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농사로 꿀 빠는 헌터-97화 (97/139)

97. 온천만들기(3)

자연이 숨겨두었다는 표현을 괜히 쓴 게 아니었다. 온천이 샘솟는 수원(修院) 주변을 따라서 나무가 빼곡하게 자라고 있었다. 제아무리 구석구석 돌아다니는 산꾼이라도 발견하기 어려울 듯했다.

‘그때 그 현상이 아니었다면 나도 절대 못 찾았겠지.’

그뿐이 아니었다. 이 성지를 둘러싼 벽을 절대 허물 수 없다는 듯 나무들의 뿌리와 줄기가 복잡하게 얽혀있었다.

‘고민되네. 이걸 다 제거해야 하나?’

김서준은 고개를 저었다.

온천의 효과만큼이나 숲이 주는 생명력도 중요했다. 처음 온천을 기획했던 의도가 그렇지 않았는가.

‘자칫 옮겨 심다가 그 생명력을 잃으면 아쉬울 거야.’

고심 끝에 김서준은 반대로 저 나무를 온천 부지의 울타리로 삼기로 했다. 그리고 그 안을 온천 부지로 치기로 했다.

‘계획보단 조금 작지만, 부지 전체를 온천으로 만든다면 이정도도 충분할 거야.’

결정을 마친 김서준은 다시 한번 트레스와 논의했다. 트레스는 김서준이 계측한 부지 크기에 맞게 다시 한번 설계도를 수정했다.

“대단하네.”

김서준이 건축 설계도를 보며 감탄을 터뜨렸다.

트레스와 드워프들은 서양식 판타지 유형의 목조나 벽돌을 이용한 건축에 용의 했다.

가온 길을 지을 때도, 외부 견적을 받은 인테리어와 설계는 외주업체와 김서준, 엘린이 함께 한 후, 시공만 드워프들이 했다.

‘가온 길은 한옥과 인스타 감성을 합쳐서 설계했으니까.’

한옥은 그만큼 트레스와 드워프들에 낯선 영역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트레스가 강하게 주장했다.

“서준, 제가 직접 설계하겠소. 한옥을 내가 직접 지어보고 싶소.”

한옥의 스타일로 지어지는 건물.

그 뒤로는 공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해야 하는 노천 온천까지.

고려할 사안이 많았다.

‘걱정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지.’

그러나 김서준은 트레스를 믿어보기로 했다.

망치의 후예 중 제일의 천재라는 말을 믿었고 그의 재능을 믿었고 노력을 믿었다.

그리고,

“이렇게만 하면 대단하겠는데요?”

부지 설정에 따라 재설계한 설계도와 설명, 그리고 망치의 술로 만든 모형을 보니 절로 감탄이 나왔다.

“클클. 고맙소. 하지만 건물이 완성될 때까지는 방심할 수 없소. 건축에 망치의 술을 사용할 수 없다는 점도 처음이고 말이오.”

트레스는 겸손한 태도로 대답했다.

“맞네요. 그래도 훌륭해요.”

김서준은 모형을 다시 살폈다. 벽처럼 둘러싼 나무와 잘 어울리는 기와 담장. 편백 나무로 만들어진 탕과 세련된 디자인의 인피니티 풀(Infinity pool). 그뿐만 아니라 다양한 유형의 탕과 조형물까지 모형은 정말 김서준의 상상 이사이었다.

“클클, 고맙소. 그럼 이제 슬슬 목재와 석재를 준비해야겠소.”

“그 부분은 걱정하지 마세요. 준비해둔 게 있거든요.”

****

“아니, 이게 뭐예요?”

박보현이 바구니 한가득 담배 상추를 채워온 남자에게 말했다. 20대 청년으로 보이는 남자는 박보현의 말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아까 제가 설명해드렸잖아요. 상추는 입만 따오면 된다니까. 이거 뿌리를 다 뽑아오면 어떻게 해요! 큰일 났네!”

“아···.”

박보현의 말에 남자가 그제야 아차 하는 얼굴. 박보현은 내심 고개를 저었다.

“도대체 정신이 어디 팔렸길래···. 정신 차려요! 이러다 떨어져요!”

“네! 알겠습니다!”

“얼른 가서 다시 심으세요!”

“넵!”

남자는 우렁차게 대답하곤 다시 밭으로 뛰어갔다.

‘이사님이 신중했던 이유가 있었네.’

임종철의 주요 임무가 금천면의 농가를 돕는 일이라면 박보현은 금천면의 젊은 귀농인과 농부를 돕는 일이었다. 어린 사람으로 어린 사람들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거라는 이유였다.

‘그리고 가르치면서 정말 농사에 관심 없는 투기꾼이나 사기꾼들도 잡아내고 말이지.’

김서준의 말에는 껌뻑 죽는 박보현이지만, 사실 긴가민가한 부분도 있었다.

