안에 있는 병이 씻은 든 날아가는 말 그대로 다시 태어난 듯한 몸이 된다는 걸까. 만약 그런 효과라면 그야말로 대박이었다.
의학계가 뒤집어지는 건 물론, 어쩌면 전 세계에 온갖 불치병 환자들과 재벌들이 모여들지도 몰랐다.
‘아냐. 아무리 마나 먹은 물이라지만 그건 좀 과하잖아.’
한참을 궁리 중인 김서준에게 엘린이 물었다.
“왜 그렇게 심각해요? 무슨 고민 있어요?”
“아, 그게 저한테는 이 온천의 효과가 눈에 보이는데요. 한 달 동안 매일 사용하면 생명력이 회복된다는 데, 이게 무슨 의미일까요?”
김서준의 말을 들은 엘린의 눈이 휘동그래졌다.
“진짜요? 말도 안 돼.”
엘린은 뭔가 아는 눈치.
김서준이 엘린에게 대답을 재촉했다.
“왜 그래요? 이게 무슨 효과인데요?”
“생명력이 회복된다는 건, 몸이 가장 좋은 상태로 돌아간다는 걸 의미해요. 가장 힘이 넘치던 시기로요.”
“어려진다는 건가요?”
“외형적으로 어려지는 거랑은 달라요. 외형에는 변화가 없죠.”
엘린은 양손으로 물을 살짝 들어 올렸다.
“물이 사람이 가진 능력이라면 손은 생명력이에요. 가면 갈수록 이 손의 그릇은 좁아지죠.”
“그럼 가지고 있는 능력도 줄어드네요.”
“게다가 이렇게 조금씩 무너지기도 하고요.”
엘린이 손 사이 틈을 만들었다. 그러자 물이 조금씩 새어나가기 시작했다. 생명력이 떨어지는 게 노화를 촉진하고 체력을 떨어뜨리는 것도 이런 원리라고 했다.
“또 이 틈 사이에 부정적인 것들이 끼어들기도 하죠. 그게 바로 질병이에요.”
“아···.”
“포션은 이 물만 채울 수 있는데, 병은 생명력의 영향이죠. 그래서 어지간한 병은 아주 좋은 포션으로도 회복이 잘 안 돼요. 물을 많이 부어도 씻겨나가지 않는 때는 있기 마련이니까요.”
김서준은 엘린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생명력이 회복된다는 건···.”
“이 그릇을 다시 키워주거나 틈을 메꿔준다는 이야기죠. 저희 대륙에서는 이런 효과를 가진 호수는 전부 엘프의 성지였어요. 이런 장소를 발견하다니, 역시 신농의 능력은 대단하네요.”
엘린이 놀랍다는 듯 이야기했다. 그리곤 물을 몸에 끼얹었다. 물이 하얀 피부를 타고 흘러내렸다. 김서준은 괜히 침을 꿀꺽 삼키고 슬쩍 시선을 옮겼다.
한참 온천욕을 즐기던 엘린은 뒤이어 다시 영상을 찍었다. 온천을 한 바퀴 돌며 홍보 멘트를 녹화하기도 하고 귀여운 정령들과 리노를 찍기도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인터뷰까지 마친 엘린은 셀카로 영상을 마무리하고 있었다.
“엘린은 저걸 참 열심히 하는군.”
“대단하오. 다른 세계에 저렇게 잘 적응할 수 있다는 게.”
“저러면서도 연구는 소홀하지 않은 걸 보면 참 능력 있는 처자요. 클클.”
드워프들이 감탄하며 탕에서 몸을 일으켰다. 우락부락한 근육들이 김서준의 눈앞을 채웠다.
‘여러분도 만만치 않아요. 그 바쁜 일정 사이 저런 근육을 유지하는 거 보면.’
김서준은 그 말을 아끼고 함께 몸을 일으켰다.
“이제 슬슬 돌아가죠. 너무 오래 있다간 오히려 탈 날 수 있으니까요.”
“그러자고. 클클.”
김서준의 말에 드워프들이 샤워실로 향했다. 리노도 탕에서 나와서 몸을 털었다. 하얀 털을 열심히 터는 모습도 역시나 귀엽다.
“벌써 나가는 고-블? 고블은 더 놀고 싶고-블.”
고블이 아쉽다는 듯 이야기했다. 그러자 나오던 노을이 고블을 보고 다그쳤다.
“신농님의 가신으로서 그 말은 용납할 수 없다움! 고블! 신농님의 말에는 항상 따라야 한다움! 애처럼 굴지 말고 얼른 나오라움!”
“힝, 알겠고-블.”
김서준이 둘을 보며 웃었다.
‘형제 같네. 귀여운 녀석들.’
노움이 거칠게 다그치자 주눅 든 고블이 밖으로 기어 나왔다. 물 밖으로 나오자 고블은 다시 본래의 블루 고블린의 형태로 돌아갔다.
“엘린, 바로 밖에서 만나요.”
“네!”
촬영을 마무리하는 엘린에게 김서준이 소리쳤다. 그리곤 노움을 어깨 위에 올리고 고블의 손을 잡은 채 샤워실로 향했다.