서류와 면접까지 치러서 받아들인 귀농인들이 아니던가. 어렵게 통과해서 귀농해놓고는 이제와서 어영부영할 이유가 무엇이 있겠느냐고 생각한 탓이었다.

‘그런데 있었네.’

정말로 귀농이 아닌 투기에만 관심을 가진 이도 있었고, 지금처럼 밭에 있지만, 정신은 딴 데 있는 사람도 많았다.

박보현처럼 정말 귀농에 목숨 건 이들도 있었지만, 이런 이들을 볼 때마다 박보현은 사람이 참 무섭다는 생각을 했다.

“오늘도 우리 반장님 빡빡하구먼.”

“아, 안녕하세요.”

박보현이 고개를 돌려 인사했다. 살짝 볼록한 배를 등산복으로 덮은 아저씨가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지역의 유지이자 임종철과 박보현을 적극적으로 돕는 김철수였다.

“살살 혀. 애들 다 도망갈라.”

“그럴 순 없죠. 이제 같은 영농조합에서 같이 토종작물을 책임져야 하는데. 지금이야 일을 가르치는 입장이지만, 끝나고 나면 동료잖아요.”

“하여간 직업정신 하나는 끝내준다니까. 이렇게 성실한 청년이 어쩌다 그런 오명을 입은 겨.”

김철수의 농담에 박보현이 얼굴을 붉혔다. 그때의 자신은 지금 생각해도 참 어리석었다. 반성하고 또 반성해야 할 일이었다.

“뭘 또 그런 표정이여. 농담이여 농담.”

“죄송합니다.”

“아녀, 아녀.”

“아, 근데 이사님께서 부탁하신 건 잘 준비되어 가시나요?”

김철수는 은퇴하고 간간이 소비자와 자제 회사 사이에 다리를 놓아주기도 하고, 금천면의 고문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하지만 본래는 건축 자재를 만드는 사업을 크게 했었다고 했다.

‘그때의 경력을 이용해서 크리스마스나 정자 만들 때도 목제를 지원했다고 했지.’

김서준은 이번에도 김철수를 통해 자재를 구매하기로 했다.

“순조롭구먼. 내일이면 바로 들어올 겨.”

“내일이요? 엄청 빠르네요? 보통 대금 넣고 나서 하지 않나요?”

“아이고. 내 고향 금천면 살려준다고 애쓰는디, 내가 가만있을 수 있나. 내가 힘 좀 썼지.”

김철수가 박보현의 어깨를 토닥였다.

“그럼 설마, 전부 다 어르신이 지원해주신 겁니까?”

“물론이지, 그 까짓거 얼마나 한다고. 대신 제대로 만들라고 말이나 전해줘.”

“물론입니다. 감사합니다!”

박보현은 고개를 푹 숙였다.

‘역시 이사님은 대단하구나.’

동시에 김서준에 대한 감탄과 존경심이 차올랐다. 평소 행적이 얼마나 올곧고 바랐으면 이렇게 너나없이 나서서 돕겠다고 난리겠는가. 박보현은 김서준이야말로 자신의 진정한 롤모델이라는 걸 다시 한번 머리에 새겼다.

“아, 그리고 이사님 거 인터뷰 좀 하라고 혀. 토종작물을 대박이지. 자연산 송이는 중동에 팔지를 않나. 엄민호 셰프네 가게 같은 하이엔드급 가게에 채소를 납품하질 않나. 온갖 대단한 일은 다 해놓고 언론매체를 피해 다니니 이거 주변 사람들이 여간 귀찮은 게 아녀.”

김철수가 반쯤 농담 섞인 핍박을 쏟아냈다. 그리곤 어깨가 쑤신다는 듯 주무르며 덧붙였다.

“아니, 오죽하면 나한테도 인터뷰 요청이 오는 거여.”

“하하하.”

박보현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곤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이사님이 바쁘긴 하셨습니다. 알겠습니다. 전해드리겠습니다.”

****

“고블, 준비됐지?”

“준비됐고-블!”

“노움도 준비됐고?”

“그렇다움!”

김서준이 두 정령을 번갈아 바라봤다. 두 정령의 얼굴에는 비장함이 묻어났다. 김서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시작!”

“고-블!”

“간다움!”

김서준의 시작 명령과 동시에 고블의 눈이 파랗게 빛났다. 일종의 탐지 모드로 고블은 물과 마나의 조합이 깨지지 않는지 체크하는 역할이었다.

그사이 노움의 굴착기가 움직였다. 굴착기의 끝에는 포크레인의 버킷 대신 집게가 달려 있었다. 집게는 거침없이 거대한 돌을 집었다.

-위잉!

거친 엔진 소리와 함께 포크레인의 암(arm)이 떨렸다. 이내 암이 위로 움직이고 돌이 뽑혀 올라왔다.

“물에서 느껴지는 기운에는 이상 없고-블!”

고블은 곧장 상태를 브리핑했다.

-쿵.