온천욕의 효과 때문일까. 머리는 맑고 깨끗했고, 마음은 날아갈 듯 가벼웠다. 몸에도 활력이 넘치고 컨디션도 다 회복된 거 같은 게 홀가분하고 만족스러운 기분.
‘완전히 힐링한 느낌이야.’
다른 사람들도 어서 이 기분을 느껴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러나 그 기분은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잠시 후, 노을로부터 온 전화 때문이었다.
[서준 씨, 저 노을이에요. 놀라지 말고 들으세요···. 지금 소민 씨가 위험해요.]
노을의 한마디는 평화롭던 김서준의 하루의 끝에서 그 날의 장르를 완전히 바꿔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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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3일째야.”
“도대체 어떻게 된 건지.”
바질리스크 던전 앞. 막사를 친 헌터들이 웅성거렸다. 리더를 잃은 헌터들을 저마다 걱정과 위로를 나누고 있었지만, 점점 위로보다는 걱정과 불안이 사람들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관리국에서는 뭐 대책 나온 거 없어요?”
한 헌터가 양복을 입고 선글라스를 쓴 요원에게 물었다. 요원은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다른 헌터가 말했다.
“차라리 다른 길드에 도움을 요청할 수 있게 해줘요!”
“맞아! 헌터관리국이 뭐 얼마나 대단하다고!”
“지금 대책을 마련하는···.”
“강구 하긴 개뿔, 3일째 이렇게 앉아 있는 게 전부 아닙니까!”
“맞아요! 차라리 우리가 인맥 동원할 테니까 외부에 연락할 수 있게 해줘요!”
요원의 만류에도 헌터들은 거칠게 항의했다. 두 그룹 간의 실랑이가 다시 한번 펼쳐졌다.
소란을 보던 노을은 고개를 저었다.
‘당연한 현상이긴 하지.’
저 안에 청룡 길드만 갇혔다면 조금 나았을 수도 있다. 지금 여기 있는 이들은 에픽 길드와 황룡 길드의 길드원들이니까.
하지만, 안에는 청룡 길드만 갇혀있는 게 아니다.
‘양 길드의 장이 함께 갇혀있지.’
양 길드 최강의 전력이. 그들은 길드의 기둥. 길드원들이 이렇게 격하게 항의하는 건 당연했다.
“잠시만요. 여러분! 진정하세요!”
“진정할 테니, 뭔가 대책을 좀 말해달란 말입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방법이 없는 것을. 관리국 역시 온갖 수를 마련하고 있지만, 방법이 없었다.
‘제발 서준 씨는 방법이 있다면 좋겠는데···.’
노을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김서준을 기다렸다.
“저, 저기!”
“저건, 김서준이다!”
차에서 내린 김서준이 일행들과 함께 잰걸음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서준 씨!”
노을은 곧장 달려가 김서준을 반겼다. 김서준은 본 적 없는 굳은 얼굴로 말했다.
“오랜만이라 인사를 나누고 싶지만, 시간이 없네요. 보내주신 자료는 전부 읽어봤습니다.”
“방법이 있겠어요?”
“일단 현장을 봐야 할 거 같습니다. 입구로 가시죠.”
김서준은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노을은 김서준을 데리고 입구로 향했다. 헌터들의 시선이 김서준에게로 모였다.
“김서준이라니. 뭔가 대책이 있는 건가?”
“바이올렛 호퍼 막은 거도 김서준이 무슨 장치를 만든 거라며. 또 대책이 있나 봐!”
웅성거리는 소리에는 저마다의 희망이 맺혀있었다. 일전의 사태에서 일면식이 있는 헌터들은 정현민과 헌터들을 꼭 구해달라는 말로 인사를 대신했다.
김서준은 짧게 대답하며 노을을 따라 걸었다. 리노와 엘린, 드워프 삼형제가 그 뒤를 따랐다.
“여기예요.”
노을이 동굴 앞에서 멈춰섰다. 동굴 앞에는 붉은색 포털이 있었다. 본래 게이트나 던전 입구의 포털은 파란색. 붉은색은 변형으로 던전에 들어갈 수 없게 되었을 때 나타나는 색이었다.
“이렇게 3일째인 겁니까?”
“네···.”
김서준이 엘린을 바라봤다. 그러자 엘린이 고개를 저었다.
“마나 구조를 비튼 게 아니라 마법 위에 마법을 덮은 거예요. 그런데 그 마법이 제 마법으로는 해결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해요.”
김서준이 입술을 씹었다. 엘린이라면 포털을 찢고 들어갈 방법을 고안할 거로 생각했다.
‘엘린이 안되면 방법이···.’
그런데 이상했다. 김서준의 눈에는 붉은색 포털 위로 파란 선이 보였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 마치 스위치처럼 빛나는 구체가 보였다.
“저건 뭐죠?”
김서준의 물음에 엘린이 되물었다.
“저거요?”
“저기 가운데 구체 안보여요?”
엘린뿐이 아니었다. 모두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물어보니 모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하물며 리노까지 말이다.
‘나 밖에 안 보이는 건가? 어째서?’
김서준은 구체를 바라봤다. 그리고 좀 더 유심히 살피기 위해 조심스레 구체에 다가갔다. 그때였다.
-팟.
[결계가 작동하여 안으로 입장할 수 없습니다. 결계를 해제하시겠습니까?]
김서준의 눈앞에 안내창이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