노움은 거대한 돌을 옆으로 뺐다. 돌이 뽑힌 흔적을 살폈다. 거대한 바위 아래 흙바닥에서 울컥울컥 새어 나오는 온천. 그러나 이정도 물양으로는 택도 없었다.

‘역시 시추를 해야 하는구나.’

김서준은 고개를 끄덕이고 노움에게 나오라고 지시했다.

“알겠습니다움!”

굴착기에서 내린 노움은 김서준이 지시한 위치로 모여들었다.

“노움 알겠지? 관이 들어갈 정도의 땅만 무르게 만들면 돼.”

“알겠습니다움!”

노움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와라움!”

“움움!”

공사장 모자를 쓴 작은 움들이 땅에서 푝푝 튀어나왔다. 노움의 곁으로 모인 12마리의 움은 노움의 지시를 따라 원을 만들었다.

“이 원을 따라 지하 깊숙이까지 땅을 무르게 만드는 거다움!!”

“움움!”

고개를 끄덕이는 움들. 노움은 그 모습을 보고는 소리쳤다.

“시작!”

노움과 움들의 손에서 초록색 빛이 흘러나왔다. 빛은 땅으로 이어졌다. 그러자 땅에 원형으로 초록빛이 맺혔다.

“고블, 물의 상태 꾸준히 확인해줘.”

“알겠고-블! 지금은 괜찮고-블!”

“움!!!”

노움과 움들이 매섭게 집중했다. 작업은 금방 끝날 듯 보였다. 김서준이 그때 뒤에 있던 드워프들을 바라봤다.

“준비됐어요?”

“물론이오!”

“명령만 해주시오!”

도스와 트레스가 우렁차게 대답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잘 발달한 승모근 위로 어마무시하게 긴 파이를 걸쳐 맨 우노가 말했다.

“말만 해 주시오. 클클클.”

말하기가 무섭게 노움이 소리쳤다.

“끝났다움!”

“우노, 지금이요.”

김서준은 그렇게 말하며 노움과 움들을 뒤로 밀렸다. 우노가 고개를 끄덕이며 땅을 박찼다. 우노의 몸이 하늘로 휙 하고 솟아올랐다.

“망치 나가신다!”

우노가 소리치며 파이프를 냅다 내리꽂았다.

-촉!

물러진 땅으로 파이프가 반절 가까이 내리꽂혔다. 동시에 도스와 트레스가 파이프 옆으로 달라붙었다.

“돌려!”

“흡!”

두 사람은 파이프를 돌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파이프가 나사처럼 땅으로 파고들어 갔다.

‘이게 되네.’

원래라면 온천 시추 업체를 불러야 했다.

그러나, 드워프들은 이것만은 꼭 자기들이 해야 한다고 드워프의 방식을 보여주겠다고 호언장담했다.

‘그게 설마 직접 시추 장비를 만든다는 이야기일 줄이야.’

드릴이 달린 파이프와 그걸 지키기 위한 파이프. 연결형 파이프 등, 현대장비와 유사한 장비와 원리를 이용했다.

하지만 가장 신기한 건 그 설비를 돌리는 방식이었다.

“돌려! 돌려!”

“으아아!!!”

“망치의 신이시여! 클클!!!”

웃통을 벗어 던진 채 근육을 팽창시키며 손으로 드릴을 돌릴 줄이야. 지금 눈앞의 광경이 꿈인지 생시인지 의심될 정도였다.

‘진짜 대단하긴 하다.’

더 신기한 건 그 속도가 엄청나다는 거다. 돌아가는 속도가 너무 빨라서 정말 시추 기계나 다름없었다.

‘근데 좀 과하잖아.’

누가 보면 파이프랑 무슨 전쟁이라도 치르는 것처럼 너무 격렬한 현장의 모습이었다. 아니,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이러려고 그 고집을 부린게 확실했다.

“이제 거의 다왔고-블...”

“좋소! 마지막이다!”

“더 힘껏 돌려라!”

고블의 눈동자가 떨렸다. 역시나 얼굴을 벌겋게 붉힌 채 흡사 광기에 빠진 드워프의 모습에 놀란 듯 보였다. 노움과 움들도 어안이 벙벙한 게 마찬가지.

“....엘린.”

김서준은 카메라를 들고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엘린에게 말했다.

“이 장면은 브이로그에서 빼주세요.”

“아, 음, 적당히 편집할게요.”

그때였다.

-쏴!

바닥에서부터 온천수가 시원하게 뿜어져 올라왔다.

“고생했다, 형제들!”

“오랜만에 힘을 쓰니 기분이 좋군!”

“클클. 역시 근육이 최고야! 서준, 어떻소, 우리 망치의 후예들이 가진 힘이!”

우노가 가슴을 떵떵거리며 김서준에게 물었다.

“대단하네요. 진짜 최고입니다.”

그 날, 김서준은 오랜만에 누군가의 앞에서 가식을 떨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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